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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취재] 232만 평화 촛불집회의 사회학 

한국 현대사의 최대 ‘터닝 포인트’가 되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2004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2008 광우병 사태 등 국가적 이슈 때마다 등장한 촛불집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대폭발…‘이번엔 바꿔야 한다’는 시민 공감대가 비폭력·평화시위 기적 이끌어내

지난 11월부터 두 달여간 전국 각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일어났다. 외신은 대규모 평화시위에 대해 “불가사의한 일”이라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과거 시위가 진보·보수 등 한쪽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들이 주도했다면 이번 촛불집회는 전 국민이 축제의 장으로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무엇이 수백 만 명의 시민으로 하여금 광장에서 ‘비폭력’을 외치게 했을까?


▎10월 29일 2만 명으로 처음 시작된 ‘최순실 국정농단’ 촛불집회의 참가인원은 40여 일 만에 100배가 늘었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비폭력’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 사진·중앙포토
#. 장면1 “뒤돌아! 뒤돌아!” 11월 26일 오후 5시30분. 서울 청운동 주민센터 방면으로 행진하던 시위대 곳곳에서 구호가 나왔다. 집회 참가자들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법원이 5시30분 이후부터 청와대 인근 행진을 제한한 만큼 법을 지키자는 차원이었다. 자신들을 막아선 의경들을 안아주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 장면2 11월 19일 서울 내자동 로터리에서 60대 남성 한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으려 하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자 저지선 앞에 앉아 있던 시민들은 “비폭력” “평화시위”를 외치며 남성을 시위대 밖으로 끌어냈다. 시위대가 “경찰들 수고한다. 경찰과 싸우지 마라”고 외친 덕분에 소동은 금방 마무리됐다.

#. 장면3 11월 12일 오후 9시45분 청와대로 가는 길목인 내자동로터리에서 일부 시민이 의경들로부터 경찰방패 두 개를 빼앗았다. 이때 “돌려줘”라는 구호가 시위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 20대 남성이 경찰 차벽 위에 올라가자 “평화시위 약속했다. 내려와”라는 구호를 너나 할 것 없이 외쳤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 구호 중에는 유난히 ‘비폭력’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일부 과격한 모습을 보이는 이가 나와도 절대 다수의 시민이 이를 만류하고 자제시킨다. 평화시위의 가장 큰 원동력은 공감대다. ‘비상식적인 정부에 맞선 상식적인 시민들의 항의’라는 도덕적 정당성을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촛불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는 취업준비생 이소연(25·여) 씨는 평화적인 촛불집회가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위임한 권력을 자기 멋대로 사용한 대통령에게 항의하려고 당당히 광장에 모인 것이다. 폭력적일 이유가 없다.”

그것은 시민의 명예혁명이었다


2만 명→20만 명→100만 명→95만 명→190만 명, 그리고 232만 명.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을 가결하기 전까지 6차례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의 수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10월 29일 처음 시작된 촛불집회의 참가인원은 40여일 만에 100배가 넘게 늘었으며 초기 광화문광장에 국한됐던 시위대의 행렬은 청와대와 직선거리로 100m 떨어진 서울 궁정동 효자치안센터 앞에까지 이르렀다.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인 12월 10일에 열린 7차 촛불집회에도 전국적으로 104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이번 촛불집회는 기존 촛불집회와 차원이 다른 강력한 힘을 선보였다. 각자의 셈법과 당리당략에 따라 탄핵소추안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던 국회의원 234명은 촛불이 보여준 민의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전 대규모 시위와 달리 시종일관 평화집회로 진행됐다. 수백만이 모여 시위를 벌여도 다음날이면 ‘연행자 수 0명’ 보도가 이어졌다. 실제 집회에 가봐도 복면을 쓰거나 머리띠를 두른 ‘직업 시위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편한 일상복 차림으로 한 손엔 촛불을 나머지 한 손엔 패러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웃으며 구호를 외치는 일반인이 대다수다. 가족 단위 또는 연인·친구와 함께 공연을 즐기듯 집회에 참가한 이도 많다. 외신들은 이와 같은 대규모 평화시위 장면에 대해 “불가사의한 일”이라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불과 1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2015년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에는 13만 명(주최 측 추산)이 참여한 가운데 당일에만 51명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연행됐다. 경찰 1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이 1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사망하는 참사까지 벌어졌다.

이번 촛불집회는 과거 시위와 무엇이 달랐을까? 무엇이 수백만 명의 사람을 광장으로 이끌어내고 무엇이 이들에게 ‘비폭력’을 외치게 만들었을까? 전문가들은 이번 평화적 촛불집회가 향후 한국 민주주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 진정한 근대적 의미의 ‘시민’이 등장했으며 이들이 주도하는 21세기형 ‘시민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역사적 순간이라는 의미다.

2008년 촛불시위와 어떻게 달랐나


▎박근혜 대통령 구속을 요구하는 사진이 등장한 집회 현장.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이 거리에 대거 나선 이례적인 집회였다. / 사진·중앙포토
신율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이번 촛불시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박근혜 대통령보다 도덕적 우위를 보여주자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 대통령은 헌법을 위반했고 실정법을 어긴 피의자 신분이다. 지금까지 나온 사실만으로도 정당성 게임에서 청와대는 이미 완패했다. 민주주의의 근원적 가치와 절차를 훼손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정부에 항거하는 방법은 합법적인 틀 안에서 이뤄지는 평화적 시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촛불집회가 등장한 건 2002년의 일이다. 그해 6월 경기도 양주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여 신효순·심미선(당시 14세)양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11월 ‘앙마’라는 아이디의 한 시민이 인터넷에 두 사람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를 열자고 제안했고 이에 호응한 1500여 명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촛불을 들었다. 이후 촛불집회는 전 국민적 관심사가 쏠리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시민들의 의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 때 타올랐던 촛불은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사태’로 불리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 반대’ 촛불집회에서 정점을 찍었다. 먹거리에 대한 근원적 불안감을 잠재우지 못한 정부의 무능력함에 질린 수많은 시민이 촛불을 들었다. 같은 해 6월 10일 열린 시위 때는 역대 최다인 70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불길이 거셌던 만큼 부작용도 컸다. 과격한 행동을 하는 이들에 대한 정부의 미숙한 대응으로 ‘평화집회’라는 촛불시위 본연의 색깔은 퇴색됐다. 시위 때마다 시내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했으며 경찰은 예외 없는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 촛불집회 1년 뒤 서울중앙지검이 펴낸 ‘미 쇠고기 수입반대 불법 폭력시위 사건 수사백서’에 따르면 106일간의 촛불시위 기간 동안 1476명이 입건됐으며 43명이 구속됐다. ‘명박산성’이라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됐던 경찰 차벽은 시위대의 밧줄에 허물어지기 일쑤였으며 불태워지기도 했다. 검찰이 추정한 불법시위로 인한 직접적 피해는 1조574억원, 간접적 피해는 2조6939억원에 달했다. 검찰은 백서에서 “최초 평화적 형태 시위가 도로점거, 쇠파이프 사용 등 폭력 시위로 변질돼 큰 피해를 야기했다”고 설명했다.

과거의 시위가 진보·보수 등 한쪽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들이 주도한 시위였다면 이번 촛불집회는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이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11월 12일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난 이모(65) 씨는 “난 새누리당 골수 지지자다. 순수하게 박 대통령을 믿고 표를 준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배신하나. 착한 국민은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뒤에서 분탕질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촛불시위에는 특히나 젊은 학생들의 참여가 많았다. 최순실(60) 씨의 딸 정유라(20)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데 대한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11월 17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고등학생들도 이틀 뒤인 19일 촛불집회에 대거 쏟아져 나왔다. 강원애니고등학교 3학년인 김현(19) 양은 “고교시절 출석도 며칠 안 한 정씨가 이화여대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시위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매주 100만 명, 200만 명의 인원이 실제 집회현장에 나온다는 건 그 몇 배의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한다는 걸 의미한다. 정말 바꿔야 한다는 절박감이 진영논리를 넘어서 온 국민을 행동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정치인, 명망가가 아닌 시민이 주도하다


▎2008년 쇠고기 반대시위를 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고 있는 경찰. / 사진·중앙포토
시위를 이끄는 특정 주도세력이 없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표면적으로 이번 촛불집회는 민주노총 등 1500여 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국민행동)이 이끌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들 조직이 동원한 사람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집회와 시위를 이끈다. 주최 측이 멍석을 깔아주긴 하지만 자유발언대 등에 서는 것은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일반인들이다. 특히 1인 가구 증가를 반영하듯 홀로 시위장을 찾는 ‘혼참러(혼자 참여하는 사람)’도 많았다. 11월 19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혼자 참석한 박수진(35) 씨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혼자 나왔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진 이후 밥맛이 떨어지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었다.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나오고 취직했는데 최씨의 딸 정유라 씨는 별다른 노력 없이 남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가졌다. 국민을 우습게 알면 큰 코 다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위 현장에서는 시민들이 시위를 주도하려는 유력 정치인들에게 반감을 나타낸 일도 있었다. 정치인들이 당리당략에 얽매여 시민들의 목소리를 국정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12월 3일 대구시 중구 한일로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선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대표는 시민들에게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촛불집회 하루 전날인 2일 ‘탄핵안 처리 불가’ 입장을 밝힌 국민의당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사회자까지 나서서 “광장의 주인은 안철수 의원이 아닌 대구 시민이다”라고 외쳤다. 같은 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측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2분 자유발언’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한 일도 있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2008년 광우병 시위 때만 해도 명망가들, 사회운동 지도자들이 마이크를 주로 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유발언할 때도 그렇고 시내 행진할 때도 일반 시민들이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의 지리멸렬한 모습에 시민들이 질렸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서울대 산하 연구기관인 사회발전연구소가 12월 2일부터 4일까지 남녀 1000명(15~69세)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새누리당·민주당·국민의당 등 세 정당의 지지율은 모두 크게 하락했다. 18대 대선이 있던 2012년, 20대 총선이 있던 지난 4월 그리고 최순실 사태 이후 등 세 시기로 나눠 지지 정당을 물었을 때 새누리당 지지율은 21.1%포인트(30.3%→22.4%→9.2%) 하락했다. 민주당(36.3%→31.3%→22.9%)과 국민의당(20대 총선 12.8%→최순실 사태 5.9%) 지지율도 동반하락했다. 반면에 “지지 정당이 없다”는 무당파층은 17.2%에서 53.4%로 증가했다.

이 설문조사를 진행한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야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수습을 주도하지 못하고 시민들이 주도한 촛불집회의 향방을 뒤따라가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분노가 일차적이지만 야당의 무능에 대한 실망도 상당하다”고 분석했다.

경찰과 법원도 달랐다


▎시민들은 경찰버스로 세워진 차벽에 꽃무늬 스티커를 붙이며 평화집회를 강조했다. 자칫 강경 기조로 치달을 수 있는 집회를 유연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들이 속속 등장했다. / 사진·중앙포토
“여러분이 나라를 걱정하는 만큼 집회 시위에 있어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십시오.”

첫 번째 촛불집회가 열린 10월 29일 광화문광장 집회 현장에서 홍완선 종로경찰서장이 방송한 발언내용이다. ‘불법·폭력 시위’임을 강조하며 일방적 해산만을 촉구하던 기존 경고방송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이튿날인 30일에는 서울경찰청이 이례적으로 “시민들께서도 경찰의 안내에 따라 주시고 이성적으로 협조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 향후에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준법 집회시위 문화가 정착되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촛불집회에 대한 경찰의 유연한 대응은 평화집회를 만든 또 다른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원칙적 대응’을 강조했던 경찰은 이번 촛불집회에서 만큼은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철성 경찰청장도 11월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촛불시위에) 최대한 유연하게 대응하려고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원도 시위대의 집회 행진을 과거와는 달리 청와대와 보다 근접한 거리까지 허용하고 있다. 경찰의 집회·행진 금지통고 처분을 취소시켜달라는 집행 정지신청에 잇따라 인용결정을 내리면서다. 그 덕분에 11월 12일 청와대와 900m 떨어진 경복궁 앞과 내자동 로터리까지의 행진이 처음으로 허용됐다. 재판을 맡은 서울행정법원의 김정숙 부장판사는 “집회·행진은 청소년·어른·노인을 불문하고 다수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국민이 스스로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집회에 참여하는 이상 집회를 조건 없이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며 판단 근거를 밝혔다.

이후 이어진 촛불집회에서도 법원은 이전까지 시위대에겐 근접할 수 없는 성역이었던 청와대와 200m 거리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100m 거리인 효자치안센터 앞까지의 행진을 차례차례 허용했다. 노명우 교수는 “시위대의 가장 큰 목적은 민의를 모르는 청와대에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청와대에 가깝게 다가갈 공간이 계속 열리다 보니 물리력을 행사하고 경찰 차벽을 강제로 뚫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왜 내 눈앞에 나타나. 왜 네가 자꾸 나타나….”

11월 19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 사이에선 이런 노랫말이 흘러나오자 폭소가 터졌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주제가 ‘나타나’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드라마 여자주인공 이름인 ‘길라임’이라는 가명으로 서울 청담동 차움의원에서 특별 서비스를 받았다는 언론보도 내용을 풍자한 것이다.

재치 있는 풍자와 패러디는 ‘순실증(국정 농단 사태로 우울감·무기력감을 느끼는 증상을 일컫는 신조어)’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며 자칫 강경 기조로 치달을 수 있는 촛불집회를 유연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11월 26일 집회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가면을 쓴 채 포승줄로 손목을 묶고 철창 모양의 종이로 얼굴을 가린 채 집회 현장을 돌아다니는 이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박 대통령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사진을 붙인 펀치 게임기도 등장했다. ‘하야하그라’ ‘박두각시 감옥 가자’ 같은 재기발랄한 손 피켓도 늘었다. 경찰 차벽에는 꽃무늬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순실증’ 시달리는 시민들의 화끈한 속풀이 풍자

투쟁을 강조하는 민중가요 대신 ‘하야송’ 등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의 등장도 시위대의 흥을 돋웠다. ‘걱정 말아요 그대(전인권)’, ‘덩크슛(이승환)’, ‘촛불하나(god)’ 같은 대중가요도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인기 래퍼 산이와 힙합 그룹 DJ DOC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를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노래를 만들어 선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재치 넘치는 풍자들은 순실증을 앓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큰 위로가 됐다. 중견 건설 기업 과장인 최모(35) 씨는 “한동안 열심히 일해봐야 뭐하냐는 무기력감에 시달렸는데 촛불집회 현장에 나가 플래카드를 보며 구호를 외치다 보면 뭔가 치유되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촛불집회로 촉발된 변화의 흐름이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이어진 데에 전문가들은 한국 민주주의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직업 정치인들이 판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유권자들이 판을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시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평화로운 가운데 시민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 사회 각 분야 중 유일하게 퇴보하고 있는 정치를 시민들이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이제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풍자하고 조롱한다. 가족이 나와서 시민교육의 살아있는 현장을 배우고 간다. 4·19도 위대했고 6월 항쟁도 위대했지만 이렇게 진영을 초월해 서로가 주권자임을 확인한 것은 초유의 경험이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터닝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정국혼란이 지나고 난 뒤 한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리라는 평가도 나온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권리를 사회계약에 의해 잠시 위임받은 존재라는 교과서에만 있던 ‘천부인권’의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시민들이 대규모로 등장했다는 측면에서다. 신율 교수는 “기존에는 4~5년에 한번 하는 투표로 정치에 간접적 영향을 미치는 방법밖에 몰랐지만 이번 촛불집회로 주권자들이 시시때때로 광장에 모여 직접 미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민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형태로 민주주의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201701호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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