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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57)] 퇴계 학단의 ‘비서실장’ 월천(月川) 조목 

“마땅히 월천에게 보여라” 퇴계가 인정한 수제자 

15세 때 문하에 들어가, 스승 임종 지키고 퇴계학 전승에 앞장서
북인 정인홍과 친분설, 류성룡과 대립설 부풀려져 후대엔 ‘저평가’


▎월천서당 앞에 선 후손들. 가운데가 조동주 월천 16대 종손이며, 조진극 문중 총무(오른쪽)와 조병기 횡성 조씨 종친회장. / 사진:류수현
도서관에서 빌린 책 중에 [퇴계문하 6철(哲)의 삶과 사상]이 있다. 경북대 퇴계연구소가 퇴계 이황의 수많은 제자 중 6명의 철인(哲人)을 뽑아 그들의 행적과 학문 등에 관한 논문을 실은 책이다. 목차를 보니 월천 조목과 학봉 김성일, 간재 이덕홍,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지산 조호익으로 정리돼 있다. 책을 펴낸 퇴계연구소 송휘칠 교수는 서문에 “이들 인물은 나이 순서로 배열했다”며 “학문적인 우열이나 서열을 고려한 게 아니다”고 밝혔다.

이들 중 맨 앞자리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은 여러 측면에서 다른 제자들과 대비된다. 월천은 퇴계 선생 위패가 모셔진 도산서원(陶山書院) 상덕사(尙德祠)에 유일하게 종향된 제자이다. 당대 유림이 높이 평가했음을 뜻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제자 다섯 명과 달리 주향으로 모셔지는 서원이 없다. 더욱이 사후 나라가 내리는 영예인 시호도 받은 게 없다. 전하는 문집이나 유적 등도 드물다. 무슨 까닭일까.

10월 17일 월천의 자취를 찾아 월천서당(月川書堂)으로 향했다. 거의 유일한 유적이다. 일대는 안동댐 상류 지역이다. 도산서원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에서 월천길로 들어서자 도로 양쪽으로 한옥 건축 공사가 한창이다. 일대에 조성되는 세계유교컨벤션센터와 한국문화테마파크 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사 구간을 벗어나자 산자락에 월천서당이 보인다. 서당 앞에 수령 450년 은행나무가 서 있다. 도산서원에서 도로로 7㎞ 쯤 떨어진 거리다.

서당에 두루마기 차림의 조진극 문중 총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방 두 칸에 가운데가 마루인 4칸 서당이다. 월천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지었다. 지금 전하는 월천서당은 월천이 81세에 자신의 정사를 지어 이름 붙인 ‘부용정사(芙蓉精舍)’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여기서 사실상 일생을 보냈다. 마을 이름이 다래 즉 월천이다. 이곳도 굴삭기가 두 곳에서 동시 작업하며 흙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위쪽은 월천정을 복원하는 공사입니다. 서당 아래 있던 사당과 고택도 다시 짓게 됩니다.”

일대는 500년을 세거한 횡성 조씨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0년대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로 떠나기 시작해 40여 호 조씨 일가는 이제 겨우 한두 집이 남았다. 이어 조동주 월천 종손이 두루마기를 입고 도착했다. 경기도 성남에서 왔다. 필자는 인사를 겸해 아침 일찍 도산서원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과 함께 월천을 알묘했다고 전했다. 상덕사 동쪽 벽에 종향된 위패에는 ‘月川趙公’(월천조공)이라 쓰여 있었다.

도산서원 상덕사에 종향된 유일한 제자


월천은 어떻게 퇴계의 수제자가 됐을까. 그가 선생을 뵌 과정을 먼저 따라가 보자. 연보에는 “(1538년 월천이) 겨울에 비로소 퇴계 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고 정리돼 있다. 그의 나이 15세 때다. 월천리는 도산서당까지 낙동강변을 따라 30분이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퇴계는 친구 이문량에게 월천을 처음 본 뒤 “기지(耆之, 월천 아버지 조대춘의 字)가 아들을 잘 두었다”고 칭찬했다. 이때부터 월천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행동은 예법을 따랐다.

월천은 23세에 어머니상을 당한다. 그는 상주로서 무덤 아래 움막에 거처하며 예서를 보다가 의문이 나면 그길로 퇴계를 찾아갔다. 26세엔 풍기로 간다. 풍기군수 퇴계를 찾아뵙고 백운동서원에서 지냈다. 퇴계가 풍기군수에서 물러나자 월천은 고향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선생을 뵈었다. 월천은 퇴계에게 경서(經書)를 질의한다. [맹자] ‘양혜왕 상편’ “觳觫若無罪(곡속약무죄)”라는 구절이다. 보통은 ‘若(약)’자를 아래로 붙여 “죄가 없는 것 같으면서”로 해석했는데 월천은 ‘약’자를 위로 붙여 “벌벌 떨면서 죄가 없이”라고 보았다. 퇴계가 옳다고 여겼다. 월천은 이렇게 경서 해석을 내려오는 대로 따르지 않고 독창적으로 고친 것이 많았다. 퇴계는 이후 다른 제자들이 질문하면 “마땅히 조사경(趙士敬, 사경은 월천의 字)에게 보여야 한다”고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했다. 그래서일까. 퇴계는 건물 오른쪽에 걸려 있는 ‘月川書堂’(월천서당) 대자(大字) 편액을 직접 썼다. ‘월’과 ‘천’ 글자가 가지런하지 않아 오히려 오래 기억되는 편액이다. 서당 마루 위에는 묵재 이문건이 쓴 ‘是齋’(시재) 큰 글자 편액도 걸려 있다. ‘시재’에는 날마다 바르게 사는 집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월천은 29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 성균관에 가지만 넉 달 만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그는 자주 도산서당에 들러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벼슬은 않고 공부만 하니 집은 가난했다. 생활이 곤궁해져 퇴계가 이따금 양식을 보냈다. 월천은 43세에 천거로 공릉참봉에 처음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년 뒤 집경전 참봉으로 부임하지만 4개월 뒤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고향에 머물며 퇴계를 도와 우탁을 모시는 역동서원 건립에 힘을 보탰다.

1570년 11월 퇴계가 병으로 눕자 월천은 곁에서 약 시중을 들었다. 다음 달 퇴계는 세상을 떠난다. 월천은 스승을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슬픔 속에서 장례를 주선해 이듬해 2월 선생을 건지산에 안장했다. 그는 스승을 애도하며 1년 동안 베띠를 둘렀고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정인홍을 ‘걸나라 개’에 비유한 월천


▎월천서당 왼쪽 능선에 자리한 월천의 묘소. 후손들이 옛 묘비를 살피고 있다. / 사진:송의호
1572년 4월 월천은 동문들과 모여 도산서당 위에 퇴계의 위패를 모실 상덕사를 세울 것을 논의했다. 이어 5월에는 퇴계의 일생과 학덕을 상세히 기술한 [퇴계선생언행총록]을 짓고 동문들과 논의해 [퇴계연보]의 초고를 만든다. 1576년에는 그가 건립을 주도한 도산서원이 완성돼 봉안제문을 지었다. 또 그는 1584년 [퇴계선생문집] 편집을 시작해 1600년 간행 임무를 완수한다. 다른 대표 제자들은 어땠을까. 김동욱 경기대 교수는 [도산서당]이라는 책에서 “학봉과 서애는 모두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느라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며 “또 초기 스승의 문집을 꾸미는 데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정리했다. 퇴계의 제자는 거주지에 따라 도산서당 인근 예안과 거리가 먼 안동으로 구분된다. 월천을 비롯해 이덕홍·김부륜·금난수 등은 예안 출신이며 김성일·류운룡·류성룡 등은 안동에 살았다. 안동 제자들이 연배도 아래였다.

조동주 종손은 ‘퇴계문하 6철’이란 표현을 듣고 “계문(溪門)에는 ‘월간애학’이라는 말이 있다”고 덧붙였다. 월천과 간재, 서애, 학봉을 줄여서다. 종손은 “우리 선조는 퇴계 선생과 아들(이준), 손자(이안도)까지 3대 제문을 지었다”며 “선생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데, 온 힘을 기울이셨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진극 총무가 “이 말까지 해야겠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월천 선조는 불행히 다섯 살 아들을 잃고 이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 3년을 보내면서 안방 출입을 하지 않아 후사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는 가까운 사이에 양자를 들일 사람도 없었다. 신도비에는 이후 월천과 부실(副室)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고 적어 놓았다.

퇴계 사후 스승의 시문을 정리하고 서원을 세우는 일에 가장 앞장섰던 월천은 사림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았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근거 없는 비방과 모략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것이 “월천은 평소 정인홍과 가까이 지냈다” “도산서원 상덕사에 사후 종향된 것은 북인(北人)의 덕이다”란 말이다. 정인홍은 북인으로 남명 조식의 제자다. 월천은 남명을 만난 적은 없지만 남명의 본거지 삼가(三嘉) 인근 고을에서 65세에 2년간 합천군수를 지냈다. 공교롭게도 정인홍의 제자였던 동계 정온이 월천의 제자가 됐고, 동계는 이후 월천의 신도비문을 지은 내력이 있다.

월천 세상 떠나자 만사 지어보낸 서애


▎하늘에서 내려다본 월천서당 주변. 월천정과 종택 복원이 추진 중이다. 왼쪽 위가 안동댐 상류 안동호의 모습. / 사진:안동시
국역 [월천집]의 해제를 쓴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는 “월천은 정인홍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분석한다. 월천이 쓴 ‘우견정인홍남명집발어(偶見鄭仁弘南冥集跋語)’라는 시를 그 근거로 든다. 정인홍이 [남명집]을 간행하면서 맨 뒤에 근거 없이 퇴계를 흠집 내자 이를 못마땅히 여겨 시 한 수로 질책한 것이다.

조정에서 옥처럼 우뚝하게 선 몸이시고/ 환하게 자연 속 자유로운 사람이라/ 우습다! 인간의 괴이한 귀신무리여/ 감히 걸(桀)의 개가 어진 요(堯)를 보고 짓는구나 월천은 정인홍을 걸나라 개에 비유하며 공격했다. 그런데 어떻게 정인홍이 월천의 상덕사 종향을 도왔겠느냐는 비판이다. 월천이 종향된 것은 1614년 도산서원이 완성된 지 38년 만이었다. 이후 온갖 억측이 나왔지만 두 사람이 친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월천은 성품이 강직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나랏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월천은 동문인 서애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 시기 일본과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낸다. “상국(相國, 재상)은 평생 성현의 글을 읽고 얻은 바가 단지 이 ‘강화오국(講和誤國, 적국과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망쳤다)’ 네 글자입니까?” 이후 많은 이가 월천과 서애를 좋지 않은 사이로 봤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서애는 자신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는 답장을 썼다. 월천이 세상을 뜨자 만사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또 양문에 출입한 김응조 등의 노력으로 두 사람 사후 이 문제는 해결됐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해 허권수 교수는 “이 내용은 [선조실록]에도 실려 있다”며 “[선조실록]은 광해조에 북인이 주도해 만들었기 때문에 정인홍과 사이가 좋지 않은 류성룡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면이 없지 않다”고 경계한다. 다른 견해도 있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는 “(월천의) 강화 배척론은 훗날 강화론에 참여했던 류성룡과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돼 남인 실각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분석한다. 시호를 받는 문제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영·정조 시기 월천에게 시호를 내리는 일이 유림에서 추진됐다. 그러나 서애와의 관계 등을 부풀리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걸림돌이 됐다고 한다. 월천의 학덕이 알려지면서 조정은 계속 관직을 내렸다. 그는 사양한다. 봉화현감은 받아들였다. 이후에도 관직이 계속 내려졌으나 대부분 사양했고 공조정랑, 합천군수 등은 나아갔고 신도비에는 관직이 ‘가선대부 공조참판’이라고 쓰여 있다.

월천은 83년을 살았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초야에서 독서와 강학을 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그중에는 고봉 기대승이 지은 퇴계 자명(自銘)의 후서(後序)를 날카롭게 지적한 것도 있다. 후서의 “중년 이후에는 바깥으로 사모하는 것에 마음을 끊었다(中年以後, 絶意外慕)”라는 구절에 대해 월천은 “선생은 어려서부터 고요하게 학문을 좋아하였고 세상의 이익과 변화에 담박했는데, 중년 이후가 되기를 기다려 명리나 권세 등 바깥의 것에 뜻을 끊었겠느냐”라고 반문한다. 고봉의 서술이 퇴계의 진면목을 왜곡한다는 일갈이다.

월천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책에 집착하는 ‘서벽(書癖)’이 있었다. 월천이 남긴 ‘중수서실기(重修書室記)’에 “1590년 가을 시렁 위의 책을 조사해보니 선대부터 내려온 것을 합해 대략 1400권”이라고 적혀 있다. 장서각은 서당 동쪽 처마를 덧대 만들었다. 책을 수집한 과정도 나와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 사거나 구하기도 하고 간혹 인출하거나 뜻밖에 임금이 하사하는 책을 받기도 했다. 친구가 보낸 것도 있다.” 그러나 많은 서책과 저작은 흩어지고 사라졌다. 종손은 “전체의 100분의 1이 채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특히 1918년에는 월천서당 아래 종택에 화재까지 겹쳤다. 또 어떤 책은 심지어 다른 집이 국학진흥원에 책을 기탁하면서 본래 주인이 월천이라는 게 드러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2015년 의성 김씨 삼대종택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월천두시]다. 월천이 채운경·김택룡·금응협에게 맡겨 쓰게 했다는 기록이 책 안에 남아 있다.

“시렁에 1400권”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책 수집


▎월천선생문집.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종가는 화재를 입은 뒤 당시 임시로 재실을 짓고 몇 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종택을 복원할 형편이 아닌 데다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이어져 고향을 떠났다. 이후 정부가 유교 등 3대 문화권사업을 추진하면서 다래마을이 포함된다. 일대 문중 땅이 헐값에 수용되자 종손은 불에 탄 종택만큼은 복원해 달라고 안동시에 요청했다. 그게 용케 받아들여져 이제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월천 유적 정비사업이다. 다래마을은 반경이 4㎞에 달했다고 한다. 좀체 믿기지 않았다. 나중에 합류한 조병기 종친회장이 물에 잠긴 안동호를 가리켰다. “지금은 물에 잠겼지만 저 배가 지나가는 곳까지 전부 마을이었어요. 강변 모래가 참 좋았는데….” 그러고 보니 월천서당 건너편에는 ‘겸재(謙齋)’라는 누정도 하나 보였다.

월천의 묘소를 찾았다. 서당 왼쪽 산허리에 위치해 있었다. 올라가면서 신도비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정온이 쓴 신도비는 묘 앞에 세워져 있었다. “종택을 복원하면서 신도비도 묘소 아래에 별도로 세울 계획입니다.” 월천은 퇴계의 비서실장이나 다름없었다. 지근거리에서 선생을 수행하고 보필하며 또 묻고 배웠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엔 도산서원을 세우고 문집을 정리하는 등 후세 전승에 앞장섰다. 정온은 월천을 이렇게 기렸다.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퇴계를 만나 이루어졌고, 퇴계의 도학(道學)은 선생을 만나 빛이 났다.”

[박스기사] “선생의 도(道), 영구히 전해질 것” - 서원 건립과 문집 간행 관련 두 가지 글 <월촌집>에 남겨

월천 조목은 퇴계 선생 사후 학문과 사상을 전하는 서원 건립과 문집 간행을 주도했다. [월천집]에 두 가지 관련 글이 남아 있다. 1576년(선조 9) 월천은 도산서원을 완공하고 상덕사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다. 그 글이 ‘도산서원 봉안문’이다. 봉안문은 “삼가 생각 건데 선생께서는 하늘이 낸 영준(英雋)이니…”로 시작된다. 이어 “도산은 도를 강구하는 곳으로 (…) 도모하고 헤아려 서원을 경영하였다”며 과정을 알린 뒤 “분주히 제사를 모심에 한마음으로 깨끗하니 부디 밝게 이곳으로 오십시오”라고 적었다.

도산서원을 건립하고 24년이 지나 1600년(선조 33) 월천은 [퇴계선생문집]의 완성을 다시 고한다(退溪先生文集告成文). 문집을 간행하는 뜻과 과정 등이 담겨 있다. 제자로서 필생의 임무를 마친 것이다. 내용을 소개한다. “아! 우리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30년이 지났는데 여태 문집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이래 공사(公私)의 서적이 병화(兵火) 가운데 없어졌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선생의 글은 온전히 보전돼 흩어지고 사라진 게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둘러 간행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인심이 끝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며 우리 죄 또한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기해년(1599) 봄에 뜻을 같이하는 여러 사람과 함께 간행을 논의하였습니다. 옛사람 중 덕이 높은 이를 사모하고 행실이 밝은 이를 모범으로 삼자는 뜻이 같아 원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떨쳐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쌀과 콩을 보내오고 어떤 이는 옷감을 보내오고 또 어떤 이는 기술자를 보내 문집 간행을 도왔습니다. 또 학자들은 구름처럼 모여 어떤 이는 글을 베끼고 어떤 이는 교정(校正)을 맡아 정밀하게 살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밤낮으로 힘써 5월에 일을 마치고, 마침내 목판을 본원(도산서원)에 보관하였습니다.

원근에서 장차 이 책을 얻어 읽고자 하는 이에게 목판을 스스로 찍어 사방에 유포하도록 한다면 영구히 전해질 것입니다. 널리 유포하고 멀리 전한다면 선생의 도가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이것을 보고 듣는 사람은 우리 후학의 경사로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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