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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4)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下 

불모지에 단비를 선사한 경영의 달인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최대 위기 맞아, 정치와 불가근불가원 관계 확립 계기
인재제일·합리경영으로 반도체산업 키워내… 후계자 이건희는 품질경영 완성


▎1983년 기흥 VLSI공장 기공식에 이병철(오른쪽 4번째) 삼성 창업회장이 참석했다. 그가 인생 말년에 내린 반도체사업 결단은 대한민국 산업의 밀알이 됐다. / 사진:삼성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1948~1960)의 부당이득에 관한 사회적 단죄 요구가 비등했다. 장면 과도정부는 ‘1955년 이후 5년 동안의 탈세를 80% 이상 정직하게 신고할 경우 벌금을 면제해 준다’며 자진신고를 유도했다. 6월 20일까지 이병철(5개 업체, 21억4000만환), 정재호(삼호그룹, 4개 업체, 5억6000만환), 김상홍(삼양사그룹, 1개 업체, 1억9000만환), 설경동(대한그룹, 대한재단 1개 업체, 1억2000만환), 송영수(전주방직, 2억9000만환), 백남일(태창방직, 3억1000만환), 구인회(럭키그룹, 3000만환), 이정림(대한양회, 600만환), 조성철(중앙산업, 500만환) 등이 신고한 탈세 총액은 33억1100만 환이었다.

국민은 “기업들이 탈세액을 터무니없이 낮춰 신고했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정부는 1960년 8월 31일 기업가 24명, 46개 기업에 벌금과 추징금 등 총 196억환을 확정하고, 1961년 4월 10일 ‘부정축재처리법’을 마련했다. 그러나 5월 16일에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5·16 혁명’의 공약 3호는 모든 부패와 구악의 일소였다. 구인회, 이정림 등 최대 재벌 총수들이 부정축재자로 투옥되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삼성에서는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인 이병철을 대신해서 조홍제 부사장이 투옥됐다.

군사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들에게 일벌백계 대신 기간산업체 1개씩을 설립해 국가에 헌납하는 소위 ‘투자명령’을 지시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재일거류민단 권일 단장을 통해 일본에 체류 중인 이병철에게 ‘신변문제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빨리 귀국해서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주시라’고 전했다. 이병철은 1961년 6월 26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날 밤 김종필 부장은 서울 명동 메트로호텔 2층 방의 독대에서 이병철로부터 ‘적극 협조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김종필 증언록1]).

군사정부는 과거 자유당 정부에서 급성장한 재벌과 동반자가 됐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을 수립하고 정부는 기획과 감독·지원업무를, 재벌 총수들은 이 계획을 실행하는 주연배우 역할을 담당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철에게 비료공장 건설을 강요했다. 농민들에게 비료를 헐값으로 공급하면 농촌 유권자들을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병철에게 1967년 5월 제6대 대통령선거 이전에 비료공장 건설을 완료하도록 당부했다.

이병철의 숙원도 비료공장 건설이었다. “내 생전에 큰 비료공장만 하나 지으면 후회가 없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당시 국내 생산량은 수요의 20%에 불과해 매년 막대한 물량을 수입해야 했던 것이다. 1950년대 초반 이병철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거쳐 정부지불 보증의 해외차관을 들여와 연산 10만t의 비료공장을 짓기로 확정했으나 정정불안으로 지지부진했었다.

짧게 끝난 박정희 정권과의 밀월


▎한비 준공에 앞서 공장을 돌아보는 장기영 부총리와 이병철(앞줄 오른쪽) 삼성 창업회장. / 사진:삼성
1964년 8월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현 롯데정밀화학)를 설립하고, 1965년 12월부터 울산공단 내에 연산 33만t의 요소비료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국내 비료 수요의 80%가량을 커버하는 세계 최대 비료공장이었다. 이병철은 정부로부터 차관교섭 전권을 위임받은 한편, 일본 미쓰이그룹과 접촉해서 연리 5.5%에 2년 거치 8년 상환의 차관 4200만 달러를 확보했다. 공장 건설에는 미쓰이물산 계열인 동양엔지니어링 외에 국내의 현대건설, 대림산업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건설 착수 1년여 만인 1966년 9월 15일 삼성의 밀수 의혹이 터졌다. 9월 16일 국세청이 발표한 조사내용 중 일부다. “밀수 사건의 주모자는 한비(韓肥) 상무이사로 근무하던 이일섭이며, 주소불명의 이창식과 공모하여 사카린 원료인 OTSA 2400부대를 지난 5월 5일 울산에 입항한 일본 선박 신슈마루로 건설자재와 같이 밀수입했다. 주모자 이일섭은 5월 16일 시가 101만원에 해당하는 141부대를 시중에 매각했으며 뒤이어 1430부대를 부산시 동래구 소재 금북화학공업에 정상 수입품인 것처럼 매각하려다 5월 19일 부산세관에 의해 적발됐다.”

이후 45일 동안 삼성은 사정 기관과 매스컴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장군의 아들’ 김두환 국회의원은 9월 22일 한비 밀수 사건 국회 보고회에서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경제부총리, 김정렴 재무부 장관, 민복기 법무부 장관에게 오물을 투척했다. 10월 15일 대구에서 개최된 ‘재벌기업 삼성 밀수 규탄대회’에서 장준하(1915~1975) 사상계 사장은 “박정희야말로 밀수 왕초”라고 발언했다가 구속됐다. 1967년 10월 22일 이병철은 한비 지분 51% 전부를 국가에 헌납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박정희 정부와 삼성은 불편한 관계가 됐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묻어둔 이야기]에서 ‘짧은 밀월, 긴 갈등’으로 정리했다. 한비 밀수 사건은 삼성의 창업 이래 최대 시련이었다. ‘정치권과는 불가원불가근(不可遠不可近)’이란 이병철의 경영철학도 이를 계기로 확립됐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다


▎1969년 제6회 수출의 날에 이병철(왼쪽) 삼성 창업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 사진:삼성
이병철은 1968년 12월 30일에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장차 국민소득 신장에 따른 내구소비재 수요 점증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1967년 말 어느 날 중화학공업에 관심을 쏟던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말했다. ‘이병철 회장한테 이제 중화학공업 좀 해보라고 해. 임자가 가서 의견 좀 물어봐.’ 이 회장을 만나 대통령 말씀을 전했다. 그는 한참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결심이 섰는지 ‘대통령을 뵈러 갑시다’라며 일어섰다.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 박 대통령은 ‘조선이나 자동차, 전자공업 중 하나를 해보라’고 제안했다. 이 회장은 전자공업을 택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삼성전자다.”([김종필 증언록1])

삼성전자의 출현에 선발기업인 금성사(LG전자)와 대한전선 등이 과잉생산 우려를 이유로 강하게 반발했다. 삼성전자는 ‘TV, 라디오, 냉장고 등 생산품 중 극히 일부만 국내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사업허가를 받았다. 1969년 10월 경기도 수원시 매탄동에 45만 평, 경남 울주군 가천면에 70만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했다. 1969년 12월 TV 및 라디오수상기 제조를 목적으로 일본의 산요(三洋)전기, 스미토모(住友)상사 등과 합작해서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했다. 1970년 1월에는 일본 NEC와 합작해서 삼성NEC를 설립하고 1974년 12월에는 한국반도체의 지분을 인수했다.

한국반도체는 1974년 1월 경기도 부천에서 자본금 100만 달러로 설립된 회사였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토로라에서 반도체를 만들던 강기동이 1975년 9월 국내 최초의 반도체인 KS-5001(손목시계용 칩)을 생산했다. 그러나 당시 제1차 오일쇼크에 기인한 경영난으로 한국반도체는 설립 1년 만에 삼성에 인수됐다.

삼성은 1960년대 초부터 언론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거치면서 반(反)재벌정서 불식과 자유시장경제 옹호가 절실했던 것이다. 1963년 2월 11일 동양텔레비전방송을, 같은 해 6월 25일에는 라디오서울방송을 연이어 설립했다. 1965년 3월 5일에는 일간지 중앙일보까지 창간함으로써 삼성은 산하에 TV, 라디오, 신문사를 거느린 종합매스컴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신문용지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1965년 10월에는 전주제지(전주페이퍼)를 인수했다. 전주제지는 1965년 전주 지방 유지들이 외자를 도입해서 설립한 회사였으나 공장 건설 중 자금난에 봉착했다.

보험업도 강화했다. 삼성이 보험업에 진출한 것은 1958년 2월 안국화재해상보험(삼성화재)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안국화재는 일제하에서 설립된 조선생명 후신으로 해방 후 민간에 불하됐으나 경영난에 직면했다. 1962년 11월 안보화재보험을 인수해서 안국화재에 흡수하고 1963년 7월에 동방생명(삼성생명)을 인수해서 종합보험 시스템을 구축했다. 당시 수입대체공업화에 힘입어 보험업은 유망산업으로 부상했다.

동방생명은 1957년 3월 강의수, 전중윤(삼양라면 창업자) 등이 설립해서 창업 1년여 만에 업계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생명보험업계의 기린아였다. 동방생명은 1962년 9월에는 동화백화점을 인수했으나 1963년 초 강의수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삼성이 동방생명, 동양화재보험과 동화백화점을 한꺼번에 인수할 수 있었다. 삼성은 1963년 11월 동화백화점을 신세계백화점으로 변경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일본 미스코시(三越)백화점이 1930년 신축한 경성지점으로 일제하에서는 박흥식이 경영하던 화신백화점, 명동 입구의 정자옥(롯데영플라자)과 함께 국내 백화점업계의 트로이카였다.

이어 1970년대 삼성은 중화학공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972년 이병철은 “미래성장 동력은 중화학에 있다”며 삼성그룹의 중화학 업종을 40%까지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국내 섬유의 70% 이상이 화학섬유인데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터였다. 1974년 가을 삼성 50%, 미국 아모코 35%, 일본석유화학 15% 지분구성의 삼성석유화학이 설립됐다. 국내외에서 1억 달러를 조달해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내에 부지 6만 평을 확보해 폴리에스터 원료인 PTA(고순도텔레프탈산) 생산공장을 건설했다. 제1차 오일쇼크로 인한 불황으로 고전하다가 1983년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위기 상황에서 기업 체질을 바꾸다


▎1982년 삼성종합연수원 개원식에 등장한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 / 사진:삼성
삼성의 중공업 진출 시작은 1977년 경남 거제도에 위치한 한·일 합작의 우진조선소 인수였다. 1974년 설립된 우진조선은 1기 조선설비 공사가 50% 정도 진척된 상태였으나 자금난으로 위기에 처하자 삼성이 우진을 인수해서 1977년 4월 22일 납입자본금 27억2000만원의 삼성조선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조선 설비도 국제 규모로 신속하게 확장했다. 1977년 5월에는 대형 철구조물 제작업체인 대성중공업을 인수했다. 대성중공업은 일본 대성철공소와 재일교포 성해룡에 의해 1970년 11월에 설립돼 서울 남산타워와 롯데호텔 철골공사를 담당한, 해당 업계 선두주자였다.

1970년대 후반 이후 국내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에다 세계경기 부진이 겹치면서 1980년 8월 정부는 자동차, 발전설비, 건설중장비 등의 생산을 제한하는 중화학투자 조정을 단행했다. 발전설비는 한국중공업으로 일원화했고, 건설중장비는 한국중공업과 대우로 이원화했다. 당시 삼성의 중공업 3사도 적자에 허덕여 1983년 1월 1일부로 삼성중공업이 삼성조선과 대성중공업을 흡수 통합했다.

한편 1976년에는 경기도 용인시에 국내 최대의 테마파크인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을 오픈했다. 1977년에는 호황 업종인 국내 건설시장에 동참하기 위해 통일건설을 인수했을 뿐 아니라 중동 건설특수를 겨냥해 삼성해외건설을 설립하고, 1978년에는 유명 해외건설업체인 신원개발을 인수·합병했다.

이 무렵 삼성은 방위산업에도 진출했다. 정부의 자주국방 정책에도 주목해서 방위사업체인 삼성정밀(현 한화테크윈)을 설립했다. 첨단산업인 정보통신에도 참여해 1977년에는 삼성GTE통신까지 설립했다. 1970년대 삼성은 사업기반인 경공업을 중화학과 반도체, 정보통신, 서비스업 등으로 리스트럭처링하는 구조조정기를 거쳤다.

1980년대에 들어 삼성의 계열사 확대가 둔화했다. 이 무렵부터 정부의 산업정책이 대기업 규제로 전환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정부는 대기업이 다른 회사 주식을 취득할 때의 한도를 자기자본의 100% 이내로 제한했다. 또 재벌이 몸집 불리기 수단으로 사용했던 계열사 간 상호출자도 금지했다. 1987년부터 30대 재벌에 한해 대출 동결 등 여신규제도 병행했다.

삼성전자는 이 기간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본격적 준비기로 삼았다. 이병철은 1983년 2월 반도체사업 진입을 결행했다. 반도체는 막대한 설비투자에 비해 기술혁신 주기가 매우 짧다. 그러나 이병철은 위험을 극복하고 성공을 쟁취해야 삼성의 미래가 담보된다고 판단했다. 당시 일본 요시다 총리 밑에서 경제기획을 담당하던 이나바 박사는 “향후 일본의 살길은 경박단소(輕薄短小)의 하이테크산업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병철은 한국도 자원 빈국이라 첨단기술 산업 중심으로 산업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1982년 12월 27일 한국전자통신을 흡수해서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고, 1984년 5월 수원의 기흥 VLSI공장을 준공했다. 국내 최초이자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의 반도체 생산공장이었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동안 무수한 사업에 손을 댔지만 반도체사업 진출 결정을 가장 고심했다”고 술회했다.

경영의 달인이 고희에 도전한 반도체사업


▎1983년 삼성은 64K D램 개발생산을 발표했다. 이병철(왼쪽) 삼성 창업회장이 그 전면에 섰다. / 사진:삼성
1984년에는 제일제당이 미국의 유진테크와 합작해서 유전공학연구기업인 ETI를, 4월에는 삼성의료기기를, 9월에는 세계적인 컴퓨터메이커인 미국 휴렛팩커드와 합작해 삼성휴렛팩커드 등을 각각 설립했다. 1985년에는 삼성항공(한화테크윈)의 자회사로 미국에 삼성유나이티드항공을 설립했다. 미국 공군의 전투기 엔진 정비사업을 전담하는 업체였다. 1985년 5월에는 삼성데이타시스템을 설립했고, 7월에는 제일제당이 최대 군납식품업체인 동립산업을 인수했다.

1980년 4월 삼성전자의 종합연구소 설립을 비롯해 주요 계열사별로 연구소 설립을 추진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총 4600억원을 기술개발에 투자했다. 미국, 일본, 유럽 등이 주력하던 반도체, 신소재, 메카트로닉스, 유전공학, 우주항공 등의 높은 기술장벽을 타개하기 위해 자체 기술개발이 절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인(巨人)’의 몸에도 한계는 있었다. 이병철은 10년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1987년 11월 1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의 나이 26세이던 1936년에 경남 마산에서 정미소에 손을 댄 이후 77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려 반세기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오로지 사업 외길을 걸었다. 그는 모험을 즐기는 탁월한 승부사였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 지병인 폐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사활을 걸고 반도체 투자를 결정했다.

이병철이 평생 키운 사업들은 가짓수가 너무 많아 전부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또한 그는 손댄 사업마다 거의 실패 없이 국내 정상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돌다리 경영’, ‘관리의 삼성’이란 명성은 괜히 붙여진 게 아니다. 그의 경영철학인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가 돋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이병철은 삼성을 국내 최고의 대기업집단으로 키워내는 과정에서 탈세, 밀수, 정경유착, 황제경영, 반노조경영 등의 멍에를 감수해야 했다. 후진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흔히 발견되는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산업의 역사이자 문화사이며 동시에 현대 경제사이기도 하다. 기업가 이병철은 불모지에 단비를 선사한 경영의 달인이었다.

TSMC가 가장 두려워하는 기업으로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경영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언제나 그는 현장에 있었다 / 사진:삼성
삼성그룹의 경영권은 1987년 11월 19일 창업주 이병철 타개 당일 3남 이건희에게 계승됐다. 계열분리가 본격화한 것은 1994년 전주제지 경영권이 장녀 이인희에게 귀속되면서부터였다. 장남 이맹희는 제일제당, 2남 이창희는 제일합섬, 5녀 이명희는 신세계백화점과 조선호텔의 경영권을 각각 확보했다.

후계자로 선택된 이건희는 1988년 삼성그룹 50주년 기념식에서 2000년대 세계 초일류 기업 달성을 목표로 ‘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경영’의 제2창업을 선언했다. 1993년 6월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임원회의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라”며 J.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를 주문했다. 1995년 3월 9일에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휴대전화 ‘애니콜’ 15만 대(500억원 상당)를 사업장의 전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세계 1위의 모토로라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보다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담은 행동이었다. 선대의 양적경영에서 품질경영으로의 전환을 예고한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1997년부터 애니콜은 단기간에 글로벌 점유율을 늘려갔다. 그 와중에 삼성전자의 TV가 부동의 세계 1위인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인의 안방을 점령했다. 1996년에는 1기가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로 GIGA 시대를 여는 반도체신화를 창조하는 등 글로벌 삼성시대를 앞당겼다.

흔히 수성(守城)이 창업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국내외 수많은 기업이 창업자 사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건희는 선대회장의 업적을 훌륭하게 계승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인 한국의 삼성을 세계화 시대에 부합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의 베르베르인부터 북극의 이누이트까지 전 세계인이 ‘대한민국’은 몰라도 ‘삼성’은 알 정도로, 이건희는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냈다. TSMC의 모리스 창 설립자는 일본 반도체산업의 쇠락 이유 중 하나로 “일본 NEC, 도시바, 히타치에 이건희 같은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삼성전자를 TSMC의 가장 두려운 경쟁기업으로 평가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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