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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6)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 下 

1001마리 소떼 방북으로 이뤄진 거인의 꿈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로 오일쇼크 위기 극복, 사업다각화로 80년대 재계 1위
90년대 대선 출마와 대북 사업으로 주목받아… ‘왕자의 난’ 거치며 그룹 분할


▎정주영(왼쪽) 현대그룹 창업회장은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는 경영인이었다. 그의 도전은 곧 한국 경제의 성취였다. / 사진:아산재단
1973년 10월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 감산을 통해 유가를 무려 4배 이상 올렸다. 그 결과 경기침체 속에 물가상승이란 스태그플레이션이 유발됐다. 당시 한국은 아랍국들이 비우호국으로 분류해서 고통이 더 컸다. 1974년 하반기부터 수출 부진과 고용 감퇴, 경상수지 악화 등 거시경제 지표들이 빠르게 나빠지면서 당시 추진한 정부의 100억 달러짜리 중화학공업화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아랍의 산유국들이 석유 가격을 인상해 긁어모은 달러화로 대대적인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74년 2월 16일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나제르 기획상과 함께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경제협력위원회’를 결성한 것을 신호탄으로 이란, 쿠웨이트, 바레인 등 중동시장 접근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자본은 물론 기술마저 불량한 국내 건설업체들의 핸디캡을 커버하기 위해 해외건설에 한해 물적 담보 없이도 정부가 대신 지급을 보증하는 내용의 ‘해외건설촉진법’을 마련했다. 그 결과 해외건설 수주액은 1974년 8900만 달러에서 이듬해 7억5100만 달러로 급증했다. 1975년 3월 신원개발이 4076만 달러의 이란 코탐사항 확장공사를, 현대건설은 바레인에서 1억3700만 달러의 ASRY조선소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더욱 경이적인 것은 1976년 현대건설의 9억4000만 달러짜리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공사(공사 기간 1976년 6월~1979년 12월) 수주였다. 수주금액은 당시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50%에 해당하는 4600억원으로 해외 언론에서는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로 소개했다. 외환이 바닥났던 우리나라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주베일은 사우디아라비아 동쪽, 페르시아만(灣) 연안에 있는 어촌이다. 해안으로부터 무려 12㎞ 떨어진 수심 30m의 바다 한가운데에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해상유조선 정박시설(OSTT) 건설사업으로 총 길이가 3.48㎞에 달했다. 정식계약은 1976년 6월 16일 체결됐는데, 한국 정부가 지급보증을 섰다.

주베일공사는 콘크리트 소요량만 5t 트럭으로 연 20만 대 분이 동원됐고, 철강재만 1만t짜리 선박 12척분이 소요되는 공사로 계약 공기는 42개월이었다. 정주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효과를 본 ‘돌관(突貫)경영’(집중해야 할 공정에 전 인력을 투입해 밤낮없이 24시간을 작업하는 식의 경영)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공사에 임했다. 시간 단축을 위해 해상유조선정박시설(OSTT)의 철 구조물을 쪼개서 89개의 재킷(jacket)으로 나눈 후 이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했다. 재킷 한 개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 등 웬만한 10층 건물 높이로, 재킷 1개의 중량은 400~500t이었다. 재킷의 덩치가 너무 커서 화물선으론 운반이 불가능했다.

시련은 있어도 불가능은 없다


▎1976년 정주영(왼쪽) 현대그룹 창업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나와프 왕자와 주베일 산업항 공사 계약을 체결했다. / 사진:아산재단
그래서 1만5800t과 5500t급 바지선 두 척을 연결해 그 위에 재킷 4, 5개씩을 싣고 예인선으로 끌고 갔다. 1만2500㎞를 19차례나 왕복하며 89개의 재킷 운반 작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는데, 운반에만 총 35일이 소요됐다.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지만 정주영은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으로 성사시켰다. 이 공사에만 총 25만 명이 동원됐다.

주베일 항만공사는 정부가 기획하고 연출한 ‘주식회사 한국’의 성공신화이자 정주영의 불굴의 도전정신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1978년 현대건설을 세계 500대 기업 중 98위로 선정했다.

1980년대 현대그룹의 다각화 작업의 특징은 첫째, 전자·정보통신 등 첨단산업 진출이다. LG, 삼성, 대우 등에 비해 늦게 전자산업에 진출한 현대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현대전자는 1983년 11월부터 PC 등 컴퓨터를 생산하는 한편 반도체 등을 생산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 1986년 10월 준공했다. 이후 각종 가전제품을 비롯한 반도체, 컴퓨터 생산에 매진해 단기간 내 삼성, LG, 대우 등과 호각세를 이룰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1986년 1월에는 현대마그네틱을, 1988년 2월에는 현대미디어시스템을 설립해서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산업에 참여했다. 1989년 5월에는 생산설비 제어 장비와 공정제어장치, 데이터통신 등을 목적으로 한 현대정보통신을 설립했다.

영역 가리지 않은 사업 확장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 사진:아산재단
중공업의 첨단화·고부가화로 1987년 9월 전자제어장치 및 연료분사장치를 생산하는 현대케피코를 설립했다. 현대중전기는 1983년 2월 미국 웨스팅하우스(Westing House)사와 합작으로 한국산업서비스를, 1984년 3월에는 현대엘리베이터를 설립했다. 1984년 11월에는 사우디 알자밀사와 합작으로 산업전자공장을 건설하고, 1986년 6월에 미국 GE사와 합작해서 한국전기동산을 설립했다. 1988년 7월에는 현대로보트산업을 설립해서 공장자동화사업에도 진출했다. 1984년 10월 현대중공업 내에 로봇절단팀을 조직, 1985년 5월에 일본의 ㈜나치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86년 2월 스포트로봇(8810AK) 1대를 생산해서 최초로 현대자동차에 판매했다. 1988년 7월엔 현대로보트산업을 설립했다.

이어 1988년 8월에는 현대철탑산업을 설립했다. 1973년 5월에 현대건설 소속 철탑공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국내에 설치된 송전철탑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했다. 특히 초고압의 34만5000V용 철탑은 국내 제작이 불가능했다. 현대건설은 초고압용 송전철탑의 국산화 개발에 착수, 1973년 6월에 34만5000V용 송전철탑을 국내 최초로 제작해 한국전력에 납품했다. 1977년 7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송전철탑 3641t을 수출하는 등 사업 전망이 밝아지면서 현대철탑산업을 설립했다.

1986년 9월에는 중장비 대여, 정비 및 기술용역 제공을 목적으로 현대중장비산업을 설립했다. 현대중공업 중기사업부는 1985년 10월 일본 닛산사에 5년간 소형 굴착기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1986년 2월에는 미국 굴지의 중장비제조회사인 Dresser사와 소형 크룰러 도저/로더를 10년간 OEM 방식으로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1987년 1월 4300평의 공장을 준공하고 이 부문을 분리해서 독립 법인화했다.

석유화학산업에도 진출했다. 현대그룹은 1988년 9월 충청남도 서산에 117만5000평 부지를 확보하고 1조200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연산 35만t의 프로필렌, 부타디엔, 스티렌모노머, 에틸렌글리콜 등을 생산하는 계열 석유화학공장 등을 갖추고 현대석유화학을 설립했다. 비교적 늦게 이 부문에 진출한 현대그룹은 명실상부한 중화학 기업집단으로 도약했다.

아울러 현대그룹의 국제화 추진은 1981년 1월 한국알라스카자원개발을 설립하면서부터 시작됐다.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경험하면서 자원의 안정적 확보 차원에서 취한 조치였다. 현대종합목재를 중심으로 해외에 현지법인을 설립하면서 국제화는 가속화했다. 현대종합목재는 미주지역 수출물량 확대를 목적으로 1982년 1월 미국에 현지법인 HFI(Hyundai Furniture Industries)를 설립했다. HFI는 1983년 1월과 1987년 8월에 미국 댈러스와 LA에 각각 가구조립공장을 건설하고 1983년 1월에는 솔로몬 원목개발 현지법인(HTC: Hyundai Timber Company)을, 1985년 8월에는 말레이시아에 현지법인(SHWI: Sime Hyundai Wood Industries)을, 1987년 7월에는 미국 하이포인트에 현지법인(HFI)을 각각 설립했다.

이 시기 백화점, 광고회사, 투자자문회사 등 서비스산업 진출도 확대했다. 그룹 차원의 광고를 전담 시키기 위해 1983년 11월 광고대행사 금강기획을 설립했고 1986년 10월에는 연구용역 및 증권투자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현대사회경제연구원을 설립했다. 1987년 3월에는 백화점을 경영하는 한무쇼핑, 5월에는 설계용역전담사인 현대브라운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1987년 3월에는 현대투자자문을 설립하여 현대증권,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종합금융, 강원은행 등과 함께 금융 소그룹을 형성했다. 그 결과 현대그룹은 1980년대 삼성그룹을 제치고 국내 최대의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룹을 위기로 몰고 간 정치 활동


▎정주영(가운데) 창업회장은 정치에 뛰어들기 전까지 끊임없이 현대의 사세를 확장하며 재계 1위까지 올려놨다. / 사진:아산재단
1990년대 들어 정주영은 정계 진출과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해 주목 받았다. 국내에서 성공한 기업인이 정계에 진출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본업은 기업가이며 정치 활동은 부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정주영은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국내 정치사상 대권에 도전한 최초의 재벌 총수로 기록됐다.

정주영은 대권 도전에 나선 이유에 대해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힘들지 않았던 기업이 없겠지만 아우 인영이(한라그룹 창업자)가 옥고를 치르면서 창원중공업(두산중공업)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잊히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정주영 스스로도 5공 집권 초기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때문에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술회했었다. 정치권으로부터의 압박을 정계 진출의 직접적 동기로 거론한 것이다.

그해 12월 19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개표한 결과 김영삼 민자당 후보가 득표율 42%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주영은 최종득표수가 380여만 표(득표율 16.3%)에 그쳐 통일국민당 당원들조차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현대그룹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룹의 주력이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 대규모 중화학공업이라 초유의 경기불황을 견뎌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998년 초 진보성향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반전되는 듯했다. 정주영, 정몽헌 부자가 그해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소떼 1001마리를 몰고 직접 판문점을 통과해서 입북(入北)한 것을 계기로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 물꼬를 트게 된 것이다.

1999년 2월 현대그룹은 북한 관련 사업을 총괄할 현대아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금강산관광단지 및 개성공업단지 조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내세우며 한반도에서의 냉전 청산에 골몰했지만 공개적으로 북한에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대리인이 필요했는데 현대가 가장 적합한 파트너였다.

서해교전으로 파열된 대북사업


▎1998년 통일 소를 싣고 북한으로 가는 차량. / 사진:아산재단
그런 탓인지 정부 주도로 추진된 빅딜은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 한화에너지의 정유 부문을 현대정유에 넘기는 등 현대그룹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외환위기로 그룹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주영은 대북사업을 더욱 확대했으나 1999년 6월 서해교전 발발로 현대의 대북사업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 와중인 2000년 3월 현대그룹 초유의 경영권 승계문제로 정주영의 아들들 간에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정주영이 노환으로 입원하면서 현대그룹은 정몽구와 정몽헌의 공동회장제로 운영됐는데, 이들 간에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정주영의 장남 정몽필이 일찍 교통사고로 사망해 정몽구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2000년 3월 14일 정몽구 공동회장이 정몽헌의 최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에 전보시킨 것이 발단이었다. 다음날 정몽헌 공동회장은 인사 보류를 지시하고 3월 24일에는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회가 정몽구의 공동회장 면직을 발표했다. 3월 27일에는 현대그룹 사장단 모임에서 정몽헌을 현대그룹의 단독회장으로 승인했다. 5월 31일 정부와 채권단은 정주영, 정몽구, 정몽헌 3부자의 동반퇴진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2000년 9월 정몽구가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서비스 등 9개 계열사를 분리하면서 마무리됐다.

현대그룹의 위상에 큰 타격을 준 이 사건을 세인들은 ‘왕자의 난’으로 불렀다.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몽헌은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아산, 현대엘리베이터, 현대기술정보, 현대종합상사, 현대증권, 현대물류 등 수적으로는 훨씬 많은 계열사를 확보했다. 하지만 정몽구가 이익도 많고 튼튼한 기업들을 챙겨 실리를 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6남 정몽준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등을 분리함으로써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현대백화점도 이때 독립했다. 국내 최대 재벌인 현대그룹은 점차 여러 개의 소그룹으로 분할되었다.

정몽헌 회장의 비극


▎정주영 창업회장의 말년에 현대그룹은 분할의 길을 걷는다. 정몽구(왼쪽 첫 번째)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정몽준(왼쪽 두 번째) 아산재단 이사장, 고(故) 정몽헌(오른쪽 첫 번째) 현대그룹 회장 등이 아버지와 새벽 출근을 하고 있다. / 사진:아산재단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의 계열분리는 정몽헌 지배의 현대그룹을 위축시키는 계기가 됐다. 현대그룹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쌓인 데다 건설경기 침체까지 겹친 탓이다. 막대한 금액을 북한에 송금한 상황에서 형제기업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점도 한 요인이었다. 현대건설은 2000년 10월 29일에 만기가 돌아온 어음 260억원을 결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는 2000년 11월 3일에 부실기업 퇴출조치와 관련해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마련했다. 만기가 도래한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이 제때 상환하지 못할 때는 해당 기업이 만기 도래분 20%만 상환하기로 하고 나머지 80%는 산업은행이 대신 신속하게 갚게 하는 것이었다. 회사채 신속인수제는 현대그룹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2000년 5월부터 2002년 9월까지 국책기관과 금융권이 현대그룹에 지원한 33조6000억원을 주로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에 쏟아부었음에도 현대건설과 현대전자 소유권은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2001년 3월 21일 정주영은 86세로 타계했다.

한국 경제의 개발과 호흡 같이 해


▎정주영(가운데) 현대그룹 창업회장은 스스럼없이 직원과 씨름을 하는 소탈한 경영인이었다. / 사진:아산재단
‘왕회장’ 정주영은 현대건설 초기부터 현장 근로자들 사이에 ‘호랑이’로 통했다. 불시에 현장에 나타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들이 발견되면 추상같이 야단을 친 탓이다. 토목건설 현장은 군대와 같은 일사불란함이 생명이어서 카리스마를 갖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현장 직원들과 막걸리 파티를 즐기고 흥이 나면 즉석 씨름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미 풍기는 가부장적 경영자였다.

또한 정주영은 “신용과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부와 기회를 창출한 자수성가형 기업가였다. 그는 적극적인 사고력과 진취적인 기상, 그리고 목표에 투철한 신념을 가진 개척정신으로 현대그룹을 창업하고 한국 제일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승희[아산정신과 현대그룹의 기업문화], 한국경영사학회 [아산 정주영 연구])

세계 10위 경제 대국인 한국의 공업화 과정은 ‘한강의 기적’ 혹은 ‘한국주식회사’로 불리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정부는 기획과 감독을, 기업가들은 주연배우였다.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상징적인 사례였다. 현대그룹의 역사가 한국 경제 발전사와 등치될 정도였다.

현대그룹 성장의 비밀은 토건 위주의 수직계열화였다. 삼성그룹의 수평적 계열화와는 대조적이다.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의 공업화 완성을 위해 지속적인 창조적 파괴가 요구됐고 정주영은 이런 기회들을 기민하게 포착해서 현대그룹의 덩치를 키워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06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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