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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 기획 - 애완의 철학(3)] 늑돌이와 함께 춤을! 

잡종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한경심 자유기고가 icecreamhan@empal.com
이름이 붙은 개는 모두 혼혈, 순종이라는 말은 어불성설… 훌륭한 개는 품종보다 매너가 좋은 개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모든 개는 생긴 것 자체로 완벽하다. 이것이 가장 본원적인 ‘애완의 철학’이다.
“출생에 따라 천민이 되거나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민이 되고, 바라문이 된다.”_<숫타니파타>

“수보리야, 중생이라는 것은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_<금강경>

“튼튼함이 가장 큰 이로움, 기꺼움이 가장 큰 재산, 믿음이 가장 소중한 벗이며, 마음 놓고 누림이 으뜸가는 평화다.”_<법구경>


외국에 나가게 되면 흔히 듣는 질문이 있다. “어디서 왔습니까?” 즉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물음이다. 낯선이에게 맨 처음 던지는 이 질문은 딱히 무슨 저의가 있어서 묻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 이름이 한번 거론되면 곧장 ‘그 나라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 그 사람 자체를 알기 전에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것이 우선 입력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 나라(또는 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이해, 선입관, 편견, 또는 호감 등이 동시에 작동하게 된다.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려주는 게 무슨 대수일까 만은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웃으면서 “멀리서 왔어요”라고 대답해준다.

사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건, 딱히 물어볼 말이 없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을 수도 없고, 다짜고짜 이름부터 묻기 뭣하니까 단지 말을 붙여보고 싶어 가장 손쉬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향이 어디냐, 나이가 몇 살이냐는 물음이 그런 말 걸기용 질문에 속한다. 더 나아가서는 어느 학교를 졸업했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결혼은 했느냐는 등의 질문이 따른다. 나는 그런 질문에 수줍어하거나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아닌데, 딱 한번 괜히 대답했다고 후회한 적이 있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이는 공부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첫 질문이 “몇 살이냐?”는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다(무슨 예감에서였는지 이때만큼은 망설여졌다) 솔직히 대답해주었는데, 이후 나의 모든 행동과 발언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이에 견주어 평하려 들었다.

그러니까 질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대답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언제나 문제가 되어 나중에는 그런 질문이 실례가 되어버리고 만다.

늑돌이와 산책하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늑돌이의 윤 나는 검은 털과 점잖은 행동거지를 보고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 “무슨 종이에요?”다. 아마도 무슨 혈통 좋은 개라고 생각해서 물은 것일 게다. 그러면 나는 씩 웃으며 대답한다.

늑돌이의 ‘출생의 비밀’


“잘은 모르지만 잡종, 사랑스러운 ‘똥개’ 아닐까요?”

그러면 대부분 사람은 실례했다는 듯이 좀 당황한다. 어떤이는 날 위로하듯,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듯 이렇게 말한다.

“아니에요, 얘는 틀림없이 혈통이 있는 개일 거예요.”

늑돌이가 처음 집에 왔을 때 나도 아들에게 늑돌이가 무슨 종이냐고 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개라고 하면 아는 게 그저 진돗개나 풍산개(이 둘을 구별은 못 한다), 초등학교 때 부자인 친구 집에서 보았던 하얀 스피츠, 예전 고속버스 이름이었던 그레이하운드, 어렸을 때 읽은 <돌아온 래시>의 래시가 콜리였다는 것 정도다.(그 동화책의 삽화가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 지금도 콜리 종은 알아본다) 나이가 들어서는 삽살개를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았고, 동생이 키우는 개가 말티즈라는 걸 알았다. 그 외 푸들이니 비글, 닥스훈트, 퍼그, 래브라도, 불도그, 셰퍼드, 도사견, 도베르만, 코커스패니얼, 시베리안 허스키, 치와와 등을 책이나 영화, 텔레 비전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외모의 특징이 두드러진 몇몇 종만 겨우 구별하지, 나머지는 이름만 들어본 정도다. 내게 개는 그냥 개일뿐이었다.

대학 때 친구한테서 개를 한 마리 얻어왔는데, 진돗개 잡종이라고 했다. 사실 그때 우리나라에서 키우는 개는 진돗개 순종, 아니면 진돗개 잡종밖에 없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집에서 키우던 개는 떠돌이 개를 거둔 것이었는데, 우리 형제들은 ‘추츠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름이다)라고 부르고 추츠키가 낳은 새끼들도 모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드미트리, 카타리나 등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추츠키가 무슨 종인지 궁금했던 적도 없고, 식구들도 한 번도 그런 걸 화제로 올린 적이 없다. 지금 추츠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골든 리트리버처럼 밝은 빛깔의 털이 길고 멋있었다. 우리는 다만 추츠키가 귀여운 새끼를 낳았다는 데 흥분했고, 새끼들이 강아지가 되어 하나둘 떠나게 되어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마지막까지 남았던 유난히 귀여운 막내 수놈 드미트리는 먼 친척이 농장에 데려갔는데, 농장을 지키는 늠름하고 씩씩한 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뒤로도 한쪽 눈가는 까맣고 한쪽 눈가는 하얀 털이 난 개구쟁이 드미트리가 농장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걸 상상하며 서운함을 달래곤 했다.

늑돌이를 데려온 아들의 말에 따르면, 늑돌이는 잡종일 거라고 한다. 늑돌이를 어디서 데려왔는지 물을 때마다 얼버무리며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던 아이는 한참 뒤 말해주기를, 인터넷에서 분양한다는 공지를 보고 그 집에 가서 직접 데리고 왔다고 한다. 젖이 퉁퉁 불어 있던 어미개의 털 색깔은 놀랍게도 흰 색이었고, 새끼 중엔 흰 색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 늑돌이는 친탁을 한 건가?

“늑돌이는 네가 고른 거야?”

“아니, 그냥 주는 대로 받았는데, 내 마음에 꼭 들더라고.”

나는 아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늑돌이가 그렇게 무작위로 선택되어 우리에게 오게 됐다는 사연을 들으며 내가 느낀 기분은 바로 ‘안심’이었다.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렸을 아이를 겨우 찾았을 때의 심정 말이다.

아들은 마포구 합정동에서 늑돌이를 가슴에 안고 버스를 타고 왔는데, 늑돌이는 오는 내내 아들의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아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나도 대학 1학년 봄, 친구 부모가 사는 삼송리라는 데를 난생 처음 가서 진돗개 잡종 강아지 ‘봄이’를 얻어왔는데, 시외버스를 타고 성남에 있는 집까지 오는 동안 봄이도 그렇게 떨었던 기억이 났다.

아이는 늑돌이의 어미를 보았을 뿐 그 어미나 아비가 무슨 종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만약 무슨 이름 있는 품종이었다면 합정동 주인이 강조해서 말해주었을 텐데, 그런 말이 없었던 걸 보면 잡종이었을 확률이 높다. 잡종이면 어떻고 순종이면 어떤가. 늑돌이, 아니 지금 우리 눈앞에 이 새까만 녀석이 있다는 게 이렇게나 기꺼운데.

늑돌이의 까맣고 초연한 눈, 귀엽게 아래로 처진 귀, 튼실한 근육, 우아하게 구부러져 정교하게 마무리된 다리, 힘차게 뻗어 올라간 꼬리, 때로 그윽하고 때로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날 바라보는 눈길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그런 늑돌이를 지켜보면 나도 모르게 “완벽해! 완벽해!”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늑돌이와 함께 걸으며 산과 개울, 거리의 모든 식물과 동물도 다 완벽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싱싱하고 예쁘게 살아 있는 것만이 완벽한 게 아니라, 시들고 떨어지고 죽어가는 것도 모두 그대로 완벽하다는 것을. 그러니 사람이 어찌 완벽하지 않겠는가.

잡종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요즘 사람들은 모두 ‘이름 있는’ 품종의 개만 키우려는 경향이 있다. 주인도 궁금해하지 않는 족보를 캐묻는 사람도 많다. 사진은 생후 3개월 된 진돗개 새끼들.
늑돌이를 집안에서만 데리고 있을 때 늑돌이는 그냥 귀여운 강아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방접종을 하러 늑돌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더니 수의사가 진료수첩을 만들면서 이름과 함께 종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늑돌이는 늑돌이일 뿐인데, ‘종’으로서 그 정체성을 규정받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진료수첩에 그런 것까지 기입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잘 모르겠는데, 무슨 종인 것 같아요?”

“래브라도 피가 섞인 것 같은데요.” 수의사는 이렇게 대답하더니 진료수첩에 ‘믹스견’이라고 써넣었다. 믹스견이라니, 영어와 한자가 이렇게 생뚱맞게 섞인 잡종언어를 보았나! ‘믹스견’이라는 단어가 하도 ‘잡종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수의사의 말마따나 강아지 늑돌이를 보는 사람은 대부분 래브라도 새끼로 보곤 했다. 심지어 두 살 반이나 된 지금도 곧잘 래브라도 새끼로 오인한다. 래브라도는 몸집이 크니, 네 다섯 달 된 래브라도 강아지로 보는 것이다. 늑돌이의 강아지같은 표정도 그런 오해를 거드는 요인이다.(늑돌이가 좀 동안이긴 하다)

요즘은 모두 ‘이름 있는’ 품종의 개만 키우는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 늑돌이를 보는 사람은 ‘똥개’라는 나의 설명에 만족을 못 하고 저마다 품종을 알아내려고 애를 쓴다. 검은 털색 때문에 사냥개 종류라고 진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로 말려 올라가는 꼬리를 보고 진돗개의 피를 받은 게 틀림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주인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을(어쩌면 키우는 개의 품종도 모르는 멍청한 주인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마치 춘추전국 시대 인물로 말(馬)을 귀신처럼 감별했다는 백락(伯樂)이나 된 것처럼 퍽이나 진지하고 권위를 담아 늑돌이의 혈통을 알아내려 들었다.

사실 나는 늑돌이의 혈통이나 품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하나도 궁금하지가 않다. 대신 늑돌이의 눈에 내가, 또 남편이나 아들이 어떻게 비치는지, 개는 몇 가지 색깔밖에 구별하지 못한다는데 늑돌이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지, 또 냄새로 사물을 인식하는 개로서 늑돌이가 맡는 세상을 냄새로 표시한다면 어떤 ‘냄새 지도’가 나타날까 그런 것이 늘 궁금하다. 또 어딘가 먼 데를 바라보는 듯 초연하고 조금 슬픈 눈으로 한숨을 폭 내쉴 때 늑돌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궁금하다. 같은 사람인 아이를 키우면서도 나는 내 어린 시절은 다 까먹은 듯 아이를 이해하지 못한 때가 많았고, 또 여자가 아닌 남자 아이여서 아이의 마음을 더욱 가늠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하물며 나와 다른 종인 늑돌이를 이해하기란 얼마나 까마득한 일인가.

그럼에도 때로 늑돌이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은 순간이 있다. 나와 오래 눈을 맞출 때 늑돌이의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눈부처로 비친 것을 발견하는 순간, 밥을 먹은 다음 내게 다가와 제 뺨을 부빌 때, 내가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상에 앉아 있을 때 내 곁을 지키며 선잠을 잘 때, 또 산책길에 앞서 나가다 한순간 뒤돌아 서서 내게 와 껑충 뛰어오르며 안길 때,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 고백을 받은 것 같은 행복감에 젖는다. 말 대신 온 몸으로 표현하는 늑돌이의 고백에는 한 점의 거짓도 과장도 없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순종, 잡종, 혼혈, 또는 ‘디자이너 독’


▎지난해 8월 서울에서 열린 FCI 국제 도그쇼. 곱게 단장한 마르티즈가 주인을 바라보고 있다.
개의 품종에 무지했던 나는 늑돌이와 산책하면서 정말 많은 개를 만나게 되었다. 하루 산책길에 보통 서너 마리 이상 만나게 되고, 보호자들과 이야기도 나눈다. 독특하고 멋진 개를 보면 어떤 품종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개를 키우는 데 필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늑돌이가 자주 만나게 되는 친구들을 나는 다 알고 싶었다. 2년 동안 매일, 어떤 때는 하루 두 번씩 산책하며 만난 개 가운데 잡종이라고 한 개는 단 한 마리뿐이었고, 보호자들의 말에 따르면 모두 이름 있는 개였다. 이름 있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자긍심도 대단해 보였다. 이런 이들에게 개 이름을 물어보면 개 이름 대신 종종 품종 이름을 말해주곤 한다. 사람으로 치면 “아이 이름이 뭐예요?”라는 물음에 “얘는 서울사람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나는 점차 품종은 잘 물어보지 않게 되었다. 들어봤자 구별도 못하니, 이름을 물어보고 개를 한번이라도 불러보는 것이 그 개에게 다가가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시추’ 종을 데리고 다니는 이에게 “개 이름이 뭐예요?”라고 했더니 “시추예요”라고 한다. 내가 다시 “품종 이름이 아니라 개 이름 말이에요”라고 했더니, “개 이름도 시추예요”라고 한다. 이건 사람으로 치면 충청도 사람에게 ‘충청도’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과 비슷한 건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결코 잊지 못할 테니 재밌기는 하다.

또 어떤 이들은 코커스패니얼과 푸들 사이에서 난 개를 잡종이라고 하는 대신 ‘코커푸’라는 종이라고 주장하고, 요크셔와 몰티즈 사이의 잡종은 ‘모르키’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피가 섞인 게 잡종이 아니라, 이름 있는 개들 사이라면 피가 섞여도 잡종이 아니라 또 하나의 종이 된다는 주장이다. 흔히 말티즈와 푸들 사이에서 난 개는 ‘말티푸’, 치와와와 페키니즈의 교배로 나온 개는 ‘치와니즈’라는 식으로 조합한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 같다. 마치 ‘타이틀’에 굶주린 사람마냥 어떤 식으로든 이름을 갖지 않으면 못 배기는 모양이다.

아마 제일 흔한 ‘이름 붙이기’ 현상은 ‘얹혀가기’인 것 같다. 진돗개 피가 조금이라도 섞이면 진돗개라고 부르는 식이다. 자기 개가 요크셔테리어라고 하는 어떤 이에게 “아, 요크셔테리어는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내가 물었더니(진짜로 몰라서 물었다) 그 사람은 살짝 당황하며 “요크셔테리어 혼혈이에요”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럴 땐 ‘잡종’이라는 말 대신 ‘혼혈’이라고 말한다. 그럼 숱하게 불러왔던 진돗개 잡종은 진돗개 혼혈이라고 고쳐 불러야 하나? 어떤 의미에서는 혼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사실 모든 개는 혼혈이니 말이다.

최근 서구에서는 ‘디자이너 독’이라는 것도 생겨났다. 닥스훈트와 치와와를 교배시켜 ‘치위니’라고 부르는데, 닥스훈트와 치와와 사이의 모든 개를 치위니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의 크기나 눈 모양, 털 길이 등을 엄격하게 규정해놓고 그에 합당한 놈만 인정해준다는 식이다. 이렇게 새로운 기준에 맞춰 만들어낸 희귀한 ‘품종’은 유명 디자이너의 신상품처럼 몇몇 사람만 독점하는 액세서리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디자이너 독이 새로운 품종으로 자리를 잡을지, 아니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오늘날 이름 있는 품종도 사실은 하나의 품종으로 완성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서구에서 가장 많이 키운다는 래브라도만 해도, 현재의 품종으로 확립된 것은 백 년 남짓 되었을 뿐이다. 래브라도 해안의 어부들이 키우는 중간 크기의 개가 영국으로 건너가 몇몇 개와 교배를 거친 뒤 현대의 덩치 큰 래브라도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름이 붙은 개는 모두 혼혈이니, 순종이라는 말은 아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어쩌면 왕래가 적은 진도에서만 살던 진돗개 정도나 순종이라는 말에 합당할는지 모르겠다.

품종 교배로 더 훌륭한 새 품종을 개발하는 데 나는 굳이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일부에서 만들어내는 극도로 작은 티컵 강아지들은(컵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서 불은 이름이다) 귀여운 하트 모양의 머리를 얻기 위해 고통스러운 뇌를 갖게 되고, 다리나 관절, 뼈가 약해 잘 부러지며 온갖 질병에 취약해진다. 그런 개를 보고 과연 마음 놓고 귀여워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사람은 이름에 대한 욕망뿐 아니라 귀여움에 대한 욕구도 한정이 없는 모양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도 과하면 추해지듯, 귀엽고 좋은 것만 추구하는 것도 다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가장 매너 좋은 개는 유기견이다?


▎보호소에 맡겨진 한 유기견의 애처로운 표정. 유기견은 품성과 매너가 가장 좋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늑돌이와 산책길에서 만난 수많은 ‘이름 있는’ 개 가운데, 내게 감동을 준 개는 별로 없다. 지난해 집 앞 공원에서 만난 밝은 털을 가진 래브라도 D는 어찌나 순하고 나를 잘 따르는지 늑돌이가 질투했을 정도였다. 솔직히 나는 슬픈 호박색 눈을 가진 D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이런 눈을 가진 개라면 24시간 시중을 들어주게 될 것이다. D를 만나보니 왜 사람들이 큰 개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서양에서 왜 래브라도를 가장 선호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밝은 색 래브라도는 자주 볼 수 있는데, 검은색 래브라도는 도통 볼수 없다는 점이다.

산책길에서 D처럼 순한 개를 만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개는 미리 경계하고 짖으며 상대 개를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늑돌이도 예전에는 그랬다. 사회화 교육 시기를 놓치고 집안에서 응석받이로 자란 개는 사람보다 개를 더 경계하며 심하게 짖는다. 처음엔 사람도 무서워하던 늑돌이는 산책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제는 다른 개가 짖어도 무심하게 대할 줄 알게 되었다.(물론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오면 대응해 짖기도 한다) 심지어 개라면 무조건 짖는다는 유기견 출신 푸들 초코는 늑돌이 앞에서 얌전해져 초코의 보호자가 깜짝 놀란 적도 있다. 개는 사람을 위로해준다지만, 같은 개에게도 치유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이제 늑돌이는 다른 개가 저기서 나타나면 미리 앉는 행동까지 보인다.

개가 미리 앉는 모습을 처음 보여준 것은 한 청년이 데리고 다니는 스코티쉬테리어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스코티쉬테리어가 늑돌이를 보자 3m 정도 앞에서 갑자기 주저앉았다. 보호자인 청년의 말에 의하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우호적인 표시라는데, 그런 행동이 이른바 ‘카밍 시그널(calming signal)’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감동을 받았다. 이런 개를 만나면 늑돌이도 조용히 다가가 냄새를 맡고 상대도 제 냄새를 맡게 해준다. 보헤미안 같은 차림을 한 멋진 청년이 데리고 다니는 이 스코티쉬테리어(애석하게도 이름을 잊었다)는 귀와 눈이 커서 토끼를 떠올리게 하는 아주 잘 생긴 놈이었는데, 정말 점잖고 품위가 있었다. 청년이 먼저 늑돌이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바람에 우리는 거리에 서서 한참 얘기했는데 이 멋진 스코티쉬테리어는 중성화 수술을 마쳤다고 한다.

“새끼를 낳고 싶지는 않은 거예요?” 스코티쉬테리어가 명품 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흔한 개는 아니다.

“순종은 특유의 유전병이 많거든요. 저는 잡종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스코티쉬테리어도 잡종을 원했는데, 구할 수가 없었어요.”

청년의 말에 따르면 잡종이 머리도 좋고 더 건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궁금한 것은 이 개의 온화함이 중성화 수술을 받은 덕택인지, 스코티쉬테리어 종의 성격인지, 아니면 그 개만의 특성인가 하는 것이다. 개에 대해 아는 바도 많고, 산책도 자주 해준다는 청년의 말로 미루어보건대, 이 개의 온화함은 사랑받고 존중받으면서 자란 덕택인 것 같다.

내게 명견, 훌륭한 개는 품종이 우수한 개가 아니라 매너가 좋은 개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흥행했던 영국 영화 <킹스맨>의 명대사 ‘매너가 (성숙한)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s man)’는 말을 빌리자면 ‘매너가 명견을 만든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개의 매너는 바로 그 개를 키우는 사람, 그리고 다른 개를 키우는 사람들 손에 달렸다고. 개도 사회적 동물이라 보호자의 태도뿐 아니라 만나는 다른 개의 행동에도 영향을 받으니 말이다. 개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매너가 가장 좋은 개는 유기견이라고 한다. 자유롭게 살아가기 때문인지, 아니면 14만 년간 지속되어온 사람과의 유대감을 상실한 개의 겸손함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혼자 순응하며 생존하는 법을 터득한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리 동네에도 몇 마리 떠도는 개가 있는데, 모두 온순하고 다른 개가 짖으면 알아서 피한다. 그 개들의 온순함을 보면 과연 집에서 사는 개들(늑돌이도 포함해서)은 버릇 나쁜 부잣집 자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르페우스의 후손, 개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


▎래브라도 리트리버종 수컷인 ‘후크’가 주인과 눈맞춤을 하고 있다. 이런 행동을 하면 개와 주인의 뇌에서 ‘사랑의 호르몬’으로 불리는 옥시토신 분비가 늘어난다고 알려졌다.
참 신기하게도 혼자 길을 갈 때와 달리 개와 함께 나가면 세상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자연도 새롭게 보이지만, 동네 골목 하나하나에도 저마다 나름의 풍경과 냄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식물과 동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수많은 생명체도 만난다. 물론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은 사람이다. 딱딱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어른, 언짢은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고개를 돌리는 어르신,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걸어가는 학생, 싱글거리며 늑돌이를 불러보는 가게 주인들. 가끔 들리는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만날 때마다 “개를 데리고 자요?”라고 묻는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개 냄새 안 나요? 나는 냄새 때문에 못 키우겠던데”하고 안됐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 동네 주변에는 대학교와 초등학교가 있는데, 여대생들은 늑돌이를 보고 “아유, 귀여워!” 하며 쓰다듬어 보려고 한다. 늑돌이도 확실히 여자를 좋아하기는 한다. 물론 남학생도 관심을 보인다. 남학생들은 앉아서 늑돌이를 불러보려고 한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면 아이들은 늑돌이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지만 무서워서 “물어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친절하게 얘기해준다.

“손을 쑥 내밀지 말고 손바닥을 보여 봐. 그러면 개가 다가갈 거야.”

서너 명이 한꺼번에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니 늑돌이는 놀라 “컹!” 짖고, 아이들도 놀라서 “와!”하며 내뺀다. 가끔 초등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주전부리를 사먹으러 들어가면 학교를 파하고 나온 아이들이 몰려들어 늑돌이에게 온갖 관심을 보인다. 아이들은 “나도 개 키우고 싶은데, 엄마가 안 된다고 해요”라는 둥 별의별 질문을 쏟아내며 어떻게든 늑돌이를 한번 만져보려고 애를 쓴다. 개를 키우는 아이들은 개를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늑돌이도 가만히 있지만, 무서워하며 다가오는 아이에게는 늑돌이도 잔뜩 경계를 한다.

떡볶이 가게에서 만난 한 여자아이는 개를 키우지도 않는다는데 늑돌이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때만 해도 늑돌이는 경계심이 많고, 특히 아이들을 무서워했는데 이 여자아이에게만은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신기해서 가만 지켜보았다. 여자아이는 다른 애들처럼 호기심으로 늑돌이를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아니라, 무심한 듯 편안하게 늑돌이한테 다가갔다. 늑돌이는 여자아이의 냄새를 충분히 맡고 편안해졌는지, 이윽고 아이의 손등을 핥았다. 개가 낯선 사람을 만나 이렇게 핥는 것은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과 같다. 정말 멋진 만남이었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이 여자아이처럼 개와 멋지게 인사하는 사람을 만난다. 나는 어렸을 때 개를 무서워했고, 지금도 큰 개와 낯선 개에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래서 개나 다른 동물과 교감할 줄 아는 사람을 보면 오르페우스나 프란체스코 성인, 복희(伏羲)씨처럼 신비하게 보인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종이 무어냐는 시시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야수를 길들였다는 복희씨의 손길인가


▎지난해 유기견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던 랩퍼 아웃사이더와 그의 애견들.
늑돌이와 산책을 처음 나서던 무렵, 우리는 동네 뒷산인 백사실 계곡에 자주 올랐는데, 하루는 한 청년과 그 어머니를 만났다. 그 모자도 우리처럼 산책하러 온 모양이었다. 생후 6~7개월 무렵이었나, 아직 귀여운 때라 만나는 사람마다 늑돌이가 무슨 종이냐고 묻고 쓰다듬어보고 싶어 했지만, 늑돌이는 사람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무서워 짖곤 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늑돌이를 만질까 봐 걱정했었는데, 이 청년은 늑돌이를 정말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늑돌이는 마치 홀린 듯 청년 앞에 얌전하게 앉아 청년의 손길을 편안히 받아들였다. 나도 이 청년만큼 늑돌이를 안정감 있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나 역시 홀린 듯, 이 청년이 늑돌이의 경계심을 순식간에 풀어버리는 태도와 어루만지는 동작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 경외심마저 들었다. 야수를 길들였다는 복희씨나 새들에게도 설교했다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신비한 능력, 그리고 동물과 식물, 바위까지 춤추게 만들었다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의 힘은 어쩌면 과장 없는 진실일는지도 모른다.

늑돌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이 청년과 그 어머니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조용하게 교감하는 그 모습은 개와 사람이 어떻게 동반자로 살아왔는지, 아니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공존해왔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모자와 나는 서로 키우는 개에 관해 묻고 대답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하는 동안 그 모자는 늑돌이가 무슨 종이냐고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헤어지고 계곡을 내려오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먹고 말아 먹는가] 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김병연의 한시를 소개한 [Selected Poems of KIMSAAKAT](공역)이 있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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