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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5)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 上 

신화적 족적 남긴 압축성장의 아이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쌀집 종업원으로 시작해 자동차·건설·조선·제철 제국 이뤄내
미군과 박정희 정부 신임 얻으며 팽창… 경부고속도로 사업 통해 국내 최대 재벌로


▎1980년대 초반 코엑스에 전시 중인 포니 자동차와 선박을 바라보고 있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 그가 그린 삶의 궤적은 곧 한국 경제 기적의 성장사였다. / 사진:아산재단
아산 정주영(鄭周永)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의 빈농 정봉식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원래 함경북도 명천에서 11대, 길주로 옮겨 4대까지 살다가 증조부 때 아산리로 이주했다. 정주영은 1921년부터 3년 동안 서당에서 공부하다 송전공립보통학교에 진학했지만, 가출을 결심했다. “어디 가서 어떤 노동을 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같은 쥐라 해도 뒷간에 있던 쥐는 똥 먹다 도망가고, 광에 있던 쥐는 쌀 먹다 도망간다고 했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은 175㎝의 큰 키에다 체력 또한 좋아 힘을 쓰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네 번째 가출 시도 끝인 1934년 고향을 벗어났다. 이후 인천과 서울의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으로 전전하다 서울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 배달원으로 취직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60대의 복흥상회 주인 이경성은 근면성실한 정주영에게 침식을 제공했고, 장부 정리까지 맡겼다. 정주영은 1938년 1월 복흥상회를 인수한 뒤 상호를 경일상회로 바꿨다. 22세 청년 정주영은 그동안 쌓은 신용만으로 배달꾼 4년 만에 쌀가게 주인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쌀만 팔아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1939년 12월 전시통제령에 따라 쌀 배급제로 전환하면서 경일상회는 문을 닫았다.

90%의 확신과 10%의 자신감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오른쪽) 현대그룹 창업회장은 근면성과 신념으로 한국 굴지의 갑부가 됐다. / 사진:아산재단
정주영은 1940년 3월 서울 아현동의 ‘아도서비스자동차 수리공장’을 3500원(圓)에 인수해서 5000원의 합작회사로 만들었다. 삼창정미소 주인 오윤근에게서 신용으로 3000원, 친구 오인보에게서 500원을 차용하고 동업자가 출자한 800원 등으로 충당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행원의 한 달 급여가 70원이었다.

경성서비스의 정비기술자 이을학과 김명현을 끌어들여 영업을 개시했다. 개업 20일 만에 부채의 절반 정도를 상환했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한 직공의 실수로 공장이 전소됐다. 수리 중이던 트럭 4대와 승용차 1대, 외상으로 확보해놓은 부속품도 함께 타버렸다.

정주영은 재기를 위해 오윤근 사장에게서 3500원을 더 빌렸다. 오 사장은 “내 평생 사람 잘못 보아 돈 떼였다는 오점을 안 남기고 싶어 다시 더 빌려주겠네”라며 정주영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신설동 뒷골목 빈터에 무허가 공장을 차려놓고 직원 50여 명으로 다시 자동차 수리를 재개했다. 그는 수리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대신 수리비를 더 많이 받았다. 아도서비스의 수리 물량은 나날이 급증했지만 아도서비스는 기업정비령 탓에 1943년 3월 대형 정비업체인 일진공작소에 흡수됐다.

시련에 굴하지 않고 정주영은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서울 중구 초동 106의 적산(敵産) 부지 200평을 불하받아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서 1년 만에 종업원 수가 70~80명으로 불어났다.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대금을 받으러 미군 부대를 자주 출입하면서 토건업이 유망할 것임을 간파했다. 1947년 5월 25일 현대토건사 간판을 달았다. 주변에서 토건업은 위험성이 크다며 말렸지만,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강행했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공업학교 교사 출신 기사 1명과 기능공 10여 명으로 건축업을 시작했고, 첫해 매출액 1530만원을 기록했다. 1950년 1월에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합병해서 공칭자본 3000만원, 불입자본금 750만원의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지만, 6개월 만에 6·25전쟁이 터졌다. 정주영은 피란지 부산에서 주한미군 막사 건립을 시작하면서 첫째 아우 정인영(鄭仁永)을 끌어들였다. 정인영은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문과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부터 주한미군 통역으로 활동했다.

1950년 1월 서울 대학로의 서울대학교 법대 및 문리대 건물을 미8군 전방기지사령부 본부 막사로 개조하는 공사를 수주한 이후부터 점차 주한미군공사 물량이 늘었다. 그 와중에 현대는 새로운 기회와 접했는데, 1952년 12월 방한하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묵을 마땅한 숙소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8군은 종로구 운현궁을 숙소로 결정하고 수세식 화장실 설치와 난방시설 및 내부 단장을 의뢰했다. 기한 내에 완공하면 공사비를 두 배로 올려주기로 했다. 정주영은 양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해본 적 없었지만 용산 부근 고물상을 뒤져 철야 작업으로 열흘 만에 공사를 완료했다.

주한미군 토건 공사를 독점


▎정주영(오른쪽) 현대그룹 창업회장은 숱한 시련을 딛고, 미군의 신뢰를 얻어내며 사업을 확장했다. / 사진:아산재단
또 한 건은 부산 대연동의 UN군 묘역 단장공사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 순방길에 한국에서 전사한 UN군 병사 무덤 참배를 결정했으나 전쟁 중에 급조된 묘역이라 헐벗은 상태였다. 미8군 관계자는 “UN군 묘역에는 반드시 파란 잔디가 있어야 한다”면서 정주영에게 부탁했다. 엄동설한에 푸른잔디가 어디 있겠는가. 정주영은 궁리 끝에 트럭 30대를 동원해서 낙동강 연안의 갓 핀 보리들을 사들여 묘지 조성공사를 마무리했다.

이후부터 현대건설은 전국에 산재한 주한미군 토건 공사를 거의 독점했다. 공사 이익은 실행예산의 5~6배에 달하는 대박이었다. 원·달러 환차익은 보너스였다. 전시 인플레 때문에 환율이 계약 시점보다 엄청나게 치솟은 것이다.

1951년부터는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긴급 복구공사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953년 4월 낙동강의 고령교 복구공사는 현대건설을 부도위기로 내몰았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교량으로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복구가 시급했으나 공사 기간 중 물가가 폭등해서 현대건설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정주영은 “사업은 망해도 재기할 수 있지만 신용은 한번 잃으면 끝장”이라며 중구 초동의 정비공장과 동생들 및 매제 김영주의 주택 4채까지 팔아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휴전 직후인 1953년 11월 서울 소공동 삼화빌딩에 사무실 2개를 얻어 현대건설 간판을 달고 일시중단된 미군 공사 대신 민간 및 정부공사에 전념했다. 이 무렵 전국에는 1000여 개의 건설업체가 난립해 덤핑입찰 내지 사전담합 등 부조리가 심했는데, 도급순위 1~5위의 대동건설, 조흥토건, 극동건설, 대림산업, 삼부토건이 정부발주 공사를 독식하는 ‘건설 5인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1957년 현대건설의 수주액은 5억3900만환으로 도급순위 9위였다.

현대건설이 반전을 써내려간 계기는 1957년 9월 국내 최대의 단일공사인 한강 인도교(한강대교) 복구공사 수주였다. 1위 가격을 써낸 흥화공작소의 가격을 본 내무부 장관이 “흥화공작소는 입찰 의사가 없는 것 같다”면서 2위인 현대로 낙찰했다. 이 공사에서 40%의 이익을 거두며 현대는 ‘건설 5인조’에 진입할 수 있었다. 현대건설은 설립 10여년 만에 대형 건설업체로 부상했다.

현대건설의 해외진출 시도


▎태국 파타니 나리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현대건설이 세계로 확장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 사진:아산재단
현대는 1963년 6월 내부자금과 AID 차관자금 등을 들여 충북 단양군 매포면에 대규모 시멘트공장(연산 20만t)을 건설했다. 이 시멘트공장은 1964년 7월에 완공했다. 1968년 40만t으로 확대하고 1970년 1월 현대건설 시멘트사업부를 분리해서 현대시멘트㈜를 설립했다.

한편 현대는 설립 이래 최초로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계기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었다. 미국 정부는 대가로 한국기업의 해외진출 기회를 제공해서 국내 유수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베트남 사업을 추진했다.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기업 최초로 1965년 9월 태국 남단의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해서 1968년 3월에 준공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로 큰 손해를 봤지만 국내 건설업체들의 해외진출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1966년 1월에는 베트남 남부의 주월미군 요충지인 캄라인만 준설공사를 수주해서 돌관경영으로 공사를 끝냈다. ‘불가능은 없다’와 ‘빨리빨리’등 한국적 경영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캄라인에서 15㎞ 떨어진 방오이의 주택건설공사도 수주했으며, 주월미군 대상의 세탁사업도 병행했다. 1966년 한 해 동안 건설 및 세탁사업 등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벌었다.

현대건설은 1968년 2월 착공한 서울~부산 간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에 참여했다.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전무했던 정부는 계획 초기부터 현대건설을 참여시켰는데,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 경험 때문이었다. 고속도로 건설에는 육군 공병을 비롯해 현대, 대림, 동아, 삼부, 극동 등 국내 굴지의 16개 건설업체가 참여했다. 최대 구간을 시공한 업체는 현대건설이었다. 서울~수원 공구를 비롯한 4차선 428㎞ 중 40%를 현대건설이 담당한 것이다. 착공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완공됐는데 총 공사비 429억원이 소요됐고, 현대건설이 수주한 금액만 전체 공사금액의 20.51%인 87억9600만원이었다. 현대건설이 공사를 통해 얻은 이익은 3억3000만원에 불과했지만 이를 계기로 현대건설은 국내 최대의 재벌로 도약하게 됐다.

정주영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400억원의 예산으로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었음에도 하겠다고 나섰다. 정주영이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후 정부가 발주한 대규모 토목 및 건설 공사에 현대가 참여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정주영 회장이 장관들을 자기 회사의 간부 정도로 여긴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노태우 회고록]) 현대건설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충실한 압축성장의 기수가 되며 최정상 대기업 집단으로의 도약을 완료했다.

독자기술로 ‘포니’ 생산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테이프를 끊는 박정희 (왼쪽 두 번째) 대통령 내외와 정주영(오른쪽) 현대그룹 창업회장. / 사진:아산재단
1960~70년대 현대그룹의 괄목할 성과는 완성차 사업에서 나왔다. 1967년 울산공업단지에 부지 10만 평을 확보하고 자본금 5000만원의 현대자동차를 설립했다. 미국 포드에서 부품을 수입해서 1968년에 국내 조립 승용차 ‘코티나’를 출시했다. 당시 선발기업인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 제휴한 승용차 ‘새나라’가 국내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현대의 중형세단 코티나는 소비자들의 호평으로 빠르게 시장점유율을 넓혀나갔다.

현대자동차는 1974년 독자기술로 1238cc 엔진을 장착한 후륜구동의 ‘포니’ 승용차를 생산했다. 시판 첫해인 1976년 1만726대를 팔아 포니의 시장점유율은 43.6%를 기록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보유한 국가가 됐다. 1974년 2월에는 자본금 2500만원으로 현대자동차서비스를 설립했다. 이어 1977년 6월 현대자동차서비스로부터 휠, 범퍼 생산시설과 1개 컨테이너 생산라인을 인수해서 자본금 2500만 원의 현대정공을 설립했다. 현대정공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출용 컨테이너 생산도 병행했다.

이후 조선업에도 진출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8년 제철, 기계, 화학, 조선을 4대 국책사업으로 정하고 집중육성을 선언했다. 1970년 현대건설 내에 조선사업부를 발족하고 정주영이 스페인·프랑스·영국·서독 등에서 자금을 빌려 조선소를 건설하고, 영국애플도어 및 스코트리스고 조선소와 기술·판매 협조를 체결했다. 1972년 그리스 리바노스사와 26만t의 초대형 원유운반선 계약을 맺고 1973년 경남 울산 방어진에 선각공장을 준공해서 현대조선중공업으로 분사했다. 1974년 울산조선소 1~2도크를 세웠고, 리바노스에 원유운반선 1호선을 인도했다.

현대중공업은 1975년 철구사업부를 신설하면서 비조선사업을 개시했고, 선박수리업체인 현대미포조선소도 세웠다. 1978년에는 현대차량, 현대엔진, 현대중전기를 분사했다. 1974년 7월에는 자본금 5000만원의 고려화학을 설립했다. 현대그룹의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공업 등 계열사들의 점증하는 안료, 도료, 합성수지, 접착제 등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현대가 소재산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8년 인천제철 인수였다. 인천제철은 1938년 9월 설립된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으로 출발했다. 철강, 알루미늄, 마그네슘 등을 제조하다 해방 후 귀속재산이 돼 1953년에 인천공장을 모체로 대한중공업공사로 재발족했다. 시설은 1200마력 압연기와 건물 4443평, 미가동 기계공작물 34점 등이었다. 연산 12만t의 평로, 15만5000t의 분괴중형, 1만5000t의 박판 설비로 재가동한 대한중공업은 1962년 11월 인천중공업으로 개명됐다.

인천중공업은 1964년 9월 제철설비를 분리하여 선철 연산 12만t의 인천제철을 설립했다. 이후 두 회사가 경영난에 직면하자 정부는 1970년 4월 인천중공업을 인천제철에 합병시켜 한국산업은행에 관리를 맡겼다가 부실기업 정리 차원에서 1978년 6월 현대중공업으로의 인수를 허가했다.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주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해봤어?’ 정신으로 구현된 울산 현대중공업 전경. / 사진:아산재단
현대종합상사도 1978년 8월 부실기업 인수전에 참여해 대한알루미늄공업과 한국불화공업을 인수했다. 대한알루미늄은 국내 최초의 알루미늄 제조업체로서 당초 한국알루미늄으로 출발했다. 원료인 보크사이트의 확보 곤란과 기술 부족으로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1973년 7월 한국산업은행과 프랑스의 Pechiney사 간에 50:50으로 합작투자해서 자본금 20억6900만원의 대한알루미늄공업으로 재발족 됐다. 생산능력은 연산 1만7500t으로 전해공장, 주조공장, 전극공장 외에 수전설비, 알루미나 저장설비 등 각종 중장비를 갖췄다. 전해공장은 알루미나를 알루미늄으로 만드는 곳으로, 120기의 전기로에서 연산 1만7500t을 생산했다. 1975년 3월에는 현대강관을 설립했다. 현대강관은 자본금 2000만원의 소규모 업체인 경일산업을 모체로 해 출발했다. 경일산업은 철근, 못, 철선 등을 생산해서 현대 계열사들에 공급했다. 1977년에는 강관사업부를 신설했다.

현대건설은 1973년 초부터 서빙고동 현대아파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등을 건설하면서 국내의 아파트 문화를 주도했다. 이후 현대건설의 주택사업부를 분리시켜 1976년 3월에 자본금 2000만원의 한국도시개발을 설립했다. 토목건축업과 부동산 매매, 임대를 목적으로 출범했다. 1976년 6월에는 남지산업을 흡수해서 주택건설 전문업체로 거듭났다.

한라건설과 현대산업개발도 설립했다. 한라건설은 1977년 10월 현대양행이 해외건설 목적으로 설립한 자회사(자본금 15억원)로 1978년 3월에 한라개발을 흡수해 종합건설업체로 도약했다. 그러나 현대양행이 정부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한라건설은 현대양행에서 분리돼 현대그룹 계열사로 남았다. 1977년 10월에는 토목건축 및 아파트 분양을 목적으로 현대산업개발을 설립했다.

못부터 선박까지 만든다

현대건설은 1976년 12월 말부터 중동건설현장용 제재목을 생산하기 위해 울산에 제재소를 마련, 1977년 7월부터 수출 가구 공장을 가동하면서 1978년 1월에 금강목재공업을 설립했다. 1979년부터 ‘리바트가구’를 국내외에 공급하면서 가정용 및 선박용 가구, 인테리어, 제재업으로 영업종목을 다변화했다. 1980년 1월에는 현대종합목재산업으로 변경했다.

한국포장건설은 1976년 3월, 골재와 아스콘을 생산하던 현대건설 관악중기공장 소속의 관악석산을 분리시켜 설립한 도로포장 전문업체이다. 또한 그해 3월에는 토건 및 도로포장 건설 전문의 고려산업개발을, 1975년 12월에는 알루미늄 창호 자재의 생산을 목적으로 현대알루미늄을 각각 설립했다.

기술용역 전문인 현대엔지니어링은 1974년 2월 현대건설 기술사업부를 분리해서 자본금 1000만원의 현대종합기술개발로 발족했다. 현대콘크리트는 1969년 4월 현대건설에 각종 콘크리트관, 블록, 벽돌 등을 납품하기 위해 설립한 소규모 업체였다. 1971년 12월 말 현대건설에 흡수돼 콘크리트 제조공장으로 유지되며 1976년 4월 동서산업으로 변경했다.

아세아상선(현 HMM)은 1976년 3월에 자본금 2000만원에 3척의 VLCC(초대형 원유운반선)로 설립됐다. 1977년 5월 곡물, 석탄, 광물 등을 운반하는 살물선(Bulk Carrier) 아세아 1호·2호를, 9월에는 원양예인선단을 취항시켜 중동 건설현장까지 자재 운송을 전담했다. 1978년 6월에는 국내 최초로 중동정기항로 운항사업면허를 취득하고, 1979년 3월 12일 제3회 ‘해운의 날’에 국내 최초로 1억불 운임의 탑을 수상하는 등 대형 선사로 도약했다.

현대는 1976년 12월에 자본금 5000만원의 현대종합상사를 설립하고 1978년 2월 11일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았다. 선박 부품과 각종 기계, 공산품 원료, 건축자재와 화학제품, 운반용 기계 등 주로 현대그룹 생산 제품의 수출대행을 위해서였다. 이렇게 현대는 현대건설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1970년 대 ‘못에서 자동차 제조’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복합 기업집단을 구축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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