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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친일 혹은 반공’ 너머의 백선엽 장군을 말한다 

피식민 경험 바탕으로 ‘최초의 현대 한국군’ 일궈내 

·25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 등 연합군 위기 숱하게 돌파
미8군과의 신뢰 바탕으로 휴전선 방어할 ‘1야전군’ 창설

백선엽 장군이 7월 10일 오후 11시 35분 별세했다. 향년 100세.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한 백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와 38선 돌파 작전 등 결정적인 전투를 지휘했다. 이런 장군의 삶은 오늘날까지 공과(功過)와 시비(是非)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 많은 사람이 ‘친일 부역자’ 혹은 ‘반공 영웅’ 가운데 일면으로만 그의 삶을 바라본다. 과연 이런 평가가 온당한 것일까. 2009년 10월부터 10년간 장군을 인터뷰했던 필자가 그의 삶을 되짚었다. 필자의 인터뷰 기록은 지난 6월 평전 [백선엽을 말한다]로도 출간됐다. [편집자 주]


▎생전인 지난 2월 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내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만난 백선엽 장군.
사람들은 한 인물을 평가할 때 흔히 공과(功過)를 병렬하기 좋아한다. 쌓은 공, 지은 잘못을 늘어놓고 균형적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자는 취지다. 그런 공과와 시비(是非)의 균형적 판단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오히려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평형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기계적인 균형’을 경계해야 한다. 한 사람이 지닌 특성과 면모가 지닌 발생, 진행, 귀착의 인과(因果)적 흐름을 놓칠 수 있어서다. 특히, 그 대상이 세상에 거대한 풍운을 몰고 온 정치의 권력자가 아닌 경우에는 그렇다.

중국 최고 권력자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이 흔한 사례다. 극도의 권력집중을 통해 말년에 이르면서 지독한 좌파적 실험을 강행했던 그의 과오는 사실 엄청나다. 1959년 그가 벌인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비공식적 추계로는 중국인 4000만 명 이상이 굶거나 그로 인한 비정상적인 죽음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공산당의 정통성을 유지하되 개혁과 개방을 펼쳐야 했던 그다음의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사후의 마오쩌둥을 평가하면서 “공(功)은 7, 과(過)는 3”이라고 했던 말은 아주 유명하다. 그래서 과거의 인물이 지닌 공과를 평가하는 말로서는 아예 ‘고전(古典)’이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극도의 권력을 손에 쥔 사람에 대한 평가로서의 ‘레토릭’에 해당한다. 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정황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의 여지를 남긴다는 사고에서 나온 표현이다. 매우 정치적인 수사(修辭)의 기법이 아닐 수 없다.

간도 특설대 활동 중 독립군 못 마주쳐


▎다부동 전투 당시 백선엽 국군 1사단장(오른쪽 둘째)이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 사진:미래한국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백선엽(1920~2020) 예비역 대장이 얼마 전 세상을 떴다. 그는 6·25전쟁 속 유명 인물이다. ‘유명’이라고 얘기했지만,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생이다. 고구려의 고분(古墳)이 많아 세인들이 국사 교과서에서나 한두 번 들었을 법한 고장이다. 유년을 그곳에서 보낸 백선엽은 7세에 평양으로 올라온다. 아버지가 일찍 집을 나가 6세 이후로는 그를 다시 본 적이 없다. 어머니 방효열의 훈육을 받으면 평양에서 자란다.

부친이 없는 백선엽의 유년은 어려웠다. 모친은 선엽의 손 위 누이와 동생 인엽을 모두 데리고 대동강에 뛰어들어 자살까지 시도했다. 그럼에도 백선엽은 잘 자랐다. 소학교(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뒤 수재들만 모인다는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10월 초 미 1군단장에게 평양 탈환 상황을 보고하는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왼쪽 첫째). / 사진:대한민국 육군
우리 사회에서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자주 거론하는 대목이 그다음의 행적이다. 그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대부분의 학생이 지향하는 길을 거부했다. 보통은 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선생으로 부임하는 일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백선엽은 일제 치하의 ‘군인’이라는 행로를 선택했다.

일본이 만주에 세운 만주국의 만주 군관(軍官)학교를 지망했다. 2년제 군관학교를 나온 그는 다시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첫 발령지는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쓰(佳木斯)의 신병 훈련소였다. 1년 정도 그곳에서 백선엽은 교관 생활을 한 뒤 이듬해 ‘간도 특설대’에 배치를 받았다.

이 특설대가 시비의 초점이다. 백선엽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이곳이 우리의 독립군을 때려잡는 특수 부대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당시 만주국은 이른바 ‘오족(五族)’의 연합체였다. 만주인들이 우선이었고 중국인 그리고 몽골 사람, 이슬람을 신봉하는 중앙아시아 사람,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이 있었다.

‘간도 특설대’는 각자의 언어를 지닌 ‘오족’의 민족별 분류에 의해 탄생한 부대였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공통 언어를 지닌 부대를 구성한다는 취지였다. 따라서 몽골은 몽골 부대, 중국인은 중국인 부대 등으로 독자적 부대를 이뤘다.

간도 특설대는 그런 취지에 따라 만들어져 1930년대 후반에는 만주 일대에 남아 있던 무장 항일 세력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만주에는 이렇다 할 무장 항일 세력이 존재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한반도에서 이곳으로 넘어왔던 ‘독립군’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아울러 백선엽이 특설대 배치를 받아 업무를 수행한 1943년에는 독립군은 아예 마주치기조차 불가능했다. 그 부대가 작전 대상으로 삼은 존재는 중국 공산당 계열의 ‘팔로군(八路軍)’이었다.

그나마 팔로군의 그림자도 마주치기 힘들었다. 그래서 백선엽이 속했던 특설대는 베이징(北京) 인근 지역으로 이동해 한동안 그곳에 주둔하기도 했다. 주로 수행했던 업무는 팔로군에 관한 정보 수집,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했던 선무(宣撫) 작업이었다.

중공군 공세 맞서 미 1군단 전력 보전


▎2013년 8월 백선엽 장군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입은 뒤 경례하는 백 장군. / 사진:연합뉴스
해방을 맞은 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945년 12월 월남했다. 직전에 그는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하는 북한의 사정을 지켜보다 이윽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서울에서 그는 역시 군문(軍門)을 택한다. 미 군정(軍政)이 주도했던 ‘군사 영어 학교’에 등록함으로써 대한민국 건국 뒤 만들어진 한국군의 창설 멤버가 된다. 이어 부산 주둔 5연대 연대장을 거쳐 대한민국 국방부 정보국장을 지냈다가 1사단장에 취임했다.

그는 결코 유명하지 않았다. 이북 출신자로서 뚜렷한 인맥이 없었던 데다가, 그 자신이 워낙 조용한 성품이라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아주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주머니’ 정도는 쉽게 뚫고 나와 다른 이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크고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김일성이 벌인 동족상잔의 처절한 싸움, 6·25전쟁은 백선엽이라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세상 모두에게 알리는 무대였다. 그는 김일성 군대가 물밀 듯이 치고 내려와 신생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로 전락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크게 솟아올랐다.

그가 담당했던 전선은 다부동이었다. 대구 북방 22㎞ 거리인 이곳에 김일성 최정예 3개 사단이 몰려들었다. “8월 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켜라”는 김일성의 독촉이 가해진 시점이었다. 백선엽의 1사단은 수안보까지 내려와 전쟁을 독전하는 김일성과 그 최정예 부대의 모진 공세를 ‘기적적으로’ 막아냈다.

전력과 장비, 병력의 숫자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그는 열흘 이상을 버텨 다부동을 사수했다. 우리는 보통 ‘낙동강 전선 싸움’을 골고루 평가하는 분위기다. 낙동강 연안을 따라 포진했던 국군과 미군 부대 모두 잘 싸워 전선을 지켰다는 맥락에서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낙동강 전선’에는 시차(時差)가 존재한다. 가장 먼저 북한군이 혈로를 뚫고자 했던 곳이 다부동이다. 다부동이 뚫리지 않자 영천과 포항, 경주를 나눠서 공격한다. 그러나 다부동에서 최정예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북한군은 나머지 다른 지역의 공세에서 최상의 전력을 유지하기가 이미 힘든 상태였다.

이 다부동 전투로 인해 백선엽의 이름 세 글자는 잘 알려진다. 이어 백선엽의 1사단은 인천 상륙작전(9월 15일) 직후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하는 길을 최초로 뚫었다. 아울러 북진하는 유엔군 전체 대열에서 최초로 김일성 정권의 수도였던 평양에 입성하는 기록을 세운다.

이어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참전한다. 초기 중공군의 공세는 매우 뛰어나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전체가 곤경에 빠지고 만다. 이때 아군의 서부전선 핵심 전력이었던 미8군 예하 미 1군단 소속이었던 백선엽의 1사단은 중공군 공세에 직면해 미 1군단 전체의 후퇴를 건의해 결국 실행에 옮긴다.

이는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그의 대단한 공적이다. 당시 한반도의 전쟁에서 아군 측 전력의 주축은 미8군이었고, 그중 실체적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부대가 미 1군단이었다. 가정이지만, 당시 중공군 초기 공세에서 미 1군단이 저들의 포위에 말려 전력을 상실했다면 그 이후로는 미군이 전력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따라서 미 1군단이 중공군에 의해 전력이 모두 꺾였다고 가정한다면 아군이 그 이후 전쟁을 지속해서 수행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6·25전쟁은 당시 참전한 중공군, 그를 요청한 북한 김일성의 승리로 사실상 마감했을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드러난 백선엽의 전공은 매우 대단했다.

그는 이어 1951년 1·4후퇴로 중공군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탈환하는 한국군 부대 지휘관의 영예를 안았고, 이어 강릉 주둔 1군단장으로 부임한다. 지금 휴전선을 지도로 살피면 동부는 북쪽으로 고성까지 죽 올라가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동해에 떠 있던 당시 미 7함대 제5 순양함대의 함포(艦砲) 지원을 이끌어내 북한군을 밀어붙인 당시 1군단장 백선엽의 공로가 역시 돋보이는 대목이다.

1군단장 재임 때 그는 한국군 최초 휴전회담 대표를 맡는다. 그를 눈여겨본 당시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의 추천이었다. 이어 그는 호남선과 경부선을 위협하던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에 나선다. 역시 미8군 사령관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서였다.

모두 2개 정규 사단, 경찰 병력 2개 사단 등을 거느린 대형 군단급 토벌부대를 구성했고, 그 부대에 지휘관의 이름을 부여한 최초의 사례를 기록한 일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건국 뒤에도 늘 후방을 위협하던 공산당 빨치산 세력이 ‘전멸(全滅)’에 가까운 국면에 접어든다.

‘본격 현대 한국군’ 1야전군 창설


▎시민들이 7월 13일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고(故)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의 분향소에서 조문하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 사진:뉴시스
그는 엄정한 군기(軍紀)를 확립해 대민(對民)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투항 의사가 있었던 빨치산과 그 가족들에게 최대한의 포용 조처를 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둔다. 아울러 치밀한 작전 수행 능력으로 한때 대단한 전투력을 보였던 빨치산을 완벽하게 무력화한다.

백선엽은 빨치산 작전 뒤 곧장 춘천 북방 소토고미로 직행해 1950년 12월 북진 때 와해했던 한국군 2군단 재창설을 지휘한다. 역시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었다. 당시 국군은 155㎜ 야포를 보유하지 못했으나 미군이 2군단 재창설을 기점으로 이를 대거 이양한다.

이는 한국군 현대화의 힘찬 출발이었다. 우리 군사(軍史)에서도 2군단 재창설의 의미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다부동 전투, 평양 입성, 중공군 공세 속 미 1군단 후퇴 등에서 백선엽이 쌓은 미군과의 신뢰를 그 전제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의미 맥락을 제대로 캘 수 없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백선엽의 ‘질주’는 이어진다. 1953년 1월에는 한국군 최초의 별 넷 대장 자리에 오른다. 아울러 휴전까지 육군참모총장으로 1951년 중반에 시작한 처절한 중동부 지역 전선 고지전을 지휘한다. 참모총장 시절에는 한국군 10개 사단을 20개 사단으로 늘리는 방안을 미8군과 협의한 뒤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브리핑한다.

그다음에 돋보이는 대목이 ‘1야전군’ 창설이다. Field Army라는 ‘야전군’은 미군이 한국군을 중무장한 뒤 155마일 휴전선을 단독 방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부대였다. 국가 수준의 전쟁을 비롯해 어떤 형태의 작전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막강한 편제의 군대다.

이는 사실상 현대 한국군의 탄생이랄 수 있었다. 병력이 40만 명에 이르고, 탱크를 비롯해 핵 투사 능력이 있는 8인치 곡사포까지 갖춘 부대였다. 백선엽은 3년 3개월 동안 이 부대를 건설한다. 역시 전폭적인 미군의 신뢰를 바탕에 깔고서다.

앞에서 언급한 대목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런 백선엽의 인생 역정을 공과(功過)와 시비(是非)로 나누는 일이 자연스러울까. 아니면 간도 특설대의 경력을 식민지 청년으로서 필요했던 발전 과정으로 보고, 그 학습을 토대로 대한민국 군대의 중추로서 그가 대업(大業)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맥락’과 ‘흐름’으로 보는 게 타당할까.

그는 1920년생이다. 나라를 직접 빼앗긴 아버지 세대와는 차이가 있다. 식민지 지배자인 일본의 궁극적인 힘을 살펴 그를 배우고 익혀 제힘으로 쌓는 데 부모 세대에 비해 주저하는 심리가 훨씬 덜했던 세대다. 아울러 간도 특설대와 만주 군관학교라는 체계적인 교육 틀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군대 지휘관으로서 백선엽이 보였던 자질과 능력은 크게 떨어졌을 수도 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독립을 지향했던 애국열사도 훌륭하지만, 식민 지배자의 힘을 고스란히 익혀 제힘으로 축적했던 일제 시대 적잖은 ‘능력자’들을 우리는 이해의 시선으로 읽어야 한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서거는 그를 새삼 일깨워준다.

-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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