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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특집] 하나님 아래 인류는 한 가족 

문선명 총재 탄신 100주년과 천지인 참부모 성혼 60주년의 의미 

1951년 부산에서 통일교 창시… 반세기 만에 비약적 발전
2012년 문 총재 성화 후 한학자 총재는 제2의 전성기 열어


▎한학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가 세계성직자협의회(WCLC)창립식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 사진: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2019년 8월 17일 경기도 가평 청심평화월드센터에는 굿럭 조너선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 하이메 파스 사모라 전 볼리비아 대통령, 각국의 전·현직 국회의장·장관 12명, 국회의원 12명 등 세계 여러 나라 정치·경제·종교지도자 및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회원 3만여 명이 한목소리로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다.

각자 손에 든 전자 초에 불을 밝히자 관중석은 이내 노란 불빛으로 일렁였다. 이날 문선명 총재의 성화(聖和) 7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고, 문 총재가 없는 7년 동안의 활동을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특히 문선명 총재의 탄신 100주년, 한학자 총재 탄신 77주년과 문선명·한학자 총재 성혼 6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을 앞두고 ‘비전 2020 승리’를 다짐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가정연합은 설명했다.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가다


▎1991년 평화회담을 가진 뒤 카메라 앞에 선 문선명·한학자 총재와 김일성 주석. / 사진: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지난해 6월 세계평화정상연합 아프리카대륙 의장에 임명된 조너선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추모사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2019 아프리카 서밋과 올란도 경기장의 축복결혼 축제에 참여했는데, 내가 받았던 축복을 10만 명이 동시에 받는 장관(壯觀)에 감격했다”며 “문 총재의 평화 유산이 한학자 총재를 통해 완성되고 있음을 축하하는 이 복된 날에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류가 문선명 총재에게 주목하는 것은 문 총재가 한평생 세계평화와 인류 구원의 신념 아래에 인간이 가야 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문 총재는 16세 때 하늘의 소명을 받은 이후 많은 준비 과정을 거쳐 26세인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공식 노정을 출발했다.

방황하는 인류에 비전 제시


▎2019년 12월 28일 미국 뉴저지주에서 열린 세계성직자협의회(WCLC) 창립식. / 사진: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1945년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때가 26세였습니다. 그때 해방을 맞이해서 우리 민족 전체가 축하하면서 기뻐했습니다. 만세를 부르면서 우리 천지가 됐다고 세계를 흔들어 뒤집어엎을 만한 기쁨에 충천해서 야단이었습니다. 나도 역시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해방된 그날 이후 이 나라가 해방됐다고 만세를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기뻐도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민족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사명이 있음과 동시에 나도 새로운 역사적 출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복귀 세계를 향해서 제일보를 내딛지 않으면 안 되게 됐습니다. 그래서 먼저 남한 땅에 섰으니만큼 남한 땅을 중심으로 삼고, 더욱이 서울을 위주로 해서 복귀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전심을 다 해 출발했던 것입니다.” _〈문선명 선생 말씀선집〉 157-071, 1967. 2. 14, 이하 표기도 말씀선집의 출처를 나타냄)

문 총재는 이때부터 남들이 가보지 않는 길을 가게 된다. 문 총재는 광복과 더불어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펼치고자 한 계획이 어렵게 되자 ‘평양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도착했다.

문 총재 주변에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모여들게 되자 목사·장로들의 반대와 고발이 잇달았다. 문 총재는 그해 8월 11일에 평양 대동보안서에 수감되는 등 고통이 이어졌다. 그 후 북한 정권이 점점 종교를 말살하고 독재정치를 강화하면서 문 총재는 1948년 5월 20일부터 2년 4개월 25일간 흥남 감옥에서 강제노동형을 받게 됐지만, 문 총재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어쩌면 악랄한 북한 정권 아래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피난처’(430-061, 2003. 12. 30)로 생각하면서 고난을 견뎌냈다.

문 총재는 이 기간 공산 정권의 잔학성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고, 감옥 생활을 통해 제자들을 찾아 세우고 예수가 겪었던 한스러운 노정을 탕감하면서 새로운 출발의 기대를 닦을 수 있었다. 결국 문 총재는 6·25 동란 당시 유엔군의 상륙 진격으로 흥남감옥에서 구사일생으로 자유의 몸이 되면서 1950년 12월 4일에 평양을 떠나 도보로 남하의 길에 올랐다.

1951년 1월 27일 부산 초량역에 도착한 이후 새 신자들을 모아 교회 기반을 다진 뒤 1954년 5월 1일 서울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 총재의 북한 노정은 하나님의 한을 몸소 체휼(體恤)한 그야말로 피·땀·눈물의 천로역정이었다.

문 총재가 이처럼 남들이 아니라는 길을 걸어가고, 고난의 길을 자처하게 된 것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이끌어 가야 할 지도자로서 세계적 현안에 미리 부닥쳐보고 자질을 미리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어느 누가 가지 않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문 총재는 인류 구원과 세계평화의 모토를 걸고 한평생 전력투구했다. 그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즉 종교적인 것과 환경적 측면에서 진행됐다. 내적인 것은 창조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함으로써 개인 완성, 가정 완성을 통해 본래 하나님이 구상했던 평화세계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축복결혼을 통한 참가정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리고 외적 환경을 복귀하는 방안으로 정치·경제·문화·언론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평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을 창건하겠다는 목표로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1960년 3월 16일(음력)에 성혼한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해 온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축복결혼식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회복하기 위한 대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 아래 가정을 꾸리게 되는 자리까지 회복하자 하는 것이 문 총재가 지향하는 축복결혼식이다.

문 총재는 축복결혼이 타락의 혈통을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창조 본연의 혈연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야말로 뿌리를 바꾸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문 총재는 국가·인종·종교 등을 초월하는 교차축복결혼식에 주목했다.

“지금까지도 인류가 죄악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작부터 거짓 사탄의 혈통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섭리적인 뜻과 목적을 놓고 하늘이 점지해 준 선천적이고 원리적인 혈연이 아니고, 인간의 실수로 야기된 후천적이고 비원리적인 관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타락해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의 신세가 되긴 했지만, 하늘이 주신 부모와 자식 간의 근본관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타락으로 무지한 식물인간이 돼 부모가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사는 청맹과니의 삶이 돼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의 혈통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혈통 전환을 거쳐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본연의 혈연으로 환원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혈통 전환을 해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찾아 세우는 최상의 방법은 교차축복결혼(交叉祝福結婚)입니다. 인종·문화·국경·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즉 모든 원수 관계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차원의 하늘적 혈통을 창조하는 대역사입니다.”(528-012, 2006. 6. 1)

무소유와 참사랑의 삶


▎1960년 4월 11일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성혼식 모습. / 사진: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특히 축복결혼은 국가와 인종, 종교 등 모든 인위적 벽을 뛰어넘어 평화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문 총재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차축복결혼을 제시했다. 즉 원수의 집안, 원수의 나라끼리 사돈 관계를 맺을 경우 서로 가족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 총재에게는 세 가지 철칙이 있다. 그것은 철저한 공금 관리와 인권 유린 금지, 순수한 혈통 유지다. 이는 하늘나라 헌법의 첫째 덕목이라면서 식구들에게 늘 강조해 왔다. 그러다 보니 문 총재 역시 무소유의 삶을 살아왔다. 문 총재는 돈에는 언제나 초연했다. 그래서 개인 이름의 통장이나 재산이 없었다.

문 총재는 2001년 1월 13일 경기도 가평군 천주청평수련원에서 거행된 하나님왕권즉위식에서 순결혈통 보존과 인권유린 금지, 공금약취 금지 등 3대 철칙을 선포했다. 이는 하늘나라, 즉 천일국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제시했다. 문 총재는 3대 철칙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제부터 지켜야 할 철칙은 첫째로 죽을 일이 있더라도 핏줄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사 조치를 잘못 해서 인권을 유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평등합니다. 인권을 차별하거나 유린해서는 안 됩니다. 책임자들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인사 조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인권을 정상적으로 지도하는 데는 참사랑, 위하는 사랑을 갖고 사는 사람이 주류입니다. 천지창조가 거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주류사상을 흩어 버리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죄 중에 둘째 번 죄입니다. 셋째로 공금을 도둑질하지 말라, 공금을 마음대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입니다. 이것 때문에 감옥 가는 사람이 70% 이상 됩니다. 감옥에 들어가 보면 그렇습니다. 인권을 유린하고 핏줄을 더럽히고 남녀 문제에 걸려 있습니다. 그다음엔 돈 문제, 권력문제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이 원수였다는 것입니다.”(347-274, 2001. 7. 5)

문 총재가 수많은 기업을 설립하는 등 경제활동을 펼친 것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환경 창조에 목적이 있었다. 특히 세계 인류가 골고루 물질적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국가 이익을 떠나 자원과 기술의 평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특정 국가가 과학기술과 경제력을 독점해서 다른 나라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경제적 평준화를 주창했다. 이러한 경제관에 기초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공생·공영·공의의 인류 공동체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문 총재는 초창기에 통일산업을 세워 방위산업과 자동차 산업 등 첨단기술을 축적해 왔다. 그리고 독일 공장을 인수해 선진 기술을 후진국에 이전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문 총재는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을 이뤄 누구나 차별 없이 살아가게 하는 데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을 세우고 선진국과 후진국이 경제와 기술 평준화를 통해 모든 나라가 잘살 수 있는 환경창조를 위해 진력했다. 특히 부자는 자신이 취득한 부를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 주고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도와 부의 평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창시자의 생전보다 사후에 더 빛을 발하고 가치를 인정받는다. 예수·석가·공자는 종교를 창설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후에 제자들과 후계자에 의해 종교 형태를 갖게 되었고, 세계로 뻗어 나갔다.

흔히 통일교회로 불리는 한국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1954년 서울에서 창설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모체다. 창설자는 널리 알려진 문선명 총재다. 이단이라 비난받는 하나의 교회에서 출발했으나 세계로 뻗어 나가 가장 짧은 시간에 세계종교로 우뚝 서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여성 지도자

문 총재는 2012년 9월, 93세를 일기로 성화했다. 이후 가정연합은 문 총재의 평생 동반자인 한학자 총재가 이끌어가고 있다. 한 총재는 “초창기 심정으로 돌아가 신령과 진리로 교회를 부흥시키겠다”고 선포했으며, 그날 이후 세계가 인정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과연 여성으로서 전 세계적 조직과 신도를 갖춘 가정연합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 것인지 우려가 적지 않았으나 오히려 문 총재 생전보다 더 많은 일을 역동적으로 해내고 있다.

한학자 총재는 1943년 2월 10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갓난아기(한 총재의 어머니)를 업고 3·1운동에 참여한 나라 사랑의 여인이었다. 한 총재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올곧은 심정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성혼 초기는 고난과 역경의 나날이었다.

아버지 한승운 선생은 기독교인으로 북한에서 교사를 하다가 남하해 평생 교단에서 봉직했으며, 외할머니와 어머니 역시 충실한 기독교 신도였다. 한 총재는 4세 때 아버지와 헤어졌다 일제 치하 말기였기에 모두 가난한 삶을 살았으며, 일본인의 핍박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한 총재는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굳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딸이 되겠다는 자긍심을 갖고 자라났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재림 예수를 맞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져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어머니는 한 총재가 6세이던 1948년에 목숨을 담보로 한 탈출 끝에 38선을 넘었고 용산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외삼촌을 만나 서울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대구·제주도·전라도를 전전하며 겨우겨우 삶을 이어갔다. 고생 끝에 어머니는 춘천에 터를 잡았고, 1955년 12월 서울 청파동 교회에 나가게 됐다.

1956년 봄, 춘천 봉의초등학교를 졸업한 만 13세의 한 총재는 어머니를 따라 청파동 교회에서 처음으로 문 총재를 봤다. 성정여중을 거쳐 1959년 봄에 성요셉간호학교(지금의 가톨릭대 간호대학)에 입학해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한 총재는 하늘의 계시에 따라 1960년 4월 11일 아침 10시에 성혼식을 올림으로써 문선명 총재의 평생의 동반자 겸 수많은 일을 해낸 공동창업자가 됐다.

문 총재 성화 이후 한 총재 중심의 통일교회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가정연합의 65년 역사는 한강의 기적보다 더 많은 것을 이뤘다. 하나의 교회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 밑바탕에는 성신실체인 독생녀 한 총재의 굳건한 신앙과 열성, 모성의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다. 1970년대에 세계로 눈을 돌려 일본·미국을 시작으로 개척 전도를 전개해 현대 종교 역사상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했다.

[박스기사] 세계 성직자 하나로 묶어 하늘의 꿈 이룬다 - 신(神)통일세계 초종교·초교파 세계성직자 3만 희망전진대회 개최


▎WCLC 창립 기념 포럼에서 트럼프 정부의 복음주의자문위원장인 폴라 화이트 목사가 연설하고 있다. / 사진: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가정을 바로 세우고 하나님 중심의 신통일세계와 세계평화를 위해 종교·교파·국가를 넘어 함께할 기구로 세계성직자협의회(World Clergy Leadership Conference 이하 WCLC) 창립을 위한 ‘신(神)통일세계를 위한 기독교 희망전진대회’가 2019년 12월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의 프루덴셜 센터에서 기독교 성직자, 신도들을 포함 3만여명의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WCLC 창설자인 한학자 총재는 기조연설을 통해 “세계에서 모인 성직자는 이 시대의 하늘이 준비한 의인이기 때문에 자기를 돌보기보다는 위하여 사는 참사랑으로 나라와 세계를 품는 사명을 다 해야 한다”며 “가정해체, 청소년 문제, 마약 문제로 몰락한 미국을 위해 참부모는 소방수로, 의사로 50개 주를 순회강연하면서 40년이란 인생의 황금기를 미국에 바쳤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한학자 총재를 비롯해 트럼프 정부의 복음주의자문위원장인 폴라 화이트 목사, 루온에이브럼 라우스 미국성직자협의회(ACLC) 공동의장, 노엘 존스 시티 오브레퓨지 교회 주교, 조지 스탈링스 대주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무엘 하데베 하나님계시교회 선지자, 스위스의 프니엘라지쿠마 목사, 에콰도르의 곤잘로 세리 대주교, 김기훈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부회장 겸 미국 총회장(ACLC 공동의장), 이기성 가정연합 한국회장(대한민국성직자협의회, KCLC 공동의장), 김스데반 목사(KCLC 공동의장), 이기철 목사, 박영규 목사 등 한국·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필리핀 등 전 세계 70여개 국 1800명의 성직자들이 참석했다.

노엘 존스 주교는 기조연설자 소개에서 “피부색·교단·출생지가 달라도 평화는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한학자 총재의 비전은 매우 놀랍다”며 “겸손과 사랑 없이는 하나가 될 수 없으니 피부색이 달라도 모두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서 성직자부터 하나가 되자”고 말했다.

한편 2019년 12월 27일에는 WCLC 창립기념 포럼이 70개 국에서 모인 성직자 1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뉴욕 맨해튼 센터에서 개최됐다. 포럼은 7명의 성직자대표 기도, 김기훈 ACLC 공동의장 환영사, 폴라 화이트 목사의 연설, 한국·유럽·아프리카·아시아·중남미 성직자 대표의 연설 등이 진행됐다.

WCLC의 모체가 된 초종교·초교파적 성직자 연합인 ACLC는 2000년 5월 미국성직자 120명을 중심으로 창립됐다. ACLC는 수십 년간 참가정 운동을 이끌어온 가정연합과 함께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을 강화하고 있다.

-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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