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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양승태 코트’와 ‘박근혜 청와대’의 밀거래 의혹 

법원행정처 ‘BH 동향’ 비밀문건에 드러난 사법부 민낯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국정원 댓글 사건’에 박 정권 정통성 위기 닥치자 원세훈 재판 볼모로 상고법원 거래 시도 정황 드러나

“민주화 이후 가장 큰 시련을 맞닥뜨렸다.” 최근 사법부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는 한 중견 변호사의 진단이다. 그 혼자만의 예단이 아니다. 법조계는 지금 사법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법부가 청와대와 내통해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사법부에 불어닥친 바람은 역대에 보기 드문 태풍급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두고 청와대와 ‘내통’한 의혹을 뒷받침할 정황이 드러났다. 사법부는 격랑으로 빠져들고 있다.
판사 뒷조사, 정치권과의 내통 의혹이 한꺼번에 터졌다.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정황이 법원행정처 소속 법관의 컴퓨터에서 찾아낸 문건을 통해 드러났다.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은 물론이고 국민의 분노도 예사롭지 않다. 특히 전임자인 양승태(70) 전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부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을 빌미로 박근혜 정권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했다는 점이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1월 22일 법원 전산망인 코트넷에 한 편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지난해 3월 판사들의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행사에 대한 외압 의혹에서 촉발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논란에 대해 조사한 결과다.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을 뒷조사해 성향을 분류, 관리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때 한 차례 진상조사를 했지만 실체를 밝히지 못했던 의혹이다.

이번에는 김명수(60) 대법원장이 취임 후 재조사를 지시해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중앙지방법원장)가 직접 법원행정처 법관들이 사용한 업무용 컴퓨터의 저장장치를 분석했다. 추가조사위는 55쪽 분량의 문건 내용을 확인했다. 추가조사위는 지난해 11월 20일부터 3개 월간의 조사 결과를 A4용지 37쪽 분량의 조사보고서에 담았다.

보고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행사나 판사회 관련 동향을 엿보고, 사법행정위원회 추천 후보 성향을 분류해 관리한 문서가 나왔다. 법관 개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온라인 활동도 사찰했다. ‘블랙리스트’라는 명칭을 달지 않았을 뿐 사실상 판사들의 성향을 파악해 관리한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충격은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한 원세훈(67) 전 국정원장 재판에 법원행정처와 청와대의 개입을 충분히 의심할 만한 문건이 발견된 것이다. 여기에는 재판부의 동향 파악은 물론이고 재판 동향과 정보를 청와대와 주고받은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다.

원세훈 재판 2심 선고 앞두고 靑 “항소 기각 기대”


▎원 전 원장의 항소심 선고 하루 전인 2015년 2월 10일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재판 관련 동향 문건. 청와대와 재판 정보를 주고받은 내용이 들어 있다.
2015년 2월 10일에 작성된 문서. 제목은 ‘원○○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이다. 작성 시기는 원 전 원장에 대한 항소심이 선고된 지 하루 뒤였다.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이 문서에는 원 전 원장 항소심 선고 전후의 ‘BH(청와대) 동향’과 대응방안이 담겨 있었다.

원 전 원장은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1심 법원은 국정원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인정하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선거법 위반 여부는 항소심의 가장 큰 쟁점이었다. 2심 법원은 1심을 깨고 선거법도 유죄로 판단했다. 원 전 원장은 징역 3년과 자격 정지 3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문건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청와대와 항소심 선고가 나오기 전부터 재판 동향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건은 ‘원 전 원장 항소심이 BH의 최대 관심 현안이며, 판결 선고 전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선고 전 BH가 ‘항소 기각’을 기대하면서 ‘법무비서관실을 통해 법원행정처에 전망을 문의했다’고도 했다.


청와대의 부탁을 받은 법원행정처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어서 직접 확인하지는 못하고 있다’면서도 ‘우회적·간접적인 방법으로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렸다’고 했다. ‘1심과 달리 결과 예측이 어려우며, 행정처도 불안해 하고 있는 입장임을 알렸다’는 내용도 있다. 행정처의 이런 입장은 ‘민정라인을 통해 보고됐다’고 주석이 달렸다.

판결이 나온 뒤 행정처의 태도는 더없이 수세적이다. 마치 청와대의 하부 기관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법원행정처에 전달한 메시지는 거의 지시에 가깝다. 문건의 내용은 이렇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사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시’, ‘향후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

법원행정처는 이에 대해 ‘법무비서관을 통해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상세히 입장을 설명했다’고 적었다. 법원행정처는 이후 2심 판결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다. 청와대의 뜻대로 ‘신속한 처리’를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판결 기록이 접수되기 전이라도 법률상 오류가 있었는지 면밀히 검토해 상고심 재판을 신속히 처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선고가 나온 지 불과 하루 만이었다. 아직 원 전 원장 측의 상고장이 제출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미 상고심의 예상 쟁점까지 정리했다. 항소심이 선거법 위반을 유죄로 판단한 핵심 증거인 지논 파일과 시큐리티 파일의 사실관계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증거능력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법원 행정처의 고민이었다. 다시 말하면 법원행정처가 재빨리 시작한 ‘법리 검토’란 항소심 결과를 논파할 근거 찾기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법원행정처가 이렇게 서둘러 상고심 준비를 시작한 이유는 당시 진행 중이던 18대 대선 무효소송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모 씨 등 시민 6644명은 2013년 1월 4일 대법원에 대선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대선에 사용된 전자개표기가 불법 장비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국정원 댓글 사건을 국정원의 불법적인 선거개입에 의한 부정선거로 보고 이를 선거 무효의 근거(청구 원인)로 추가했다.

법원행정처는 항소심 결과가 대선 무효소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선거 무효소송은 대법원의 단심 재판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은 소송이 제기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한 번도 재판을 열지 않았다. 대법원이 정권의 눈치를 보며 고의로 재판을 끈다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대선 무효소송을 조속히 진행하라는 여론의 압박이 커지는 상황에서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을 유죄로 본 항소심 결과는 악재 중의 악재였다. 대선 무효소송의 청구인 측이 원 전 원장 항소심의 법리를 내세워 선거 무효를 주장할 경우 이를 부인할 논리가 궁색해지기 때문이다.

대선 정당성 훼손될까 전전긍긍한 사법부


▎2012년 12월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았던 국정원 여직원 김모 씨. 김씨가 머물렀던 오피스텔에서 경찰과 국정원, 선관위 관계자 입회 아래 경찰의 증거자료 수집을 지켜보고 있다.
청와대가 상고심 진행을 서두르라고 재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청와대의 요구는 ‘상고심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뒤집어달라’는 노골적인 요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상고심 형태에 대해선 청와대 내부에서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 전 수석은 전원합의체 회부를 주장한 반면, 대법원 재판 연구관 출신인 곽병훈(50) 당시 법무비서관은 “전합 회부는 오히려 판결 선고를 지연시킬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한 변호사는 “우 전 수석과 곽 전 비서관의 의견은 우선순위가 달랐을 뿐 ‘원하는 방향으로 재판을 신속히 끝내야 한다’는 본질적인 의도는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우전 수석은 양 대법원장을 비롯해 보수 색채가 짙은 전합 재판부를 통해 확실한 결론을 내려주길 바란 것이다. ‘확실한 결론’이 파기환송 말고 뭐겠나. 곽 전 비서관은 대선 무효소송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빠른 재판 진행에 방점을 뒀을 것이다.”

문건이 작성된 지 이틀 뒤인 2월 12일 원 전 원장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같은 달 24일 대법원은 이 사건을 3부에 배당했다. 주심은 민일영 당시 대법관이 맡았다. 그런데 2개월 뒤 대법원은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겼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소부(대법관 3~4명으로 구성하는 재판부)에 배당된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기는 것 자체는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다만 이번 경우는 우 전 수석이 전합 회부를 요구한 정황이 드러났다. 대법원이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유불리를 따져 전합에 넘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2014년 9월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대법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과 대화하고 있다.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전합에 회부된 지 3개월이 지난 그해 7월 16일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선거법 위반에 대해 다시 심리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일부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취지였다. 네 번째 재판(파기 환송심)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 사이 원 전 원장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2016년 가을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과 탄핵정국에 접어들면서 원 전 원장에 대한 재판도 사실상 마비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 지난해 4월 27일 대법원은 대선 무효소송의 결론을 내놨다. 소송이 제기된 지 4년 만이었다. 그동안 변론 기일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대법원은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됨으로써 원고들이 더 이상 18대 대선의 무효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없게 됐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각하는 심리를 진행하지 않고 소송을 종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4개월 뒤인 8월 30일 서울고법은 원 전 원장의 국정원법과 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을 정면으로 거스른 판결이었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박근혜 정부가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면 아마 나오기 어려웠을 판결이었다”고 평가했다.

양승태 법원이 청와대와 거래하려던 것은?


▎2014년 12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고 김영한 민정수석(왼쪽)이 업무노트를 펼치고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 전 수석의 업무노트(오른쪽)에는 ‘법원 길들이기’ 등 사법부에 대한 압박 지침이 메모 형태로 기록돼 있었다.
내·외부로부터 법원의 독립은 사법부의 금과옥조(金科玉條)와도 같다. 대부분의 법관이 독립성을 생명처럼 여긴다. 특히 재판에 대한 개입이나 간섭은 사법부의 신뢰를 근본부터 훼손할 수 있다. 다른 판사가 맡은 재판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은 법관 사회의 불문율로 통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법원행정처가 무리하게 청와대 요구를 수용한 이유에 대해 법조계에선 양 전 대법원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서였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법원행정처의 문건에는 원 전 원장 재판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정무적 대응방안’이 들어 있다.

법원행정처는 ‘계속하여 수세적 입장을 취하는 방안’과 ‘수세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국면전환을 꾀하는 방안’을 두고 저울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BH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는 국면’을 활용해 ‘대법원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쥘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취임 첫해인 2013년에 60%를 웃돌던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급전직하해 40%대에 머물렀다. 2015년 초에는 30%대까지 곤두박질치며 국정동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국정원의 선거개입 의혹을 사실로 판단한 항소심 결과는 정권의 정통성을 흔들 치명상이나 다름없었다.

법원행정처의 당시 처지도 조급하긴 마찬가지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취임 때부터 상고제도 개선을 임기 중 역점사업으로 꼽았다. 대법원에 올라오는 상고심이 한 해 4만 건에 이르러 중요 사건을 충분히 심리할 수 없고 사건이 적체돼 당사자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다. 2014년부터 법원행정처 엘리트 판사들을 통해 국회 로비를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입법을 추진했다.

2014년 12월에는 홍일표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발의해 상고법원 설치법안을 국회에 올렸다. 이때부터 대법원은 2015년 한 해를 상고법원 설치 입법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원 전 원장 판결 동향 문건에서 법원행정처가 ‘(원 전 원장 사건의) 상고심 처리를 앞두고 있는 기간 동안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다급한 청와대를 상대로 주도권을 쥐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당시 대법원이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국민적 공감대다. 결과적으로 치밀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상고법원 설치 법안은 무용지물이 됐다. 대한변호사협회와 검찰 등 법조계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청와대는 제 앞가림조차 벅찬 상황이었다. 한 현직 판사는 “시기와 방법 모두 잘못됐다. 정말 국민을 위해 상고법원이 필요했다면 정치적 뒷거래가 아니라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공감대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가 스스로 인정했듯이 박근혜 정부에서 사법부는 수세적 입장이었다. 청와대의 법원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단서는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일지, 비망록을 통해서다. 청와대는 법원을 길들이는 데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전략을 취했다. 원 전 원장에 대한 1심 판결 닷새 전인 2014년 9월 6일 김 전 수석의 업무일지에는 법원과 관련한 메모가 이렇게 기록돼 있다.

‘겁 주기’ ‘협박’… 청와대의 법원 길들이기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13년 7월 10일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법원 지나치게 강화. 공룡화. 견제 수단 생길 때마다 길을 들이도록…상고법원 또는 다 찾아서.’

1심 판결 이후인 9월 22일에는 미국·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 상고제도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검토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어서 3일 뒤에는 원 전 원장 판결과 관련된 메모가 다시 등장한다.

‘원세훈 판결 세미나→법원 겁 주기. 고급(高級) 협박.’

청와대가 사법부의 숙원사업(상고법원 설치)과 민정라인을 통해 사법부를 상대로 강온전략을 구사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청와대와 법원행정처가 긴밀히 협력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있다. 현직 판사에 대한 중징계 처분이다.

원 전 원장에 대한 1심 판결 이후 김동진 당시 성남지원 판사는 내부망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 판결”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심 판결은 ‘국정원의 정치 관여는 맞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로 요약할 수 있다. 1심 법원은 여당 대선후보를 지지하고 야당 후보를 비방한 댓글에 대해 정치개입을 금지한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유죄로,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이를 두고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와 다를 바 없는 논리적 모순이란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김 판사의 비판이 나온 뒤 김 전 수석의 업무일지에는 ‘법관-비위법관의 직무배제 방안 강구 필요.(김동진 부장)’란 메모가 들어 있다. 3개월 뒤 대법원은 김 부장판사에게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판사가 특정 사건을 공개적으로 논평하는 것을 금지한 법관윤리강령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두 가지 과제가 주어졌다. 사법부에 자정 능력이 남아 있음을 입증하는 것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제기된 뒤 1년 넘게 이어져온 내적 갈등을 봉합하는 일이다. 김 대법원장은 추가조사위의 발표가 나온 직후 실제 뒷거래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김 대법원장은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거나 재판이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오해받을 만한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부 반발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진상규명에 대한 의지는 피력했다. 추가조사위의 조사 결과를 보완하고, 조치 방향을 논의할 수 있는 기구를 구성해서 후속조치를 취하겠다고 김 대법원장은 약속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와 전국의 법학교수 등 시민사회와 법조계는 양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이었던 고영한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당시 사법행정의 최고 책임자들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잇따라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에 배당한 상태다.

진실규명 짊어진 김명수 대법원장 “너무 외롭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법원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내부 반발 속에 이전 사법부의 적폐를 청산하고 개혁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국회도 사법부를 압박하고 있다. 법조인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김해영·박주민·송기헌·이재정 의원은 2월 1일 기자회견을 열고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 추궁을 사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김 대법원장이 구성하겠다고 약속한 3차 조사기구에 외부인사 참여를 보장하고 조사 대상 컴퓨터의 전체 파일을 조사할 것과 문건 실행 여부와 작성자를 파악해 응분의 조치를 할 것 등을 요구했다. 추가조사위가 확보한 법원행정처의 컴퓨터 저장장치는 임 전 차장이 사용했던 것을 비롯해 모두 네 대 분이다. 이것에는 암호가 설정돼 조사하지 못한 문건 760개가 들어 있다.

의혹의 당사자인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퇴임 직전 법원 행정처 컴퓨터를 개봉 조사해야 한다는 법관 대표회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적이 있다. 임 전 차장은 사법 행정권 남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난해 3월 사임했다. 대법원이 3차 추가 조사를 벌이더라도 이미 퇴직한 두 사람을 불러 조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검찰이 강제수사를 시작해 두 사람을 소환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법부 내부를 검찰이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다. 추가조사위 발표 하루 뒤인 1월 23일 김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 13명 전원은 긴급 간담회를 가진 뒤 “추가조사위의 조사 결과와 관련해 대법원이 외부기관의 요구대로 특정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원심 판결을 파기함으로써 외부기관이 대법원의 특정 사건에 대한 재판에 압력을 행사하고 대법원이 이에 영향을 받았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조재연·박정화·안철상·민유숙 대법관 등도 동참했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 1월 19일 저녁 전국법관대표회의 판사들을 공관으로 불러 비공개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대법원장은 판사들에게 “너무 외롭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중견 변호사는 “내부 개혁을 위해 대법관 13명의 반발을 혼자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판결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법관들의 무오류 의식과 순혈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법부가 스스로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결국 외부에 의한 개혁에 떠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개헌특위 사법분과 자문위원회는 외부인이 참여하는 사법행정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사법평의회’를 통해 사법부의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방안을 내놨다. 사법부 분과 자문위 간사인 헌법연구관 출신의 황도수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사태의 근본적 문제는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과 사법행정의 비대화에 있다. 대법원장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독립된 사법행정기관으로서 사법평의회가 신설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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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호 (2018.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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