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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미국 영화상 휩쓰는 배우 윤여정의 힘 

“전형성 피하는 연기가 필생의 목적” 

영화 [미나리] ‘순자’ 역 맡아 21개 美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 수상… 올해 연기 56년 차, 삶을 끝 간 데까지 밀어붙이는 센 캐릭터 잘 소화

▎영화 [미나리]에서 외할머니 ‘순자’ 역을 맡은 배우 윤여정은 올해 제93회 오스카 여우조연상의 유력 후보로 꼽힌다. 시상식 후보는 오는 3월 15일 발표된다.
배우 윤여정이 미국 영화상을 휩쓸고 있다.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킨 재미교포 2세 아이작 정, 한국 이름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3월 3일 한국 개봉) 얘기다. 1980년대 미국 아칸소 시골로 이주한 정 감독 가족의 이민사를 그린 영화다. 영어 제목도 한국말을 그대로 읽은 ‘Minari’. 브래드 피트의 영화사 플랜B와 공동 제작에 나선 배우 스티븐 연(출연작 [워킹 데드] [버닝] [옥자]) 등과 더불어 배우 한예리·윤여정이 출연해 지난해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관객상을 시작으로 미국영화연구소(AFI)의 ‘2020년 올해의 영화’ 10편에 선정되는 등 2월 10일 현재까지 61관왕 수상이란 기록을 세웠다.

이 가운데 21개가 외할머니 ‘순자’ 역의 배우 윤여정이 받은 여우조연상이다. 나열하자면 이렇다. 전미비평가위원회상부터 LA·보스턴·노스캐롤라이나·오클라호마·콜럼버스·그레이터웨스턴뉴욕·샌디에이고·뮤직시티·샌프란시스코·세인트루이스·노스텍사스·뉴멕시코·캔자스시티·워싱턴DC·미국흑인·뉴욕온라인 등 지역·단체별 비평가협회상, 디스커싱필름·미국여성영화기자협회·골드리스트시상식·선셋필름서클어워즈 등 21개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차지했다. 출연진 전원이 받은 뉴멕시코비평가협회·미들버그영화제 앙상블상 2개는 따로 치고서다.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 가능성


▎지난해 1월 미국 유타 주에서 열린 선댄스영화제에서 윤여정을 비롯한 영화 [미나리] 출연·제작진이 사진 촬영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윤여정은 1966년 TBC 3기 탤런트로 데뷔해 올해 연기 56년 차를 맞았다. 스크린 데뷔작인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로 스페인 시체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대종상 신인상 등 휩쓸고 임상수 감독의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하녀](2010)로 대종상·춘사영화제·대한민국영화대상·시네마닐라영화제 여우조연상, 박카스 할머니로 분한 [죽여주는 여자](2016)로 캐나다 판타지아영화제 슈발누아경쟁-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한국 문화예술계에 기여한 그간 공로로 4년 전 은관문화훈장도 받았지만, 전 세계 영화산업의 이목이 쏠리는 미국에서 이처럼 주목받은 것은 처음이다.

윤여정은 4월 열릴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지난해 [기생충]도 못한 한국 배우 최초 연기상 후보로도 점쳐진다. 아카데미와 자주 수상작이 겹쳐 ‘미리 보는 오스카(아카데미트로피 애칭)’로도 불리는 미국배우조합(SAG)상에서도 그는 이미 한국 최초 여우조연상 후보에 호명됐다. 이에 더해 [미나리]는 전년도 [기생충]이 받은 앙상블상, 스티븐 연의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할리우드 시상식 예측 사이트 ‘골든더비’에 따르면, 윤여정은 현재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 가능성이 높은 배우 3위에 올라 있다. 영국 영화 [더 파더]에서 앤서니 홉킨스와 호흡을 맞춘 배우 올리비아 콜맨, 코로나19로 안방극장이 활성화된 덕을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맹크]의 할리우드 배우 어맨다 사이프리드에 이어서다.

현지 평단은 [미나리]의 이 “사랑스러운 할머니”(버라이어티)에 대해 호평 일색이다. 미국 시사지 타임은 골든글로브가 이 영화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렸을 때 “베테랑 배우 윤여정의 반짝거리고 입이 거친, 극 중 여성 가부장 역할이 후보에 못 오르다니”라며 기막혀했다. 영화 매체 블루레이닷컴은 “윤여정은 자신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영화의 정신을 고취하는 폭죽 같은 할머니 캐릭터를 완벽히 보여줬다”고 엄지를 세웠다.

한국에선 개봉 전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야외극장에서 상영된 게 최초이자 유일했던 터. 그런데 오는 3월 3일 한국 개봉 때 영화를 볼 한국 관객들은 오히려 이런 반응일지 모른다. ‘윤여정이 이것보다 잘한 연기도 많은데?’라고.

한국 관객에게 [미나리]의 윤여정은 사실 낯선 캐릭터만은 아니다. 그가 연기한 순자는 미국에 이민 간 딸 ‘모니카’(한예리)를 보러 한국에서 마른멸치와 고춧가루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할머니다. 미국서 자란 여섯 살 외손자 ‘데이빗’(앨런 김)은 “한국 냄새 난다(smells like Korea)”며 외할머니를 낯설어하지만, 곧 외할머니의 화투 애제자가 된다. 둘은 순자가 “산에서 온 이슬 물”이라 부르는 미국 음료수 마운틴듀를 마시며 레슬링 중계도 본다. 순자가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를 아칸소 깊은 숲속 개울가에 함께 심을 때도 데이빗이 함께한다.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데이빗) “진짜 할머니 같은 게 뭔데?”(순자) “쿠키도 만들고 나쁜 말도 안하고 남자 팬티도 안 입고….”(데이빗) 대놓고 이렇게 불평했던 데이빗은 조금씩 자신이 모르고 자라온 조국, 즉 한국에서 온 외할머니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한국에선 영화·드라마, 최근엔 예능으로도 변주돼온 윤여정 특유의 유머 감각, 직설화법 뒤에 배어나는 잔정이 순자 캐릭터에 매료되게 만드는 조미료 역할을 톡톡히 한다.

정 감독은 지난해 부산영화제 화상 간담회에서 영화 제목이 [미나리]여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실제 우리 가족이 미국에 갔을 때 할머니가 미나리 씨를 가져가서 심었어요. 우리 집이 한국 채소농장을 했지만, 미나리는 오직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었고 할머니의 사랑이 녹아있었죠.”

이처럼 가족의 뿌리와 같은 순자 역에 윤여정을 캐스팅한 것은 정 감독 자신도 영화학도로서 [화녀]를 비롯해 그간 윤여정의 작품 활동을 익히 봐왔기 때문이다. 정 감독은 “처음엔 고약한 말로 아이들을 불편하게 하지만 결국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좋아하게 만드는 정직하고 서슴없는 역할에 딱 맞았다”라면서 미국 현지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감에 거론된 데 대해 “미국이 ‘윤 선생님’(영어를 주로 쓰는 정 감독은 윤여정에 대한 호칭만은 한국말로 했다) 같은 보물을 ‘알아봤다’는 게 기쁘다”고 했다. ‘알아봤다’는 그의 표현처럼 이번 [미나리]의 순자는 윤여정이 이미 오랫동안 빛나게 성취해온 연기 세계의 일각이란 얘기다.

정 감독의 실제 외할머니에 얽힌 의미를 살리면서도 캐릭터를 새롭게 창조해낸 윤여정 표 연기의 힘도 컸다. 다음은 윤여정이 부산영화제에서 밝힌 얘기다.

“어떤 감독들은 자기 할머니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그걸 흉내 내라고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면 굉장히 배우가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내가 아이작 할머니를 맞게 그리는 건가 아닌가. 그런데 아이작이 나한테 선생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그랬어요.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 더 내가 책임감이 큰 거예요. 나는 언제든지 내가 무슨 역할을 할 때 그건 나는 미션이에요. 전형적인 할머니,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전형적인 엄마, 나 그런 거 하기도 싫어요. 내가 조금 이렇게 다르게 하고 싶어요. 그건 내 필생의 목적이에요.”

영화 속 순자가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단다. 미나리는 ‘원더풀’”이라 말한 대사처럼 어디서든 뿌리내리고 살아가야 하는 이민자 가족의 운명 속에 질기게 살아남는 어떤 생명력 그 자체를 윤여정은 지극히 평범한 한국 할머니의 캐릭터에 맛깔나게 담아냈다.

늘 시대에 발맞춰 변화무쌍한 캐릭터 맡아 열연


▎윤여정(오른쪽)은 영화 데뷔작 [화녀](1971)에서 복수극을 벌이는 시골 처녀 ‘명자’ 역을 맡아 주목받았다.
“세월 따지는 것 싫고 창피하다”고 손사래 쳐온 윤여정이지만, 올해로 일흔넷.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 그처럼 드라마·상업영화·저예산·독립·예술영화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배우를 찾기 힘들다. 반세기 넘는 연륜뿐 아니다. 그는 늘 시대에 발맞춰 변화무쌍한 캐릭터들을 맡아 왔다. 그것도, 삶을 끝 간 데까지 밀어붙이는 센 캐릭터로.

첫걸음부터 예사롭진 않았다. 충무로의 기묘한 거장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는 TV 탤런트만 경험했던 윤여정이 처음 도전한 영화였다. 김 감독이 자신의 1960년 흑백영화 [하녀]를 직접 컬러판으로 각색해냈다. 훗날 임상수 감독이 칸에 들고 간 전도연 주연 동명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의 현대판 리메이크다.

[화녀]에서 윤여정이 맡은 명자는 돈을 벌러 상경해 양계장을 하는 유명 작곡가 ‘동식’(남궁원) 부부의 집에서 일하게 되는 시골 처녀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처녀는 어느 날 술에 취한 동식의 일탈로 일가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명자가 거대한 닭 모이 분쇄기로 무엇을 갈았는지 모를 지저분한 모이통 안을 들여다보는 눈빛은 예측불허의 광기로 일렁인다. 애초 김 감독이 신인 윤여정을 점찍은 게 TV 드라마에서 여고생 깡패로 분한 그가 뿜어내는 기운을 보고서란다. [화녀]가 개봉한 해 윤여정은 MBC 드라마 [장희빈] 주연도 맡아 ‘국민 밉상’으로 등극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나쁜 년 지나간다!”고 달려드는 인파 탓에 바깥출입도 잘 못 했다니 희대의 악역을 얼마나 밉살맞게 해냈을지 짐작할 만하다.

가수 조영남과 결혼 후 미국에 가며 잠시 연예계를 떠났던 그는 이혼 후 한층 더 굵직한 작품에 뛰어들었다. [사랑과 야망] [원미동 사람들]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드라마 히트작은 셀 수 없다. [분례기]로는 한국방송대상 여자탤런트상, [넝쿨째 굴러온 당신]으론 KBS 연기대상 장편드라마 부문 여자 우수연기상을 안았다.

영화에선 [바람난 가족]으로 시작된 임상수 감독과의 협업도 새 전성기를 열었다. 문소리·황정민 주연의 이 콩가루 가족 영화에서 그는 예순에 섹스의 참맛에 눈뜬 시어머니를 연기했다. 이어 [하녀]에선 신입 보모 전도연을 감시하는 터줏대감 하녀, [돈의 맛]에선 젊은 남자를 탐하는 재벌가의 숨은 권력자가 됐다. 이어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선 딱한 늙은 목숨을 거둬주는 탑골공원 할머니였다.

무수히 출연한 홍상수 영화에 더해 가족에게 헌신적인 할머니를 연기한 [계춘할망] [그것만이 내 세상] [장수상회]도 있다. 할리우드의 워쇼스키 자매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 8]에선 감옥에서 배두나를 돕는 조력자가 됐다. “내가 모르는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 “최선 다하는 후배들 보면 같이 하고 싶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그는 생생한 동시대 기운을 매 작품 길어 올렸다. 데뷔 50주년에 출연했던 [죽여주는 여자] 때는 “감독들이 이젠 나한테 별걸 다 시키는구나 싶었다” 농담 반 말했지만, 그 별별 캐릭터를 매번 실패 없이 땅에 발붙인 캐릭터로 연기해냈다.

봉준호 “[미나리] 순자는 전대미문의 러블리한 캐릭터”


▎2016년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박카스 할머니 ‘소영’ 역을 맡은 배우 윤여정.
[미나리] 역시 그 자장 안에 있다. 영국 매체 옵저버가 “작가 겸 감독 정이삭의 시골 유년기에서 건져낸 왈츠이자 경쾌한 추억의 영화”라고 말한 [미나리]의 유쾌한 온기, LA위클리가 “문화·민족·국적을 불문하고 크고 복잡한 가정의 기쁨과 고통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젖어들 수 있는 재미있고 진정어린 달콤한 영화”라고 짚은 포용력, 긍정성의 든든한 토양이 바로 윤여정의 순자 캐릭터다.

영화지 씨네21 설합본호에서 윤여정과 대담한 봉준호 감독은 순자를 “전대미문의 러블리한 캐릭터”라 꼽으며 “일반적인 할머니 상을 비껴가는,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할머니 캐릭터라 어딘지 통쾌하고 좋았다”고 했다. 영화 제작 경험이 있는 감독답게 윤여정이 이 영화의 화면 밖에서도 정신적 중심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하면서다.

실제로 윤여정은 저예산 독립영화인 [미나리]를 찍기 위해 미국 교외 지역에서 한예리·통역가 등과 한집에서 합숙하며, 한여름에 에어컨도 고장 난 트레일러(영화 속 가족의 집)를 오가면서 촬영했다. 더구나 영어가 더 익숙한 정이삭 감독은 시나리오의 80%에 달하는 한국어 대사 대부분을 한예리·윤여정 등 한국에서 온 배우들에게 의지했다. “윤 선생님은 저격수처럼 어떤 이야기든 정확히 캐치하세요. 많은 부분을 배웠습니다.” 정 감독의 말이다.

이 뜨겁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의 아수라장에서 벗어난 지금 윤여정은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애플TV 미국 드라마 [파칭코]에 출연하게 된 것. 지난해 칸영화제 공식 선정작에 포함된 임상수 감독의 새 영화 [헤븐: 행복의 나라로(가제)]도 그가 출연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결혼생활 당시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데다 최근에도 영화·예능·영화제 등에서 곧잘 위트 있고 명쾌한 영어 구사를 선보였던 만큼, 향후 더 많은 해외 진출 가능성도 내다보인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여배우들]에서 한류 스타 후배 배우들에게 “난 재래시장이나 지킬게”라고 했던 윤여정. 일흔넷에 바로 그 재래시장 감각으로 세계무대를 접수했다.

- 나원정 중앙일보 문화팀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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