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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 교수의 ‘그리스 문명의 결정적 순간’(8)] 전쟁이 펼쳐내는 신화와 현실 

복수의 윤회… 자식 잃은 부모는 통곡했다 

김승중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희랍미술고고학 교수
그리스-페르시아 대결은 전쟁의 개념을 완전히 바꾼 역사적 계기…범 그리스의 정신과 그 잠재력을 일깨운 영웅적 투쟁으로 기록돼

테르모필레 전투의 승자는 페르시아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는 이 전투의 패배를 통해 승리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테르모필레 전투야말로 전 그리스인들의 사기를 돋우고, 자신의 땅과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희생정신을 기리는 심볼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젊은이들을 죽이며, 부모를 통곡케 하는 비극의 연속일 뿐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전경. 기원전 490년께 세워져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됐다. 고대 페르시아 문명의 영광과 몰락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 사진·중앙포토
“아들아, 전투를 마치고 당당히 돌아오라, 방패를 들고서, 그렇지 않으면 방패에 얹혀오라.”(Come back with your shield-or on it: 플루타르크 Plutarch, Moralia 241).


▎그리스 호플라이트(hoplite: 중무장보병) 병사가 전형적인 페르시아 군인과 대결하는 장면이 킬릭스(kylix) 술잔의 내부를 장식했다.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인 BC 48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 사진제공·김승중
이 구절이 바로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이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애잔한 가슴이 담긴 유명한 훈유(訓諭)이다. 당당히 이겨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면, 죽을 때까지 용감히 싸우고 방패 위에 실려서 시신으로 돌아오라는 뜻이다. 그만큼 스파르타의 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에서 가장 용맹한 이들로 알려져 있었고, 상무(尙武)정신으로 충만한 스파르타식 교육 또한 특별히 엄격한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그들의 여성들도 마음가짐이 달랐다고 한다. 강한 몸을 키워야 건장한 아들을 낳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파르타는 그리스 도시국가 역사상 유일하게 여성에게도, 남성 기준보다는 약간 완화된 것이지만, 신체교육을 체계적으로 시켰던 것이다.

어머니의 입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는 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것이 섬뜩하기 그지없지만, 역사는 일괄적으로 남성적인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과장되었다고 하지만,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이 그만큼 거세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만큼 더 스파르타의 전투일화들이 유명한 것이 아닐까? 페르시아 대전(Persian Wars, BC 499∼BC 449: 그리스-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라고도 일컫는다) 중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Leonidas I, BC 540∼BC 480)가 이끄는 300명의 최정예 스파르타 전사들이 테르모필레(Thermopylae) 협곡에서 목숨을 바쳐 펼친 3일간의 방어전이 그러하다.(BC 480년 8월 혹은 9월)

스파르타를 앞장세운 그리스 연합군의 기상


▎스파르타에서 출토된 스파르타 호플라이트 병사의 대리석 흉상. BC 5세기 초 작품으로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소장. / 사진제공·김승중
페르시아 대제국이 처음으로 그리스 땅을 침공한 지 10년이 된 BC 480년. 그들의 제1차 침공은 BC 490년에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에서 아테네의 소수병력이 주도하여 기적적으로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쳤지만, 그 후 다리우스 대제(Darius I, BC 550∼486)의 계승자인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제(Xerxes I, BC 519∼465)가 그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 제 2차 침공을 한다. 북쪽에서부터 육로와 해로로 동시에 쳐들어오는 크세르크세스는 20만 명에 가까운 군사를 이끌고(200만 명이라고 과장된 보고들도 전해지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그 수치를 20만 명으로 추정한다) 테르모필레의 문턱에 다가오고 있었다. 온천으로 유명한 이 지역은 ‘뜨거운(테르모) 문(필레)’라는 뜻의 이름을 지녔는데 신화에서는 하데스로 들어가는 동굴이라고 기술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로크리스와 테살리 지역을 연결하는 해안을 따라 있는 유일한 육로다. 험한 산맥이 자연적으로 보호하는 남단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넘어가야 하는 유일한 병목루트다.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소문을 들은 그리스 연맹국들은 당황하였고, 곧 육지 전투력이 뛰어난 스파르타가 앞장서서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중요한 종교행사인 카르네이아의 페스티발(Festival of Carneia)이 행해지는 동안에는 군사 활동이 원래 금지된 터라, 전 군대가 출전하기가 무척 곤란했다. 그와 동시에 해안으로 침공해 내려오는 페르시아함대는, 해군대장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BC 524∼BC 459)가 이끄는 그리스 동맹군이 아르테미시온 해협(Straits of Artemesion)에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대한 결정을 앞둔 스파르타는 곧 델포이의 신탁(Delphic Oracle)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는 바로 이러했다. “라코니아(Laconia: 스파르타의 영토) 전역이 페르세우스(Perseus) 자손들의 손에 멸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왕의 죽음을 애도하리라.” 페르세우스의 자손이라 함은 곧 페르시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의 왕이 자신을 희생하면 스파르타 전 영토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그 당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는 죽음의 행진을 앞두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오직 대를 이을 수 있는 살아있는 아들을 둔 300명의 정예 병사만을 선발하였다고 한다.

이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을 선두로, 각기 다른 도시국가에서 지원한 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레오니다스 스파르타의 왕은 곧 크세르크세스가 끌고 온 20만 명의 페르시아 오랑캐와 맞서 싸우러 나갔다. 스파르타를 앞세운 그리스 연합군들의 기상은 높았다. 페르시아 대전을 보고하는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BC 425)가 디에네케스(Dienekes)라 불리는 한 스파르타 전사의 이야기를 전한다. 페르시아군들이 쏘아대는 화살들이 물밀듯이 많아서 태양빛을 다 가려버린다는 소리를 듣고, 디에네케스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전형적인 스파르타식 대꾸를 했다고 한다. “아~ 더 잘됐군, 그러면 그늘에서 시원하게 싸우게 되겠네.”

테르모필레 전투의 위대한 저항


▎클레오프라데스 페인터(Kleophrades Painter)의 명작인 히드리아 물병.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으로,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장인 ‘약탈’을 그린 작품이다. / 사진제공·김승중
스파르타 정예부대를 앞세운 그리스군은 그 좁은 테르모필레 고갯길을 사이에 두고 수십 배가 넘는 무시무시한 페르시아의 전투대열을 마주보고 대기 중이다. 크세르크세스가 마지막으로 레오니다스에게 전갈을 보낸다.

“투항하여 무기를 양도하라!”

이에 눈도 깜짝 않고 레오니다스가 한 유명한 응답이 이러하다.

“와서 가져가보라!”

그리고 이틀에 걸쳐 이들 그리스의 병사들은 지리적인 이 점을 이용해서 페르시아의 거대한 물결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그러나 바로 이틀의 전투가 끝났을 때에 피알테스(Ephialtes)라는 한 지역주민이 그리스군의 진열 뒤로 연결이 된 샛길을 크세르크세스에게 누설해버린다. 그리하여 3일째가 되는 날 페르시아군은 이 협로의 앞뒤를 봉쇄할 수 있게 되었다. 페르시아 군이 양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형세를 알아챈 즉시, 레오니다스는 그때까지 살아남은 그리스 동맹 도시국가들의 군병을 해산시키고, 자발적으로 남은, 단지 700명의 테스피아에(Thespiae)군, 그리고 400명의 테바이(Thebai) 군과 함께,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만을 데리고 모조리 죽을 때까지 싸운다.

이들은 창과 검으로 싸우다가 잃어버리면 단검을 들고 싸우고, 이것도 모자라면 손과 이빨로 싸웠다고 헤로도토스가 전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스파르타 군의 사전에는 후퇴라는 말이 없다는 개념이 생겨났던 것이다. 레오니다스는 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의 시신을 지키려고 많은 전사가 그의 곁에서 싸웠지만, 결국에는 분노에 불타는 크세르크세스의 특명으로 그의 머리는 잘려지고 그의 몸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한다. 레오니다스의 유골은 40년이 된 후에야 스파르타로 반환되어 재매장되었고, 그 이후로 매년 그의 장례를 기념하여 운동경기(funeral games)를 행하였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즐겨하는 운동경기를 추모의 정신으로 매년 레오니다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행한다는 것은, 레오니다스가 헤라클레스의 후예라고 부를 정도로 불멸의 영웅 신분을 확고히 획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쪽 히드리아 물병 중 프리아모스의 죽음 부분을 확대한 사진.
테르모필레 전투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페르시아의 승리였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는 그리스의 여건을 만들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테르모필레 전투가 일어난 바로 그해 말, 아르테 미시온에서 살라미스로 후퇴한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 해전(Battel of Salamis)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멋진 진법으로 봉쇄하여 격멸시켰고, 그 다음해에는 플라테아 지상전투(Battle of Platea, BC 479년 8월)에서 스파르타, 아테네, 코린트, 메가라의 연합군이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제국 군대를 섬멸시킴으로써 사실상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스파르타의 용맹스러운 전사들이 테르모필레에서 목숨을 바쳐 페르시아의 침공을 늦추는 바람에 아테네 전역의 시민이 피난을 갈 수 있었고, 살라미스로 해병들과 군함 등을 퇴각시켜 테미스토클레스 장군 밑에서 그 대열을 재편성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프리아모스의 손자인 아스티아낙스를 살인 무기로 쓰고 있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업톨레모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작은 병력으로 수많은 사상자(헤로도토스는 2만 명 이상의 페르시아군 사상자를 보고한다)를 낸 바로 이 테르모필레 전투야말로 전 그리스인의 사기를 돋우고, 자신의 땅과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희생정신을 기리는 심볼이 되었다. 테르모필레 전투야말로 자신의 땅을 지키는 시민의 애국정신의 상징이며, 빈약한 전투조건 아래서도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용기백배 전법교육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대결은, 자유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그리스의 용맹한 전사들과 주체적 의지가 없는 족쇄 찬 야만족 노예들 사이의 전투로 차츰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또한 물론 한쪽에 치우친 과장된 생각이지만, 그만큼 그리스인들은 월등한 자부심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었던 머나먼 옛날의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실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였을 것이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그리스 땅을 직접 침공한 시기는 대략 BC 492년부터 BC 479년까지라고 볼 수 있다)이야말로 역사상 처음으로, 어마어마한 대규모의 세력에 대항하여, 온 그리스 도시국가가 뭉쳐서 ‘외세’를 물리친 중요한 정신적 자각의 계기가 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범 그리스의 국민성과 그 잠재력을 다시금 평가하고 새롭게 정의하는 기회가 되었다.

신화를 오래된 역사라고 인식한 그리스인


▎헥토르의 시신을 수레에 묶어 끌고 가며 훼손을 시키는 아킬레우스. 보스톤 미술박물관 소장의 히드리아(hydria) 물병이다. / 사진제공·김승중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그리스 내의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는 티격태격 다투기 일쑤였고, 각각의 도시국가가 식민지를 정복하러 나가서 그 지역의 토착민들과 싸움을 벌인 일이 허다했다. 수시로 다투는 도시국가들이 그래도 그들의 공통된 언어, 종교 그리고 문화를 기념하기 위해 모든 전투행위를 중단해가며, 범 그리스적 성역에 정기적으로 모여 온갖 행사를 치렀음을 기억할 것이다. 아테네의 드라마 페스티벌도 그러했고, 올림픽과 같은 4대 범 그리스적 운동경기도 그러했다. 전투술과 운동력이 마치 한 동전의 양면처럼 그리스 남성이 추구하는 이데아의 양면을 이룬다는 개념은, 그만큼 전쟁 자체가 운동 경기와도 같이 비교적 가볍게, 도시국가들 사이의 ‘경쟁의 게임’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 이전에는 어떤 형식으로 이해되었든 간에,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의해서 완전히 새롭게 인식되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쟁을 수시로 겪은 우리 한반도의 국민의식이나 정부정책은, 한 번도 본토가 외세에 의해 침략당하지 않았던 9·11테러 이전의 미국과는 전혀 다르지 않았던가? 그리고 9·11을 겪고 난 미국의 국민의식의 변화는 단결, 공포, 방어, 그리고 공격적인 색깔을 띠며 다양한 모양새를 보이지 않았는가?


▎헥토르의 몸값을 지니고 아킬레우스를 찾아온 프리아모스. 헥토르의 시신은 이미 훼손되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다.
BC 6세기 후반에 걸쳐 급속하게 수퍼 파워로 자라난 페르시아 대제국을 자신들의 영토에서 물리치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로 전쟁을 해야만 했고, 그리고 대규모로 단결해야만 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갑자기 격동 속에 처해진 이들의 이야기는 그 어느 신화적 영웅 이야기 못지않은 소재를 제공했고, 또 실제로 레오니다스와 같은, 수많은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신화와 역사의 관계를 다룬 제 2회에서도 논했듯이,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신화를 오래된 역사라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페르시아 전쟁은 다름이 아닌 그 세대의 트로이 전쟁이었던 것이다. 기나긴 전쟁 역사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중요한 사건으로서 페르시아 전쟁은 그 웅대한 트로이 전쟁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리얼한 사건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을 겪고 난 직 후에(BC 480년 경) 트로이의 약탈 (Sack of Troy)을 주제로 만들어진 미술품들이 급증했다. 수많은 도기화를 비롯한 각종 고대 미술 장르가 트로이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이 아크로폴리스의 약탈을 겪은 아픔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장면들을 우리는 목격한다. 이들 중 무척 인상적인 작품 하나가 바로 클레오프라데스 페인터(Kleophrades Painter)의 히드리아 물병(Hydria)이다. 여기에 표현된 장면은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 전략이 성공적으로 실행된 밤이다. 무적의 요새도시인 트로이는 그리스가 남긴 거대한 목마를 아폴로에게 바치는 제물로 인식해서 도시 장벽 안으로 들여오고서 조급하게 승리의 축연을 벌인다. 트로이 전 도시가 곯아떨어진 새를 틈타 목마 안에 잠복하고 있던 아케아(Achaea: 그리스를 일컫는 옛말) 병사들이 나와서 순식간에 트로이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Priamos)가 아폴로의 제단 위에 털썩 주저앉은 처참한 꼴을 보라. 피범벅이 된 손자의 시신을 무릎 위에 걸친 채, 살인자의 마지막 강타를 맞이하는 순간이다. 반항을 하기는커녕 그는 완전한 포기 상태로 머리를 쥐어 잡고 죽은 손자를 애도하며 죽기만을 기다린다. 제단 위에서 피를 흘리며 희생되는 동물처럼, 이 둘은 아폴로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려치기 직전인 그 칼 모양새가 장검보다는 제사 때 사용하는 도살 검과 비슷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트로이의 전설적인 위대한 왕 프리아모스를 살해하는 이는 바로 다름이 아닌 아킬레우스(Achilleus)의 아들 네업톨레모스(Neoptolemos)였고, 프리아모스의 무릎 위에 놓인 손자는 헥토르(Hektor)의 아들인 아스티아낙스(Astyanax)이다. 사실 손자의 죽음은 시공을 달리하는 사건이지만 그 손자를 죽인 사람도 네업톨레모스였기 때문에 도기 화가는 한 장면에 처리했다. 다시 말하면 트로이 황실의 3대 모두가 아킬레우스 부자에 의해서 살해된 셈이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네업톨레모스가 프리아모스 대왕을 죽이는 순간을 아주 흥미롭게 표현한 경우도 보인다.

땅에 질질 끌려 무참하게 훼손된 헥토르의 시신


▎테베(Thebes)에서 출토된 크레이터(Krater) 술그릇(BC 730). 배를 타는 남자가 한 여자의 손목을 붙잡고 납치해가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 사진제공·김승중
이는 바로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프리아모스를 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인데, 그 손에 든 무기가 칼, 장검, 혹은 창도 아닌, 그의 손자 시신 그 자체인 것이다! 신화적 내러티브(narrative)에 차질이 생길망정, 이 그림의 장면은 네업톨레모스야말로 할아버지와 손자 두 사람을 모두 살해한 장본인임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무자비하고 처참한 광경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새삼 부각시키는 교묘한 화법을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파트로클로스(Patroklos)의 죽음으로 인해 하늘로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불멸의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진정한 영웅 헥토르를 살해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말이 이끄는 수레에다가 묶어 그리스의 막사를 몇 바퀴나 돈 것도 기억할 것이다. 이 장면도 도기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몸이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처참한 장면은 역설적으로 그리스인들의 이상인 몸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있다. 트로이 장벽 위에서 이 처참한 광경을 고통스럽게 목격하는 왕과 왕비. 헥토르의 시신은 벌써 수레에 묶여 끌려가고 있고, 거기에 올라타며 보라는 듯이 헥토르의 부모에게 고개를 돌려 야릇한 시선을 보내는 아킬레우스!

목적지는 다름이 아닌 사랑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이다. 눈에 확 띄는 흰색의 언덕 위에 파트로클로스 이름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우리 알파벳 상식으로도 거의 읽을 수 있다), 이 무덤에서 탈출하는 듯한 그의 영혼(psyche)이 날개 달린 자그마한 병사로 표현되어 있다.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메신저의 여신 아이리스(Iris)가 반대편으로 부리나케 날아간다(이 모든 것 그리고 다음에 볼 장면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모두 자세히 기록된 이야기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텐트로 돌아와서도 땅에 질질 끌려 무참하게 훼손된 헥토르의 시신에 대해 개똥만도 못한 취급을 한다. 아킬레우스가 누워있는 클리네(kline: 침대의자 같은 고대 그리스 가구이며 여기 누워서 술을 마시고 심포지온을 즐겼다) 밑에 자그마한 상이 보인다. 여기에 안주로 먹는 고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그 밑에 헥토르의 시신은 피범벅이 된 채 그대로 내팽개쳐져 있다. 사람이 먹는 고기살보다 더 천한 비계덩어리 취급을 한 것이다. 전투 도중에도,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싸움을 중단할 정도로, 죽은 이의 몸을 보호하는 것은 그리스인들의 신성한 과업이다. 이러한 상식을 개무시해버리는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은 그리스 전통문화와 풍습을 넘어서는, 반신반인인 영웅만이 저지를 수 있는 휘브리스(hybris)인 것이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일리아드>의 첫 줄)

프리아모스 대왕이 곧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귀중한 물건들을 몸값으로 들고, 분노의 화신 아킬레우스의 텐트로 몸소 찾아온다. 십년전쟁을 치른 막판에 트로이의 왕이 한방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무척이나 대담하며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일리아드>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장면은 그 서사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24장에 적힌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맞춤하며 토로한 다음과 같은 대사다.

“신 같은 아킬레우스여, 당신의 아버지를 기억하시오.

나처럼 늙고 고통의 문턱에 서 있는 그대의 아버지를 말이오…

하지만 그대의 아버지보다 내가 더 불쌍하오.

내, 기나긴 역사상 아무도 살아 숨쉬는 인간이 겪어보지 못한 것을 체험했소.

나의 입술로 나의 아들을 살해한 손에다가 입맞춤을 했기 때문이오.”

전쟁의 시작은 여자를 납치한 행위의 결과


▎에기나 섬의 아파이아 신전. 미술과 건축 스타일 및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페르시아 전쟁을 전후로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 사진제공·김승중
프리아모스의 이러한 감동적인 대사는 아킬레우스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인 펠레우스(Peleus)가 앞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 때문에 겪게 될 고통을 연상하게 하였고, 아버지를 동정하는 마음 때문에 헥토르에 대한 불타는 노여움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시신과 함께 프리아모스를 무사히 트로이로 돌려보낸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왕이 결국에는 자기의 아들 네업톨레모스 손에 죽임을 당하는 아이러니를 그때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 결국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Paris)가 쏜 화살이 단 하나의 약점인 발뒤꿈치를 꿰뚫자 전사하고 마는 그런 운명의 사나이일 뿐이지 않았는가?

끊임없는 복수의 사이클이 낳는 처참한 비극은, 불교의 윤회설과도 같이 고대 그리스의 근본적인 정신적 토대가 되는, 역사적인 인과관계와 사회적인 이념을 설명하는 기본원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의 왕 아가멤논(Agamemnon)이 오랜 전쟁 끝에 트로이를 함락시킨 후 미케네(Mycenae)로 귀향하자마자 아내인 클레이템네스트라(Clytemnestra)에게 살해당한 이야기가 우리는 3대 비극의 작가 중 하나인 에스퀼로스(Aeschylus, BC 525∼BC 456)의 유명한 3부작인 <오레스테이아(Oresteia)>를 통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살해된 표면적인 이유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Iphigenia)를 트로이 전쟁을 위해 희생물로 죽여서 바친 것에 대한 어머니의 앙갚음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살아있는 아들과 딸, 오레스테스(Orestes)와 엘렉트라(Elektra)가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그들 자신의 어머니 클레이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에기스토스(Aegisthus)를 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기나긴 인과관계의 한 일면일 뿐, 알고 보면 벌써부터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Atreus)가 에기스토스의 아버지 티에스테스(Thyestes)에게 인간으로서는 못할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들을 죽여서 저녁으로 먹였다). 그것이 재앙의 씨가 되어 대대로 가문에 저주가 생긴 것이라고 그들은 설명한다.

역사적인 페르시아 전쟁과 신화적인 트로이 전쟁의 인과관계도 그러한 패턴을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페르시아 전쟁의 모든 일면을 전하는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여자들을 납치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의 명작 <역사>(Histories) 제 1장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한다.


▎아파이아 신전 동쪽에 위치한 페디먼트 석상. 아파이아 신전은 BC 490년경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지어진 1 건축물이다.
“여기에 적힌 내용들은 모두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 ssos)의 헤로도토스가 탐구하여 찾아낸 사실들을 기록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측 모두의 가치 있는 행위와 업적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여기에 정식으로 그 역사적인 싸움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는 곧 “역사를 잘 알고 있는 페르시아의 학자들에 의하면, 페니키아 사람들이 가장 처음으로 잘못을 했다”며 그리스로 여행 온 페니키아의 상인들이 아르고스(Argos)에 이르렀을 때 물품을 사러 온 여자들을 납치해간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피랍자들 중 하필이면 아르고스의 공주인 이오(Io)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에서 에우로페(Europe) 공주를 납치해 왔다고 한다. 이제 장군멍군이 여기서 멈추었으면 그만인데, 후에 그리스인들이 전함을 타고 콜키스(Cholkis)의 아이아와파시스강으로 가 볼일을 다보고 나서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해왔다고 한다.

바보 같은 일, 남자답지 못한 복수


▎트로이 침공을 표현한 아파이아 신전 서쪽의 페디멘트 조각상들. BC 490경의 작품으로 뮌헨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 이르러 전례에 따라 트로이의 왕자,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네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으려고 강제로 납치했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출신의 한 여인 때문에 무려 1000척의 배를 출동시켜 트로이를 쳐들어간 그리스를, 그때부터 페르시아가 적으로 생각해왔다는 의견을 헤로도토스는 제시한다. 그리고 여자를 납치해가는 행위가 아무리 못마땅할지라도 그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며, 남자답지 못한 일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하는 미술품들의 더 깊은, 진실된 의미는 무엇일까? 앞에서 살펴본 ‘트로이의 약탈’ 도기화야말로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그 와중에 ‘트로이 전쟁’이라는 과거의 신화적 소재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아파이아 신전 서쪽 페디먼트 석상. 웃는 표정으로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려 하고 있다. / 사진제공·김승중
이때 건축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신전이,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지어진 비교적 드문 대작인 아파이아 신전(Temple of Aphaia, BC 500∼BC 480)이다. 아테네에서 남서쪽으로 40∼50㎞ 떨어진 에기나(Aegina)라는 섬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 신전은 동쪽과 서쪽의 페디멘트(pediment) 조각상들이 그 스타일 때문에 미술사학적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소재는 여지없이 트로이 전쟁을 다룬다. 아테나 여신을 가운데 두고, 그리스 병사들과 트로이 병사들이 싸우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흥미롭게도, 동쪽과 서쪽이 각기 다른 트로이 전쟁을 다룬다는 것이다. 우리가 호메로스를 통해 잘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가 두 번째로 침공한 것이다. 그 전 세대에 영웅 헤라클레스가 아킬레우스의 친구로 유명한 아이아스(Aias)의 아버지인 텔라몬(Telamon)과 함께 트로이를 쳐들어갔던 일이 있었다. 이것이 제1차 침공인 셈이다. 그리고 이 두 침공이 각각 동, 서쪽의 페디멘트에 따로따로 나타나 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두 쪽의 석상이 아주 다른 스타일을 보인다는 것이다. 두 명의 쓰러지는 전사를 비교해보면 언뜻 이해가 갈 것이다. 서쪽의 전사를 보면 부자연스럽고 딱딱한 포즈가 일단 눈에 들어온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르케익 스타일(Archaic Style)의 웃는 표정으로 가슴에 꽂힌 화살을 빼려 하고 있지 않는가? 요가 포즈를 취한 것인지 죽어가며 쓰러지고 있는 것인지도 구별하기 힘들다. 그에 반해 동쪽의 전사는 그럴듯한 근육의 표현과 축 처진 팔과 다리, 숙인 고개로 고통스러운 느낌을 자연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바로 아파이아 신전 건축이 페르시아 전쟁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완성이 안 된 동쪽 페디멘트를 그 당시 유행하는, 새로운 클래시컬 스타일(Classical Style)로 조각했을 확률이 높다.

몇십 년 후 클래시컬 스타일의 본보기가 된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는 이전에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시 분석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리스의 아이콘인 이 신전의 4면을 장식하는 메토프 조각상들 중 북쪽 전면이 모두 ‘트로이의 약탈’을 선보인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파르테논 신전이야말로 트로이전쟁을 비롯한 신화적인 전투를 비유적으로 사용하여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적인 의미가 뚜렷한 건물이다. 그러나 트로이를 단지 그리스가 물리친 ‘동쪽 세력’ 중 하나라고만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그들을 처참하게 짓밟은 끔찍한 장면들은 도대체 왜 다시금 반복하여 계속해서 나타냈을까? 아킬레스의 아들 네업톨레모스가 불쌍한 노인을 제단 위에서 제물을 바치듯 내리치는 휘브리스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 옆에 나타나 있는 프리아모스의 딸이며 예언능력을 지녔던(트로이의 함락을 다 예언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카산드라(Kassandra)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레써아이아스(Lesser Aias)라는 그리스군이 아폴로신전의 처녀 사제인 카산드라를 폭행 강간하는 장면이다. 누드로 노출된 카산드라가 절규하며 아테네 여신상을 붙들고 있고, 레써아이아스가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여신상에서 떼어내려고 한다. 아폴로의 여사제를 강간한 죄도 모자라서 그녀가 아테네 여신상을 붙들고 애원하고 있는 그녀를 또다시 폭행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짓밟히는 트로이 사람들의 이미지를 보고 동정심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속 시원함을 느꼈을까? 그렇지 않으면 오랜 조상의 업을 짊어졌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침략을 견디어내야 했다는 슬픔을 상기시키는 느낌이었을까? 아무래도 이 모든 요소가 공존하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들과 딸을 전쟁에서 잃은 부모의 마음은 어떤 나라의 시민이든 한마음이었을 것이고, 한 나라의 왕보다는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하는 프리아모스의 애절한 대사는 거의 3000년이 지난 오늘, 전쟁으로 뒤덮인 현 시대의 누구에게든지 감명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김승중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프린스턴대 천체물리학과에서는 우주론을, 콜롬비아대학 예술사고고학과에서는 희랍미술을 전공해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콜롬비아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버지니아대학에서 미술사학 석사코스를 밟았다. 이 시기 다양한 현지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고고학의 생생한 지식을 얻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희랍미술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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