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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부산엑스포 유치 A to Z (3)] 엑스포의 역사와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시애틀 엑스포의 꿈, 부산으로 연결되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1882년 민영익이 이끈 미국 외교사절단 ‘보빙사’의 시카고 엑스포 참가로 첫 인연
미국, 시애틀 엑스포 통해 소련과의 ‘우주 경쟁’ 반격… NASA 주도 달 착륙 성취


▎부산 엑스포 유치를 기원하며 해운대 해수욕장에 만들어진 모래 그림. 에디슨, 에펠탑 등 엑스포의 역사를 담고 있다.
2030 부산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전이 본격화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세계박람회기구(BIE)’의 파트릭 슈페히트 행정예산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실사단 8명이 4월 2~6일 방한해 개최 희망지 부산을 실사하고 돌아갔다. BIE의 실사는 지난 3월 6~10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와 3월 20~24일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이어 세 번째다. 4월 17~21일엔 이탈리아 로마로 이어졌다.

부산시는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라는 2030 엑스포 주제와 ‘자연과의 지속가능한 삶’,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 등 3대 부제에 맞춰 개최지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했다. 부산은 주민들의 개최 의지, 바다와 을숙도 등 자연환경, 교역도시이자 과학기술·산업의 중심지라는 점 등을 앞세워 개최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이제 11월 말 정기총회에서 171개 회원국의 비밀 투표로 개최지가 최종 결정된다. 회원국 3분의 2 이상이 투표해 이 가운데 3분의 2 이상을 득표해야 개최지로 최종 선정된다. 득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외교력·경제력·문화력 등 대한민국과 부산이 가진 모든 유·무형 자산을 쏟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국제박람회가 어떻게 개최되면서 과학과 문화, 국제교류 발전에 기여했으며, 어떠한 ‘엑스포 정신’이 형성돼 인류사에 영향을 끼쳤는지 살피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과 세계박람회의 기나긴 인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국제 엑스포를 열어야 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11월 BIE 정기총회 표결에서 회원국을 설득할 수 있는 열쇠일 수 있다.

미국으로 간 ‘은둔의 나라’


▎1895년 간행된 유길준의 [서유견문]. 미국과 유럽 기행문인 이 책은 조선 근대화에 영향을 끼쳤다. / 사진:삼성출판박물관
세계박람회는 19세기 말 구한말 시절, 세계의 흐름과 함께하려던 조선의 노력과 처음 만났다. 조선이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섭정 시절(1864~1873년) 쇄국정책을 추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은 1866년 8월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이 불탄 제너럴셔먼호 사건, 그해 10~11월 강화도에서 프랑스와 충돌한 병인양요, 1871년 6월 미국과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 등을 치렀다.

그러다 1875년 9월 일본이 영국에서 사들인 포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주변에 들어와 조선수비대와 전투를 치른 운요호 사건이 터졌다. 이를 계기로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조약(또는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조선은 개항했다. 그 뒤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개항과 수교를 했으며, 1883년에는 당시 패권국가인 영국, 그리고 1871년 통일을 이룬 뒤 국력이 팽창하던 독일과 각각 수교했다. 영국은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1885~1887년 거문도 불법 점령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1884년에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댄 러시아, 그리고 1866년 통일 뒤 활발한 통상 활동에 나선 이탈리아와 각각 국교를 맺었다. 조선은 1886년 프랑스와도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당시 프랑스는 1884~1885년 청나라와 청불전쟁을 벌여 베트남 북부의 통킹만 지역을 차지하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1898년 아프리카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하는 등 치열한 세력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은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수교했다.

이렇게 항구를 열고 각국과 수교한 조선은 1893년 미국에서 열린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참가하면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유럽이 아닌 곳에서 처음 열린 세계박람회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지 400년을 기념해 열려 ‘컬럼비아 세계박람회(The World’s Columbian Exposition)’로도 불린다. 미국에는 남북전쟁(1861~1865년)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팽창하던 국력을 과시할 기회였다. 조선은 시카고 세계박람회 참가를 계기로 ‘은둔의 나라’에서 세계와 함께하는 나라로 본격적인 발돋움에 나섰다.

1882년 미국과 수교한 조선은 이듬해 공사로 부임한 루시어스 푸트(1826~1913)의 권유에 따라 미국에 외교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조선이 서양에 파견한 첫 외교사절단이었다. 민영익이 정사로, 홍영식이 부사로, 서광범이 서기관으로 각각 파견됐다. 유길준·변수 등이 수행했다. 보빙사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열차 편으로 워싱턴과 뉴욕에 도착해 공화당 소속의 체스터 A.아서(1829~1886, 재임 1881~1885년) 미국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났다.

100년 만에 돌아온 조선의 전시품


▎1900년 프랑스 파리 박람회의 ‘대한제국관.’ 건축가 페레가 지은 건물을 현지 신문이 삽화로 실었다. / 사진:2012여수엑스포조직위원회
유길준은 미국 시찰을 마치고 보스턴에 남아 공부하다가 돌아왔다. 1895년 미국 유학 중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서유견문]을 펴냈다. 보빙사는 1883년 보스턴에서 열린 기술공업박람회를 둘러봤으며, 조선의 특산물도 소개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외교사절단의 주요 시찰 대상 중에 박람회가 포함됐던 셈이다. 1889년의 파리 세계박람회에도 민영찬이 조선의 물품을 전시했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 참가였다.

조선이 서양과 공식적으로 만난 첫 세계박람회는 1893년 시카고 박람회였다. 조선은 46개국이 참가 한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관복·삼회장저고리·누비속바지·대님·도포·망건·갓·토시·버선 등 전통복식과 가마·도자기·부채를 비롯한 일반 생활용품, 그리고 투구덮개·조총을 비롯한 군용물자를 전시품으로 보냈다. 특이한 점은 아악 연주단을 함께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아악 연주단 파견은 조선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유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은 예(禮)와 악(樂)에 의한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육·외교·의식·의전·문화·도덕을 담당하는 예조에 장악원(掌樂院)을 설치해 궁중 행사에 필요한 음악과 무용을 맡겼다. 장악원은 제사를 지내는 제례에선 유교 이상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의식음악인 아악을 연주했다. 군주가 신하들과 만나는 조회와 국빈 등을 모시는 연향(연회)에서는 당악·향악·신악 등 이른바 속악을 연주했으며, 군사의례에서는 군악을 각각 다뤘다.

시카고 세계박람회에는 정3품 참의내무부사인 정경원이 장악원 소속 국악사와 통역원 등 10명과 함께 참석했다. 고종은 1885년 궁중 사무와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내무부(內務府)를 설치해 갑오개혁 때인 1894년에 내무아문(內務衙門)으로 업무를 이관할 때까지 운영했다. 참의내무부사는 이 부서의 당상관이다. 오늘날 중앙부처 국장급에 해당하는 고위공무원이다. 당시 조선은 전통의 통치 체계에 따라 격식에 맞춰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것이다. 군주가 직접 관장하는 외교 담당 부처에서 참가단을 파견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일행은 선박을 갈아타면서 미 서부 해안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1869년 개통한 대륙횡단철도를 이용해 시카고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궁중 악사들은 개막식 날 한옥 형태의 전시관에서 아악을 연주했다. ‘세계박람회가 전 세계의 문화와 사람이 함께 만나는 거대한 창구’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세계박람회 참가는 이처럼 전통 예법에 맞춰 문화 행사인 아악 연주로 시작한 셈이다. 부산에서 엑스포가 열리면 개막식 날 이 행사를 재현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계박람회를 매개로 하는, 21세기 대한민국과 100여 년 전 역사와 전통의 만남이 될 터다. 참고로 장악원이라는 명칭은 1895년 장례원으로, 1897년엔 교방사로, 1907년에는 장악과로 각각 바뀌었다. 경술국치 이후엔 아악대와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를 거쳐 해방을 거쳐 6·25 때인 1951년 4월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으로 새로 출발했다.

엑스포에서 입증된 대한민국 산업화


▎1961년 오스트리아에서 회담한 존 F. 케네디 (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총리. 미·소의 우주 전쟁은 시애틀 엑스포에 흔적을 남겼다. / 사진:JFK 도서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은 조선이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보낸 전시품이 현지에 기증돼 시카고 필드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사실이다. 그중 일부가 정확히 100년 뒤인 1993년 열린 대전세계박람회에서 전시됐다. 타임머신의 재현이자 아름다운 귀향이다. 부산 엑스포에서도 참가한 각국의 전시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살아있는 타임머신’ 프로그램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그 뒤 1900년 프랑스의 초청을 받아 파리 세계박람회에도 참가했다. 조선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은 황제를 칭했다.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는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유일한 케이스다. 프랑스는 자국 건축가가 사진을 바탕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지은 전시관을 대한제국에 제공했다. 전시관에는 한지·나전칠기 등 생활 물품과 서화 등 예술작품이 걸렸다. 그 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에도 초청받았지만 참가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참가한 첫 세계박람회는 1962년 시애틀 박람회였다. 대한민국 전시관에는 대나무·왕골·유기·도자기 제품 등 전통 공예품과 재봉틀·라디오·타이어·철물·고무신·치약 등 공산품 1608점이 세계인과 만났다. 실제로 세계박람회 전시 덕분에 한국의 일부 공산품은 수출 계약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박람회는 단순한 전시 행사장이 아니라 실물경제 활동이 이뤄지는 교역의 장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기억할 사실은 1962년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원년으로 대한민국이 산업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해였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세계박람회 참가는 이처럼 산업화와 더불어 시작한 셈이다.

시애틀 엑스포가 낳은 ‘스페이스 니들’


▎시애틀을 상징하는 벤치마크인 스페이스 니들. 1962년 열린 시애틀 엑스포의 미래 지향성을 구현했다.
대한민국은 그 뒤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1970년 일본 오사카 등 등록 세계박람회는 물론 특정 주제하에 열리는 인정 세계박람회까지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월 1일 배포한 2022년 연간수출입 동향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세계 수출 순위는 중국·미국·독일·네덜란드·일본에 이어 세계 6위다. 1962년 대한민국이 경제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지 불과 60년 만에 세계적인 교역 국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세계박람회 참가를 통한 글로벌 경제·산업 흐름 파악과 능동적인 대처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이 해방 이후 처음 참가한 세계박람회인 시애틀 박람회를 차근히 살펴보면 2030년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뛰고 있는 부산이 적극적으로 참조할 부분이 적지 않다. 1962년 4~10월에 개최된 시애틀 세계박람회가 부산과 같은 해양 도시에서 열렸다는 점과 과학기술과 미래를 주제로 개최됐다는 점에서다.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도 서로 일맥상통한다. 특히 시애틀 세계박람회는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개된 우주 경쟁의 흔적을 선명하게 담고 있다. 우주 개발 경쟁은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한 것으로 꼽히는 국가 간 경쟁이다.

박람회 명칭부터 ‘21세기 전시회(Century 21 Exposition)’였다. ‘우주 시대의 인간(Man in the Space Age)’을 주제로 삼았으며 ‘우주 시대에 산다(Living in the Space Age)’를 모토로 내세웠다. 우주에서 시작해 미래를 미국이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한 의욕적인 행사였다. 우주 개척을 상징하는 전망 탑인 스페이스 니들과 기술 진보를 대변하는 모노레일 등이 설치돼 의미를 더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의지가 전적으로 실린 행사였다. 10월 21일 폐막식에는 쌀쌀한 날씨에다, 당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소련과 맞서는 상황에서도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당시 세계박람회에 맞춰 건설돼 지금도 시내 중심지에 우뚝 서 있는 전망 탑인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은 시애틀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높이 184m로 세계박람회를 앞둔 1961년 4월 17일 착공해 그해 12월 8일 완공했다. 박람회 개막일인 1962년 4월 21일 공식 개장했다. 안전에 특히 신경을 써서 시속 320㎞의 강풍과 진도 9.1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모두 25개의 피뢰침이 설치돼 낙뢰 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했다. 우주선만큼 정밀한 설계인 셈이다.

스페이스 니들은 시애틀은 물론 워싱턴주와 미 서부 태평양 지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160m 높이에서 회전하는 전망대에선 시애틀 시가지는 물론 해발 4392m의 레이니어 산을 최고봉으로 하는 캐스케이드 산맥과 해발 2478m의 올림포스 산을 포함한 올림픽 산맥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엘리엇 만에 점점이 떠 있는 섬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세계박람회 기간 중 하루 평균 2만 명이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페이스 니들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높이 182m에 넓은 부분의 폭이 42m에 이르고 총중량 9550t의 육중하고 견고한 구조물이다. 하늘을 찌르는 바늘 같은 디자인은 그야말로 우주 시대를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시속 16㎞ 속도의 엘리베이터는 출발한 지 43초 만에 전망대에 도달한다. 강풍이 불어도 속도만 시속 7.9㎞로 줄일 뿐 운행에 지장이 없다. 이 때문에 큰 인기를 모아 전체 세계박람회 기간에 방문객 960만 명 중 230만 명이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는 지금도 손님을 받고 있으며, 그곳에 자리 잡은 스카이시티 레스토랑은 도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이곳의 기념품 가게는 여전히 방문객으로 붐빈다.

세계박람회가 열린 지 60년도 더 지났지만 미국과 소련이 벌였던 우주 경쟁의 흔적은 여전히 엑스포 개최지 시애틀에 남아 있다. 우주 경쟁은 냉전 시절 경쟁국인 두 나라의 과학기술 자존심 대결에서 비롯했다. 불꽃 튀기는 경쟁은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지구 궤도에 쏘아 올리면서 시작됐다.

미국을 혁신으로 이끈 스푸트니크 쇼크


▎1969년 달에 도착한 아폴로 11호. 시애틀 엑스포의 정신이 현실로 구현된 순간이다. / 사진:NASA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라는 미국의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국은 풍부한 자원과 우수한 인력, 잘 갖춘 인프라, 그리고 자유무역과 기업가 정신에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혁신으로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면서 글로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주도하고 있었다. 미국 경제는 1960년 국내총생산(GDP) 5300억 달러로 전 세계 GDP 1조3700억 달러의 40%를 차지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규모뿐 아니라 품질 면에서도 미국산 자동차·기계·항공기·무기·식료품 등 주요 생산품은 전 세계에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스푸트니크에 일격을 당한 미국은 설욕을 다짐했다. 미국과 소련 간의 우주 경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 재임 1953~1964년)의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릴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재임 1953~1961년)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1위의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우선 1958년 7월 29일 우주와 항공 분야 장기계획을 위한 우주항공국(NASA)을 창설했다. 주목할 점은 우주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 연구·개발 투자를 대대적으로 확장했다는 사실이다. 수학·과학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대학은 물론 중·고교도 교과 과정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미국의 과학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인재를 전 세계에서 모았다. 장학금을 주고 외국 유학생을 대대적으로 유치하는 방식으로 전 세계의 과학기술 인재를 미국에 끌어들였다. 인재는 국적이나 인종·배경이 아닌, 철저하게 실력에 따라 대우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렇게 미국의 과학기술 국력을 재정비하면서 설욕의 시기를 기다렸다.

설욕의 바통은 후임인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1963, 재임 1961~1963년)에게 넘어갔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1961년 4월 12일 소련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 로켓에 실린 인류 최초의 유인우주선에 탑승해 108분 동안 지구 궤도를 돌고 귀환했다. 미국은 우주 경쟁에서 소련에 밀렸지만 초조해하지 않고 오히려 원대한 꿈을 내세웠다.

의지와 집념의 인물인 케네디는 소련에 설욕하기 위해 ‘달 정복’이라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케네디는 1961년 5월 25일 의회 연설에서 “1960년대 말까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킬 것”이라는 국가 목표를 제시했다. 소련의 우주기술을 단박에 뛰어넘는 아폴로 계획의 시작이었다.

케네디의 의지와 집념은 1962년 9월 12일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라이스대에서 국가우주계획과 관련해 연설한 내용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왜 달인가? 왜 이를 우리의 목표로 골랐는가? 그런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도 말했을 겁니다. 왜 가장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하는가? 왜 35년 전에 대서양 횡단비행을 했는가?”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의 에베레스트 정복과 1927년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을 사례로 제시하며 도전의 가치를 앞세운 연설이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달에 가기로 선택한 것은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목표는 우리의 에너지와 능력을 최대한 조직하고 평가하게 해줄 것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도전하기로 했다’는 케네디의 연설은 아폴로 계획의 도전 정신을 잘 나타낸다.

우주와 미래를 주제로 하는 1962년 시애틀 세계박람회는 이런 배경에서 치러졌다. 시애틀 엑스포에 담았던 케네디의 우주 개발 의지는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날 21시 17분(이하 그리니치 표준시간) 미 우주항공국(NASA) 소속 닐 암스트롱(1930~2012) 선장과 버즈 올드린(93)은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의 착륙선 이글 호를 타고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에 차례로 내렸다. 인류가 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순간이다. 마이클 콜린스(1930~2021)는 본선에 남았다. 소련이 1957년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지 12년 만에 미국은 달에 인류 최초의 유인우주선을 착륙시킴으로써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미국이 연구소와 교육기관에서 이룬 과학기술 혁신의 결과다.

엑스포는 하이테크를 나누는 장(場)

달 도착 6시간 뒤인 7월 21일 02시 56분 암스트롱 선장은 착륙선 이글 호에서 나와 인류 최초로 달에 첫발을 디뎠다. 암스트롱은 달에서 휴스턴 본부와 교신하며 “이 걸음은 한 인간에겐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겐 커다란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라는 말을 남겼다. 아폴로 계획의 흔적은 이 발언과 함께 시애틀의 엑스포 현장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주 경쟁은 사실 올림픽만큼이나 순기능적일 수 있다. 우주 개발 과정에서 사용한 기술이나, NASA가 미래를 대비해 개발한 기술이 대거 민간에 제공되면서 인류의 생활기술로 활용되고 있다. ‘NASA 스핀오프(spin off·파생)’ 기술로 불리는 우주 관련 기술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귀 적외선 체온계나 인공심장·심실세동기 원천기술도 우주 개발 과정에서 나왔다. 레이저 시력 교정에 사용하는 라식 기술이나 흠이 나지 않는 렌즈도 NASA가 원천이다. 항공기 결빙 방지 기술, 불에 타지 않는 내화 소재, 화학물질 탐지기, 화재 탐지기 등 생활 기술도 민간에 이전돼 인류를 안전하고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신발 등의 충격 흡수재나 베개·여성의류 등에 쓰이는 형상기억소재도 NASA가 민간에 공유한 하이테크다.

2030 부산 세계박람회를 기술격차가 있는 나라들과 하이테크를 나누는 장으로 승화시킨다면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이라는 부제와 어우러질 수 있다. 이는 지구온난화와 빈곤, 불평등 등 세계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통 마당을 부산에서 여는 명분이 될 수 있다.

-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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