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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4)] 여성들의 가발을 국가가 금지한 진짜 이유는 

법으로도 막기 어려운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궁중 넘어 유행처럼 번진 ‘가체’… 천정부지로 가격 오르며 재산 탕진하기도
심해지는 사치 풍조에 ‘가체금지법’ 꺼낸 정조… 사대부 통제 방편으로 봐야


▎단오날 여인네들의 시냇가 풍경을 그린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 그림 속 여인들은 머리에 가체를 올리고 있다. /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장발을 휘날리며 공을 던지는 투수, 축구장을 누비는 머리를 짧게 깎은 여자 선수, ‘기묘한’ 스타일의 머리 모양을 한 남녀 격투기 선수 등은 요즈음 쉽게 볼 수 있다. ‘스포츠머리’라고 해 거의 획일적이던 남자 운동선수의 머리 모양도 다양해졌고, 여자 선수들의 헤어스타일도 각양각색이다.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요즈음은 각자 개성적인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풍조는 이제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다.

머리카락이 풍성하면 어떤 스타일의 머리 모양을 하더라도 괜찮지만, 머리숱이 적으면 머리를 예쁘게 꾸미기 어렵다. 그래서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머리숱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머리숱이 적은 사람은 물론이고, 숱이 많은 사람도 자신의 머리를 치장하기 위해 가발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가발의 역사는 아주 오래됐다. 수천 년 전부터 중국이나 이집트에서 가발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발은 한국 사극에도 자주 등장한다. 주로 궁중 여성이나 기생이 머리에 가발을 얹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여배우들이 화려한 의상과 함께 보여주는 다양한 머리 패션은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극 속 머리 모양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이 참고하는 것은 주로 조선 후기 그림에 나오는 머리 모양이라고 한다. 실제로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면 다양한 머리 모양이 나타난다.

단원이나 혜원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사이 활동한 화가이므로, 이들이 그린 그림에 나타나는 머리 모양은 주로 18세기 후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19세기 헤어스타일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른 자료가 필요한데,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과 이도령을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의 머리 모양을 묘사한 내용이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 후기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건의 하나는, 정조 임금이 내린 가체 금지령이다. 이 법령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정조 12년(1788) 10월 왕은 특이한 명령을 내렸는데, 여성의 가체 착용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이 명령을 [가체신금사목]이라는 책자로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이 책자에는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 번역도 함께 실어 글자를 아는 사람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가체신금사목이라는 말의 의미는 ‘거듭 가체를 금지하는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조 때도 가체를 금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이다.

가발 금지하는 '가체신금사목' 책자로 배포


▎2022년 11월 19일 서울 광진구 동국대학교 사범대학부속 여자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제10회 광진구 전통 성년례’에서 봉사자들이 성년자들에게 비녀와 족두리를 꽂아주고 있다. 정조는 머리 장식을 위한 가체를 금지하는 대신 족두리 쓰는 것을 권장했다. / 사진:서울 광진구
역사드라마 덕분에 현대인에게도 ‘가체(加髢)’라는 단어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사극을 촬영할 때 여성 연기자들이 머리에 얹는 무거운 가체 때문에 고생했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으므로, 조선시대 궁중 여성이 사용한 가발을 가체라고 말한다는 정도는 대체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가체’에서 ‘체(髢)’자의 의미는 ‘땋은 머리’라는 뜻이므로, ‘가체’라는 단어의 의미는 ‘본래 자기의 머리에 땋은 머리를 더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가체신금사목]에는 아홉 개의 조항이 들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첫째 규정은 다음과 같다. “양반 집안과 일반 여염집 부녀자가 남의 머리털 땋은 것을 머리에 얹는 것과 자기 머리털을 머리에 얹는 것을 일절 금지한다.”

이 금지 조항의 핵심은 머리의 모양을 높게 만들면 안 된다는 데 있다. 자기 머리에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땋아 만든 가발을 머리에 올려 높게 만들거나, 또는 순전히 자기 머리카락만이라 하더라도 이를 높이 올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여성이 자기 머리에 가발을 더해 높게 장식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정조는 이를 대신할 방법도 제시했다. 머리 모양은 자기 머리를 땋아 뒤에다가 쪽을 찌도록 했고, 머리 위를 장식하는 것으로는 족두리 쓰는 것을 권장했다. 다만 족두리에 화려한 장식을 하는 것은 금지했다.

정조가 가체를 금지시킨 이유는 가체가 사치를 조장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체를 금지시키려던 시도는 이미 영조 때도 한 번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정책을 끝까지 관철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가체를 금지시키는 법령의 특이한 점은 위반에 대한 처벌이다. 가체를 사용하다가 적발될 경우, 처벌은 가체를 사용한 당사자가 아닌 그 집 가장이 받게 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가체 금지를 각별히 당부했는데, 모든 관리가 자신 집안에서부터 법을 지키고, 또 다른 집안에서 이 법을 위반하는지 살펴보며, 사법 관리들이 엄격하게 단속한다면 가체금지 정책은 성공할 것으로 봤다.

이렇게 엄격하게 가체 사용을 금지했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먼저 궁중 여인들에게는 이러한 금지가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궁중에서는 가체를 쓸 수 있고, 머리를 높이는 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졸지에 생업 잃은 상인 등 부작용 나타나기도


▎대궐 여인만 사용하던 가체가 양반집 부녀자에게 퍼져나가고, 이 유행을 여염집 부녀자들도 따라하게 된다. 그러자 가체 값이 너무 비싸졌고, 가체를 구할 수 없어 혼례를 미루는 사례마저 나타났다. 사진은 충남 부여군의 전통 혼례 장면. / 사진:부여군
그리고 또 하나는 천민 여성 머리에 대한 규정이다. 양반과 평민 부녀자는 가체를 사용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머리털로도 머리를 높여서는 안 되는 데 비해, 천민 여성은 자기의 머리털만으로 머리를 높이 올리는 것은 허용했다. 19세기 기생이 머리를 높게 치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법령의 예외 규정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이 법령은 양반 사대부 집안 부녀자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아름다운 여성 머리의 핵심은 숱이 많은 것이었다. 동양의 고전 [시경]에도 숱이 많은 머리를 아름답다고 표현한 대목이 있다. “검은 머리는 구름 같아서, 가발을 붙일 필요가 없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오래 전부터 풍성한 머리를 높이 꾸미는 것을 통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여성이 머리를 높게 꾸미는 오랜 전통이 새삼 문제가 된 시기는 영조 때였고, 다음 임금인 정조 시기에는 그 폐해가 심각할 정도라고 여기게 됐다. 대궐 여인만 사용하던 가체가 양반집 부녀자에게 퍼져나가고, 이 유행을 여염집 부녀자들도 따라하게 된다. 그러자 가체 값이 너무 비싸져 가체를 구하기 위해 재산을 탕진하는 이가 생기고, 가체를 구할 수 없어 혼례를 미루는 사례마저 나타났다.

정조 임금이 가체를 금지하는 법을 발표한 이후, 조선에서 가체는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된다. 대궐 여인을 제외한 궁 밖 여성들이 가체를 사용하는 것은 법 위반이었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법 위반 시 처벌 대상은 가체를 사용한 당사자가 아닌 그 집 가장이었다. 그러자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

서울 중부에 사는 이기성이라는 인물이 가체를 적발하는 임무를 맡은 관청 공무원을 사칭하고, 가체를 사용한 여자네 집 가장을 협박해 돈을 갈취한 사건이다. 정조는 이기성의 재판을 공개적으로 하도록 지시하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에서 몽둥이로 때려 자백을 받아내도록 했다. 이런 자를 미리 잡아내지 못한 포도대장에게 급료를 깎는 징계도 내렸다. 가체를 금지하는 법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를 많은 사람에게 보여준 것이다.

가체 금지는 사치 풍조를 없앤다는 커다란 명분이 있었지만, 가체를 만들고 판매하던 상인들로서는 생업을 잃은 것이었다. 국가에서 가체 착용을 금지했으므로, 당장 재고 물량을 처리할 길이 없어졌다. 물건을 준비하느라 들어간 많은 돈도 그대로 빚이 돼버렸다. 이들 상인은 국가에 일정한 세금을 내고 장사하던 사람들인데, 국가는 그 손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심지어 가체 대신 다른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해달라는 상인들의 요청도 거절했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은 패션의 최첨단에 서 있던 인물이므로, 그 머리 장식이 당대 유행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소설에서 춘향 머리 모양을 묘사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흑운 같은 허튼머리 반달 같은 화룡소로 아주 솰솰 흘리 빗어 전반같이 넓게 땋아, 옥룡잠 금봉차로 사양머리 쪽 쪘는데, 석웅황 진주투심 산호가지 휘얽은 도투락댕기 맵시 있게 달았으니”

춘향의 머리 모양을 묘사한 이 대목에는 현재는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많아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 머리 모양이 어떤 것인지 얼핏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먼저 현재 자주 쓰지 않는 낯선 단어들의 뜻을 풀이해보기로 한다.

▷흑운(黑雲): 검은 구름. 머리숱이 풍성한 모양을 묘사한 것 ▷전반: 종이 자를 때 쓰는 좁다랗고 얇은 긴 나무판 ▷허튼머리: 숱이 많은 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의미는 알 수 없다 ▷화룡소(畵龍梳): 용무늬를 새겨 넣은 머리빗 ▷옥룡잠(玉龍簪): 용의 형상을 새긴 옥으로 만든 비녀 ▷금봉차(金鳳釵): 봉황의 형상을 새긴 금으로 만든 두 갈래로 된 비녀 ▷사양머리: 새앙머리 ▷쪽: 머리를 땋아서 뒤로 틀어 올리고, 비녀로 고정시킨 머리 모양 ▷석웅황(石雄黃): 천연 돌인데, 잘 갈아서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진주투심(眞珠套心): 진주로 만든 장신구 ▷산호(珊瑚)가지: 산호의 가지를 말하는데, 보석의 일종이다 ▷도투락댕기: 머리에 길게 늘어뜨리는 헝겊으로 만든 장식

사대부와 평민 부녀자들, 가발 대신 비녀로


▎가체를 보관하던 용도의 다래함. 19세기 은행나무로 제작됐다. / 사진:가나문화재단
춘향 머리를 묘사한 짧은 문장 하나에도 이렇게 낯선 단어가 많다. 위 문장 중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단어는 ‘허튼머리’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그 뜻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춘향 머리 모양이 어떤 것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 것은 이런 머리 모양이 현대인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어 풀이를 참고해 춘향 머리 모양을 현대어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뭉게구름처럼 풍성하고 까만 머리털을 반달 모양의 고급 빗으로 솰솰 흘려 빗는다. 그리고 이 머리털을 깔끔하게 넓게 땋아서 새앙머리를 만들고, 옥으로 만든 비녀와 금으로 만든 비녀로 이 머리를 쪽을 쪄서 고정시킨다. 쪽찐 머리에 도투락댕기를 드리는데, 이 도투락댕기에는 석웅황, 진주, 산호 등의 보석을 달아 아름답게 꾸몄다.”

춘향 머리 모양의 핵심은 새앙머리에 쪽을 찌고 도투락댕기를 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춘향은 가발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정조의 가체를 금지하는 법령이 나온 이후에는 기생이라 하더라도 가체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춘향전]의 이 대목을 언급하면서 ‘허튼머리’를 가체라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는데, 허튼머리는 풍성한 머리 모양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춘향전]에는 춘향만 아니라 이도령 머리를 묘사할 때도 ‘허튼머리’라는 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도령 머리치장을 보면 “삼단 같은 허튼머리 반달 같은 화룡소로 아주 솰솰 흘리 빗어 전반같이 넓게 땋아, 수갑사 토막댕기 석웅황이 더욱 좋다”고 했다. 춘향의 ‘흑운 같은 허튼머리’에 비해 이도령 머리는 ‘삼단 같은 허튼머리’다. 삼단은 ‘삼’을 베어 묶어놓은 것을 말하는데, ‘삼단 같은 머리’는 숱이 많고 긴 머리를 비유하는 말이다.

국가가 개인에 간여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

현재 ‘가발’이라고 하면 머리숱 적은 사람이 이를 감추기 위해 쓰는 것인 반면, 18세기 조선의 ‘가체’는 여성이 치장을 위해 머리에 얹는 엄청나게 큰 가발이었다. 가체는 가격이 너무나 비쌌기 때문에 이를 구입하느라 가산을 탕진할 정도였다고 한다. 요즈음도 비싼 맞춤형 가발이 있지만, 가산을 탕진할 만큼 비싼 것은 아니다.

영조와 정조 시대 가체를 금지시킨 명분은 점점 심해지는 사치 풍조를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궁중 여인이 사용하는 값비싼 가체를 왕가 이외 부녀자들이 쓴다는 데 대한 불쾌감도 있었던 것 같다. 가장 높은 계층의 궁중 여인은 가체를 사용할 수 있는데 비해 사대부와 평민 부녀자들은 절대로 가체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계층 여성들에게는 머리 얹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사대부와 평민 부녀자들은 자기 머리를 높게 얹을 수도 없게 했다.

우리나라의 1970년대 장발단속은 겉으로는 미풍양속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군사독재정권이 자유 확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남녀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긴머리’를 한 남성을 처벌할 수 있다는 법률 조항은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1988년 장발에 관한 처벌 조항이 삭제될 때까지 이 법률 조항이 유효했다.

19세기에 들어서기 직전인 1788년 가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정조의 의도는 사치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대부를 통제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대부분 정조의 가체 금지를 찬양하는 기록뿐이므로, 여기에 대한 다른 의견으로 어떤 것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조의 가체 금지는 국가가 개인의 일에 어디까지 간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사치 풍조를 막기 위해 가체를 금지했지만, 가체를 없애면 다른 방식으로 머리를 장식할 것이 뻔한 일이다. 19세기 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은 가체로 머리를 장식하지는 않았지만, 그네 뛰러 나가면서도 화려한 비녀와 댕기로 머리를 꾸몄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법으로도 막기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306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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