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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포럼 명사 인터뷰]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가 말하는 건축의 ‘가치’ 

“아름다운 건축물보다 중요한 건 쓰는 사람에게 기쁨 주는 것”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사회가 건축을 만든다? 사회가 건축을 왜곡할 위험성도 크다
시공간 넘어 사람이 갖는 공동 가치, 공동성(共同性) 중요해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3월 6일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이 의지를 가진 생활인으로서 건축을 알고 함께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흔히 ‘사회가 건축을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사회는 선하고 공정하기만 할까? 권력자·자본가가 비추라는 대로 받아들이는 거울로서 건축이 기능한다면, 사회가 건축을 왜곡하는 것이다.”

건축의 ‘공동성(共同性·commonness)’을 강조해온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J포럼 강연 주제 ‘건축, 사회에 질문을 던지다’에 담긴 함의를 묻자 이같이 답했다. 김 교수는 “사회가 건축을 만든다”는 말을 공리(公理)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건축 뒤에 숨은 사회에 의해 건축은 국가·자본·대중·욕망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그래서 건축의 ‘공동성’을 강조한다. 서울대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도쿄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2018년까지 42년간 서울시립대와 서울대 건축학과에서 건축의 공동성에 기초한 이론을 가르쳤다. 3월 6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광장은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가 설계한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농심 어린이집’(2013). 그는 “기쁨이 건축물의 사용자와 건축가를 이어주는 접점”이라고 말했다. / 사진:김광현
건축의 공동성을 강조해왔다.

“지역이나 시대와 관계없이 사람이 가진 건축에 대한 공동의 가치, 그것이 공동성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국의 ‘스톤헨지’ 앞에 서면 당시 스톤헨지를 세운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왜 사람들은 이 땅에 구조물을 세우는지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공동성 측면에서 ‘광장’도 여러 번 언급했다.

“고대 그리스의 광장인 ‘아고라’도 그리스 사람이 전에 있던 것을 가져다 만든 게 아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모이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공유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모든 사람은 건축하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왜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광장이 없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광장은 빈터가 아니라 주변이 갖춰져야 한다. 유럽의 경우처럼 광장 주변에 집과 카페가 들어서고, 동등한 사람들이 자기 집 거실처럼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우리나라 광장으로 광화문광장을 꼽지만, 광화문광장은 광장이란 이름을 붙여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지 광장의 기능을 갖춰 저절로 생겨났다고 보긴 어렵다. 계획해서 설계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는 문화가 형성돼야 하는데, 그런 인식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강연 주제인 ‘건축, 사회에 질문을 던지다’는 어떤 의미인가?

“흔히 ‘사회가 건축을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사회는 선하고 공정하기만 할까? 권력자·자본가가 비추라는 대로 받아들이는 거울로서 건축이 기능한다면, 사회가 건축을 왜곡하는 것이다. ‘사회가 건축을 만든다’를 뒤집으면 ‘건축이 사회를 만든다’가 된다. 그러려면 사회는 우리 사회의 근원적 희망을 드러내는 건축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의지를 가진 생활인으로서 건축을 알고 함께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축가가 공간을 통해 사람의 삶을 결정하려는 접근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건축이 삶을 디자인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듣기에는 멋진 말이지만, 만연하면 폭력과 다름없다. 공간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에 용도를 정해놓고 그 용도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무대에서 ‘연기’든 ‘춤’이든 잘되도록 만드는 게 건축이지 ‘무조건 이 무대에서는 연기만 해야 돼’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최근 건축가·교수들이 인문학적으로 건축을 설명하는 콘텐트가 인기다.

“누구나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점에서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하지만 건축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정작 우리 사회의 주택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욕망·자본·시장·소비 등 다각적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함에도 최근 건축가·교수들은 대중이 어려워한다는 이유로 인문학적 접근만 하려 하고, 정작 해야 할 얘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건축가는 예술가로, 대중은 그냥 감상자로 흘러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가장 오래된 건축서를 통해 건축의 3요소로 강(firmitas), 용(utilitas), 미(venustas)를 꼽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미’를 아름다움으로 번역하며 건축물의 예술적 표현을 강조하지만, 김 교수는 건축물이 인간에게 기쁨(delight)을 주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꼭 좋은 건축물이지는 않다”


▎김광현 명예교수는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2021, 21세기북스)를 통해 “‘사회’를 직시할 때 비로소 건축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며 “‘사회’는 건축 뒤에 숨어 건축을 조종하고 통제한다”고 밝혔다. / 사진:21세기북스
미학적 접근을 강조하는 콘텐트도 많아졌다.

“아름답다는 건 시대와 사람에 따라 변하는 주관적 감정이다. 아름다운 건축물과 좋은 건축물은 동의어가 아니다. 중요한 건 건축물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느냐다. 어떤 사람에게 유용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면 아름답지 않아도 좋은 건축물이다.”

매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선정 소식이 나올 때마다 “한국은 왜 프리츠커상을 못 받는가”라는 비판 기사가 쏟아진다.

“나는 그 질문보다 ‘우리나라 건축물은 왜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나’라는 질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건축물을 사회적 자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동차, 휴대폰과 달리 100년도 넘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재건축·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때려 부수고 새로 짓기를 반복한다. 그런 걸 지양하고 주변과 조화를 이뤄 대대손손 기쁨을 주는 건축물을 짓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지역 소멸’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2021년 감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47년경에는 전국의 약 70%에 달하는 157개 시·군·구가 소멸위험 고위험 단계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각 지자체에서는 지역 소멸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은 눈에 띄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다. 작금의 상황에서 과연 건축은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지역 소멸은 시민 삶의 공간 축소라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지적된다.

“결국 출산율을 높이고, 인구 유출을 얼마만큼 막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나. 도 단위의 대규모 계획보다는 읍·면 단위의 구체적 계획이 중요한데, 그런 곳에는 정작 지역사회나 여러 복지시설이 낙후되고 흩어져 있다. 주거 정책적 관점에서 지역의 어린이집·도서관·산업 등을 복합하는 등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지자체장의 역할이 중요하겠다.

“최근 3~4년 사이 몇몇 지자체장을 만나보면 지역소멸을 막고자 하는 의지는 있으나, 아이디어가 구체적이지 않더라. 건축이 어떤 식으로 지역 산업에 영향을 주고, 5~10년 후 주민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기획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집 짓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 지자체장은 지역 소멸 문제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과 생각을 맞춰가면서 주거 정책을 기획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해체도 가속화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공동체 해체는 막을 수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만 봐도 과거 농촌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지만, 공장이 생겨나자 청년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임금을 더 많이 주는 도시로 혈혈단신 옮겨갔다. 결국 이들을 수용하는 아파트가 획일적으로 지어졌고, 그래서 아파트가 공동체 해체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일부 농촌 공동체를 지향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은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아파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공동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다. 농촌 공동체와 다를 뿐 도시에도 공동체가 엄연히 존재한다. 아파트의 기능과 역할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공동체를 확장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쓰는 사람이 “여기 살길 잘했다” 느낀다면 좋은 건축

J포럼 강연에서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다면?

“‘아파트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라는 질문이었다. 과거 정부가 임대주택을 많이 만들어 왔더라면 아파트 문제는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를 민간에게 일임했고 대규모 건설회사가 아파트를 갖고 분양하니 주택이 상품이 됐다. 주택을 민간에게 맡겨둔 채 정부는 물량만 따지고 주거 문화 발전을 등한시했다.”

주거 정책에 더욱 집중했어야 하나?

“그렇다. 주택 정책보다 주거 정책이 훨씬 복합적이고 중요하다. 그런데도 주거기본법의 대부분은 주택 공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주거에 관한 얘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주택과 이발소·어린이집·경로당·주민센터·의료시설 등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될지를 계획단계부터 고민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도시공동체를 확장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주거 문화 발전이 더딘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정치인들을 보면, 건축에 관한 지식·철학도 갖추지 않은 채 선거철마다 어떤 시설을 짓겠다고 공약한다. 그런 공약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자본가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자본가도 건축을 배워야 한다. 건축 양식을 공부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건축을 통해 우리 주민들을 기쁘게 할까를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건축은 짓는 사람, 돈 내는 사람, 사용하는 사람, 설계하는 사람, 지나가면서 구경하는 사람 모두가 만족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정치인·자본가는 건축에 대한 인식을 폭넓게 가져가지 않고, 부동산 문제로만 한정한다.”

성공한 건축이란 무엇일까?

“30~40대 때는 멋지게 짓는 것이 성공한 건축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물론 우수한 건축가가 멋들어지게 지은 건축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건축가가 지은 멋진 건축물만 가치가 있을까? 우리나라의 주택을 예로 들면 건축가가 지은 것보다 이름 없는 사람이 지은 것이 훨씬 많다. 못 지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 쓰는 사람이 ‘여기 살길 잘했다’, ‘이곳이 정말 좋다’라고 느낀다면 그게 성공한 건축이 아닐까?”

※ J포럼은 - 2009년 국내 언론사 중 중앙일보가 최초로 시작한 최고경영자과정이다. 시사와 미디어·경제·경영·역사·예술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강좌와 역사탐방, 문화예술 체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로 14년째를 맞이한 J포럼은 매년 두 차례(봄·가을) 원우를 선발하여 진행된다. 그동안 졸업생 1100여 명을 배출해 국내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학습과 소통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의·접수: J포럼 사무국(02-2031-1018), http://ceo.joongang.co.kr

- 글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 / 사진 최기웅 기자 choi.giung@joongang.co.kr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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