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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신라의 하늘’을 가짜로 복원하는 일은 역사의 죄 

‘가득하게 비어 있는’ 황룡사가 아름다워 

한정호 동국대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상상에만 의존한 황룡사탑 복원은 신라정신을 모독하는 행위… 영원의 상태로 돌아간 황룡사의 고귀한 기운 느끼고 재발견해야

▎1970년대 경주 황룡사지 정비·조사 과정에서 나온 돌무더기. 황룡사는 완공까지 100년이 소요된 당시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
문화재 관리의 기본원칙은 현상유지다. 지금 경주시 일원에서 벌어지는 ‘신라왕경 복원사업’의 방향은 그 원칙을 거스르고 있다. 작은 유물을 복원하더라도 손상된 부분의 원형이 불확실할 때는 인위적인 복원을 삼가야 한다. 발굴되지 않은 경주의 왕릉은 고요한 채, 우리에게 풍요로운 메시지를 전한다. 황룡사의 주춧돌은 온몸으로 받들었던 무거운 기둥을 내려놓고 긴 안식을 누리고 있다. 그 모습은 더없이 평안하다. 부디 그대로 두거나, 아주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100년 복원사업의 대계를 그려야 한다.


▎최근 복원사업으로 경주 월성(月城) 유적지에 3m 깊이로 판 발굴 구덩이. 문화재 복원과 발굴은 사료적 근거가 없다면 보존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남은 시간과 공간이 일치해야만 성립한다. 옛 황룡사 터에 앉아 그날 그때 이곳에 있지 않아서 만나지 못한 수많은 사람, 그리고 목격하지 못한 사건과 사물을 떠올리며 이 터의 앞날을 걱정한다.

사찰의 핵심 건물은 불상을 모시는 금당과 사리를 봉안하는 탑이다. 황룡사 금당과 9층탑이 완공된 시점만 따져보더라도 황룡사의 건립은 최소 100년에 걸쳐 진행된 우리 역사상 가장 긴 건축 프로젝트였다. 이렇게 탄생한 건축이기에 황룡사에 대한 신라 왕실의 애착과 백성들이 가졌던 자긍심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황룡사 금당의 장육존상과 9층 목탑이 신라를 지키는 세 가지 보배 가운데 첫째와 둘째라는 신라인들의 믿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 천사옥대를 포함한 이 3대 보배가 있었기에 고려왕이 신라 침략을 단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육존상이란 불상의 크기와 관련된 이름이다. 불교경전에 따르면 석가 생존 당시 일반인들의 평균 신장이 8척이었던 것에 비해 석가모니의 신장은 그 두 배인 16척이었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불상을 만들 때 높이를 1장6척에 맞추고, 이렇게 조성된 불상을 장육존상이라고 부른다. 황룡사 장육존상이 완성되던 당시의 도량형으로 환산할 경우 불상의 높이는 대략 6m에 육박하는 거대한 금동불입상이었다.

황룡사 장육존상의 완성에 대해 신라사람들은 불교의 성군으로 추앙되는 인도의 아소카왕마저도 이루지 못한 꿈이 신라에서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에 의하면 아소카왕이 금과 구리를 모아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깨달은 왕은 모았던 금과 구리를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부디 인연 있는 나라에 당도하여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온 세상을 떠돌아도 미완에 그쳤던 불상은 드디어 신라 땅에 이르러 단 한 번의 주조로 완성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황룡사 장육존상이라는 것이다. 불상이 완성되고 황룡사 금당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에 불상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적셨다. 그것은 황룡사를 창건한 진흥왕이 승하할 징조였는데, 우리나라 불상과 관련된 최초의 영험담이다.

신라가 백제 장인 아비지를 부른 이유는?


▎하늘에서 바라본 신라왕궁 터 월성 유적지 전경. 왕궁 복원을 위한 작업이 시작됐으나 졸속 복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라의 둘째 보배인 황룡사 9층 목탑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셔온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국가의 안녕과 삼국의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건립되었다. 높이가 무려 80m에 달했던 이 목탑은 동아시아 고대 목조건축의 전설이자 신라의 하늘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의 하늘을 지배했던 황룡사 9층 목탑은 백제의 건축가 아비지의 손에 의해 건립되었다. 목탑이 건립되던 당시는 한반도의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신라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하며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대규모 건축공사로 인한 국력의 소진과 적국인 백제에 국부를 유출하는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여왕이 9층 목탑 건립을 추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 건축의 상량식과 같은 목탑의 중심기둥인 찰주를 세우는 행사가 있기 전날에 아비지는 목탑 건립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기록에는 전날 밤 아비지가 모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고 일손을 멈췄다고 했다. 그러자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금당 문에서 노승과 장사가 나와서 기둥을 세우고는 다시 돌아갔다. 이 모습을 본 아비지가 자신의 생각을 뉘우치고 공사를 이어갔다는 이야기는 당시 신라의 조정과 백제장인의 갈등이 설화로 재구성된 것이리라.

이렇게 완성된 황룡사 목탑은 이후 여러 차례 낙뢰로 인한 피해와 화재를 겪지만 그때마다 복구를 거듭하며, 600여 년간 서라벌의 창공에 우뚝 서서 신라인들의 삶을 지켜보았다. 여러 기록을 보면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목탑의 구조와는 달리 황룡사 목탑에는 층계가 설치되어 9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 김극기(金克己)가 지은 시에는 황룡사 탑 위에 올라 바라본 경주의 풍경을 “수많은 집이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하게 보인다”라고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황룡사의 두 보배는 애석하게도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전란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황룡사의 소실은 우리나라 조형역사상 가장 뼈아픈 비극이었다. 장육존상과 9층 목탑 말고도 성덕대왕신종을 능가하는 대종과 솔거가 그린 노송도 등 신라 왕실의 후원 속에 제작된 당대 최고의 미술품들이 황룡사와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된 옛 황룡사의 터에는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해서 1960년대 초에는 100여 호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황룡사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64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사적지 정비가 추진되면서 황룡사 터에 들어서 있던 민가들이 철거되고, 1976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는 이후 8년간 지속되었다. 발굴 결과, 황룡사는 불상을 모시는 금당이 하나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세 개의 금당 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장육존상이 서 있던 대석과 건물의 기둥을 받들던 주춧돌, 9층 목탑의 기단 등 땅속에 감춰졌던 황룡사 건물터들의 전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복원의 뜻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어


▎황룡사지 조사 과정에서 나타난 주춧돌의 모습. 지금은 긴 안식을 누리고 있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 사진·중앙포토
황룡사의 뿌리가 잘 버텨준 탓도 있지만 현재의 황룡사 터는 모범적인 유적정비 사례로 평가받는다. 고대 문화유산에 대해서만큼은 콧대가 높은 중국 학자들도 황룡사 터를 보고는 놀라움과 부러움을 금치 못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러나 황룡사 터를 발굴하고 정비한 배경은 황룡사를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다행히 무산되었지만 1970년대에는 실제로 9층탑을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하려는 계획도 수립되어 있었다.

그 후에도 황룡사 복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간간이 이어져 걱정은 되었지만 어차피 허황되고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애써 무시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막대한 예산이 편성되고, 복원을 위한 연구와 설계용역이 발주되는 등 황룡사 복원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연구용역에 참여하는 지인들을 만나 우려를 전달하면 대부분 학문적 연구 목적으로 참여했지 “설마 원형도 모르는데 실현가능성이 있겠느냐”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럼에도 황룡사 복원사업은 밀어붙일 태세다. 원형을 모르는데 어떻게 복원을 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목탑과 금당을 복원하기로 한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복원이 쉬운 담장을 먼저 설치한다니 실소를 금치 못할 노릇이다.

문화재 관리의 기본원칙은 현상유지다. 황룡사 복원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복원의 뜻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문화재의 관리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보존처리는 의사의 치료행위에 해당한다. 즉 아픈 문화재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행위다. 그리고 문화재의 복원은 숭례문의 사례와 같이 완벽한 원형정보가 있을 때나 실행될 수 있는 개념이다. 작은 유물을 복원하더라도 손상된 부분의 원형이 불확실할 때는 인위적인 복원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황룡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잘 유지되고 있는 유적을 파괴하겠다는 것에 다름없다.

솔거가 그렸다는 소나무 그림에서 교훈 얻어야


▎최근 디지털 기술로 옛 모습을 상상해본 ‘황룡사 9층목탑’. 대부분 상상에 의한 것으로 실제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 사진·중앙포토
분명한 것은 황룡사의 옛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현재 황룡사 터에 남아 있는 흙과 돌 이외에는 없다. 그 위에 존재했던 건축에 대해 학자들이 탐구하지만 그것은 단편적인 자료에 의지한 추상일 뿐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A학자가 보는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이 다르고, B학자가 생각하는 탑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황룡사 원형 복원사업은 아비지나 솔거가 부활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사업이다. 만약에 실제로 황룡사가 복원된다면 그것은 황룡사가 아니라 현대 상상력이 만들어낸 21세기 창작물에 불과하다. 과연 전문가로 불리는 몇 사람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 숭고한 터를 내주는 것이 지당한 일인가. 누구든 상상하는 모습을 허공에다 마음껏 그릴 수 있는 현재의 상태로 황룡사를 보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주장에 한 표를 던진다.

황룡사 복원을 주장하는 논리로 얼마 전 어느 정치인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황룡사 터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발언을 했다. 유적의 가치를 관광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편견이 함축된 발언이다. 한마디로 황룡사 복원의 목적이 사람들이 찾는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유적지를 관광지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황룡사의 원형에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볼거리만 제공하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은 유적의 잘못이 아니라 그곳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룡사지를 찾는 탐방객들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황룡사지를 답사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경주의 어느 유적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영원의 상태로 돌아간 황룡사가 주는 기운이 평화롭기 때문이리라.

황룡사 장육존상과 9층목탑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는 지식이지만 전설의 화가 솔거가 그렸다는 소나무 그림 이야기는 누구나 기억한다.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으면 솔거가 늙은 소나무를 벽화로 그렸더니 새들이 진짜 소나무인줄 알고 날아들었다가 벽에 부딪쳐 땅에 떨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림의 색이 바래 한 승려가 색을 덧칠하자 더 이상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의 무대, 바로 그 소나무 벽화가 그려졌던 사찰이 황룡사다. 이 이야기가 어쩌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황룡사 복원문제를 경계하라는 과거의 메시지는 아닐까.

현실에서 동떨어진 고대의 공간 황룡사의 옛터를 찾았을 때의 인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이가 있고, 나처럼 만나지 못했던 과거의 사람들과 가상의 시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황룡사의 과거와 같은 공간이지만 시차로 인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이 세월을 빛과 그림자(光陰)라 했던가! 그들이 남긴 흔적 위로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시간들이 쌓여간다.

오랜 시간과 사연으로 가득 빈 공간에서 모든 사라져 버린 것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존재하지만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나를 맑게 한다. 온몸으로 받들었던 무거운 기둥을 내려놓고 긴 안식을 누리고 있는 황룡사의 주춧돌이 더없이 평안하다. 부디 솔거의 그림에 덧칠을 했던 어느 승려의 경솔함이 황룡사의 터전에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황룡사지의 텅 빈 모습에 고요하고 아름다운 정취가 서렸다. / 사진·중앙포토
한정호 - 1989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에 입학한 이후 지금까지 경주를 기반으로 고대불교미술 탐구를 즐기고 있다. 동국대와 동아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마쳤다. 현재 모교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대 불교건축과 불교공예를 주로 연구하며, <황룡사 중금당지 불상대석에 대한 고찰> <황룡사 가섭불연좌석 고>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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