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백스테이지 인터뷰] '웃는 남자'로 뮤지컬 돌아온 슈퍼주니어 규현 

“비극 속에서도 웃음 터질 수 있게 할 것” 

주인공 그윈플렌 역 이석훈·박강현·수호와 쿼드러플 캐스팅
“한 번만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나만의 캐릭터 보여주고 싶어요”


▎슈퍼주니어의 규현은 뮤지컬 [웃는 남자]에서 “인생작을 만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2018년,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꼽은 소설 [웃는 남자](1869)가 한국의 뮤지컬 무대에서 다시 태어났다. 5년의 제작기간과 175억원을 투자한 대작으로, 저 유명한 [지킬앤하이드]의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과 로버트 요한슨 연출이 섬세하게 빚어낸 무대는 초연 당시 관객 20만 명을 동원할 만큼 큰 사랑을 받았고, 제7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 6관왕 등 주요 뮤지컬상을 휩쓸며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14개월 만에 돌아온 [웃는 남자]는 슈퍼주니어 규현(32)의 변신이 눈길을 끈다. 주인공 ‘그윈플렌’은 신분차별이 극심했던 17세기 영국에서 귀족의 잔인한 구경거리를 위해 입이 찢겨버린, ‘웃는 얼굴로 우는 남자’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밝고 쾌활한 이미지로 활약 중인 그가 무대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거듭난 것이다. 2016년 [모차르트!] 지방 공연 당시 성대결절로 하차한 이후 4년여 만에 뮤지컬 무대를 밟은 ‘천상 아이돌’ 규현은 ‘웃는 얼굴로 우는 남자’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팬들은 ‘인생작’으로 평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쾌활한 이미지와 달리 무대 위의 규현은 비극에도 썩 잘 어울린다. /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사회복무요원 시절에 초연을 두 번이나 재밌게 봤거든요. 당시 작품 관계자분들이 ‘다음에 같이 하자’고 했을 때는 하하 웃어넘겼죠. 그런데 뮤지컬 복귀작으로 다른 제안들이 들어오니 이 작품이 계속 생각나고, 꼭 해보고 싶었어요.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품은 처음인데, 넘버마다 부르면서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아요. 하면서 공연이 빨리 끝났으면 싶은 작품도 있지만, 이 작품은 빨리 다음 무대에 서고 싶어지는 작품이죠.”

마냥 유쾌할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표정이 다소 어둡다. 방송에서 보던 규현이 아닌 것 같다고 하니 “원래 밝은 성격인데 오늘 컨디션이 별로”란다. 그러면서도 “나대는 걸 좋아하진 않는데 카메라가 들어오면 이상해진다”고 말하는 그는 가식없고 솔직했다. “실수를 좀처럼 안 한다”며 자기자랑도 은근히 한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없어 아쉽다”는 것이다. “배우들끼리 단톡방이 있거든요. 보통 하루 하나씩 실수가 나와서 같이 재밌게 얘기하는데, 저도 뭔가 있었으면 할 정도예요.”


▎뮤지컬 [웃는 남자]는 제작기간 5년, 제작비 175억원을 들인 대작이다. /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웃는 남자]는 여타 작품과 차원이 다른 무대미술로도 화제가 됐다. 요즘 가장 ‘핫한’ 오필영 디자이너가 구현한 무대는 거대한 마술상자와 같다. 가시덤불 모양의 무대 막에 선명히 새겨진 붉은 입술이 벌어지면 ‘웃는 남자’가 속 이야기를 토해내는 컨셉이다. 막이 열리면 초반부터 입이 떡 벌어진다. CG나 소품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안무로 숨 막히게 아름답게 펼쳐진 눈보라 치는 들판부터, 공기보다 가볍게 날리는 물빛 천 한장으로 표현된 엔딩의 우주인지 바다인지 모를 영원한 공간까지, 시종일관 ‘이토록 아름다운 무대를 본적 있는가’ 묻는 듯하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작품의 테마도 이분법적인 무대 미술로 선명히 드러난다. 스케일보다 돋보인 것은 마법같은 장면전환의 노하우다. 으리으리한 귀족들의 세계와 초라한 규모의 유랑극단 등 어둡고 파편적인 서민들의 세계를 쉴새없이 오가면서도 이음새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관객의 시선을 갖고 노는 테크닉이 정교하다.

그윈플렌은 ‘콤프라치코스’라는 인신매매단이 귀족들의 놀잇감으로 팔아넘기기 위해 기형적인 모양으로 입을 찢어버린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청년이다. 사실 예능으로 익숙해서 그렇지 무대 위의 규현에게는 비극이 낯설지 않다. 전작인 [베르테르] [모차르트!]에서도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예능을 할 땐 대중을 재밌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뮤지컬에서는 제가 그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고 해요. 베테랑 배우들처럼 순간 몰입은 안되지만 진심을 다해서 하려고 하죠. 비극이라도 가능한 선에서는 즐거운 장면을 많이 만들려고 하구요. 우울하게만 가면 저나 관객이나 힘들 수 있잖아요. 웃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려고 해요.”

앙상블 배우들에게 20분 동안 욕바가지


▎뮤지컬 [웃는 남자]는 오필영 디자이너가 구현한 거대한 스케일의 무대미술이 압권이다. /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소속사 후배 EXO 수호를 비롯해 이석훈·박강현 등 쟁쟁한 배우들과 쿼드러플 캐스팅인 만큼 ‘나만의 그윈플렌’을 위한 숨은 노력도 있었을 터. 하지만 오히려 “비슷하게 해도 많이 다르다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연출진과 많이 얘기하면서 캐릭터를 만드는데, 제 경우 해맑은 그윈플렌이 급전직하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와 닿는다고 하세요. 그걸 더 잘 살리려고 천진난만한 면모를 자주 보여주려고 하죠. 사실 모든 작품에 연출의 숨은 의도가 많은데 객석까지 안 와 닿는 경우가 있어요. [웃는 남자]도 처음 보는 사람은 ‘세상을 바꾼다더니 왜 바로 끝나냐’고 묻기도 하죠. 저도 두 번 보고 그윈플렌을 이해했거든요. 귀족으로서 특권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큰 용기잖아요. 그걸 처음 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연기하려고 하는데, 제대로 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통상 아이돌 출신들이 전성기를 지나 뮤지컬로 활동 무대를 옮기곤 하지만, 규현은 벌써 뮤지컬 경력 11년차다. 어려서부터 뮤지컬에 특별한 로망이 있었던 걸까. “그 당시 저는 슈주 멤버인데도 팬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허접한 사람이었거든요. 다른 멤버들은 다 개인 활동을 하는데 저만 스케줄이 없어서 지하철 타고 다니고 그랬어요. ‘연예인이 왜 스케줄이 없냐’는 소리도 들었죠. 저도 뭔가 활동하고 싶은 와중에 처음으로 뮤지컬에서 저를 찾아주신 거예요. 한번 제대로 파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애정 갖고 열심히 했어요. 해보니 즐겁더군요. 제 장점이 연기보다는 노래에 있으니 노래 위주로 작품 선택을 하면 후회하지 않을 작품을 만나게 되구요. 하면서 저도 즐겁고 팬들도 즐거워해 주셔서 여기까지 왔네요.”

2010년 [삼총사]로 데뷔할 때 만 해도 뮤지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규현은 늘 다른 배우들의 에너지를 받으며 성장해 왔다. 여러 멤버들 사이에서 적당히 힘을 뺄 수도 있는 아이돌 그룹 활동과 달리 텅 빈 무대를 혼자서 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100%의 에너지를 동료들로부터 얻는다는 것이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나를 좋아하는 팬들 앞에서 나를 보여주면 되는 콘서트와 달리 무대는 다른 배우, 스탭들과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전혀 달라요. 그런데 [삼총사] 때는 그런 걸 전혀 몰랐죠. 왕용범 연출님이 앙상블 배우들에게 규현이를 욕해달라고 부탁해서 20분 동안 욕을 먹었는데, 북받쳐 오른 감정을 터뜨리면서 한 꺼풀 벗었달까요. 처음엔 저를 신경 안 쓰시던 엄기준 선배도 어느 날 ‘뮤지컬 계속할 거니?’ 묻더니 정말 많이 조언해 주셨어요. [베르테르] 때는 조승우 선배 도움도 많이 받았죠. ”

[웃는 남자]를 준비하면서는 같은 제작사의 [레베카]에 출연하고 있는 옥주현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연습실 영상을 본 옥주현이 “괜찮은데 아쉬운 부분이 있다”며 연락을 해온 것이다. “4시간 동안 저를 붙들고 가르쳐 주셨어요. 그냥 누나 앞에서 계속 노래 불렀죠. 인사 정도 나누는 사이였는데, 디테일한 표현법부터 목 관리까지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수호요? 다른 그윈플렌들은 많이 도와주는데 수호는 별로 도움이 안 됐어요.(웃음) 중학교 때부터 워낙 친한 동생이라, 다른 데선 리더로서 멋지게 행동하다가도 저한테만 오면 애기가 되거든요. 그동안 자주 못 보다가 작품 때문에 자주 보게 된 것만으로도 좋네요.”

‘웃는 얼굴로 울어야 하는’ 그윈플렌과 달리 규현은 DNA부터 낙천적으로 보였다. 2007년 “죽다 살아날 만큼” 큰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딱히 트라우마도 없고, 오히려 사고 이후 더 밝아졌다. 가수와 방송인, 뮤지컬 배우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해야 하는 바쁜 스케줄에 오히려 팬들이 건강을 걱정하지만, “힘들어할 이유가 없다”는 그다. “글쎄요, 이게 힘든 건지 잘 모르겠어요. 바쁘게 살기로 제가 선택했으니 투정하면 안 되죠. 일을 미친 듯이 하는 게 익숙하고, 쉬는 걸 원하지도 않아요. ‘다음 주에 노래 안 부르는 날이 이틀 있으니 그때 편한 친구들과 한잔하면 되겠다’는 정도의 희망이면 충분히 충전됩니다.”

2006년 데뷔한 슈퍼주니어가 15주년을 맞았으니, 인생의 절반을 아이돌로 살면서 느끼는 고충도 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을 하겠다”는 그다. “길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녀요. 15년 동안 배인 습관인데, 눈을 마주치면 알아볼 것 같아서요. 이유 없이 피하게 되고, 여름에 바다에 놀러 가지도 않죠. 오픈된 장소에 못 가는 아쉬움 말고는 얻는 게 너무 많아요. 수많은 팬의 사랑과 금전적인 여유를 생각하면 다 감수할 만 하죠. 아이돌로 산다는 건 좋은 것 같아요. 국내든 해외든 공연 다니면서 팬들을 만나면, 인터넷이나 TV로만 나를 봤던 분들이 어쩌면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봐줄까 싶거든요.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직업이 또 있을까요.”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 되고 싶어”


▎아이돌 데뷔 15주년을 맞은 규현은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다. / 사진 : SM엔터테인먼트
오랜 팬덤은 그가 쉬지 않고 달리는 이유기도 하다. “요즘 왜 살아가는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요. 결론은 못 내렸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박수와 함성을 받는다는 게 소름 돋을 만큼 감동적인 일인 것 같아요. 팬들이 사는 이유가 저라는 얘기를 들으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됐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퇴근길 팬들이 건네주는 편지를 일일이 읽어본다는 그는 뮤지컬 배우로서 어디까지 가고 싶냐는 물음에도 “팬들 통장이 괜찮을 때까지”라고 했다. “편지 읽어 보면 팬들 통장이 텅텅 비었대요. 티켓이 워낙 비싸잖아요. 제가 지인을 초대할 때도 벌벌 떨 정도죠. (웃음) 제 공연은 티켓이 없어서 못 구할 정도는 아니라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거든요. 회전문 도시는 팬들이 자꾸 돈을 쓰게 되는 게 죄송하네요. 제 인기가 더 많아져서 티켓 구하기가 힘들어져야 팬들이 돈을 아낄 수 있겠죠? (웃음)”

재연작이지만 팬들로부터 “규현의 인생작”이라고 평가받는다는 그는 “끝까지 실수 에피소드 안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제 만족도 중요하지만 회전문 도는 제 팬들이 많이 만족해주셔서 감사하고, 그게 끝까지 유지되게 하는 게 숙제예요. 매 공연 10분 전부터 항상 무대 장치인 타워에 들어가서 기도하죠. ‘오늘 와주신, 저를 사랑하고 제가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귀한 3시간이 지난 후에 가슴속에 뜨거운 무언가를 갖고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 유주현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yjjoo@joongang.co.kr

202003호 (2020.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