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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9)] ‘노처녀가’, 시집 못 가는 양반 처녀의 노래 

‘집요한 임금’ 정조의 노총각·노처녀 결혼대작전 

정조, 나라가 나서 중매 선 혼인담 [김신부부전] 작성해 국정에 활용
“혼인시켜줄게, 비 내려다오” 결혼대작전은 가뭄 대책 매뉴얼의 일환


▎엘리자베스 키스의 목판화 [시골 결혼 잔치](1921년 작). 한국인의 혼례는 온 마을이 함께하는 잔치였다. 결혼 잔치의 흥겨움을 섬세하고 정감 있게 표현했다. / 사진:제물포구락부
"답답한 우리 부모 가난한 좀 양반이 / 양반인 체된 체하고 처사가 불민하여 / 괴망(怪妄)을 일삼으니 다만 한 딸 늙어간다 / 적막한 빈방 안에 적요하게 혼자 앉아 / 전전불매 잠 못 들어 혼자 사설 들어보소 / 어떤 처녀 팔자 좋아 이십 전에 시집간다 / 이 내 팔자 기구하여 사십까지 처녀로다”([잡가본] ‘노처녀가’)

작자 미상인 ‘노처녀가’는 조선 후기에 여인들의 처소 규방(閨房)에서 유행한 가사(歌辭)다. 어느 양반의 딸이 나이 사십 되도록 혼인하지 못한 기구한 팔자를 한탄하듯 노래하고 있다. 누가 지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잠 못 드는 노처녀의 ‘혼자 사설’이 퍽 짠하다. 그녀는 어쩌다가 혼기를 놓치고 부모를 원망하게 됐을까?

혼사를 그르친 원흉은 가난과 체면이었다. 호환, 마마, 전쟁이 무서운 재앙이라지만 백성의 일상을 지배한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이다. 양반이라고 해서 피해 갈 수도 없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면 잔반(殘班), 몰락한 양반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딸을 아무 데나 시집보내지 않았다. 양반입네 하며 신분과 집안을 깐깐하게 따지니 중매인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괴상망측한 체면 놀음에 딸은 머리도 올리지 못하고 속절없이 늙어갔다.

“혼인 사설 전폐하고 가난 사설뿐이로다 / 어디서 손님 오면 행여나 중매신가 / 아이 불러 힐문한즉 풍헌 약정 환상(還上) 재촉 / 어디서 편지 왔네 행여나 청혼선가 / 아이더러 물어보니 외삼촌의 부음이라 / 애닳고 설운지고 이 내 간장 어이 할꼬 / 친구 없고 혈족 없다 위로할 이 전혀 없네”([잡가본] ‘노처녀가’)

사십인 노처녀는 애간장이 탔다. 조선 시대 양반가 여성은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가부장의 아내이거나 어머니로서만 역할을 인정받았다. 혼기를 놓친 노처녀는 온전한 성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 노릇 못한다는 자괴감이 컸으리라. 친구들도, 동기들도 모두 시집가고 장가가서 위로해 줄 이도 없었다. 탈출구는 오매불망 혼인밖에 없었다. 그 애절한 열망이 노래에 낱낱이 담겨 있다.

어디서 손님이 오면 행여나 중매인일까, 마음 졸인다. 알고 보니 환상(還上), 봄에 꾼 곡식을 이자 쳐서 갚으라는 재촉이다. 편지가 와도 행여나 청혼서일까, 공연히 기대한다. 집안의 큰일인 외삼촌의 부음이지만 노처녀는 섭섭함이 앞선다. 노래가 널리 퍼진 것을 보면 같은 처지인 여인이 적지 않았으리라. 그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특별한 청혼서가 날아들었다. ‘나라님’이 중매를 서기로 한 것이다.

혼인 사업에 태업한 관리 경질하기도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표준영정. / 사진:전통문화포털
“나이가 찼는데도 혼사를 치르지 못한 남녀를 특별한 규칙과 관례로 돌보아주는 것은 옛 성군들의 어진 정사에 부합된다.” 조선 후기의 개혁 군주 정조가 1791년 2월 9일에 내린 전교다. 왕은 봄을 맞아 혼기가 지난 노처녀와 노총각들을 돌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신하들은 임금의 뜻을 성실하게 받들지 않았다. 한성부에 과년한 남녀를 수소문해 아뢰라고 여러 차례 일렀는데도 조사가 지지부진했다. 정조는 이를 엄히 문책했다. 한성부의 낭관과 부관들을 잡아 가두고 판윤을 교체했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 실무 책임자들을 벌하고 시장을 경질할 정도로 정조 임금은 이 사안을 중시했다. 왕의 의지를 확인한 한성부 관리들은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녔다. 한성 5부에서 가난해 혼인을 제때 하지 못한 자들의 명단을 올렸는데 사족과 평민을 합쳐 모두 281인이었다. ([정조실록] 1791년 6월 2일) 나라에서 돈 500전과 포목 2단씩 지원해 이들의 혼사를 서둘렀다. 정조는 매월 업무 보고를 받으며 ‘혼인 사업’을 직접 챙겼다.

사실 이 사업은 조선의 역대 군주들이 이미 시행해온 일이었다. 정조가 전교에서 밝힌 것처럼 혼사를 치르지 못한 남녀를 나라에서 돌보는 규칙과 관례가 있었다. 조선에서 혼기를 놓친 노처녀와 노총각은 구휼 대상이었다. 가난해서 혼인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사가 아니라 나랏일이었다. 관아에서 혼수를 지원해 배필을 맞게 했다. 조선의 대법전 [경국대전]과 훗날 이를 재정비한 [속대전]에도 아래 조항을 국법으로 명시했다.

“사족(士族)의 딸로 나이 삼십 되도록 가난해 시집을 못 가는 자는, 예조에서 임금에게 아뢔 헤아리고 혼수를 지급한다. 그 집안이 궁핍하지도 않은데 30세 이상이 차도록 시집가지 않는 자는 그 가장을 엄중하게 논죄한다.”([경국대전] 예전 ‘혜휼’)

“장가가고 시집갈 때가 지난 자는 한성부와 각 도를 엄히 신칙해 수소문하고 방문하며, 더욱 심한 자는 호조와 감영·고을로 하여금 별도로 보태고, 돌보고 돕게 한다.”([속대전] 예전 ‘혼가’)

유교 통치체제를 완성한 군주로 평가받는 성종도 과년한 미혼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집안 형편상 혼인하지 못한 자들을 나라에서 구휼할 수 있도록 절목(節目, 시행규칙)을 만들게 했다. 예조에서 임금의 전교를 받들어 25세 이상 처녀들을 조사했는데, 가난해 예를 갖출 수 없는 자들은 쌀과 콩을 합쳐 10석씩 지급해 혼수로 삼게 했다. 사족이 아닌 자는 그 절반을 줬다. 혈세를 들인 만큼 혼인도 서둘렀다. 이미 정혼한 자는 20일 안에, 아직 정혼하지 않은 자는 한 달 안에 혼인하도록 독촉했다.([성종실록] 1472년 5월 7일)

“한성 내 모든 노총각·노처녀 혼인시켜라”


▎김정호의 [경조오부도]. 한성부 관내 5부 (동부·서부·남부· 북부·중부)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1861년에 간행한 [대동여지도] 제1첩에 수록됐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후기에 제도와 문물을 재정비한 영조도 노처녀·노총각 구휼을 먼저 처리해야 할 중요한 나랏일로 받아들였다. 경연 자리에서 참찬관 박문수가 “제때 혼인하도록 하는 것이 왕정의 선무(先務)”라고 아뢰자 왕은 크게 공감을 표했다. 영조는 한성부 당상, 각 도의 감사, 고을 수령들에게 “혼기가 지난 자들을 수소문하고 혼수 준비를 도와 때를 넘기는 우환이 없도록 하라”고 명했다. 지금의 기획재정부 격인 호조와 세금 출납 및 지출을 담당한 선혜청도 뒷받침하게 해 일의 체계를 정연하게 갖췄다.([승정원일기] 1730년 12월 24일)

정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규칙과 관례에 따라 혼인 사업을 시행하되 통 크게 지원하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한성부 관리들도 처음에 소홀히 다루다가 임금에게 문책을 당하자 대오각성했다. 불과 몇 달 만에 남녀 281인을 찾아내 돈과 포목을 지급하고 혼인을 서두르게 했다. 노처녀·노총각의 혼사는 착실하게 진행됐고 오직 한성 서부(西部)의 두 사람만 예를 이루지 못했다. 정조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일은 처음을 가지런히 하는 게 귀하고, 정치는 마무리에 힘쓰는 데 기대를 건다(事貴齊始 政期勉終).”(이덕무, [김신부부전])

정조가 얼마나 집요한 임금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은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랐다. 한성부에 두 사람을 도와 각각 혼사를 성사시키라고 지시하고, 호조와 선혜청에는 보조를 늘려 더욱 풍요롭게 해주라고 주문했다. “좋은 일이 완성되게 하라”는 강력한 의지였다. 왕명에 따라 ‘결혼대작전’이 펼쳐졌다. 그 실화가 규장각 검서 이덕무의 [김신부부전]에 생생히 담겨 있다.

노총각은 28세 유생 김희집이었다. 그는 현감의 손자였지만 서출(庶出)이었다. 본처 소생의 적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애초 혼인을 약속한 집안에서는 신분과 형편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혼을 통보했다. 가난한 서출이라 딸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처녀는 유생 신덕빈의 21세 서녀(庶女)였다. 역시 적통이 아닌 데다 살림마저 빈궁해 약혼한 집안에서 혼사를 미뤘다. 알고 보니 그사이에 배반하고 다른 사람과 혼인한 것이었다.

한성 서부령(西部令) 이승훈은 난감했다. 혼사가 꼬인 두 사람이 하필이면 자기 관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나랏일에 집요한 임금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나고 오금이 저렸다. 이전 보고와 어긋난다고 엄격하게 추궁해 책임을 물을 게 뻔했다. 한성부에서도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판윤 이하 관리들이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다고 했던가. 이때 궁여지책 하나가 이승훈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희집과 신씨 처녀가 통혼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두 사람 다 문벌이 좋고 나이 차도 적당하며 형편과 처지 또한 비슷합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이름과 성을 임금께서 같은 날 보시게 됐으니 이것은 하늘이 정한 인연입니다. 어찌 배필을 이루지 않겠습니까?”(이덕무, [김신부부전])

옳다구나, 한성판윤 윤구익은 무릎을 쳤다. 그는 서부령 이승훈과 주부 윤형을 중매로 삼아 각각 김희집과 신덕빈의 집에 보냈다. 이승훈의 제안에 김희집은 고마워하면서도 선뜻 응하지 못했다. 또다시 버림받을까봐 염려한 것이다. 관건은 처녀 집안의 뜻이었다. 신덕빈은 한성부 관리들이 중매에 나선 것을 감격스러워했다. 그가 기꺼이 허락함으로써 혼인은 성사됐다. 택일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1791년 6월 12일이었다.

성대한 혼례와 아름다운 미담의 정치술


▎[속대전]은 조선 영조 때 간행한 통일 법전이다. 나라에서 혼기가 지난 남녀를 조사해 혼인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정조는 한성부의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 임금의 정치술이 작동했다. 그는 이 혼례를 국가가 주관하는 성대한 행사로 치를 생각이었다. 나라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초대형 이벤트다. 백성의 구경거리로 더할 나위 없다. 한성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 큰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임금의 은덕을 널리 과시할 수 있다. 나랏일의 동력을 확보할 수도 있겠다. 정조는 호조판서 조정진과 선혜청제조 이병모를 불러들였다.

“김희집과 신씨 처녀의 혼례를 두 경에게 맡긴다. 조 판서는 희집을 아들로 여기고, 이 제조는 신씨를 딸같이 보라. 그대들이 각각 두 집을 위해 혼서를 대신 지으라. 혼수와 폐백, 호위와 의식 등에 필요한 세세한 것들을 모두 하사한다. 이는 왕의 말을 믿게 하자는 것이다. 경들은 마음을 다해 준비하라.”(이덕무, [김신부부전])

드디어 6월 12일, 새벽닭이 울자마자 혼례 절차가 시작됐다. 혼인 행렬은 청사초롱과 홍사초롱 쌍쌍이 앞에서 인도하고 한성 5부의 서리와 하인들이 좌우에 호위해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구경꾼들이 몰려나와 저잣거리는 떠들썩했다. 나라의 대신들이 왕명을 받들어 혼주로 나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칭송하는 목소리가 입에서 입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번져나갔다. 화제의 중심에는 임금의 은덕이 빛나고 있었다.

거국적 혼인 이벤트는 가뭄 대책 매뉴얼이기도


▎19세기 문신이자 서화가인 김정희의 혼서(婚書). 아들의 혼인을 위해 1852년 11월 21일에 썼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정조는 또 당대 최고의 문장가 이덕무에게 전을 지으라고 명을 내렸다. 바로 [김신부부전]이다. 기이한 이야깃거리이자 아름다운 미담이 아닌가. 국정 홍보로 효과 만점이다. ‘어진 정사’는 기록에 남아 오랫동안 전해질 것이다. 실제로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정약용의 [목민심서] 등에 김희집과 신씨 처녀의 혼사가 상세히 다뤄졌다. ‘애민 군주’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덕무는 [김신부부전]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지치(至治, 지극한 다스림)의 세상이다. 아, 아름답도다!”

그런데 조선 시대 군주들이 과년한 남녀를 혼인시키려 한 것은 단순히 애민 차원의 은덕만은 아니었다. 사실 여기에는 매우 유교적인 가치관이 투영돼 있다. 화기(和氣), 우주의 조화로운 기운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게 노처녀·노총각 구휼과 무슨 상관일까? 천인감응(天人感應),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기 때문이라고 유가(儒家)에서는 바라본다. 이런 관점은 조선 시대 임금과 유학자들의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행].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풍속도 화첩에 수록돼 있다. 혼례를 치르러 사모관대를 갖추고 신부 집으로 가는 신랑의 행렬을 그렸다. 앞에서 기럭아비가 목기러기를 안고 행렬을 인도한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남녀가 혼인해 함께 사는 것이 인간의 큰 도리이니, 만약 시기를 어기면 화기를 상하는 데 이를 것이다.”(성종)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처녀로서 시집 못 간 자가 매우 많아 그 원망이 화기를 손상하기에 충분합니다.”(박문수)

만약 화기가 상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조선 사람들은 가뭄·홍수·태풍·지진·폭설 등 자연재해의 원인을 우주의 조화로운 기운이 깨진 데서 찾았다. 그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법은 천인감응에 따라 인간 세상의 다스림에서 출발했다. 일례를 들어보자. 1535년 겨울에 천둥이 여러 차례 치고 태백성(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중종이 이를 염려해 신하들과 의논했다. 영의정 김근사가 임금에게 아뢨다.

“옛사람들이 재변은 모두 백성의 원망 때문에 일어난다고 했으니, 반드시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어 재변을 그치게 하셔야 합니다.”([중종실록] 1535년 10월 15일)

재변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것이다. 특히 백성의 원망에 초점을 맞췄다. 원망의 진원지를 찾아 혜택을 베푸는 것이 급선무였다. 조선 시대 가뭄대책이 이와 같았다. 1540년 중종은 경전과 역사서에서 기우(祈雨), 비 오기를 비는 조항을 초록하고 예조와 승정원에 비치했다. 특히 중국의 옛 제도와 문물을 다룬 [문헌통고]를 비중 있게 참고했다. 임금이 제단을 마련해 기도하는 것 외에도 백성의 원망을 해소하는 방안들이 소개됐다.

“죄수와 실직자들을 다시 심리해 억울함을 풀어주고, 어진 사람을 기용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을 내치며, 부역과 세금을 감해 가볍게 해주고, 과부·홀아비·고아·독거노인 등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방문해 위로하며, 시집·장가 못 간 사람들을 구휼해준다.”([중종실록] 1540년 5월 10일)

저출산 시대, 결혼과 출산은 개인사 아닌 나랏일


▎조선 후기 문장가 이덕무의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그는 정조의 명으로 [김신부부전]을 지어 규장각 일지에 싣고 자신의 문집에도 남겼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정조가 혼기를 놓친 남녀를 돌보고 거국적인 혼인 이벤트를 연 것은 ‘가뭄 대책 매뉴얼’의 일환이기도 했다. 혼인하지 못한 노처녀·노총각의 원망을 해소해 화기, 우주의 조화로운 기운을 상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봄여름 사이에 백성이 비를 바랄 때 이렇게 임금이 ‘어진 정사’를 베풀면 기우제를 올리지 않고도 곧잘 비가 내렸다고 한다.

“김희집과 신씨 처녀의 혼인 중매가 성사되자 비가 즉시 후련하게 내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것이 이처럼 빠르다.”(이덕무, [김신부부전]) ‘노처녀가’에서는 나이 사십 되도록 시집 못 간 양반의 딸이 부모를 원망하고 있다. 작자 미상인 노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시대요 사람들이다. 시대가 귀를 기울이고 노처녀의 처지를 헤아렸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노처녀의 상이 노래에 녹아들었다. 원망은 가난과 체면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체념으로 바뀌어갔다.

“우리 부모 무정하여 내 생각 전혀 없다 / 부귀 빈천 생각 말고 인물 풍채 마땅커든 / 처녀 사십 나이 적소 혼인 거동 차려주소 / 김동(金童)이도 상처(喪妻)하고 이동(李童)이도 기처(棄妻)로다 / 중매 할미 전혀 없네 날 찾을 이 뉘시던고 / 검정 암소 살져 있고 봉사 전답 같건마는 / 사족 가문 가리면서 이대로 늙히노니”([잡가본] ‘노처녀가’)

조선 후기 여성들이 모두 혼인에 매달렸던 것은 아니다. 부모에게 매인 사족 여성과 달리 경제적으로 자립한 평민 여성은 혼인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수삼의 기인 열전 [추재기이]에는 삼월이라는 쉰 살 노처녀가 등장한다. 그녀는 떡과 엿을 판 돈으로 연지와 분을 사서 아침저녁으로 화장했다. 남편도 없는데 화장하는 이유를 물으니, 세상 남자들이 다 남편감이라고 했다. 삼월이를 눈여겨본 한양 사람들이 민요를 지어 불렀다. “처녀에게 배필이 많으니 동네 어귀에 사는 삼월이로다.”

과거에는 남녀가 혼인하는 것이 인륜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혼자 살면서 인생을 즐기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가정을 꾸리고 싶어도 경제적 여건이 안 돼서 기약 없이 미루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은 지금 심각한 저출산으로 미래를 위협받고 있다. ‘결혼대작전’이 급선무다. 결혼과 출산은 이제 개인사가 아닌 나랏일이다. ‘집요한 임금’ 정조라면 어떻게 할까?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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