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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0)] 5공화국의 3S 정책, 억압과 자유화의 부적절한 동침 

그때 그 시절 ‘손에 손잡고’ 부른 ‘아! 대한민국’ 

스포츠 공화국’의 빛과 그림자… 정치적 울분 탈정치적으로 해소
올림픽이 가져온 대한민국의 영광, 권력자 아닌 국민에게 돌아가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주제곡 ‘손에 손잡고’의 음반 커버. 냉전의 벽을 허물고 지구촌이 화합하는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세계적인 작곡가 조르조 모로더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 사진:폴리그램
"하늘 높이 솟는 불 / 우리의 가슴 고동치게 하네 / 이제 모두 다 일어나 /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 손잡고”

1988년 9월 17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 그룹 코리아나의 노래 ‘손에 손잡고’가 울려 퍼졌다. 160개 국 1만3304명 선수단이 한데 어우러지며 서울올림픽 개막식은 절정을 이뤘다. 4년 전 로스앤젤레스올림픽과 8년 전 모스크바올림픽은 냉전으로 분열된 ‘반쪽 올림픽’이었다. 반면 제24회 서울올림픽은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까지 대거 참가한 사상 최대 올림픽이었다. 노랫말처럼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화합의 감동을 전 세계에 선사한 것이다.

‘손에 손잡고’는 서울올림픽 개막 석 달 전에 공식 주제가로 발표한 노래다. 원래 올림픽 주제가로 선정해둔 곡은 따로 있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공모와 의뢰, 경연을 거쳐 1986년에 내놓은 ‘아침의 나라에서’(박건호 작사, 길옥윤 작곡)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이 흥겨운 노래는 이미 해외 무대에 오르며 서울올림픽을 홍보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뒤늦게 공식 주제가를 바꾸려고 하자 한국연예협회 등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자국 노래를 홀대한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곡이라야 한다며 교체를 밀어붙였다. ‘손에 손잡고’는 다국적 레코드사 폴리그램이 영화 [탑건], [플래시댄스] 등의 OST로 유명한 세계적인 작곡가 조르조 모로더와 손잡고 만들었다. 폴리그램 측이 제작과 유통 비용을 전부 대고 (100만 장 이상 판매 시) 음반 수익의 3%를 조직위에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손에 손잡고’는 전 세계에서 17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기록하며 역대 올림픽 주제가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곡 자체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냉전이 막을 내리고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에 열린 화합의 올림픽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지핀 세계 평화의 뜨거운 염원이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88 서울올림픽, 5공화국 관통한 키워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로 시민과 대치하는 계엄군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신음하던 가난하고 위태로운 분단국 이미지를 벗고 21세기를 바라보며 세계사의 주역으로 거듭나는 전환점이었다. 한국의 올림픽 성적도 눈부셨다.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아시아의 강호 중국과 일본을 월등히 앞선 성적이었다. 한국인의 긍지와 자신감이 용솟음쳤다. 온 국민이 감격하고 환호했다. 하지만 이런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열망해온 전임 대통령은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우리는 올림픽사상 가장 성대하고 모범적인 인류 화합의 대제전을 이 땅에서 개최함으로써 한국인의 확고한 평화 의지를 지구촌에 심게 될 것입니다. 국운 융성의 위대한 민족사를 창조해가는 오늘의 우리들이 각계각층의 힘과 정성을 한데 모아 막바지 준비에 최선을 다한다면, 서울올림픽은 조국을 선진 대열에 진입시키는 결정적인 전기를 이룰 것이 틀림없습니다.”([중앙일보] 1987년 10월 14일 자 1면)

서울올림픽이 막을 올리기 1년쯤 전,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무등경기장에서 열린 제68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남긴 치사(致詞)다. 그는 5공화국의 핵심 과제로 올림픽을 유치하고 대통령 임기 내내 개최 준비에 몰두했다. 서울올림픽은 5공화국을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1988년 9월 17일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퇴임과 함께 ‘5공 청산’이 화두로 떠올랐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12·12쿠데타로 권력을 쥔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비상계엄을 확대해 광주 시민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그해 8월 실권을 빼앗긴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자 전두환 단일후보가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0월에는 대통령 7년 단임제와 선거인단 간선제를 골자로 한 5공화국 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삼청교육대 대거 연행과 인권 유린은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 해직은 국민 여론 통제로 이어졌다.


▎1981년 3월 3일 전두환 대통령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제5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하는 순간이다. / 사진:대통령 기록관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월 민주정의당을 창당하고 2월에 대통령 선거인단을 모아 ‘체육관 선거’를 치렀다. 3월 3일 전 대통령이 다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5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한 것이다. 구색을 갖추기는 했지만 본질은 총칼과 탱크를 앞세워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은 정권이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정통성이 부족한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 5공화국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전두환 정권은 제24회 하계올림픽 유치에 나섰다.

올림픽 유치는 애초 박정희 정권 말기에 추진하던 사업이었다. 1979년 10월에는 내외신 기자들에게 공표하기도 했다. 10·26 사건으로 중단된 이 사업을 전 대통령이 끄집어낸 것이다. 정권의 정통성을 세울 업적과 비전이 ‘지구촌의 축제’ 올림픽에 어른거렸다.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고 국민에게 희망찬 미래를 보여줄 기회였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올림픽 유치 작전이 펼쳐졌다.

드라마틱한 반전 이뤄낸 올림픽 유치 작전


▎1981년 9월 30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투표 결과 서울이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자 정주영(왼쪽) 현대그룹 회장 등 한국 대표단이 환호하고 있다.
국내외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정치 상황은 불안정했고 재정 여건도 올림픽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제출하긴 했지만 정부 고위 관료들조차 반대 의견을 내며 만류하는 판국이었다. 경쟁 상대인 일본 나고야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일찌감치 유치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이 올림픽을 따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서울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올림픽 개최지 선정까지 불과 넉 달 남은 시점이었다. 투표권을 가진 각국 IOC위원들을 설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 없었다. 길이 없으면 닦으면 된다는 게 그의 경영 철학 아니던가.

한국은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표밭을 다졌다. 일본은 도쿄올림픽(1964년)을 개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느덧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으니 이번에는 개발도상국 차례라는 논리로 설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전 대한체육회장은 홀스트 다슬러 아디다스 회장과 물밑 접촉을 했다. 독일 스포츠 기업 아디다스는 일본 나고야가 올림픽을 유치하면 자국의 아식스를 밀어줄까봐 우려했다. 다슬러 회장은 올림픽 후원기업 선정권 등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한국의 득표를 돕기로 했다.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의 IOC 총회장. 한국 유치단은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 선정 결과를 기다렸다. 외신 예측은 일본 나고야로 쏠렸지만 드라마틱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후 3시 45분.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쎄울!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우리 대표단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면서 벌떡 일어나 서로 얼싸안았다. 내가 예상했던 46표보다 6표가 더 나와 52 대 27로 나고야를 물리친 것이다. 나도 놀랐고, 우리 대표단 모두가 놀란 득표수였다.”(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

불가능해 보이던 올림픽 유치를 성사시키면서 전 대통령은 큰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5공화국 정권에게 서울올림픽은 폭압을 정당화하고 민심을 호도할 명분이었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포츠 공화국’을 도모했다. 서울올림픽을 축으로 삼고 다양한 스포츠 이벤트를 엮어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스포츠 공화국’ 환상에 취한 5공 정권


▎1982년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하는 전두환 대통령. 공이 스트라이크존에 정확하게 들어갔다고 한다.
우선 서울올림픽에 앞서 1986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 서울은 1981년 11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 총회에서 북한과 이라크를 제치고 제10회 아시안게임 개최지로 선정됐다. 이때부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하나가 됐다. 전두환 정권 인사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86·88’이었다. 민족의 영광을 부르짖고, 세계 속의 한국을 외치며, 미래의 희망을 부풀렸다.

전두환 정권은 대회 준비뿐만 아니라 경기력 향상에도 매달렸다.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면 성적이 뒷받침돼야 한다. 경기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 메달을 많이 따야 한다. 돈 드는 일이므로 재벌기업을 끌어들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한체육회장으로 중심을 잡았다. 이건희 삼성그룹 부회장은 대한레슬링협회, 정몽구 현대정공 사장은 대한양궁협회,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대한복싱협회, 그리고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은 대한수영연맹을 맡아 메달 유망주들을 육성했다.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국민에게 건전한 여가 선용을!”

1982년 3월 23일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과 함께 내건 캐치프레이즈다. 사흘 전인 3월 20일 전두환 정권은 체육부를 신설하고 5공의 2인자 노태우를 장관에 임명했다.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개막전에서는 전 대통령이 직접 시구를 했다. 이때 포수가 받은 공을 전달하기 위해 마운드로 다가가려고 하자 경호원들이 놀라면서 막아서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연장 10회 말 만루 상황, 끝내기 홈런으로 드라마를 쓴 이 경기는 프로야구의 흥행을 예고했다.


▎1982년 1월 5일 야간 통행금지가 36년 만에 풀렸다. 밤 0시 1분 자정이 넘은 시각에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모습.
축구와 씨름도 프로화의 길로 들어섰다. 1980년 대 초 컬러TV 보급과 중계방송 확대는 프로스포츠의 인기를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경기가 많이 열리는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텔레비전이 마치 운동회를 방불케 했다. 대표팀 감독이나 국위를 선양한 선수에게 전화를 걸어 치하하는 대통령의 모습도 ‘땡전 뉴스’로 TV 화면을 장식했다. ‘스포츠 공화국’의 환상에 취해가는 5공의 씁쓸한 단면이었다.

스포츠(Sports), 섹스(Sex), 영화(Screen)는 이른바 ‘3S’라며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대변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 우민화는 5공에 항거하기 위해 다소 과장한 말이다. 실상은 자유화에 가깝다. 사람들을 계속 억누르면 언젠가 폭발한다. 5공은 꾹꾹 눌린 정치적 울분을 탈정치적으로 배출시키고자 했다. 억압과 자유화의 두 얼굴로 국민을 으르고 달랜 것이다.

1982년 1월 5일 자정을 기해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됐다. 1945년 미군정 치하에서 시행된 지 36년 만의 일이었다. 이제 통금 사이렌에 쫓겨 필사적으로 집에 뛰어들어갈 필요가 없어졌다. 통금 시간을 어겨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지새울 걱정도 사라졌다. 자유를 만끽하려는 군중심리에 밤 문화가 호황을 맞았다. 유흥업소 네온사인과 교회의 십자가 불빛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는 도시의 밤 풍경이었다.

'애마부인' 흥행과 관능적인 심야의 자유


▎영화 〈애마부인〉 포스터. 1982년 2월에 개봉한 국내 최초의 심야 영화다.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심야극장은 컬러TV의 등장으로 불황에 시달리던 영화계가 야간 통행금지 해제에 발맞춰 내놓은 기획상품이다. 1982년 2월 6일 국내 최초의 심야 영화 [애마부인](정인엽 감독, 안소영 주연)이 서울극장에서 개봉했다. 성적 욕망에 충실한 영화였다. 관능적인 심야의 자유였다. 첫날부터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애마부인]은 6월 11일까지 상영하며 관객 31만 명을 동원했다.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였다.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3편까지 시리즈를 이어갔다.

싸구려 에로영화도 쏟아져나왔다. 198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카세트리코더(VCR)가 빠르게 보급됐다. 비디오 대여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에로영화 코너에 들어서면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낮에 독재 정권의 억압에 맞서 어깨 걸고 싸우던 학생들도 밤이 되면 낯을 붉히며 에로영화를 관람하는 자유를 누렸다. 억압과 자유화의 부적절한 동침이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 (중략)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 (중략) / 아아 대한민국 / 아아 우리 조국 /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1983년 가수 정수라의 1집 앨범에 수록된 ‘아! 대한민국’(박건호 작사, 김재일 작곡)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바라는 ‘자유로운 이상향’이 아닌가. 이 노래는 이른바 ‘건전가요’다. 건전한 사회의식을 기를 목적으로 지은 가요다. 공연윤리위원회는 1979년부터 건전가요의 음반 삽입을 의무화했다. 음반에 넣어야 해서 넣는 곡이다. 히트를 기대하는 곡이 아니다.

그런데 ‘아! 대한민국’은 달랐다. KBS 순위 프로그램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덕분에 가수 정수라는 연말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그야말로 대박 난 것이다. 노래의 인기는 반짝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은 1980년 대 국민가요로 자리매김했다. 국민가요는 시대가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국민가요냐 관제가요냐, ‘아! 대한민국’ 두 얼굴


▎1989년 12월 31일 국회 청문회 증언에 나선 전두환 전 대통령.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자위권 행사로 해명하자 이철용 의원이 다가가 질책하고 있다. / 사진:보도사진연감
1985년 달러, 유가, 국제금리가 한꺼번에 하락하는 ‘3저’ 국면이 도래하자 한국 경제는 초고속 성장 가도를 달렸다. 수출에 목숨 걸고, 석유를 전량 수입하며, 외채를 상환해야 하는 우리나라로선 호시절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한국인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풍요를 예감했다. ‘아! 대한민국’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거쳐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민족적 긍지와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2절 노랫말처럼 우리의 모든 꿈이 세계로 뻗어가는 것 같았다.

반면 5공 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세력은 경제 호황의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번진 부정부패를 파헤쳤고,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노점상·도시빈민과 연대했다. 그들에게 ‘아! 대한민국’은 사회 현실을 호도하는 ‘관제가요’로 비쳤다. 실제로 이 노래는 원래 (국무총리실산하) 사회정화위원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주관한 건전가요 보급 옴니버스 앨범에 실렸었다. 5공에 반감이 컸던 대학생들은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로 ‘아! 대한민국’을 야유하고 독재 정권을 질타했다.

“하늘엔 최루탄이 터지고 / 강물엔 공장폐수 흐르고 / 저마다 누려야 할 권리가 / 언제나 짓밟히는 곳”

결국 1987년 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5·18과 권력형 비리 등을 규명하는 5공 청산 청문회가 열렸다. 퇴임한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개막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11월 23일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서울올림픽이 가져온 대한민국의 영광은 권력자가 아닌 국민에게 돌아갔다.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회 청문회 증언에 나섰지만 여야의 삿대질과 맞고함 속에 퇴장했고, ‘청문회 스타’ 노무현 의원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내동댕이쳤다. 1980년대가 저물던 날의 빛바랜 풍경이었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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