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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책과 사람'] 새 소설책·산문집 함께 출간한 작가 이응준 

신기(神氣)와 무지의 합작 한국 사회 광기에 휘둘린다 

‘엣쎄이소설’이라는 [해피 붓다], 짧은 메모 묶은 [작가는…]
정치·이념·종교 문제 등 세상에 대한 ‘성난 목소리’ 담아


▎작가 이응준은 20세기 작가를 자처한다. 문학 울타리에만 갇혀 있지 않고 바깥세상에 적극적으로 논평을 통해 개입하는 존재가 20세기 작가다. 21세기 들어 그런 작가의 역할이 극도로 위축돼서 문제라는 게 이응준의 생각이다.
1970년생 작가 이응준은 한국문단의 이단아 같은 존재다. 이단아를,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을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때 그렇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이방인에 더 가깝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내부고발자여서다. 4년 전 신경숙의 표절 의혹을 제기했던 일 말이다.

또 그 얘기냐고? 있을 수 있는 반론을 받아들여 시계를 과거로 돌리자.

작가 초년병 시절 이응준은 문학 영재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는 어떤 시대 기준에 비춰도 이른 나이인, 스무 살에 시인, 스물넷에 소설가로 각각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절차를 밟아 작가로서 공인받았다는 의미다. 최근 나란히 출간한 새 소설 [해피 붓다], 산문집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를 포함해 지금까지 시집을 네 권, 소설집 여섯 권, 장편소설 다섯 권, 산문집 두 권을 출간했다. 실팍하다고 해야 할 출간 목록도 목록이지만 그의 문학은 시집이든 소설책이든 제목에서부터, 이건 뭐지, 미간이 좁혀지거나 급한 호기심이 솟구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데뷔 단편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가 그렇고 2004년 소설집 [무정한 짐승의 연애]가 그렇다. 추억에 속도가 있다니. 무슨 뜻인가. ‘무정한 짐승의 연애’라는 표현을 이해 못 할 바는 없다. 어느정도 우리는 아니면 연애할 때 더욱 짐승이지 않나. 이 책들의 제목이 품고 있는 어떤 불투명함이나 처연한 감정은 아마도 그의 문학의 뿌리가 시(詩)라는 점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문학 캠프 안에만 갇혀 지내지 않았다는 점이 작가 이응준의 개성일 텐데, 가령 2008년 스스로 각색·감독한 40분짜리 단편 영화로 뉴욕과 파리의 단편영화제에 각각 초청된 사실은 그의 자부심인 듯하다. 기자의 과거 기사를 찾아보니 2009년 7월 이응준이 역시 자신의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을 각색·감독해 영화를 만든다고 소개한 꼭지가 있다(이 계획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 이응준의 또 다른 정체성은 영화감독이다.

사회·인간의 문제 해법 제시하는 20세기 작가 자처


▎이응준은 한국 사회를 파시즘에 취약한 사회라고 진단한다. 거대한 집단행동으로 표출되곤 하는 한국 사회의 뜨거움에 파시즘적인 성격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다. 오른쪽 책 사진 위로부터 [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 [해피 붓다]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
붕당의 경계를 넘어선 현역 국회의원들 사이의 로맨스를 그린 2012년 장편 [내 연애의 모든 것]이 공중파 드라마로 만들어진 사실은 이 작가가 서정에만 매몰되지 않고 서사의 창조에도 능하다는 증좌. [국가의 사생활]을 바탕으로 한 2014년 논픽션 [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는 남한이 북한을 흡수한 통일 대한민국의 부작용을 조목조목 따진, 문인으로서는 이례적인 책이다. 그는 또 2013년 1월부터 2년간 [중앙SUNDAY]에 칼럼을 연재하며 정치·사회·문화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가 펴내는 책의 앞표지 안쪽 ‘책날개’에 스스로 밝힌다. 요컨대 이응준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작품 바깥에서, 문학 아닌 분야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발언해 온 작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뼛속 깊이 20세기 작가여서 그렇다. 20세기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 지금 21세기는 문학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 구문일 정도인데, 웬 20세기? 그래서 더욱 20세기?

철학적으로나 실존적으로 일종의 사제 역할을 하는 존재, 사회 병리나 인간 불안 등 모든 문제를 사람들이 작가에게 묻고 그에 답하는 게 작가의 권리이지 의무였던 존재. 이응준에 따르면 그런 존재가 20세기 작가다. 하지만 요즘 작가는 그렇지 않다는 것.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지 못하면 곧바로 퇴출당하는 게 요즘 작가들이 처한 한계 상황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죽었다는 게 이응준의 평소 지론이다.

새 소설 [해피 붓다]와 새 산문집 [작가는…]은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책들이다. 그래서 친절하지는 않은 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또 이응준부터가 인정하듯 요즘 냉정한 독자들은 좀처럼 작가에게서 그런 걸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피 붓다]는 ‘엣쎄이소설’이라는 독특한 의장을 갖추고 있다. 그냥 평범한 소설은 아니라는 얘기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소설보다 엣쎄이가 강조된 느낌이다. 굳이 서사와 플롯, 그럴듯한 재현이라는 소설의 과육으로 메시지를 포장하기보다, 그래서 감동적으로 혹은 효율적으로 읽히게 하기보다, 메시지 전달을 위해 소설의 골격을 활용한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겨둘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는 게 두 책의 미덕인데 그 대목들은 물론 앞서 언급한 주제들에 관한 것이다. 사회 병리, 인간 불안 등 세상의 모든 문제들 말이다. 그것도 전통과 권위에 강하게 반항하는 이단아 이응준의 성난 목소리에 실린.

두 책은 장르를 달리하지만 사실상 한 몸이다. 짧은 메모를 묶은 [작가는…]이 먼저, [해피 붓다]에는 그 메모들을 문단 단위에 살린 대목이 꽤 된다. 두 책에 실린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응준의 문장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눈에 걸린다. 이응준은 묘한 소리를 하는 소년이 아닌가.

우선 이응준 자신과 인간 내면에 대해. “(나는)좌익 파시즘과 우익 파시즘과 대중 파시즘과 문화 파시즘의 적이자, 북한 민주화 운동가입니다.”

“승려처럼 살고 싶었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괴승(怪僧)이 되어 있다(그나마 요승(妖僧)은 아닌 게 불행 중 다행).” “인간들 대부분의 내면은 자유인이 아니라 관료주의자다. 아마 나도 그러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므로.”

“인간은 ‘하는 것’으로 혁명을 이루지만, ‘안 하는 것’으로 구원받는다.”

“순진한 자들은 타인들이 자신처럼 행동할 거라 착각하는 부류다. 순수한 자들은 타인들이 자신처럼 행동해야 옳다고 화가 나 있는 부류다.”

“어느 타인도 내가 될 수 없고, 나 역시 어떤 타인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고 느낄 때는 사랑을 할 적의 착각뿐이다.”

“유럽 휩쓴 ‘68혁명’ 남녀 대학생 교제 막은 결과”

그렇다면 글은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나.

“그러나 나는 문학을 공부하고 행하며 얻은 것들로써 이 세계의 비밀 앞에서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방인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인생은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내 슬픔이 뭐냐고? 나는 내 비천함과 비열함을 문학 말고는 고백할 방법이 없다.”

“글은 어떻게 쓰는 거냐고 내게 묻는다면, 물론 문학이란 ‘철학과 예술의 공학적 유기체’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몸과 마음의 병(病)’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다.”

“이전의 것들과 다른 시가 아니라면, 새 시집은 낼 필요가 없다. 공연한 반복은 죽음이고, 쓰는 자에게나 읽는 자에게나 한평생 그렇게 많은 시가 필요하진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서 세상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쯤 되는 문장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것도 있다.

“1968년 ‘68학생혁명’은 프랑스 낭떼르 대학교 여학생 기숙사의 남학생 출입금지 철폐 요구로 시작돼 전 세계로 번져 나갔다. 이 일의 교훈은, 연놈들의 놀아나는 것을 막으면, 혁명이 일어난다, 이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아무래도 더 눈길이 가는 건 세상의 민낯, 허위를 폭로하는 대목들이다. 이념·종교·정치를 얘기할 때 이응준의 언어는 보다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념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이념들 중에 생명력 있는 이념들이란 사실은 이념이라기보다는 신학에 가깝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해서, 이념의 외피를 두른 신학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우리가 다 동시대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그저 한동안 함께 살아 있을 뿐이다. 시대는 인간의 외부에서 모든 인간을 감싸는 게 아니라, 인간들 저마다의 내부에서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분란(紛亂)을 이해 못 하는 것이다.”

“신은 육박해오는 공포의 에너지를 공포의 형식으로 완화해주는, 거대하지만 보이지 않는 물음표다.”

“과학책을 읽으면. 세상사가 다 하찮고 부질없어 보인다. 특히 정치 같은 것들. 아수라장들. 죽기 전에 지랄 발광하고 싶어서 그럴듯하게 우글거리는 것들.”

“대한민국 국회는 바바리맨과 바바리우먼들의 환각 파티장이다.”

한국인이나 한국사회는 어떤가. 좀 길지만 인용하자면, 이런 대목들.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국이 불구덩이어서라기보다는, 한국인들이 제각기 불구덩이어서다. 좌파니 우파니 뭐니 하는 이념이 아니라, 불구덩이.”

“나는 독문학에서도 전공이 파시즘이고, 현대 파시즘의 꽃(?)은 역시 ‘대중 파시즘’이다 (…) 나는 한국과 한국인이 대중 파시즘에 쉽게 감염되고 휘둘리는 유전자와 후천적 무지를 가지고 있다고 늘 지적하곤 하지만 (…) 대중선동에 쉽게 감염되고 휘둘리는 한국인(당연히 북한인 포함)들 가운데 남한 사람들은 그간 대중 파시즘에 감염되고 휘둘리는 와중에 적어도 3분의 1 이상은 공중 언론과 정권의 선전을 지독히 불신하게 되었다 (…) 이제 누구든 이제껏과 똑같은 수작으로는 이들을 잘 속일 수 없다. ‘한국인들의 악한 마음’이 일종의 ‘독한 깨어 있음’으로 본의 아니게 성장한 것이다. 잘못된 착한 믿음보다는 무조건적이고 공격적인 불신이 오히려 낫다. 파시즘을 대적하는 제일의 무기는 일단 의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단도 있다. 작가 이응준이 보기에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요점은 이렇다는 얘기다.

“자신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몰두하는 타인에 대한 적개심.”

그러니까 선천적인 유전형질에, 내부 불안을 외부로 돌리는 버릇이 더해져 한국인이 파시즘에 쉽게 빠진다는 얘긴데, 유전형질의 정체는 샤머니즘인 듯하다. 앞서 언급한 논픽션[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 말미에는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씨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그중의 한 대목.

“남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북한 사람들보다 굉장히 건강한 상태이고 뭐든 훨씬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막상 정신분석을 해보면 정신질환의 강도가 비슷하게 나와요. 한민족의 정신적 유전자는 결국 샤머니즘인데, 이게 이북에서는 근대화에 실패하면서 다시 왕조로 되돌아가는 사이에 김일성교로 가서 안착한 거고, 이남에서는 미국 자본주의와 의회민주주의가 성립되면서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거기 가서 딱 흘레붙어버린 거야.”

“남북한 사람들 정신질환의 강도 비슷”


▎이응준의 산문집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는 잠언투의 문장이 많다. 오랜 궁리의 결과로 보인다.
용어가 바뀌었으니 다시 정리하면 샤머니즘이라는 선천적 유전형질에 성격 혹은 후천적 무지가 합작한 결과가 한국사회와 파시즘 사이의 친연성이라는 얘기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심증은 가지고 있지만 선뜻 말하지 못하는 내용들인가. 아니면 자폐적인 이응준이 정상이 아닌 건가. 솔직히, 속물스럽게도, 뭔가 화끈한 발언을 기대하고 이응준은 만났지만 정작 이응준은 말을 아꼈다. 아무리 제 혼자 떠들어봤자 세상이 변할 것 같지 않고, 실제로 그동안 변화가 없었고, 보다 더 심각하게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말해도, 문제 삼은 한국사회의 특징들은 가령 진영이나 이념 논리에 따라 왜곡돼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더욱 효과가 없다. 그래서 말 안 한다. 이런 생각인 듯 했다. 그래서 이응준은 [중앙SUNDAY] 연재를 하며 시작한 정치 평론도 끊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 등 새 책들에 실린 메모들은 정치평론은 아니다. 세부적으로 사례를 들어가며 특정 정치 국면에 대해 논평을 하는 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새 책들에 실린 수준의 발언은 들을 수 있었다. 전하면, 이렇다.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이 신랄하다.

“좌든 우든 한국 사람들은 너무 정치적이다. 그건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파시즘의 전염성에 취약한, 혹은 파시즘에 굉장히 적합한 스타일인 것 같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좀 더 풀어 설명한다면.

“한국사회를 보면 남한이나 북한이나 공히 파시즘에 대한 적합성이 있는 것 같다. 북한의 김일성이 저렇게 잡고, 이게 남한으로 와서는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합작해서 지금에 이른 거다. 뭐냐면 한국의 파시즘은 샤머니즘이 약간 들어 있는 것 같다. 샤머니즘이 끼어 있으면서 이상한 광기 비슷한 열정들이 있는데 그게 사회를 이성적으로 작동하게 하고, 뭔가 찬찬히 두고 보게 하고, 뭔가 분석하는, 능력을 방해하는 것 같다. 그런 능력들이 축적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굉장히 위험한 사회다.”

그런 진단에 들어맞는 사례가 있나.

“가령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전국을 들끓게 했던 붉은 악마 있지 않나. 돌이켜보면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고 어쨌든 통합의 수단이니 그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좋게 본 건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나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해서 그런 거지 그것도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런 문제가 있다면 해결책도 있나.

“어떤 형식으로든 그런 문제들을 글로 써놓으면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언젠가 소통이 되고 그게 밀알이 돼서 효과를 볼 날이 있겠지.”

이런 이응준의 발언을 반영해 20세기 작가의 요건으로 하나를 더 추가하자. 20세기 작가는 최소한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다. 동의하시나.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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