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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특집] 작가 10인 추천! 휴가지에 가져갈 한 권의 책 

책 속에 풍덩 빠지는 시간 ‘휴休~’ 

기획 김포그니·박지현 기자 pognee@joongang.co.kr
“책은 청년에게는 양식, 노인에게는 오락, 부자에겐 지식, 고통스러운 사람에겐 위안이 된다.” -키케로 습기를 한껏 머금은 공기가 여느 해보다 뜨거운 여름. 거리에 나서기라도 하면 숨쉬기조차 힘든 폭염이 계속된다.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다. 분주한 삶을 뒤로하고 이유 있는 나른함을 즐기는 시간. 틈틈이 책 속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한 줄의 문장과 한 편의 이야기가 대숲의 바람이 되고, 넓은 바다의 파도가 된다. 한국 문학계를 이끄는 10인의 작가가 올여름 휴가에 동행할 책 한 권을 소개한다.
김별아 ● 김용택 ● 김홍신 ● 성석제 ● 오은 ● 윤고은 ● 정한용 ● 조용미 ● 한유주 ● 함정임 (가나다 순)


01. 김별아 소설가 |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시


<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1만5000원

여행지에서는 가능한 한 아무것도 읽고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생업을 쉬듯 휴양지에선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일을 멈춘다. 여행을 사뭇 즐기지 못하는 주변머리에 굳이 몸을 일으켜 떠났을 때는 그 정도의 절박한 휴식이 필요한 게다.

그럼에도 최대한 줄여 싼 트렁크에 옆구리 한쪽이 허전하면 내가 날 속이듯 책 한 권을 은근슬쩍 찔러 넣는다. 여행의 흥취를 깰 만큼 너무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고, 여독으로 다 읽지도 못한 책의 무게마저 버거워 버려두고 올 궁리를 할 만큼 너무 가볍지 않을뿐더러, 도망치듯 떠나온 본래의 목적을 잊고 사로잡혀 책 속으로 빠져들 만큼의 페이지터너(pageturner)는 아닌, 그런 책이다.

시시하지만 까다로운 내 취향에 들어맞는 한 권의 책은 주로 시집이다. 그중에서도 여태껏 가장 많이 동행한 것이 백석의 시집이다. 1935년부터 1948년까지, 그다지도 아팠던 시절을 통과한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은 낱낱이 절창이다. 백석의 시는 여행의 시기가 어느 계절이든 여행의 장소가 어디든 함께하기에 맞춤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가난한 나라에서는 헛된 오만을 눅이고 풍요한 나라에서는 오연한 자존을 높인다. 너무 많은 생각을 줄이고 지레 텅 빈 가슴을 채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해도 마냥 기쁠 책이다.

백석 시집은 지금쯤 한창 신병교육대에서 낯설고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들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는 특히 ‘흰 바람벽이 있어’를 사랑하여 이렇게 외곤 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올해 나는 어느 곳으로도 떠나지 않을 계획이지만, 백석의 시집과 함께 어디로든 유랑할 예정이다.

김별아 - 1969년 강원도 강릉 출생. 연세대 국문학과 졸업. 1993년 <실천문학>에 중편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로 등단. 장편소설 <미실> <열애>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가족 판타지>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등을 썼다.

02. 김용택 시인 | 빈 배처럼 텅 비어 오라


<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8000원

이번 휴가 때는 그냥 아무 ‘짓’도 안하고 그냥 갔다 그냥 오면 안 될까. 한번 그래보면 안 될까. 그냥 갔다가 그냥 놀다가 그냥 오면 안 될까. 전 국민이, 진짜로 아무 짓도 안하고 그냥 한번 놀다가 오면 안 될까요. 그 무엇도 도모하지 않고 그냥. 휴가란 놀러 가는 것 아닌가.

강으로 가면 강하고 놀고, 바다로 가면 바다하고 놀고, 아니면 난생 처음 벼 자라는 논두렁을 한번 걸어보라. 개울로 가면 개울하고 놀고, 산으로 가면 산하고 놀자. 놀기 싫으면 그냥 멍하니,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편하게 앉아 먼 산 능선이나 바라보라.

우리가 언제 무엇인가를 오래 바라본 적이 있는가. 몇 백 년을 그 자리에 나무가 나무로 서 있는 나무들을 보라! 달려오는 파도마다 똑같은 파도는 없다. 가는 파도에 무거운 몸과 마음을 실어 멀리 보냈다가 오는 올 때는 빈 배로 오라. 흘러가는 물을 하염없다. 바람이 살아나는 들을 보라. 노을이 한일 자로 지는 서해에 별이 뜰 때까지 홀로 누워 있어보라. 자연은 정면도 경계도 없다.

모두 받아들이고 모두 비운다. 책에 너무 기대지 말라. 남의 말을 많이 듣지 말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 세상에 자기 자신만한 책은 없다. 살다가 보면 자기가 어느 책보다 더 책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놀다가 문득, 정말로 심심하면 펼칠 시집 한 권을 권한다.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 지성사) 시집은 일단 가볍다. 시들이 길지 않다. 15행을 넘은 시가 한 편인가 두 편인가 밖에 없다. 모두 7~8행 미만이다. 얼마나 좋은가. 이번 휴가지에서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빈 배처럼 산뜻하게 돌아 올 수 있는 책이다. 읽기 싫으면 한 두어 편 읽고 눈 감고 누워 있는 그대 곁에 이 책을 가만히 놓으라. 폼 날 것이다. 아! 우리가 언제 빈 배로 바다 위에 둥둥 떠서 집 앞에 서 보았던가.

김용택 -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림고등학교 졸업. 1982년 <창작과 비평사>에 연작시 ‘섬진강’으로 등단. 시집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 <나무>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등이 있다.

03. 김홍신 소설가 | ‘끌어안기’의 관계학


<날마다 웃는 집> 법륜스님 지음 | 김영사 | 1만800원

지인이 내 아들 녀석에게 존경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녀석은 반죽 좋게 “최인호 아저씨입니다”라고 했다. 지인은 웃으며 “나는 김홍신 선생님을 존경하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녀석은 단번에 이렇게 대답했다. “안 살아보면 몰라요.”

우리는 각자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담을 쌓거나 가시를 곤두세워 다른 사람이 내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선을 긋고 산다. 하지만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러나 섣불리 끌어안았다가는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끌어안기와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그들은 결국 가장 고통을 덜 느끼면서도 따스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를 발견했다. 그들만의 거리.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고슴도치 신드롬’이라 불렀다. 이것은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남겨진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서로 다른 객체가 만나 하나를 이루어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인류 역사가 시작부터 아담과 이브가 함께 살면서부터 갖가지 이야깃거리가 발생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시인 하이네는 “나는 결혼행진곡을 들으면 군대행진곡을 떠올린다”고 했다.

인간사에서 평탄한 삶은 매우 드물고 가정은 시끄러운 게 정상인지 모른다. 그런데 <날마다 웃는 집>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만 보면 인간사에 불가능한 주제라는 느낌이 든다. 가정을 갖지 않은 성직자이니까 그냥 배려하며 살라는 말인지 모른다는 선입견을 갖고 펼쳐보았다.

법륜 스님에게 물으면 즉시 답하는 ‘즉문즉설’을 씨줄과 날줄로 잘 엮어 만든 책이었다. 불가에서 즉문즉설이란 선사들이 깨달음의 지혜로 뭇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이다. <날마다 웃는 집>을 읽고 수많은 고뇌와 부딪히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나보다 좀 더 일찍, 좀 더 지혜롭게 갈등을 딛고 뚜벅뚜벅 걸어갔으면 한다.(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살 수 있었으면 한다.)

김홍신 - 전 국회의원.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건국대 국문학 박사. 제15·16대 국회의원, 1975년 <현대문학>에 단편 ‘물살’로 등단. 장편소설 <인간시장> <대발해(10권)> <인생사용설명서> <단 하나의 사랑> 등 130여 권의 책을 냈다.

04. 성석제 시인·소설가 | 맛있는 고민에 빠져보기


<식탁 위의 세상> 켈시 티머먼 지음 | 문희경 옮김 | 부키 | 1만6500원

음식에 관련된 담론은 일상에서 과잉이라 할 정도로 넘쳐난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음식에 관련된 것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음식은 예능이고 위안이고 중독과 마비의 기제로 대중을 지배한다. 관심에 비례해 지식과 정보도 늘어났지만 그게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음식은 생명체에게 필수적이고 기초적인 것인 동시에 다툼의 대상물이고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유기농, 공장식 농업, 온실가스 배출, 농약과 화학비료, 물, 유전자 조작 등 음식에 관련된 뜨거운 이슈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걸 “다 알고는 먹을 게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거나,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음식을 먹을 때 고행에 가까운 도덕률을 생각하라는 식의 불편함을 안겨주는 책도 꽤 있다.

저자는 1979년 생으로 젊고 기운차며 의욕과 행동력이 뛰어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음식, 커피와 사과와 바나나와 초콜릿 같은 것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며 누구에게 기쁨과 고통과 이득을 안겨주는지 직접 현장에 찾아가 몸으로 부딪치며 탐색한다. 저자의 조국인 미국, 중국, 아프리카, 중남미 등등 세계 곳곳의 오지와 대도시를 가리지 않고 오가며 좌충우돌하는 과정은 소설처럼 흥미롭지만 결론은 소설과 달리 명쾌하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상당부분 찾을 수 있다. 음식을 둘러싼 센세이셔널한 논란 자체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다. 적어도 내 아이나 가족, 부모와 친구들이 뭘 먹고 있는지 그게 어디서 온 것이고 누가 생산한 것인지 알려주고 선택하게 해준다.

꼬리: 우리가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까지 커피 원두의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뀔까? 중국은 전 세계 사과 생산량의 몇 퍼센트를 생산하며 그중 몇 퍼센트를 사과 농축과즙으로 만드는가? 양식 연어 한 마리를 0.5킬로그램짜리로 키우려면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 몇 킬로그램을 먹여야 하나? 참치는?

성석제 -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연세대 법학과 졸업. 1986년 <문학사상>에 시 ‘유리 닦는 사 람’으로 등단. 단편집 <내 인생의 마지막 4 .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유랑>, 장편 <아름다운 날들> <순정> <인간의 힘>, 산문집 <소풍> <농담하는 카메라>,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지금 행복해> 등을 썼다.

05. 오은 시인 | 순순히 늙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시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김혜순 지음 | 이피 그림 | 문학동네 | 1만6800원

친구가 지도를 꺼내놓고 자신의 올여름 여행 계획에 대해 들려주었다. 찾아갈 장소, 먹을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책도 한 권 가져가는 게 어때?” 슬쩍 김혜순의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이번 휴가 때 맨 먼저 가방에 넣을 책이라고도 덧붙인다. “왜?”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시가 몹시 쓰고 싶었다고, 어디론가 떠나고 어디엔가 도착하는 상상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시를 안 읽는데?” 친구가 반문했다. “이건 시에 대한 책이면서 시에 대한 책이 아니야.”

이 책에는 시이면서 산문인, 동시에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술술 읽히면서도 어느 순간 둔중한 것에 머리를 가격당한 느낌을 받는다. 가슴에 뭉근한 것이 차오르는가 하면 내일의 삶에 대해 찬찬히 곱씹고 있는 스스로를 목도하고 놀라기도 한다. 어쩌면 이 책은 삶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문학적 순간들에 대한 책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어떤 식으로 삶을 관통해야 할지, 살면서 찾아오는 반짝이는 순간들을 어떻게 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순순히 늙을 수 없는 사람, 마음만은 늙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더 많이 발견하겠다고 작정한 사람, 지금 여기를 의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이다. 휴양지에서 돌아오기 전날 밤, 이 책의 문장들은 당신의 가슴에 한 줄 한 줄 새겨질 것이다. 당신은 이제 휴양을 마치고 여기로 돌아오지만, 여기는 그대로여도 당신은 이미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휴양지에 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선뜻 발걸음을 내딛는 일이 아마도 휴양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삶을 꾸려나갈 동력을 얻기 위해 우리에겐 쉼이, 쉬면서 하는 생각들이, 쉬면서 꾸는 꿈들이 필요하다. “각자의 우주에 각자가 있으려고/ 영혼이 되려고.”(<언젠가 이 의인화를 버릴 거야>) 우리는 묵묵히 삶을 인내한다. 불쑥 휴양지에 간다. 틈틈이 책을 읽는다.

오은 -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 2002년 월간 <현대시>에 ‘건축’으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 등을 썼다.

06. 윤고은 소설가 | ‘낯선 기시감’으로의 일상탈출


<뉴욕3부작> 폴 오스터 지음 |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1만2800원

폴 오스터는 함부로 읽으면 안 된다. 휴가지에서는 더더욱. 그의 소설은 얼핏 보기에 소풍이나 낭만과는 영 어울리지 않고, 휴가의 동행으로 삼기엔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휴가에 폴 오스터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것도 이미 거듭 읽었던 <뉴욕3부작>과 함께. 책은 벽돌만큼 두껍기까지 하다. 정말 휴가의 동행으로는 부담스럽지만,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일단 내 목적지가 뉴욕이기 때문이다. 이건 꽤 쉽고 명쾌한 휴가지 책 선택법이다. 내가 뉴욕으로 떠날 생각이면 뉴욕을 배경으로 하거나, 작가가 그곳 출신이거나, 그곳에 망명해 살고 있거나, 그곳에서 영감을 받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시태그가 #뉴욕, 일 수 있는 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제주든 도쿄든 파리든 다 마찬가지다. 이런 식이면 여행의 동행 책을 고르는 건 어렵지 않다. 일단 범위가 좁혀지니까.

<뉴욕3부작> 역시 그런 방식으로 고른 것이긴 하지만, 사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가끔 행정구역을 뛰어넘어 유효한 책들도 있는 법인데, 이 책도 그렇다.

<뉴욕3부작>에 담긴 세 편의 소설은 모두 일상의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된다. 수록작 <유리의 도시>는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오류를 대하는 한 사람의 태도다. 그는 잘못 걸려온 전화를 제대로 걸려온 척, 능청스럽게 받으면서 기어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곧 급격한 미로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뉴욕이라고 말하지만, 뉴욕에 국한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미로’에 가까운 이야기여서, 뉴욕이든 서울이든 집이든 휴가지든 지금 이 상황을 모두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소설 속의 인물뿐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독자 역시 ‘낯선 기시감’이라는 이상한 기운에 사로잡혀, 일상과는 작별하게 된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휴가엔 좀 부담스럽고, 어쩌면 위험할 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번은 동행하게 된다.

윤고은 - 1980년 서울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4년 단편 ‘피어씽’으로 제2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등을 썼다.

07. 정한용 시인 | 여행은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과정이니…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1만5000원

단 한 권의 책을 고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상엔 추천하고 싶은 책이 너무나 많으니까. 하지만 휴양지라는 조건이 있으니, 올여름 내가 여행을 갈 때 챙겨 가려 했던 책을 먼저 살펴본다. 무거운 짐을 싫어해 나는 책을 많이 싸지 않는다. “놀 때는 편히 놀자”는 생각이다. 그런데 요즘은 참으로 편리하게 무거운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전자책 단말기만 있으면 그 안에 도서관을 몽땅 집어넣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전자책을 더 많이 사는 편이다. 지금 내 단말기 안에는 약 천 권의 책이 들어 있는데, 두 손가락으로 들어 올릴 수 있다.

올여름은 모로코로 여행을 갈 계획인데, 미리 준비한 책이 몇 권 있기는 하다. 여행에 동참할 책은 무겁고 복잡하면 안 된다는 게 지론이다. 멋진 경치가 나타나면 고개 들어 창밖을 봐야 하니까. 머리맡에 두고 읽다 스르르 낮잠이 들어도 괜찮아야 하니까. 그래 준비한 책을 참고하시라고 털어놓는다면, 장강명의 <댓글부대>나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퀘스천> 같은 소설, 이게 너무 약하다 싶으면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나 스테파노 만쿠소의 <매혹하는 식물의 뇌>를 곁들이면 된다. 앗, 유감이지만 뒤 두 권은 전자책이 없어 종이책을 들고 가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뭔가 좀 아쉽다고? 단 한 권의 책을 꼭 짚으라고?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줄리언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권하겠다. 물론 아직 안 읽은 책이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이런 불확실한 확신은 그 책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현존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불리는데, 나는 이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부터 <10 ½장으로 쓴 세계역사>에 이르기까지, 풍자와 유머와 상상력을 얼마나 맛있게 요리하는지를 본 바가 있다. 더구나 최근에 나온 이 책은 나이가 든 작가가, 생의 미세한 틈에서 다큐식으로 죽음을 읽어낸다고 하니, 정말로 기대가 된다. 여행은 바로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과정일 터이니.

정한용 - 1958년 충북 충주 출생. 경희대 문학박사.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초극의지의 구조적 현현’으로 등단. 시집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 <나나 이야기> <흰 꽃> <유령들>, 평론집 <울림과 들림> 등을 썼다.

08. 조용미 시인 |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리는 비


<비> 마르탱 파주 지음 | 발레리해밀 그림 | 이상해 옮김 | 열림원 | 7500원

하늘이 무겁더니 드디어 세찬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흙 냄새가 물씬 올라오고, 창가의 단풍나무는 흠뻑 젖어 나뭇잎들을 쫙 펼쳐 들고 비를 맞는다. 장마전선이 북상하면서 오늘부터 비가 시작된다고 하니 흉하게 드러난 호수의 바닥도 이제 찰랑찰랑 물이 찰 테고 나는 또 창 앞에 며칠 꼼짝 못하고 붙잡혀 있을 것이다. 아, 저 시원한 빗소리. 잠시 와 머무는 곳이지만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비 오는 날 풍경이 궁금했다. 비가 오면 떠오르는 장소들이 있다. 그곳에 가서 빗소리를 들으면 비가 얼마나 감미롭고도 처연한 음악을 연주하는지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저 빗소리에 귀는 더욱 예민해지고 잊고 있었던 후각의 관능적인 감각도 살아날 것이다. 아뜩한 비 냄새.

휴가지에서는 땡볕에 시달리며 운전을 하거나, 벌레에 손발을 물어뜯기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숙소에 실망하거나 어쨌든 약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장대비를 만나게 되면 어떨까. 비를 맞으면 자귀나무 붉은 꽃들은 어떻게 변하는 걸까. 토끼들은, 나비들은 다 어떻게 되는 걸까.

단풍나무 잎이 비를 머금고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다. 숲의 나무들이 가진 연두와 초록은 무성해져 초록의 정점에서 날뛰다가 내리 꽂히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가라앉는다. 저 직립의 비는 지상의 모든 것들을 마구 파고든다. 이 비를 뚫고 어딘가로 가고 싶은 곳이 있는 사람들은 벌써 우산을 펼쳐 들었다. 휴가지에서 이런 비를 만난다면 마르탱 파주의 <비>를 펼쳐보면 좋겠다. 이 책은 빈 공간이 많고 얇고 가볍다. 비에 대한 전방위적인 사유가 섬세하고 감각적이고 달콤하게 펼쳐져 있다. 여름 휴양지에서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있을까. 마르탱 파주의 <비>를 보고 놀랐다. 수년간 써온 비 혹은 나무에 대한 단상들을 모은 바로 이런 산문집을 나도 꿈꾸어왔기 때문이다. 마르탱 파주의 말처럼 오늘 저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조용미 -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0년 <한길 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 등을 썼다.

9. 한유주 소설가 | 어느 지중해 휴양지에 쏟아진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지음 |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1만6000원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주로 친구들이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을 구입한다. 누군가가 뭘 권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해서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글 쓰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권하는 책을 읽으며 그들의 생각이나 취향, 관심사를 알아보는 것도 독서가 제공하는 재미 중 하나다.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도 누군가가 권한 책 중 하나였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이 책의 제목은 <윌리엄 트레버>이고,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하기까지 몇 달, 마침내 첫 장을 펼치기까지 몇 주가 걸렸다. 맨 앞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은 ‘욜의 추억’이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첫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에 5개월 된 아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평범한 문장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뒤이어 그에게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이 지긋한 여자로, 또 그 여자에게서 그녀의 친구인 미스 그림쇼로 시점이 옮겨가는가 싶더니, 한 남자와 두 여자가 나누는 평범하면서도 기이한 대화가 상황을 장악하면서 발휘하는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중해의 어느 휴양지를 배경으로 하는 짧은 소설이었다. 그러나 결코 길지 않은 페이지들에 압축된 찰나의 시간이 세 인물의 삶 전체를 담고 있었다. 이는 영미권 단편 작가들의 특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트레버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직접 읽어보고 느껴보시라고 할 수밖에.

고백하자면 나는 이 단편집을 다 읽지 않았다. 하루에 한 편씩 읽고 있기 때문이지만,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책에 수록된 ‘탄생을 지켜보다’는 아마도 내가 지금껏 읽은 소설들 중 가장 이상하고 서늘하며 끔찍한 이야기에 속할 것이다. 남들처럼 여름에 휴가를 가지 않는 나로서는 이 책을 조금씩 읽으며 더운 계절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 단편집을 다 읽은 뒤에는 역시 같은 작가의 <비 온 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한유주 - 1982년 서울 출생. 홍익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대학원 미학과 석사과정 수료. 2003년 <문학과사회> 단편소설 <달로>로 등단. 소설집 <얼음의 책>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불가능한 동화> 등을 썼다. 1인 출판사 ‘울리포프레스’를 운영 중이다.

10. 함정임 소설가 | 인생이란 추억을 완성할 여행길


<릴케의 프로방스 여행>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이리나 프로벤 엮음 황승환 옮김 | 문학판 | 1만4000원

여름만 되면 먼 곳으로 떠나곤 했다. 발트해 연안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북대서양의 섬나라 아일랜드로, 남미 안데스 산간의 마추픽추로. 올여름엔 특별한 여행을 계획했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집에서 2㎞ 해변으로의 최근 거리 여행. 하루에 한 권씩 비치백에 넣어 해변의 파라솔 아래로 떠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해운대 달맞이 언덕은 문탠 로드 중간, 집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걸으면 해운대 해수욕장에 이르고, 왼쪽으로 걸으면 송정 해수욕장에 이른다. 여러 갈래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그들과 나란히 뻗어 있는 폐철길(옛 동해남부선)을 따라 걷기도 한다.

첫날 비치백에 넣어간 책은 <릴케의 프로방스 여행>. 보헤미아(체코) 출신으로 유럽의 국경들을 넘나들며 보헤미안으로 머물고 떠나기를 계속했던 릴케의 눈과 의식에 새겨진 남프랑스의 풍경들이 편지 형식으로 전달된다. 편지의 수신자들은 릴케의 영원한 연인, 러시아계 독일 여성 작가 루 살로메를 비롯 스위스의 건축가, 독일의 출판업자, 오스트리아의 여가수, 폴란드의 귀족 부인 등 다양한 국적의 연인, 예술가 및 후원자들이다.

이 책은 앞으로 프로방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여행자들에게는 실용적인 동선(動線) 안내를 겸하면서, 폐허조차도 아름다운 프로방스 자연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고독이 서정적이면서도 명징하게 펼쳐진다. 인생이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한 여행길. 그동안 전투하듯 일상을 치르면서 떠남을 감행했던 여행자들에게는 추억의 쉼터로, 반대로 피할 수 없는 도의적 사정과 현실적 의무에 발이 묶여 누군가의 발자취로 간접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독서 여행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함정임 -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이화여대 불문학과 졸업, 중앙대 문예창작학 박사. 1990년 <동아일보>에 단편 ‘광장으로 가는 길’로 등단.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동행>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 <저녁식사가 끝난 뒤>, 장편소설 <춘하추동> <내 남자의 책>, 문학예술기행서 <소설가의 여행법> <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등을 썼다. 현재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있다.

- 기획 김포그니·박지현 기자 pognee@joongang.co.kr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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