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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특집(3)] 한·미 정보당국 물밑 접촉 막전막후 

최고 북한통 서훈-트럼프의 복심 폼페이오 한반도 국면전환의 ‘키맨’이었다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muzes@joongang.co.kr
서훈 국정원장 북 ICBM 발사의 속내를 분석해 미 정보당국과 공유, 김영철 통전부장과 판문점 비밀 접촉도…‘매파’ 폼페이오와 찰떡궁합으로 미 신뢰 얻어

▎한미 정보 당국의 수장인 서훈 국정원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CIA 국장(현 국무장관 내정자) 라인은 지난해 11월을 전후한 시기부터 최근까지 한반도 정세의 대변혁기를 맞아 물밑 접촉을 통해 핵심 역할을 했다. 서 원장은 지난 20년 동안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한 각종 공개·비공개 회담을 두루 경험한 국내 최고의 북한통이다. 폼페이오 신임 국무장관 내정자는 매주 수차례 대면 보고를 할 정도로 트럼프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는 최측근이다.
3개월 만의 극적인 반전-.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쟁 발발설이 심심찮게 회자됐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지금은 4월 남북정상회담, 5월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있다. 남북 간 특사 교환 방문이 이뤄졌고, 머지않아 북·미 간에도 특사 방문 또는 본격적인 양자 접촉 채널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놓을 때만 해도 회의적 시각이 더 많았다. 하지만 현재는 한국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효과적인 가교 역할을 하며 트럼프와 김정은을 한 차에 탑승객으로 태운 상황이다. 이런 극적 반전이 나오기까지 장막 뒤에서는 치밀한 정보전과 탐색전이 비밀리에 펼쳐지고 있었다. 한반도 정세가 대화 국면으로 돌아서는 과정에서 중요한 한 축으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서훈의 국정원이다.

서 원장은 북한과의 중요한 접촉 순간마다 빠지지 않고 움직였다. 이는 남북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국정원 특히 서 원장이 얼마나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 역시 서 원장의 대북 관련 정보분석 능력과 상황 판단 등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간부로 일한 A씨의 얘기다.

“서 원장은 아마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관료를 통틀어 가장 북한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문 대통령은 서 원장의 북한 관련 보고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두 분의 인연도 상당히 오래됐다. 14년 전인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서 원장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으로 청와대에 파견 나갔다. 이때 서 원장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일하던 문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 수석으로 일하면서 동문회에도 나가지 않는 등 공직자로서 철저하게 원칙을 지키는 문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상당히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29일 새벽 북한은 사거리 1만 3000㎞로 추정되는 ICBM 화성-15를 발사해 긴장이 고조됐다. 하지만 국정원은 최대 고각발사, 비행궤도 등을 근거로 북한이 유화적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분석했다.
서 원장은 노 대통령 집권 시 대북 관련 주요 직책을 지속적으로 맡았다. NSC 정보관리실장 이후 국정원 대북전략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서 원장은 2006년 11월부터 노 대통령 퇴임 때까지 북한 담당 국정원 3차장으로 일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며 대북통으로 자리매김한 서 원장을 문 대통령이 가까이 두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당시 대선후보로 나선 문 대통령은 서 원장을 캠프의 ‘남북경제연합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했다. 지난해 대선 때는 훨씬 중책인 캠프 선대위 국방안보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겼다. A씨는 “문 대통령이 지난 5월 대선에서 승리한 후 정부 주요 직책 인선을 앞두고 가장 맞히기 쉬운 자리가 국정원장 자리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며 “서 원장이 국정원 수장이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서 원장이 이끄는 국정원 대북라인에 대한 문 대통령의 강력한 신뢰는 최근 전개된 일련의 남북 대화 전개 과정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됐다. 특히 남북, 북·미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지난해 11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전후로 한 국정원의 정밀 분석이 상당히 정확했다고 한다. 당시 문 대통령은 물론이고 미국 측에서도 국정원의 분석을 무게감 있게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북한의 ICBM 발사를 놓고 국내외 언론, 북한 전문가들, 한미 정치권 등은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더욱 커져 한계치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고 있었고 일각에서는 미군에 의한 ‘북폭’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서 원장을 위시한 국정원 대북라인의 시각과 분석은 조금 달랐다. 이 부분은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또 당시 북한의 ICBM 발사를 전후로 한미 정보당국의 수장인 서훈-폼페이오(현 미 국무장관 내정자이자 전 CIA 국장) 라인이 북한의 동향과 의도를 면밀히 분석해 정보를 공유하는 등 상당히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훈-폼페이오 라인 수면 위로 떠오르다


▎3월 9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앞 왼쪽)이 북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뒷줄 오른쪽),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뒷줄 왼쪽)과 함께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다. 한미 정보당국의 물밑 접촉 끝에 펜스와 김여정의 만남이 추진됐으나 막판에 불발로 끝났다. / 사진:연합뉴스
폼페이오는 트럼프 대통령의 몇 안 되는 이너서클 중에서도 최측근 인사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매주 수차례 대면 보고를 하며 북한 문제를 논의해 왔다고 한다. 서훈-폼페이오 라인을 통해 공유된 국정원의 이런 분석은 트럼프에게까지 보고됐을 가능성이 크다. 서훈-폼페이오 라인의 물밑 작업은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 중 조금씩 그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방한한 펜스 미 부통령과 김여정 등 북한 특사단의 만남은 비록 성사 단계까지 갔다가 막판에 틀어지긴 했지만 이 역시 서훈-폼페이오 라인이 이전부터 극비리에 준비해온 이벤트였다. 이처럼 서훈-폼페이오 라인은 현재의 남북 간, 북·미 간 대화 국면으로 정세가 확 바뀌는 과정에서 상당히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DJ 정부 시절 대북특사 역할을 하는 등 정치권의 북한통인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폼페이오 내정자가 CIA 국장일 때 서 원장이 미국도 가고, 실무자들이 (한국에) 많이 오고 가면서 완전히 드림팀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박 의원은 또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국장을 발탁한 것은 현재 CIA 국장으로 발탁된 지나 해스펠 부국장, 폼페이오의 심복으로 알려진 앤드루 김 CIA 코리아임무센터장 등 소위 ‘CIA팀’이 서 원장 등과 잘 조율해 현재의 국면으로 북한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며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하면 이는 결국 ‘서훈-폼페이오 드림팀’이 이룬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서훈-폼페이오 라인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지난해 11월 북한의 화성-15호 발사를 전후해서다.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지난해 11월 29일 오전 3시17분(평양시간 2시 47분) 평안남도 평성 일대 개활지에서 탄도미사일 한 발이 엄청난 화염을 내뿜으며 발사대를 떠났다. 화성-15호였다. 한·미·일 군 정보당국은 발사 직후부터 미사일 궤적을 추적했다. 미사일 발사 직후부터 청와대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발사 후 2분 만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1차 보고를 했다. 이어 5분 뒤인 3시24분 2차 보고가 이뤄졌다. 비슷한 시각 동해상에선 우리 군의 육해공 미사일 합동 정밀타격훈련이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오전 6시 NSC 전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동해상을 향해 53분간 날아간 미사일은 정점 고도 4475㎞, 비행거리 950㎞에 이른 뒤 공해상에 떨어졌다.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정보당국은 고도와 비행거리를 근거로 최대 사거리를 추정했다. 한미 국방당국은 (고각이 아닌) 정상 각도 발사 시 1만3000㎞ 이상 비행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비행 특성과 외형 등을 고려할 때 신형 ICBM급으로 판단된다”며 “사거리 면에서 워싱턴까지 도달 가능함을 의미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이날 오후 12시30분 북한은 조선중앙 TV를 통한 중대 발표에서 “대륙간 로켓 15호가 수도 교외에서 발사돼 예정된 53분간을 비행했고 동해상에 설정된 목표 지역에 정확히 탄착했다”고 밝힌 뒤 “화성-14호보다 전술적·기술적 제원과 특성이 우월한 무기체계이며 우리가 목표한 로켓 무기 개발의 완결 단계의 대륙간 탄도 로켓”이라고 했다.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초대형 중량급 탄약 장착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한미 당국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ICBM의 완성’이자 ‘국가 핵무력 완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ICBM 발사 후 北 속내를 꿰뚫다


▎3월 6일 대북특사단과의 만찬이 끝난 후 김정은 위원장이 특사단을 배웅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김정은 위원장, 김 위원장의 부인 이설주.
74일간의 침묵을 깨고 발사한 화성-15호의 위력이 확인되자 서방 언론들은 한반도의 전쟁 발발 가능성이 한층 더 커졌다고 긴급 타전했다. 두 달 전인 9월 북한이 6차 핵실험에서 핵탄두 경량화에 성공했다고 주장한 것을 고려하면 ICBM 시험발사 성공은 ‘레드라인(red line·금지선)’을 넘은 것이라는 분석이 뒤따랐다. 일부에선 북한 핵과 미사일 관련 시설에 대한 미국의 기습 타격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의 반응에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됐다. 위협적인 언사를 동원해 북한을 강력하게 비난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트럼프의 반응은 의외로 신중했다. 참모들 역시 이전보다 차분하게 대응하는 듯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 모인 기자들에게 “우리가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에게 막 보고를 마친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솔직히 북한이 이전에 쏜 미사일들보다 더 ‘높게’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발사가 “기본적으로 세계 모든 곳을 위협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계속해서 만들려는 연구개발 노력의 일환”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다음 날 트럼프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전화통화에서 대북 원유공급 중단 요구를 꺼내기는 했지만 북한에 대한 공격이나 타격 등 전쟁 가능성을 암시하는 직접적인 발언은 내놓지 않았다. 11월 초 트럼프와 매티스 장관 등이 한국 방문 전에 사용했던 거의 종말론에 가까운 용어를 내놓은 것에 비하면 다소 의외였다.

이와 관련해 [시크릿파일 반역의 국정원] 저자이자 국정원 전문기자 출신인 김당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 시험발사에 북한이 성공해 어느 때보다 위중한 시기였는데 당시 국정원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북한의 의도를 분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금 다른 각도’란 북한의 진짜 속내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국정원 안팎의 소식통들의 전언에 따르면 당시 서 원장과 대북 정보라인에서 가장 크게 신경 쓴 부분은 얼마 남지 않은 평창 겨울올림픽을 북한이 참여하는 평화올림픽으로 치를 수 있을지 여부였다고 한다. 그런데 국정원이 대북 정보망을 총동원해 파악한 결과 11월 20일부터 12월 초 사이에 북한이 ICBM을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예측하고 있었고, 이 부분이 올림픽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봤다고 한다. 실제로 예상한 시기인 11월 29일 북한이 ICBM을 발사하자 국정원은 분석에 들어갔다. ‘북한이 유화적 제스처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 서 원장과 국정원 정보라인의 분석 결과였다고 한다. 최대한 고각 발사 방식을 통해 사거리가 950㎞ 정도밖에 안 되게 한 것, 이전과 달리 미사일의 비행궤도가 일본 열도 위를 지나가지 않게 조정한 대목에 주목했다고 한다. 만약 괌 주변 또는 하와이 방향으로 미사일을 쏘겠다고 호언했던 대로 시험발사가 이뤄졌다면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는 그날로 물 건너가게 되는 상황이었고, 한반도 정세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개됐을 텐데 북한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국정원은 놓치지 않았다.”

공식 라인은 통일부, 막후 접촉은 국정원이

당시 조선중앙 TV의 중대발표 내용 중 “시험발사가 최대 고각 발사체제로 진행됐고, 주변 국가들의 안전에 그 어떤 부정적 영향도 주지 않았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 것도 그냥 지나칠 대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 전 국장은 “국내외 언론과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황 악화를 우려하는 분석을 내놓은 반면 국정원의 분석은 이렇듯 좀 달랐다”며 “오히려 서훈 원장과 국정원 정보라인은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또 ICBM 발사에 대한 국정원의 이런 평가와 분석은 폼페이오 국장과도 충분히 공유됐을 것이라는 것이 김 전 국장의 설명이다.

당시 국정원은 문 대통령은 물론이고 청와대와 이낙연 총리 등 정부의 핵심 라인에도 즉각 이러한 분석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보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날 오전 10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 참석한 이 총리는 북한의 ICBM 발사 의도에 대한 질문을 받고 “북한이 능력을 과시하면서도 국제사회를 많이 자극하지 않겠다는 판단을 한 게 아닌가 싶다”며 “나름의 교묘한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답했다. 당시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의 시각도 국정원 분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 특보는 월간중앙과의 통화에서 “북한이 화성-15호 발사 이후 ‘우리는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자연히 북의 지도부가 관심을 써야 할 부분은 인민경제의 향상일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와의 협력을 구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서훈-폼페이오를 중심으로 한 양국의 대북 정보라인은 이후 12월 한 달 동안 사소한 부분도 긴밀하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북한의 동태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분석했다고 한다. 특히 1월 1일 발표될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내용에 따라 향후 한반도 정세가 크게 요동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잠시 최종 판단을 미루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서훈 원장은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전향적인 입장을 표할 가능성이 상당히 클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북남 관계 개선은 당국만이 아니라 누구나 바라는 초미의 관심사이며 온 민족이 힘을 합쳐 풀어나가야 할 중대사”라고 했다. 또 “남조선의 집권여당은 물론 각계각층 단체들과 개별적 인사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대화와 접촉 내왕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라며 “남조선 당국은 지난 보수 정권 시기와 다름없이 부당한 구실과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내세워 각 계층 인민들의 접촉과 내왕을 가로막고 남북통일 기운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는 데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년사 후반부에서는 평창 겨울올림픽을 거론하며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며 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여당 국회 정보위 한 관계자는 “김정은의 신년사가 발표되자 국정원은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확신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남북대화 국면이 열릴 것으로 판단해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서 원장은 북한과의 핫라인을 구축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신년사 바로 다음 날부터 상황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북한에 고위급회담 제의(2일)→판문점 연락 채널 복원(3일)→한미 연합훈련 연기 발표(4일)→북한의 고위급회담 수락(5일)→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 개최(9일)’라는 일련의 과정과 이후 남북 관계의 진전이 공식적으로는 우리의 통일부와 북측의 조평통 사이의 긴밀한 접촉의 결과로 보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남북 간 공식 라인과는 별도로 서훈의 국정원과 김영철의 통전부 사이에 핫라인이 구축됐고 이를 통한 남북 간 비공개 접촉이 수차례 있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의 상황 진전이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한다. 이는 김영철-서훈-폼페이오 라인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 원장과 김 부장이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는 얘기가 조금씩 흘러나왔다”며 “이 과정에서 우리 당국은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 때 김여정이 방한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나중에 청와대 관계자가 “김여정이 오는 걸 사전에 알았다”고 언급한 것은 바로 서훈-김영철 라인을 통해 입수된 사전 정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남북 간 비공개 핫라인을 통해 북측의 입장이 어느 정도 확인되자 서 원장은 1월 말께 극비리에 미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만남의 대상은 역시 폼페이오 국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서 원장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 이미 폼페이오에게 남북 비밀접촉 과정에서 나온 북한의 입장을 상세히 알려주지 않았겠느냐”며 “서 원장이 김영철과 폼페이오를 연결하는 핵심 키맨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접견자’ 서훈, 북미 가교 역할하며 힘 더 실릴 듯


▎3월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한 대북특사단이 평양에 도착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4시간 동안 접견했다. 김 위원장이 특사단 일원인 서훈 국정원장(왼쪽)과 걸어가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김여정을 포함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방한 예정 사실 역시 폼페이오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보고됐을 것으로 여겨진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평창겨울올림픽 기간 중 펜스 부통령과 김여정과의 만남이 결과적으로 불발로 끝이 났지만 이 프로젝트는 서 원장과 폼페이오가 공동으로 추진한 임무였다”고 입을 모은다. 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조건으로 언급한 ‘사전 여건 조성’ 임무를 서 원장이 김영철과 폼페이오의 가교 역할을 통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얘기다. ‘사전 여건 조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미국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서 원장은 폼페이오와 수시로 북한의 태도 변화와 김정은 위원장의 속내 등을 분석해 공유하면서 이 정보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까지 즉각 보고되도록 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최근 해임된 틸러슨의 뒤를 이어 폼페이오가 미 국무장관에 내정된 것도 지난 몇 달간 대북 관계의 진전 과정에서 그가 한 중요한 역할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서훈-폼페이오 라인의 긴밀한 팀플레이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인 폼페이오가 향후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폼페이오가 매파로 분류되긴 하지만 틸러슨에 비해 트럼프 대통령과 손발이 잘 맞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유연성을 보여왔다”며 “대북 정보력·추진력 차원에서 더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현재 정세는 북한의 통일전선부(김영철)와 우리 국정원(서훈), 미국 CIA(폼페이오) 삼각대화의 결과물”이라며 “이를 만들어낸 폼페이오에게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시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기회를 통해 성과를 내려는 의지가 강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전 편집국장은 “북미 대화의 결과에 따라 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트럼프 역시 이를 의식하고 있을 것”이라며 “트럼프는 이런 자신의 속내를 잘 읽고 있을 폼페이오를 중용함으로써 역사에 남을 만한 성과를 기대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동안 폼페이오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해온 서 원장의 행보와 역할에도 더욱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4월 말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 준비 과정에서도 서 원장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것이 분명하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보수 진영에서는 “간첩을 잡아야 하는 국정원이 남북대화를 주관하는 것은 문제”라거나 “대북 비밀 사업의 수장인 서 원장이 김정은을 만나 머리 숙이는 모습은 국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며 비판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여권은 생각이 전혀 다르다. 협상 과정에서 누구보다 북한의 속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돌발 변수나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서 원장만한 관료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북측 입장에서 볼 때 서 원장이 갖는 무게감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북 전문가들의 얘기다. 지난 정부에서 오랫동안 대북 정보라인을 담당했던 전직 국정원 간부의 얘기다.

“나는 보수적 성향의 사람” 답답해하는 서훈


▎3월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대미특사단장인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면담 결과를 발표했다. 왼쪽은 서훈 국정원장, 오른쪽은 조윤대 주미대사. / 사진:연합뉴스
“북한에서는 최고지도자와 만난 사람들을 ‘접견자’라고 부른다. 서 원장은 과거 김정일 위원장과 여러 차례 만난 ‘접견자’ 신분이다. 북측에서는 ‘접견자’ 신분을 가진 인사를 최고로 예우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인다. 과거 김정일 위원장은 서 원장의 꼼꼼함과 성실한 자세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우리 공화국에는 왜 서훈 같은 사람이 없는가’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김정일이 실제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북측이 서 원장을 핵심적이며 가장 확실한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 원장이 국내 최고의 북한통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는 1997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금호사무소 대표로 임명돼 북한 신포지구에서 2년간 머물렀다. 한국 정부 관계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에 상주한 경험이 있다. 당시 한국 대표로 미국과 일본 대표와 함께 북측 인사들과 다양한 협상을 벌였다. 이후 서 원장은 2000년 당시 대북특사였던 박지원 장관을 수행해 베이징에서 북측과 비밀 협상을 했다. 임동원 국정원장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때도 동행했다. 2000년 6·15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실무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2007년 국정원 3차장 시절 10·4 남북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성사시켰고 이후 정상회담문 작성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밖에도 총리급 회담 등 남북 간 공식·비공식 대화를 여러 번 경험하면서 북한의 협상 방식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다. 북측 인사를 설득하는 기술도 수준급이라는 평가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은 “서 원장은 김정일 위원장과 여섯 번이나 만난 경험이 있고 문 대통령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있어 앞으로도 핵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지원 의원은 “서 원장은 대통령·북한·미국이라는 삼박자를 다 갖춘 인물”이라고 평했다. 박 의원은 이어 “미국 정부가 서 원장의 대북 정보 분석 능력 등에 대해 신뢰가 높고 지금까지 CIA 등 미 정부기관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보수 진영에서는 “서 원장이 진보 성향을 지니고 있고 친 북적 사고를 한다”며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북측 인사들의 요구에 경도될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 서 원장은 상당히 답답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당 전 편집국장의 얘기다.

“한마디로 서 원장은 모범생 스타일이다. 정치적 계산 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또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체계적 훈련과 화법 구사 등에 잘 훈련된 사람이다. 국정원 안팎에서 나오는 얘기를 모아보면 서 원장은 자신을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40년 가까이 국정원 맨으로 살아왔고 지금은 안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보수적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서 원장의 하소연이라고 한다. 일부에서 나오는 그런 비판에 대해 ‘일고의 가치가 없다’며 자르지만 가끔 자신에 대한 잘못된 얘기들이 나올 때마다 답답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從北’이 아닌 ‘知北’이라는 서 원장이 한반도 국면 대전환을 이루는 길목에서 새롭게 미 국무장관으로 내정된 폼페이오와 함께 어떤 역할과 행보를 보일지 앞으로가 더 주목된다.

-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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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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