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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0)] 밀사 한형권, 한인사회당 통일전술을 레닌에게 보고하다 

통합임정을 동아시아 사회주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던 한인사회당 

미국과 러시아 외교노선 갈등 당긴 밀사 파견 문제
한인사회당과 신세대 세력 업고 실권 장악한 이동휘


▎러시아 혁명 당시 레닌의 연설을 그린 프로파간다 그림.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자신의 생각을 보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소련의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다.
상해임정은 통합되기 이전부터 지역 갈등과 노선 갈등으로 분란을 겪고 있었다. 평안도 출신과 기호 출신 사이의 지역 갈등이 적지 않은 데다, 평안도 출신의 실력양성 노선과 기호 출신의 무장투쟁 노선까지 충돌함으로써 분란은 더욱 깊었다.

이런 상황에 함경도 출신 이동휘가 총리에 오르자 통합임정에는 기왕의 갈등에 이념 갈등과 세대 갈등이 더해지게 됐다. 이념 갈등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간의 갈등이었다. 이 같은 이념 갈등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한인사회당 당수 이동휘가 통합임정의 총리로 취임함으로써 본격화됐다.

한편 세대 갈등은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이었다. 통합임정의 대통령 이승만, 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은 1890년대의 독립협회 때부터 활동하던 구세대 지도자들이었다. 반면 각부 차장들은 1900년대 이후 활동하기 시작한 신세대 활동가들이었다. 젊은 세대인 차장들은 기왕의 지역 갈등과 노선 갈등을 지속하는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이동녕 등 구세대 지도자들에게 실망했다. 그 결과 신세대 차장들은 구세대 지도자들의 영향으로부터 점점 벗어나게 됐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한형권 밀사 파견이다.

한형권 밀사 파견에 관련된 자료는 당사자 한형권의 [수기(手記)]를 비롯해 포타포프 [보고서], 안창호 [일기], 김구 [백범일지] 등이 있다. 한형권은 해방 후인 1948년 9월 [가톨릭청년]이라는 잡지에 ‘임시정부의 대아외교(對俄外交)와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전말’이라는 [수기]를 발표했다. [수기]에 의하면 한형권은 1919년 9월경 상해에 도착했다. 이동휘와 김립, 남공선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1919년 9월 18일 상해에 도착했고 그 직후 한형권도 도착한 것으로 이해된다.

사회주의 공작 벌인 러시아의 포타포프


▎1919년 8월 이동휘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동휘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한인사회당의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냈다. 사진 앞줄 오른쪽 끝이 한인사회당의 김립. 김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진순, 이동휘, 신원미상, 김철수, 계봉우, 신원미상. / 사진: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
1919년 11월 3일, 이동휘가 통합임정의 총리에 취임하고 김립은 총리 비서장에 취임했다. 당시 한형권은 이동휘, 김립, 남공선 등에게 “우리는 열강에 대하여 다소간 동정을 얻을 만한 선전공작은 필요하지만 실제의 원조는 추호도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우리는 새로 출현된 노농 러시아와 더불어 악수하여야 할 것”이라고 두세 번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동휘와 김립은 동정의 말뿐 실행은 없었다고 한다. 한형권의 주장이 너무 과격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기왕의 미국 중심, 국제연맹 중심의 외교를 접고 새로 러시아 중심, 코민테른 중심의 외교를 추진하자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통합임정의 국가체제도 기왕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소비에트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자는 의미였다.

이것은 이동휘나 김립에게도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상해임정은 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제와 국제연맹 가입을 공언했다. 그것을 소비에트민주주의 체제와 코민테른 가입으로 바꾸는 것은 총리 이동휘 혼자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당시 통합임정의 요원들 다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휘와 김립은 동정의 말뿐 감히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당시 상해의 한인사회당 요원 중에서 가장 과격한 인물이 한형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차 러시아 공산당 공작원 포타포프가 1919년 연말 상해에 나타났다. 그는 1920년 여름까지 상해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혁명 공작을 벌이다가 귀국했다. 1920년 11월경 모스크바에 도착한 포타포프는 상해에서의 공작 결과를 보고했다. 그 보고서에서 포타포프는 “1919년 12월 상해에 도착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능동적 활동을 비롯하여 한국인이 설립한 다양한 조직에 공개적으로 참가했습니다”라고 했다. 상해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공작했다고 밝힌 것이다. 포타포프는 이미 성사된 통합임정을 와해시키고 새로이 대한국민의회 중심의 재통합을 공작하기도 했다.

그 결과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과 회원 한형권 및 상해임정의 외무차장 장건상이 재통합 문서에 서명까지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첫째 포타포프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통합임정을 재조직하고자 공작했고, 둘째 그런 포타포프 공작에 문창범, 한형권, 장건상 등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특히 문창범은 통합임정에서 소외됐기에 대한국민의회 중심의 통합임정을 새로 조직하려 했다.

이와 관련해 안창호 [일기] 1920년 5월 20일 자기록에 “이동녕과 이시영이 말하기를, 이동휘 총리가 독(獨)히 한형권을 아(俄) 노농정부에 파송할 때 상해 정부는 민의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일인(日人)과 통하는 분자가 서로 혼합하였음으로 이는 신(信)할 수 없는 것이요, 아령(俄領)에 정부를 신(新)히 조직할 터인데 아무개, 아무개가 영위(營爲)하는 중에 이 총리가 그중에 참가된지라, 그 조직한 것을 한형권에게 부송(付送)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안창호가 증거를 대라 하자 이동녕과 이시영은 “그때 노농정부에 보내는 서류를 포타포프가 여운형, 김갑수에게 말했다”면서 “우리 생각에는 이 총리가 이 일을 넉넉히 행할 위인으로 안다”고 했는데, 여운형에게 전해 들었고 믿을 만했다는 의미다. 김구 [백범일지]에는 “이동휘가 자기 심복인 한형권을 비밀리에 먼저 파견하였던 일이 있었다. 이동휘는 한이 시베리아를 통과하고 난 뒤에야 이를 공개하였으니, 정부나 사회에 물의가 분분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런 기록들로 볼 때 포타포프의 공작에 이동휘 역시 동조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한형권의 [수기]에 의하면 당시 포타포프를 방문한 사람들은 한형권 자신을 비롯해 안창호, 여운형, 이광수 등이었다고 한다. 포타포프는 자신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파리) 강화회담, 국제연맹 그리고 연합국 정부에 대한 희망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한편, 그와 동시에 러시아 혁명 사상을 폭넓고 과감하게 보급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통합임정을 친러시아 노선으로 바꾸려 했다.

포타포프의 공작에 동조한 이동휘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해를 탈출한 뒤 저장성 자싱에 은거하던 시절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 사진의 뒷줄 오른쪽 셋째가 임정 산하 한인애국단장 김구. 다섯째가 임정 주석을 지낸 이동녕.
이와 관련된 기록이 안창호 [일기]에도 나타난다. 1920년 1월 14일 자 기록에 “오후 8시경에 안정근씨를 봉(逢)하여 아국(俄國)에 파인(派人) 사건을 명일 상의키로 약(約)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보면 안창호는 1920년 1월 14일 이전 포타포프를 만났고, 그때 포타포프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안창호는 이 문제를 안정근과 논의할 생각이었는데 안정근은 안중근의 동생이었다. 다음 날 안창호와 안정근은 러시아 밀사 문제를 논의한 결과 안정근의 동생 안공근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사실들은 러시아 밀사 파견은 비록 이동휘가 있었지만 사실상 안창호가 배후에서 주도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1920년 1월 16일 오전 10시경 이동휘가 안창호를 찾아왔다. 포타포프와의 교섭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그 즈음 이동휘는 한형권으로부터 포타포프와의 교섭 문제를 보고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동휘는 안창호와 포타포프와의 교섭 문제를 논의하면서 자연스럽게 한형권을 밀사로 추천하려 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오후 9시경 여운형이 안창호를 찾아와 밀사로 가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 시점부터 한형권과 여운형은 러시아 밀사를 놓고 경쟁 관계가 됐다. 한형권은 이동휘를 통해 밀사가 되려 했고, 여운형은 안창호를 통해 밀사가 되려 했다.

당시 안창호는 타협할 수도 있었다. 밀사를 두 명으로 해서, 한 명은 자신이 추천하고 또 한 명은 이동휘가 추천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명 모두 자신이 결정하려 했다. 미국의 양해하에서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추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기존의 미국 중심 외교를 유지하면서 러시아와의 외교 가능성을 탐색하려 했다. 반면 이동휘는 포타포프 의견대로 기왕의 미국 중심 외교를 철회하고, 러시아 중심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그래서 안창호는 이동휘가 추천하는 러시아 밀사를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동휘 역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당시 러시아 밀사 파견은 친미 외교 노선과 친러 외교 노선 사이의 이념 갈등을 폭발시킨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밀사 파견 문제로 분열된 통합임정


▎안중근이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 감옥으로 면회를 온 동생 정근(왼쪽 셋째)·공근(왼쪽 넷째) 형제를 만나고 있는 사진이 북한 월간 화보 [조선] 1월 호에 공개됐다. / 사진:연합뉴스
1902년 1월 21일 오후 1시, 이동휘는 안창호를 찾아와 러시아 밀사 문제를 속히 결정하자고 재촉했다. 이에 1월 22일 오후 2시 국무회의에서 러시아 밀사 파견을 논의하고 여운형, 안공근 2명으로 결정했다. 이 사실로 본다면 러시아 밀사 파견은 안창호 의견대로 결정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동휘가 노골적으로 반발하지 않은 것은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총장들이 안창호에게 찬성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해 한형권 [수기]에는 “하루는 포타포프 장군에게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중략) 그는 개연히 응낙하고 곧 한(韓), 아(俄) 연락의 필요조건을 열거하여 성문한 후에 나는 그것을 번역하여 국무총리 이동휘씨에게 전달한바, 그 익일(翌日) 정부회의에서 그 제의에 대하여 토의가 있은 결과 전수(全數) 가결”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면, 이동휘는 1월 21일 오전 한형권으로부터 보고받은 후, 오후 1시 안창호를 찾아가 밀사 문제를 속히 결정하자고 재촉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한형권을 러시아 밀사로 파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창호 때문에 러시아 밀사는 여운형과 안공근으로 결정됐다. 당연히 이동휘 측은 대책을 논의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안창호 [일기] 1920년 1월 25일 자 기록에 “김립 군이 내방하여 (중략) 국무원에서 결정한 아국파원사건(俄國派員事件)의 비밀이 벌써 발로(發露)되었다 하며, 그 근원은 군무차장이 홍도(洪濤)에게 말하고 홍이 또 아령인측(俄領人側)으로 전파하여 이를 유예균(劉禮均)이 듣고 내보(來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김립이 찾아와, 여운형과 안공근이 러시아 밀사로 결정된 사실이 노출됐음을 알렸다는 것인데, 이는 노출된 여운형과 안공근을 교체해야 한다는 뜻과 같았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1월 26일 오후 2시 안창호는 국무회의에 참석해 여운형과 안공근에게 신임장과 국서를 주기로 의결했다. 이로써 여운형과 안공근이 러시아 밀사로 확정됐다.

그런데 그날 오후 9시 이동휘가 안창호를 찾아와 여운형 밀사를 취소하라 요구했다. 내놓고 말은 안했지만 여운형 대신 한형권을 파견하라는 의미였다. 이 요구에 안창호는 “다시 생각하자”고 대답했다. 이동휘는 28일에도 같은 요구를 했고 안창호는 전처럼 대답했다. 아마도 이동휘는 자신의 요구가 거부됐다고 생각한 듯하다.

사회주의 노선의 한형권을 밀어붙인 이동휘


▎1935년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하는 안창호와 그를 마중한 여운형. /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결국 1920년 1월 31일 안창호를 다시 찾은 이동휘는 “아국(俄國)에 밀파원(密派員) 한형권을 파송하였노라”고 통보하면서 “여운형 군은 절대로 파송치 않겠노라”고 했다. 총리 직권으로 여운형 대신 한형권을 밀사로 파견했다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에 안창호는 “국무원에서 이미 결정한 사안을 독단으로 정지시킴이 불가하니 다시 국무원에 제의함이 가하다”고 대답했다. 법과 제도에 따라 해결하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동휘는 독단으로 한형권을 파견하고 말았다. 따라서 절차상으로 볼 때 한형권 파견은 법과 제도에 맞지 않았다. 당연히 재무총장 이시영은 한형권의 여비 지출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이동휘가 한형권 파견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신세대 차장들 때문이었다. 반병률 교수의 [성재 이동휘 일대기](범우사, 1998, 242쪽)에 의하면 당시 비서실장 김립, 재무차장 윤현진, 내무차장 이규홍, 교통차장 김철 등 4명이 총장들 몰래 2000원 여비를 마련해 지급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젊은 차장들이 안창호, 이시영 등 구세대 지도자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 행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동휘가 독단으로 한형권을 파견한 결정적 이유는 미국 중심 외교를 철회하고, 새로 러시아 중심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이동휘가 1920년 5월 24일 자로 레닌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의 상황 평가와 관련하여, 존경하는 포타포프 장군의 견해와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는 내용을 통해 명확해진다. 이에 더해 이동휘는 한형권을 통해 포타포프의 공작 보고서, 한인사회당에서 파악한 동아시아 3국의 정치적 상황 보고서 등을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 코민테른에 제출했다. 한인사회당 요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은밀한 보고서들을 안창호 계열의 밀사에게 절대 맡길 수 없었다.

당시 통합입정에 참여한 한인사회당 요원들이 파악한 동아시아 3국의 정치적 상황, 나아가 한인사회당이 통합임정에 참여한 이유 및 향후 방침 등은 ‘동아시아 한·중·일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보고서’에 잘 드러난다. 이 보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1920년 7~8월 호에 한형권 명의로 게재됐다. 핵심 내용은 제목 그대로 한·중·일의 정치적 상황인데 그중에서도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한인사회당이 왜 통합임정에 참여했는가에 대한 해명이다. 1919년 3월 창립된 제3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은 “국제연맹의 깃발은, 서로를 용서한 사회적 배신자 정당들을 결합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정부와 부르주아를 도와 다시 한번 노동계급을 속이고자 하는 시도들”이라 규정함으로써 국제연맹 및 부르주아 정부와의 정면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1919년 4월 개최된 한인사회당 당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결의할 때 한인사회당은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 모두에서 탈퇴한다고 결의했다. 3·1운동 이후 수립된 상해임정이나 대한국민의회는 사회주의자들 시각에서 부르주아 정부였기 때문이다. 특히 상해임정은 임시헌장에서 국제연맹 가입을 공언할 정도의 부르주아 정부였다.

이념 투쟁이 격화된 통합임정

그런데 한인사회당의 이동휘, 김립 등은 통합임정에 참여했다. 코민테른 규정으로 본다면 한인사회당은 사회적 배신자 정당이고, 상해임정에 참여한 이동휘, 김립 등은 부르주아를 도와 다시 한번 노동계급을 속이려는 국제연맹의 부역자들이었다. 그렇게 규정되면 코민테른과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에게 한인사회당은 타도 대상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동휘 등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상해임정 참여가 사회적 배신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투쟁의 일환임을 설득해야 했다.

그들의 논리는 “한국에서는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저해하는 체제가 정착되어 있음은 물론, 극도로 혁명 정신에 충만해 있는 자본가 계급은 빈농 대중과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바, 한국은 사멸되어가고 있는 봉건주의 무덤 위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독특한 과도기적 시기를 경험하기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에 압축돼 있다. 즉 한국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이기에 노동자 중심의 혁명운동은 불가능하고, 대신 농민 중심의 혁명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부르주아 계급과 통일, 연대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다시 말해 상해임정은 부르주아 정부이지만 한국의 과도기적 상황에서는 통일, 연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보고서’ 결론 부분에서 “혁명세력이 충분히 굳건해졌을 때 한인사회당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체결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함으로써 한인사회당의 상해임정 참여는 통일전선전술에 입각한 임시 방침임을 밝혔다. 아울러 이동휘가 장악한 통합임정은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혁명적 정부이므로 코민테른과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동아시아 혁명을 추동하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요컨대 한인사회당이 통합임정을 동아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전초기지로 만들 터이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와 이념을 가진 한인사회당 요원들과 안창호 등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외교관계를 비롯해 국가체제에 이르기까지 이념 투쟁이 확대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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