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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12)] 신민회 치밀한 작전이 성공시킨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잡어(雜魚)보다 고래” 안중근 결의도 빛났다 

하얼빈 방문 정보 듣고 ‘덩실덩실’, 제안 받고 주저 없이 결단
안창호가 독립위해 만든 국제 조직 지부 중요한 활약 중 하나


▎신민회 연해주 조직에 가입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에 맞춰 암살을 계획한다. 사진은 하얼빈 의거(1909. 10. 26) 당일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기 직전의 모습.
1958년 4월 23일 자 [국민보] 특집기사에는 “(을사늑약 후) 안창호, 장경 두 분 선생이 국사 문제로 주야 간 토의한 결과, 한 분은 귀국하여 또 한 분은 원동(遠東)에 가서 활동하기로 내정”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을사늑약 후, 미국 캘리포니아의 안창호와 동포들이 생각해 낸 국권 회복 방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국, 본국, 원동의 동포들을 아우를 수 있는 국제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한제국 본국에는 대략 2000만 동포가 있었다. 원동 즉 만주와 연해주에는 수 십만, 미국에는 1만여 동포가 있었다. 미국에는 이미 공립협회라고 하는 조직이 있었다. 따라서 미국 동포는 공립협회를 중심으로 국권 회복을 추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본국과 원동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전국 조직이 없었다. 그래서 공립협회에서 한 명을 선발해 본국에 파견하고, 또 한명을 선발해 원동에 파견해 전국 조직을 창설하고자 했다.

그런데 본국과 원동에서 어떤 조직을 만들지, 또 그 조직이 어떤 방식으로 미국 동포들의 공립협회와 연대할 것인지는 녹록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공립협회는 근본적으로 미국 동포들의 친목과 이권을 위한 조직이므로 국권 회복에만 전념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다음으로 이미 외교권을 박탈 당한 본국에서 공공연하게 국권 회복 운동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안창호는 공립협회를 표면 조직으로 하고, 공립협회 내부에 이면조직 또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국제 조직화하고자 했다.

이런 구상에서 안창호는 1906년 연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민회 본부조직을 창설했다. 신민회 본부조직은 공립협회의 이면조직 또는 비밀조직이었다. 아울러 본국에 신민회 본국조직, 원동에 신민회 원동조직을 창설함으로써 신민회가 미국, 본국, 원동의 동포를 아우를 수 있는 국제 조직이 될 수 있게 했다. 이런 구상을 안창호는 [신민회 취지서]에서 “무릇 우리 한국인은 내외를 논할 것 없이 통일 연합으로 그 길을 정하고, 독립과 자유로 그 목적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명시함으로써, 동포들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 자유 문명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신민회의 목표임을 천명했다.

안창호, ‘한양·미국·연해주’에 신민회 창설


▎1907년 대한제국에는 대략 2000만 동포가 있었다. 원동 즉 만주와 연해주에는 수십만, 미국에는 1만여 동포가 있었다. 안창호는 공립협회 비밀조직으로 신민회를 창설하고 본국과 원동 지역에 위원을 파견해 조직을 확장했다.
이런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안창호는 1907년 1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본국으로 향했고, 4월에는 한양에서 신민회 본국조직을 창설했다. 당연히 신민회 본부조직에서는 원동조직 창설도 추진했다. 이와 관련해 1958년 4월 23일 자 [국민보] 특집 기사에는 “원동에 제1차로 김성무씨, 제2차에 이정래(현행 이강)씨였는데, 대리씨가 안창호 선생의 재 고문을 받기 위하여 본국으로 직행하였습니다. 제3차로 정재관, 이상설, 양씨였는데”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사는 신민회 본부 조직에서 추진한 원동사업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07년 1월 7일 안창호가 공립협회 학무원 자격으로 미국을 떠나 본국으로 간 후, 신민회 본부조직에서는 제1차 원동위원으로 김성무를 파견했다. 김성무의 사명은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원동에 공립협회 원동조직 또는 신민회 원동조직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동에서 우리 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의 북간도, 서간도였다. 따라서 원동 조직은 블라디보스토크, 북간도, 서간도 중 하나에 설치해야 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이후 만주지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폭증해 북간도와 서간도에 원동지부를 창설하기는 불안했다. 그래서 신민회 본부조직에서는 원동조직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창설하는 것으로 했고, 김성무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의 현실은 미국이나 본국과는 아주 달랐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5만 명 가까운 동포들이 거주했지만, 학교도 없었고 언론도 없었다. 민족의식 역시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조직을 창설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김성무는 세계정세를 알리고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공립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를 배포하는 정도의 활동밖에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제1차 원동위원 김성무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신민회 본부조직에서는 1907년 8월 제2차 원동위원으로 이강을 파견했다. 이강(李剛)은 본명이 이정래(李正來)이고, 고향은 평안남도이며, 1878년 출생으로 안창호와 동갑이다. 이강은 훗날 회고하기를 임기반의 집에서 안창호를 처음 만났다고 언급했다. 임기반은 1890년대 평양 지역의 개화운동을 선도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독립협회 활동을 하던 1897년 고향인 평안남도 용강군으로 돌아가 활동했는데, 그때 그의 사랑방에 안창호, 이강, 임준기, 이갑 등 젊은 청년들이 대거 모여 들었다. 다시 말해 안창호와 이강은 20살 때 임준기의 사랑방에서 처음 만나 개화동지가 됐다.

1902년 안창호가 미국 유학을 떠난 다음 해, 이강도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다. 당시 임기 반은 인력개발회사의 관리가 돼 하와이 노동이민을 주선했는데, 기왕에 인연을 맺었던 평양지역 청년들이 많이 호응했다. 제일 먼저 이강이 1903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고, 이어서 임준기, 임치정, 송석준, 김성무, 이암 등이 뒤를 이었다.

이강, 조직 강화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러시아 연해주(州) 블라디보스토크시(市)에서 차로 3∼4시간 거리에 있는 크라스키노(옛 연추) 지역 외곽에 우뚝 서 있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 연추에서 애국동지 11명과 왼쪽 무명지를 잘라 피로써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했다. 또한 이강을 만난 후 1909년 1월 무렵 신민회 원동조직에 가입했다. / 사진:연합뉴스
하와이에 갔던 이강은 1년 뒤인 1904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안창호를 다시 만났다. 뒤이어 임준기, 임치정, 김성무 등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안창호를 만났다. 평안남도 출신인 그들은 안창호를 적극적으로 도와 공립협회를 창설했다. 안창호는 이들과 평생 동지 관계를 유지했다. 공립협회 창설 때는 물론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민회 본부 조직을 창설할 때도 이들과 함께했다. 당연히 원동 사업도 같이 했다.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올 때, 안창호의 뒤를 이어 공립협회 회장 자리를 맡은 인물은 이강이었다. 제1차 원동위원으로 선발된 인물 역시 평안남도 출신인 김성무였다. 이런 면에서 초기의 공립협회는 안창호와 평안남도 출신들이 주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평안남도 출신 중에서도 안창호가 가장 믿고 의지한 인물이 바로 동갑내기 동지 이강이었다.

그런데 안창호는 제1차 원동위원으로 파견된 김성무가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 대신 이강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그렇게 제2차 원동위원이 된 이강은 1907년 8월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해 9월 중순 본국에 도착했다. 그런 연고로 1958년 4월 23일자 [국민보] 특집 기사에 “제2차에 이정래(현행 이강)씨였는데, 대리씨가 안창호 선생의 재 고문을 받기 위하여 본국으로 직행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갔다고 이해된다. 위에 언급된 ‘대리씨’는 물론 ‘안창호의 대리 이강씨’라는 의미인데, 이는 당시 미국 동포들이 이강을 안창호의 대리로 생각했음을 알려준다.

한편 1958년 4월 23일자 [국민보] 특집 기사에서 “대리씨가 안창호 선생의 재 고문을 받기 위하여 본국으로 직행하였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이강을 제2차 원동위원으로 결정한 배후가 안창호라는 사실과 함께, 안창호가 이강을 본국으로 불렀음도 알려준다. 위의 내용 중 ‘안창호 선생의 재고문을 받기 위해’란, 안창호가 1907년 1월 미국을 떠날 때, 공립협회 운영과 관련된 자문을 이강에게 했었고, 이번에 이강을 본국으로 부른 것은 또다시 원동사업에 관한 자문을 하려는 것이라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1907년 9월 중순 본국에 도착한 이강에게 안창호가 원동사업에 관해 다양한 자문을 했을 것은 불문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강은 [향항(香港-샌프란시스코)에서 해삼위(海參威-블라디보스토크)]라는 회고담에서, “동경서 주자(鑄字) 살려던 돈으로 전부 조선서 소학교 교과서를 사 가지고 해삼위로 갔다. 해삼 위에는 해조신문(海朝新聞)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했다. 이 회상은 제2차 원동위원으로 선발된 이강은 애초 언론 사업에 주력할 생각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동포들이 운영하는 언론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강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면 우선 언론사를 세우려 계획하고, 필요한 주자(鑄字)를 동경에서 사려 했다. 하지만 무슨 사정인지 그 주자(鑄字)를 동경에서 구하지 못한 채 본국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9월 본국에 입국한 이강은 다음 해 3월까지 반년을 머물렀다. 그동안 이강은 안창호의 조언을 받으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상황을 확인하고 그곳 상황에 적합한 사업들을 구상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1908년 2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들이 운영하는 ‘해조신문’이 창설된 것이다. 그래서 이강은 언론사 설립에 쓰려던 자금으로 ‘소학교 교과서’를 샀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언론활동과 더불어 교육사업을 병행하려 했기 때문이라 이해된다. 이처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언론활동과 더불어 교육사업을 병행하라고 조언한 사람은 분명 안창호였을 것이다. 안창호는 자신이 귀국한 후, 신민회를 조직하면서 벌였던 교육·종교사업 등의 경험을 들어 이강에게도 언론·교육·종교사업 등을 추천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08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강은 그곳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의 나에게는 이 해삼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째로 그곳에 풍토가 좋지 못하였다. 또한 교포들이 많아서 외로운 줄을 모를 것이라던 당초의 예상은 실지 와서 보니 아주 판이했다. 그들은 일제의 기반을 벗어나기 위한 망명객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인접해 있는 함경도 사람들이었는데, 한일합병 전에도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갈 길을 찾아 이곳에 정착하게 됐던 것이다. 서로 자기만 잘 살기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이란 지극히 희박하였다. 때문에 처음의 얼마 동안은 무척 실망하였다. 조국에 계시는 어머니의 생각이 간절하였으며 또한 로스엔젤리스에서 다정하게 지내던 교포들이 애타게 그리웠다.” (이강, [나의 망명생활 50년기], [국민보] 1958. 9. 10일자)

난민 출신 연해주 동포, 민족의식 고취 형편 안돼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하차할지, 아니면 하얼빈 역의 다음인 채가구(蔡家溝) 역에서 하차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이 대기하고, 채가구 역에서 우덕순(사진)이 이토를 기다렸다. 의거 후 열린 몇차례의 형식적인 재판 끝에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1년 9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이강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포들에게 당연히 민족정신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동포 대다수가 1840년 전후 본국의 대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망명한 함경도 출신의 생활 난민이었다. 게다가 을사늑약 이후로는 본국의 일진회에서 파견한 농민들이 대거 들어옴으로써 친일 분위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포들 대부분은 민족정신, 국권 회복이란 논의 자체를 무시하고 비웃었다. 그래서 이강은 처음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곧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에 사는 교포들을 위해서”임을 상기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강은 해조신문의 편집인으로 참여해 민족정신, 국권회복을 촉구하는 논설들을 썼다. 1908년 5월 해조신문이 폐간된 후인 1908년 11월에는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해 최초의 구상대로 언론활동을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학교를 세우고 교회도 세웠다. 하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이런 현실을 이강은 훗날 “나는 무지한 교포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기가 여사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강은 점차 교포사회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아울러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 회원 전명운과 대한보국회 회원 장인환이 친일파 외교 고문 미국인 스티븐슨을 처단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민족정신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을사늑약(1905)과 고종 양위(1907)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교포 사회에도 국권 회복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이강은 애국지사들을 포섭해 공립협회 원동지부에 가입시켰다. 이 공립협회 원동지부는 표면적으로 공립협회를 드러냈지만, 이면적으로는 당연히 신민회였다. 그러므로 공립협회 원동지부는 신민회 원동조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강에 의해 신민회 원동 조직에 가입한 대표적인 애국지사는 우덕순(禹德淳)과 안중근(安重根)이었다. [우덕순선생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1880년생으로 안중근과 동갑이었다. 을사늑약 이전 우덕순은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덕순은 상동파 일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덕순은 을사늑약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이범윤 휘하에서 의병활동에 투신했다. 하지만 이강을 만한 이후 우덕순은 신민회 원동 조직에 가입하고 이강을 돕는데 헌신했다. 그런 배경에서 우덕순은 대동공보의 회계주임으로 일하게 됐다.

한편 안중근은 고종 양위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 후 이범윤 휘하의 의병활동에 투신하면서 우덕순과 동갑 친구이자 애국 동지가 됐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 연추에서 애국 동지 11명과 왼쪽 무명지를 잘라 피로써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했다. 안중근 역시 이강을 만난 후 1909년 1월 무렵 신민회 원동 조직에 가입했다. 안중근이 신민회 원동 조직에 가입함에 따라 ‘동의단지회’ 회원 11명도 가입한다. 이렇게 이강이 확장시킨 신민회 원동 조직의 활동 중에서 압권은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망명한 안중근·우덕순 ‘신민회’ 가입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 최재형 기념관에 있다.
[우덕순선생의 회고록]에 의하면 우덕순은 1909년 음력 9월 1일자 원동보(遠東報)를 보고 음력 9월 중순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할 계획임을 알았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애국지사들 사이에 이토 히로부미 사살 문제가 크게 제기됐다고 한다. 그날 밤, 대동공보의 편집국장 유진율(兪鎭律)과 주필 이강은 우덕순을 방문해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한다. 하얼빈을 방문하기로 예정된 이토 히로부미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사살 문제는 이강과 우덕순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진율과 이강의 질문에 우덕순은 “나는 동지를 기다리네”라고 대답했고, 그들은 “누구? 안?”하고 물었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된 ‘안’은 안중근을 의미했다. 우덕순은 “그렇지. 그 사람하고 의논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당시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700리 떨어진 연추에 머물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이강은 [나의 망명생활 50년기]에서 “일제의 침략 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보를 입수해 나는 그날 교포들과 의논을 했다.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데 그 자를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교포들은 안 의사가 사격의 명수니 그를 불러 하얼빈으로 파견하면 문제없이 이토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황급히 서둘러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라고 회상했다. 이 회상으로 본다면 이강은 우덕순을 비롯해 신민회 원동조직원들과도 이토 사살 문제를 논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강의 편지를 받은 안중근은 즉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날이 음력 9월 8일이었는데, 당시 상황을 이전(李全)의 [안중근 혈투기]에서는 “이강은 ‘작일(昨日) 형에게 내해(內海:해삼위로 오라)를 재촉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보았소?’하며, 전일 발간된 원동보와 대동공보를 내보였다. (중략)안중근은 회심의 미소를 보이며 ‘한 그물 잡어(雜魚)보다 한 마리 고래가 났다’고 하며 무릎을 쳤다”고 묘사했다. 당연히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해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우덕순선생의 회고록]에는 “8일 저녁에 (안중근)이 돌아왔습니다. 그 신문을 내주니 이토의 기사를 읽고 나서는 참말 일어나서는 춤을 덩실덩실 추었습니다.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내가 물은즉 ‘가야지’ ‘어디로?’ ‘하얼빈으로 가야지’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즉결(卽決)되고 말았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아마도 안중근은 먼저 이강을 만나 이토 사살을 확정하고, 저녁에 동갑친구 우덕순을 찾아가 위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이해된다.

안중근 체포되면서 “대한 만세” 세 번 부르짖어


▎안중근(사진)은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에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암살을 결심했다.
요컨대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이강, 우덕순 등 신민회 원동 회원들이 발의하고, 그것을 안중근이 결단함으로써 추진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강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하차할지, 아니면 하얼빈 역의 다음인 채가구(蔡家溝) 역에서 하차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강은 하얼빈 역에 안중근을 대기하게 하고, 채가구 역에 우덕순을 대기하도록 했다. 음력 9월 9일 오전, 이강은 하얼빈으로 출발하는 안중근과 우덕순에게 각각 독일제 권총 한 자루와 총알 7알을 주고 배웅하면서 “한 알은 가슴을 쏘고, 한 알은 머리 그리고 한 알은 다리에 나머지는 고관을 쏘시오”라고 당부했다. [우덕순선생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때 안중근과 우덕순은 “다 쏜 다음에는 비겁하게 달아나지 말고 총을 내던지고 그 자리에서 ‘대한 만세’를 크게 부를 것, 우리들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꾸밀 것, 또 될 수 있는 대로 생금(生擒)돼 우리의 정정당당한 이유를 발표하면서 우리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여러 외국에 선전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1909년 음력 9월 13일 오전 9시 반쯤,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서 하차했다. 안중근은 이토를 향해 4발을 쏘고 또 다른 고관을 향해 3발을 쏘았다. 이토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면서 “대한 만세”를 세 번 부르짖었다. 이처럼 이토 히로부미는 신민회 원동 조직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사살됐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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