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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전격해부] 여권의 ‘내로남불’로 얼룩진 박원순 퇴장 

진보의 최후 보루, 도덕성에 균열이 가다 

민주당,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의 친분 앞세워 피해자 2차 가해 초래
측근에 둘러싸인 제왕적 권력이 안희정·오거돈·박원순 사태의 불씨


▎7월 13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박원순 전 서울시장 영결식에서 이낙연 의원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박원순 충격’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7월 9일 밤 전해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말로(末路)는 비참했다.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지 하루 만에 그는 북악산 기슭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가 남긴 네 문장짜리 유서는 죽음의 이유를 밝힐 어떤 단서도 없이 무미건조했다.

그의 퇴장은 ‘박원순답지’ 못하다. 한 진보 진영의 인사는 “죽음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선택이 몰고 온 폭풍우는 온전히 피해자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 돼버렸다”며 “대체 왜 그랬느냐고 다그쳐볼 수도 없는 현실이 기가 막힐 뿐”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박 전 시장이 떠난 대한민국 사회는 가려진 진실을 두고 사분오열 돼버렸다. 그중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의 ‘박원순 감싸기’는 자가당착에 빠진 진보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진보의 DNA나 다름없는 도덕적 명분을 잃고도 진영 보호 논리에 빠져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도 서슴지 않는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은 진보 진영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성폭력 사건을 맡아 피해자를 대변해온 페미니스트였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 현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1993년에는 국내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인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소송을 맡아 6년 만에 승소하기도 했다.

서울시장 취임 후에도 성평등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했고, ‘젠더 특별보좌관’을 신설하기도 했다. 성희롱에 관해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박 전 시장의 철학은 분명했다. 2018년 5월 민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등록할 때에는 “성희롱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때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인권 개척해온 ‘페미니스트’의 추락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 3명이 연이어 성추문으로 낙마했다. 왼쪽부터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
여성 인권과 성인지 감수성에서만큼은 추호도 의심받지 않았기에 여느 정치인의 성추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력이 크다. 더구나 민주당의 유력한 대권 잠룡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파장이 어디까지 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의 성추문에 의한 낙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민주당으로선 내년에 치러질 재보궐선거 최대 악재를 만났다. 벌써 대통령 지지율이 빠지기 시작했다.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실시한 7월 3주 차(7월 13~15일) 국정수행 지지도 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도는 전주보다 4.6%p 하락한 44.1%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10월 2주 차(41.4%) 이후 9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반대로 부정 평가는 전주보다 5.2%p 오른 51.7%로 지난해 11월 1주 차(52.2%) 이후 가장 높다. 당 지도부를 비롯해 의원들, 지지자들이 일제히 ‘박원순 사태’가 증폭되는 걸 막아 나서는 이유다.

그런데 여권의 진화(鎭火) 시도가 오히려 기름을 끼얹은 형국이다. 진솔한 자기반성은 뒤로한 채 가해자 중심적인 태도와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이 쏟아내는 말과 행동은 자기 부정에 가깝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강조해온 젠더 감수성, 여성 친화 정당이란 수식어가 한낱 레토릭에 불과했단 사실을 역설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호칭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박 전 시장에게 지속해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 여직원을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 호소인’이나 ‘피해 호소 여성’으로 지칭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7월 15일 오전에 열린 최고위 회의에서 “‘피해 호소인’께서 겪으시는 고통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민주당 대표로서 다시 한번 통절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여성운동가 출신인 남인순 최고위원도 이날 “피해 호소인께 진심으로 송구하다”고 했고, 전 날 민주당 여성 의원들도 성명서에서 “피해 호소 여성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고 했다.

피해자에 대한 호칭이 사과와 위로의 진정성을 잠식했다. 민주당이 언급한 ‘피해 호소인’이란 용어는 법률적 용어도, 일반적으로 사용해온 용어도 아니다. 안 전 지사 미투 주장이 불거졌을 때나 오 전 시장의 자진 사퇴 때에도 민주당은 피해 여성을 ‘피해자’라고 지칭해왔다. 허윤정 민주당 대변인은 “수사가 종결됐기 때문에 고소인이라고 쓸 수 없으며, 법적 자기방어를 할 가해자가 없기 때문에 ‘피해 호소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민주당의 혐의 부정, 현직 검사까지 ‘2차 가해’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왼쪽)와 김태년 원내대표(오른쪽)가 7월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이 대표는 이날 박원순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지칭하며 사과했다. / 사진:임현동 기자
경찰청의 한 수사 전문가는 “이춘재의 경우에도 공소시효가 만료돼 공소권은 소멸했지만, 수사를 지속해 그가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임을 밝혀냈듯이 범죄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과 공소를 제기하는 것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민주당이 성추행 혐의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피해 호소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본다. 성추행 혐의에 대한 판단에 여지를 남김으로써 비난 여론을 희석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건을 프레이밍하기 위한 새로운 네이밍”이라며 “그럼 앞으로 위안부 할머니들도 일본 정부가 인정을 안 하니 ‘피해 호소인’, ‘피해 고소인’이라 부를 거냐”고 비판했다. 김은혜 미래통합당 의원은 “피해자를 피해자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당”이라고 촌평했다.

가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민주당의 태도가 지지자들에 의한 2차 가해를 조장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친여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박 전 시장을 두둔하고 피해자를 매도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유혹했다’거나, ‘이순신의 관노(관비의 오용) 비유’, ‘시장님 잘못이 있었다면 유서에 남겼을 것’이라는 상식 밖의 주장들이다.

압권은 진혜원 대구지검 부부장검사의 주장이다. 진 검사는 박 전 시장 등 두 명의 남자와 팔짱 낀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고 “덥석 팔짱을 끼는 방법으로 성인 남성 두 분을 동시에 추행했다. 페미니스트인 제가 추행했다고 말했으니 추행”이라고 썼다.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이어지는 글에선 “팔짱 끼는 것도 추행이에요?”, “여자가 추행이라고 주장하면 추행이라니까!”, “님 여자예요?”, “머시라? 젠더 감수성 침해! 빼애애애~~~”라고 썼다. ‘여자가 주장하면 추행!’, ‘빼애애애’란 표현들에는 여성 혐오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을 조롱할 때 쓰는 경멸적 의미가 담겨 있다.

진 검사는 “현 상태에서 본인이 주장하는 내용 관련 실체 진실을 확인받는 방법은 여론 재판이 아니라, 유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해서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이라고도 썼다.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고소와 기자회견을 한 피해자를 조롱하는 듯한 뉘앙스다. 민변 소속의 한 변호사는 “현직 검사, 그것도 여성 검사가 했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대검찰청에 진 검사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민주당 내부의 2차 가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서울시 행정 1부시장 출신인 윤준병 의원은 7월 13일 페이스북에 올린 ‘박원순 서울시장의 떠남에 담긴 숨은 유지’란 제목의 글에서 “고인은 죽음으로 당신이 그리던 미투 처리의 전범(典範)을 몸소 실천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더는 고소 내용의 진위 공방을 통해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지 마라가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침실, 속옷 등 언어의 상징조작에 의한 오해 가능성에 대처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도 주장했다.

감시 없는 ‘제왕의 밀실’이 성추문 주무대


상징조작은 일정한 사물이나 언어를 특정한 의미를 담은 상징으로 내세워 대중이 동조하게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윤 의원의 말대로라면 민주당이 줄곧 ‘피해 호소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상징조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박범계 의원은 “박 시장이 맑은 분이라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고,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삶을 포기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혹하고 엄격한 그대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진성준 의원은 “피해를 호소하는 분의 피해와 박 시장이 가해자라고 하는 점을 기정사실로 하는 건 사자 명예훼손”이라고 했고, 정청래 의원은 “(성추행 피해 기자회견이) 꼭 오늘이어야 했을까”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 같은 박 전 시장을 두둔하는 발언들은 다분히 가해자 중심적이라는 게 여성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성학자는 “가해자에 대한 용서와 실체의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건 오롯이 피해자의 의사에 따르는 게 상식”이라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순수하고 자존심이 강한 가해자가 부끄러워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해서 피해가 회복되는 건 아니다. 진실을 덮고 용서하자는 여론을 조성하려는 시도야말로 피해자에 대한 강요이며 2차 가해다.”

가해자의 죽음과 추모 일변도의 여론이 조성되는 상황은 피해자에게 공포를 극대화한다. 7월 13일 피해자가 여성단체를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 공포감이 묻어난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습니다. 50만 명이 넘는 국민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제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숨이 막히도록 합니다.”

대중의 궁금증은 ‘이 지경이 되도록 보좌진은 뭘 했나’란 의문으로 모아진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사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현직 광역단체장이란 점, 피해자가 이들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비서실 여직원이란 점, 그리고 추문의 주무대가 집무실이란 점이다.

박 전 시장의 집무실에는 일정이 없는 틈새 시간에 잠시 쉴 수 있는 간이 침실(내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는 내실에서 쉬는 박 전 시장이 다음 일정을 준비하도록 알리러 들어갔을 때 추행이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공무원은 내실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추행이 이뤄진 곳도 시장 집무실이다. 여직원을 불러 면담하면서 신체 접촉이 있었다.

집무실은 열린 공간인 동시에 밀실이기도 하다. 시장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다. 더구나 집무실 바깥의 비서실에는 시장의 최측근 보좌진이 포진해 있다. 사실상의 사적 공간이나 다름없는 단체장의 집무실에서 자신의 직업적 운명을 틀어쥔 권력자에게 저항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피해자들의 호소에는 공통으로 ‘거대한 권력’과 ‘나약한 자신’의 포지셔닝이 발견된다. 이를 두고도 일각에선 ‘여성을 약자화하는 반(反)페미니즘적 인식’이라고 비판하지만, 단체장의 권력은 ‘제왕적’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성 비위를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성평등 정책을 시스템으로 구축한 서울시만 해도 그렇다. 박 전 시장 재임 중 서울시는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을 2014년에 만들었다. 조직 내에서 성 비위 사건이 발생하면 인권담당관이나 여성권익담당관 등 전담 관리자에게 보고를 의무화하고 있다. 또 관련된 결정이나 조치 결과는 시장에게 보고하게 돼 있다. 그러나 매뉴얼 어디에도 시장이 사건의 당사자가 됐을 때를 가정한 조치 방법은 나와 있지 않다. 서울시의 매뉴얼은 ‘시장 무오류’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의 감시자에서 당사자가 된 시민단체

다른 광역지자체들도 마찬가지다. 광역단체장이 성 관련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당사자를 배제한 사건 처리 매뉴얼을 갖춘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사건의 최종 보고와 결정권자는 단체장 자신이다. 선출직인 광역단체장은 스스로 직을 내려놓거나 법원의 판결로 박탈당하지 않는 이상 상급기관의 감독 없는, 자기만의 소왕국에서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셈이다.

광역단체장이 추문에 연루됐을 때 그가 임명한 ‘어공(‘어쩌다 공무원’, 별정직 공무원을 의미)’들은 보위대 역할을 한다. 지방공무원법상 별정직 공무원은 임명권자인 단체장이 물러날 경우 자동 면직 처리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단체장의 직위 보전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박 전 시장이 숨진 뒤 그의 참모 역할을 해온 서울시 별정직 20여 명이 자동 면직 처리돼 시청을 떠났다.

시장과 운명공동체인 보좌진이 직언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게다가 시민단체 출신이 대부분인 서울시 보좌진은 시민운동 대부 격인 박 전 시장과 동지적 인연으로 얽혀 있어 수평적 소통이 어려웠다는 게 내부 관계자의 전언이다. 한 측근의 말이다.

“박 시장이 처음 당선했을 때부터 여러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들어와 참모진을 꾸렸다. 이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시장의 지시는 잘 이행하지만, 큰 틀에서 정책을 조정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정무적 감각이 부족하다. 그래서 비서실과 보좌진 내에서 알력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올해 4월 민주연구원 부원장 출신인 고한석씨를 비서실장으로 영입한 것도 이런 고질적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라고 관계자는 전했다.

박 전 시장과 시민운동 그룹의 리더십 문제에 관한 지적은 그가 처음 시장에 당선했을 때부터 제기됐다. 2011년 10월 27일 박 시장이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날 [프레시안]의 분석 기사(‘무소속’ 서울시장 박원순 앞에 놓인 ‘세 가지 난제’)에는 이번 참극의 간접적인 원인을 짐작할 단서가 들어 있다. 한 민주당 의원 보좌관의 말을 인용한 지적은 이렇다.

“시민단체는 다 ‘후배’로 이뤄진 조직이었다. 박 시장은 이미 지적이나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조직이다. 도덕적 권위에 따른 위계질서에 입각한 시민단체에서 작동했던 리더십과 서울시장으로 요구되는 리더십은 다르다. 스케일 차이뿐 아니라 이해관계가 서로 엇갈리는 집단들의 갈등을 조정하고 풀어야 한다.”

2018년 6월 안철수 당시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후보는 ‘제왕적 소통령 행세를 하는 서울시장, 서울시청을 장악한 시민단체 출신 고위공무원과 시민단체 출신 민간업자’ 등을 “서울공화국을 부패공화국으로 만든 원흉”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안 후보는 “서울시청 6층에 30~40명으로 구성된 시장 비서실, 외부자문관 명목의 온갖 친위부대가 포진하고 있다”고 했다.

시민운동그룹의 위계질서에 골든타임 놓쳐


▎7월 13일 오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를 대리해 여성단체와 김재련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사진:장진영
이번 사태에 시민단체들의 어정쩡한 태도가 ‘박원순 사단’의 영향력 때문인지 확인된 건 없지만, 개연성은 존재한다. 피해자는 비서실 동료들에게 몇 차례 성추행 사실을 고백했지만, 묵살당했다고 주장한다.

박 전 시장 자신도 오랜 재임 기간 중 자기도 모르게 권력에 취해 있던 건 아닐까. 한 여성단체 활동가는 “박 시장뿐만 아니라, 그동안 성추문이 불거진 민주당 단체장들이 하나같이 비서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점을 엄중히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 전 시장과 안 전 충남지사, 오 전 부산시장 등 재야에서 진보운동을 펼쳐온 이들이 자신의 업무를 보좌하는 여성 비서를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동지로 인식하지 않고 개인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보조자쯤으로 여긴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박 전 시장을 고소한 성추행 피해자는 일정관리를 담당하면서도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시장의 심기 경호’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 박원순’의 발자취는 거대하고도 깊다”면서도 “그가 남긴 그림자도 치명적이다. 그는 시민운동과 권력의 일체화를 선도했다. 불행하기 짝이 없는 ‘박원순 사태’가 그 귀결이다”고 지적했다.

정치는 진보의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정치권력에 취하는 순간 진보의 목표와 수단이 뒤바뀌고 만다. 진보의 도덕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나르시시즘이거나 도덕적 우월감을 도그마로 여기는 교조주의다. 박 전 시장과 민주당의 허울뿐인 젠더 감수성과 도덕성에 관한 비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현재 여권의 태도는 교조주의의 전형과 오버랩된다.

“진보의 DNA는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떳떳하게 진보라고 말하기가 머쓱해졌다.” 대학생 때부터 통일운동을 하면서 진보적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40대 회사원 이모씨의 말이다.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해온 박 전 시장은 이씨가 존경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이씨도 한때 시민단체 상근 활동가로서 시민운동에 깊이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는 “진보 운동의 가장 큰 자산은 동지와의 의리, 도덕적 자부심뿐이다. 이게 무너지면 우리 운동은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고 만다”고 말했다.

진보를 무너뜨리는 내부의 적


▎박원순 전 시장 조문을 거부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오른쪽)이 7월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왼쪽은 심상정 대표. / 사진:임현동 기자
잇따르는 여권 핵심 인사들의 성추문 사건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진보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586(50대·80년대 학번·1960년대생) 운동권 출신 정치인의 가장 큰 지지 동력은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했던 4050세대다. 이들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목숨 걸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진보 운동가들에게 동참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정치적 지지로 보상하는 경향이 짙다. 민주화 이후 저들이 제도권 정치의 주류로 성장한 건 아스팔트에서 흘린 땀과 피에 대해 국민이 주는 보상이자 최고의 예우나 다름없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한 2030세대에게 아스팔트 운동권의 추억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더구나 4050세대마저 586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이뤄졌다는 생각이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초선 의원들의 박 전 시장 조문 거부로 내홍을 앓고 있는 정의당의 상황도 기로에 선 진보의 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정의당 초선인 류호정·장혜원 의원은 성추행 피해자와 연대를 주장하며 박 전 시장 빈소를 조문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원과 여권 지지자들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심상정 대표는 “유족과 시민의 추모 감정에 상처를 드렸다면 대표로서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번에는 젊은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심 대표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정의당의 상황은 역사적·정치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정치권 586그룹과 4050세대 진보 지지층, 이들과 다른 성장 과정을 거친 2030세대 간 충돌의 단면이다. 장혜영 의원은 심 대표의 사과를 두고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거대한 인식의 차이 앞에 지독한 현기증을 느낀다”고 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박 전 시장이 갖는 시민사회단체 내 상징성, 전통적인 진보적 가치와 2030세대의 중요한 담론인 젠더 이슈가 부딪치면서 생긴 현상”으로 분석했다.

진중권 전 교수는 “민주당 586들이 그동안 계속 보여줬던 것처럼 우리 세대가 썩을 대로 썩어서 이제 폐기되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라며 “문제는 이들 세대의 헤게모니가 아직 공고하다는 것. 이들의 사회적 순기능이 사라진 지 오래, 점점 더 역기능만 늘어가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진보는 도덕적이란 믿음마저 깨진다면, 더는 국민이 그들을 지지할 이유가 사라진다.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진보의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이유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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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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