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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5)] 태조 왕건과 ‘도이장가’, 두 장수의 충절을 노래하다 

왕건을 살린 신숭겸의 비장한 묘책… 공산전투의 그날 

왕건, 삼한 통합 명분 얻기 위해 신라 왕실 지원하고 후백제 견훤과 싸워
[훈요십조] 8조, 전라도 차별 아닌 궁예·견훤 잔존세력 경계 의미로 봐야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왕건의 의제(義弟)로 나온 신숭겸 (왼쪽에서 세번째). 실제 역사에서는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한 개국 일등공신이었으며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충신이었다. 후일 고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됐다. / 사진:KBS
"주군을 오롯하게 하신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 넋은 가셨으되 / 몸 세워 하신 말씀 / 직분 다해 활 잡는 이 마음 새롭기를 / 좋다, 두 공신이여 / 오래오래 곧은 / 자취가 나타나는구나”

‘도이장가(悼二將歌)’는 두 장수를 애도하는 고려가요이자 향가다.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고려 제16대 왕 예종이다. 1120년(예종 15년) 팔관회에서 잡희(雜戲), 광대들의 공연에서 영감을 받고 지었다고 한다. 두 장수는 927년 공산전투에서 고려 태조왕건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은 신숭겸과 김락이다. 만약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삼한을 통합한 왕건의 대업도 없었다. ‘도이장가’는 한국사의 결정적인 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예종이 이 노래를 짓게 된 계기인 팔관회는 어떤 행사였을까? 팔관회는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운해부터 거행한 국가적인 제의이며 잔치였다. 태조의 유훈에 따라 고려 멸망 직전(1391년)까지 이어졌다. 매년 10~11월에 개경(개성)과 서경(평양)에서 열렸는데 사흘간 제례 의식을 치르고 가무 공연을 즐기면서 국왕, 신하, 백성이 한데 어우러졌다. 애초 왕건이 의도한 대로 고려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성하고 거국적인 행사였다.

팔관회는 가무백희(歌舞百戱)로 절정을 이뤘다. 여러 개의 대형 무대를 설치하고 노래와 춤, 극과 곡예 등 갖가지 공연을 펼친 것이다. 1120년 예종이 팔관회를 관람하는데 한 공연에 유독 눈길이 갔다. 사람 모양의 우상(偶像) 둘이 관복을 갖추고 말에 올라 뜰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예종은 문득 궁금해 좌우에 그 내막을 물었다.

한 신하가 신숭겸과 김락의 숭고한 희생을 기념하고자 한 고려 태조의 일화를 들려줬다. 왕건은 신하와 백성에게 팔관회를 베풀면서 두 공신이 함께 즐기지 못함을 슬퍼했다. 이에 팔관회를 열 때마다 풀로 신숭겸과 김락의 인형을 만들게 하고 관복을 입혀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두 인형이 생시처럼 임금의 술을 받아 마시고 춤을 췄다고 한다. 1120년 예종이 본 공연은 태조의 뜻을 받들어 지난 일을 재현한 것이었다.

예종은 두 장수의 충절과 태조의 의리에 깊은 감명을 받고 시가를 지었다. 신숭겸과 김락을 애도하는 노래, ‘도이장가’다. 이 사실은 임금의 행적이라 [고려사] 세가 등에 기록됐다. 노랫말은 [평산신씨장절공유사]에 향찰(鄕札)로 전한다. 향찰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것으로 신라 향가에 주로 쓰였다. 신라가 망하고 2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도이장가’에 고려 왕실과 신라의 특별한 유대감이 흐르는 건 왜일까?

뛰어난 정치가와 타고난 군인의 경상도 쟁탈전


▎신숭겸의 초상. 평산 신씨의 시조다. 전라도 곡성 출신으로 본명은 능산이었는데 고려 태조에게 본관과 성씨를 하사받았다. / 사진:평산 신씨 대종중 홈페이지
왕건은 918년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건국 직후 고려 태조는 지금의 경상 지역을 아우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신라 최후의 보루였지만 후백제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는 곳이었다. 신라에서는 고려의 힘을 빌려 견훤의 무력 공세를 막고자 했다. 왕건은 뛰어난 정치가였다. 신라는 비록 망해가는 나라였지만 천년왕국의 정통성을 지닌 종주국이었다. 신라를 구원해 명분과 민심을 얻으면 삼한일통(三韓一統)에 유리하다고 봤다. 왕건에게는 대업의 향배를 가르는 일이었다.

반면 후백제왕 견훤은 타고난 군인이었다. 그는 무력으로 신라를 압박해 굴복시키는 전략을 썼다. 920년 견훤이 신라를 침공해 대량군(합천)과 구사군(창원)을 빼앗고 진례군(김해)까지 치고 들어갔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왕건은 기꺼이 군사를 보냈다. 견훤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는데 이때부터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두 영웅은 925년 조물군(안동)에서 정예병을 거느리고 직접 맞붙었다. 결과는 왕건의 판정패였다. 고전 끝에 가까스로 화친을 맺고 조물군을 내주고 말았다.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던 견훤에게 굴욕을 맛본 것이다. 이로써 지금의 경상도 서북 지역은 대부분 후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왕건은 절치부심하며 설욕의 기회를 노렸다.

927년 고려는 신라와 손잡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왕건은 1월에 후백제가 점령한 용주(예천)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이 싸움에선 신라 경애왕이 몸소 출병해 고려 태조를 응원했다. 고려는 계속해서 3월에 근품성(문경), 4월에 강주(진주)를 손에 넣었다. 7월에는 고려 용장 김락이 대량성(합천)을 격파하고 후백제 장군 추허조 등을 포로로 잡았다. 정보를 제공하고 길을 안내하는 등 신라의 도움이 빛을 발했다.

경상 지역의 요충지들을 빼앗겼으니 견훤으로서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고려도 고려지만 문제는 신라였다. 출병까지 감행하며 왕건을 돕는 경애왕을 가만둘 수 없었다. 927년 9월 견훤은 독한 결심을 하고 응징에 나섰다. 후백제군은 근품성을 불태운 뒤 고울부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지금의 문경을 거쳐 영천까지 깊숙이 찌르고 들어간 것이다. 신라의 도성 서라벌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견훤의 군대가 진을 쳤다.

경애왕은 즉각 고려에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왕건은 시중 공훤에게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하지만 견훤은 왕건과 경애왕의 허를 찌르는 대담한 작전을 펼쳤다. 고려군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서라벌을 급습한 것이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 왕도에서 참혹한 약탈과 만행이 벌어졌다.

“신라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적군이 닥쳤다는 급보에 놀라 성 남쪽 이궁(離宮)으로 달아났다. 신하와 악공과 궁녀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견훤은 군사들을 풀어 마음껏 약탈하게 하고, 좌우에 명해 신라왕을 찾도록 했다. 붙잡혀온 경애왕은 핍박해 자살하게 하고, 왕비는 강제로 욕보였다. 그리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포로와 병장기와 보물들을 다 거두어 돌아갔다.”([고려사] 세가 태조 10년 9월)

참담한 소식에 분노한 고려 태조는 정예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국왕의 깃발을 펄럭이며 왕건은 공산(公山, 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으로 달려갔다. 개국 일등공신 신숭겸과 얼마 전 대량성을 함락시킨 김락이 임금의 수레를 좌우에서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범강장달이 같은 장수들도 그 뒤를 따랐다.

주군을 사지에서 구하고 대신 죽은 장수들


▎경주의 명소 포석정. 신라 경애왕은 이곳에서 연회를 열다가 후백제군의 급습을 받았다. 결국 견훤에게 붙잡혀 핍박을 당하고 자살했다. / 사진:문화재청
왕건은 공산의 동수(桐藪)에서 전열을 정비했다. 이곳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서라벌을 유린하고 돌아오는 숙적 견훤을 잡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이미 고려군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는 전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거꾸로 왕건을 요리할 계책을 세웠다.

후백제군은 일부러 깊고 험준한 계곡 아래에 진을 쳤다.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은 야음을 틈타 적진을 덮쳤다. 후백제군은 야습에 맞서려고 했지만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에 전열이 무너지고 말았다. 고려군은 도망치는 후백제군을 쫓아 계곡 안쪽으로 치고 들어갔다. 이때 계곡 위쪽에서 북소리와 함성이 크게 일면서 후백제군이 쏟아져 내려왔다. 복병이었다. 고려군을 유인해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후백제군은 순식간에 포위망을 구축했다. 고려군을 겹겹이 에워싸고 섬멸했다. 차가운 달빛 아래 처참한 살육전이 펼쳐졌다. 왕건은 계곡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형세가 너무 불리했다. 후백제군은 서로 공을 세우려고 국왕의 수레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신숭겸과 김락이 천신만고 끝에 출구를 뚫어 주군을 데리고 나갔다.

왕건과 장졸들은 고개를 넘어 정신없이 달아났다. 하지만 곧 멈춰서야 했다. 이번에는 산이 가로막은 것이다. 적들이 따라붙고 있는데 잘못 오르다간 갇혀서 몰살당하기 십상이었다. 부랴부랴 발길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새 고개를 넘어온 적들이 다시 포위망을 짜기 시작했다. 산밑에 몰린 고려군은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군사들은 피로와 두려움에 심신이 얼어붙고 있었다. 왕건은 눈앞이 캄캄했다. 도무지 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산중에서 노숙하면서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갔다. 이제 삼한일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다니 믿기지 않았다. 주군을 처연히 바라보던 신숭겸이 비장한 묘책을 내놓았다.

“소신이 폐하로 위장해 적의 이목을 끌겠습니다. 그 사이에 폐하께서는 변복하고 이 산을 넘어 몰래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모쪼록 옥체를 보전해 훗날을 도모하소서.”

신숭겸은 서둘러 주군의 갑옷을 벗겨 자신이 착용하고 임금의 수레에 올랐다. 김락이 고려 국왕 기를 치켜들고 신숭겸과 함께 사선에 섰다. 최후의 결전을 치르기 위해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죽음을 향해 떨쳐나서는 길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더불어 왕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전장의 군인에게 가장 영예로운 죽음이 아닌가.

죽어서도 태조 왕건의 곁을 지킨 신숭겸


▎사안도(射雁圖). 신숭겸이 고려 태조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기러기를 쏘아 맞히는 장면을 그렸다. 이 일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평산도호부 조에 실려 있다. / 사진:평산 신씨 대종중 홈페이지
병졸의 옷으로 갈아입은 왕건은 장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을 타고 오르는데 등 뒤에서 뜨거운 함성이 일었다. 돌아보니 신숭겸과 김락이 군사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묵직한 오열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왕건은 꿋꿋이 발걸음을 이어갔다. ‘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국왕으로 위장한 신숭겸은 미리사 앞에서 격전을 벌이고 장렬히 전사했다. 김락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최후를 맞았다. 후백제 병사들은 신숭겸의 목을 베어 왕건의 수급이라며 견훤에게 바쳤다. 지축을 울리는 환호성이 공산을 뒤흔들었다. ‘이겼다! 왕건을 죽였다! 견훤 대왕 만세!’ 후백제군이 승리에 들떠있을 때 왕건은 꾸역꾸역 산을 넘고 달구벌(대구)을 가로질렀다. 충신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사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개경에 돌아온 태조는 좌우에 명해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했다. 적들이 목을 베었을 뿐 아니라 갑옷까지 벗겼을 테니 시체를 판별하려면 신체 특징을 알아야 했다. 결국 왼쪽 발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사마귀가 있는 것을 보고 그 몸을 찾아냈다고 한다(안정복, [동사강목] 고려 태조 10년).

머리 없이 누워 있는 신숭겸의 시신을 보고 고려 태조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날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 사람으로 본명이 능산이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용이 뛰어났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춘천으로 가서 궁예의 수하가 됐다. 이후 왕건을 따르며 여러 차례 정벌전에 나가 공을 세웠다. 능산은 고려 태조의 전우이자 최측근이며 일등공신이었다.

그에게 신(申)씨 성을 하사한 것도 왕건이었다. 하루는 능산이 고려 태조를 수행해 평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삼탄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데 기러기 세 마리가 공중에 떠돌았다. 태조가 따르는 신하들에게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느냐고 물었다. 활 솜씨를 보고 상을 내리려는 임금의 속내였다. 능산이 성큼 나섰다. 오히려 왕에게 몇 번째 기러기를 맞추면 되느냐고 되물었다. 왕건은 웃으면서 말했다.


▎대구 지묘동의 표충단. 신숭겸 장군 유적 뒤편으로 고려 태조가 도망쳤다는 왕산이 보인다. 인근에 파군재, 독좌암, 안심, 반야월 등 공산전투에서 유래된 지명과 설화들이 남아있다. / 사진:대구광역시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라.” 능산이 말을 달려 활을 쏘니 과연 명중했다. 태조는 감탄하며 그에게 큰 선물을 줬다. 신(申)씨 성을 하사하고 평산을 본관으로 삼게 했다. 능산은 그리하여 신숭겸이 된 것이다. 기러기를 쏜 곳 근처의 밭 3백 결도 안겨줬다. 대대로 조세를 받을 수 있는 땅이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평산도호부).

왕건은 지난날을 떠올리며 신숭겸의 죽음을 애도했다. 머리가 없는 모습이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이에 금으로 두상을 제작해 시신을 온전하게 하고 춘천에 장사지냈다. 도적이 황금 두상을 노리고 무덤을 도굴할까 봐 봉분 3개를 만들어 어느 곳에 묻었는지 특정하기 어렵게 했다. 시호는 장한 절개, 장절(壯節)이라 했다.

신숭겸의 고향 곡성에도 무덤이 생겼다. 일설에 따르면 견훤은 공산에서 목을 벤 자가 왕건이 아님을 알고 그 수급을 담장 밖으로 던져 버렸다. 주위를 맴돌던 신숭겸의 말이 주인의 머리를 물고 곡성 태안사 뒷산으로 가서 사흘간 울다가 죽었다. 이를 본 승려들이 머리와 말을 장사지내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곡성의 성황신이 됐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곡성현).

전라도 차별? '훈요십조'의 오해와 진실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묘는 춘천에 있다. 머리가 없는 시신을 온전히 하기 위해 금으로 두상을 제작해 묻었다. 도굴을 방지할 목적으로 봉분을 세 개 만들었다고 한다. / 사진:춘천시
왕건은 신숭겸이 전사한 공산에 지묘사를 세워 김락과 함께 명복을 빌게 했다. 지묘(智妙)는 지혜로운 묘책이라는 뜻이다. 왕으로 위장해 주군을 구한 충절과 지략을 기린 것이다. 신숭겸은 943년 왕건이 세상을 떠난 후 고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됐다. 조선 초에 숭의전을 세워 4명의 고려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을 제향하게 됐을 때도 그는 왕건의 곁을 변함없이 지켰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마전군).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은 유훈 [훈요십조]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조항을 남겼다.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의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 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통합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다(훈요 8조).

이를 두고 왕건이 전라도 사람을 차별해 등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억측이 최근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어불성설이다. 고려 태조가 누구보다 신뢰했으며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최대 공신이 전라도 곡성 출신의 신숭겸이다. 게다가 왕건은 초창기에 나주를 공략해 기반으로 삼으면서 궁예, 견훤에 필적하는 난세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태조의 보위를 이은 혜종 또한 나주 목포 출신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이었다.

삼한 통합의 명분 얻은 왕건 우러르는 찬가


▎곡성의 용산재 및 덕양사는 신숭겸 장군의 탄생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적이다. / 사진:곡성군
훈요 8조에 나오는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옛 지리 정보와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때 지금의 청주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건이 즉위한 직후에 궁예 추종자들이 연달아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통합에 원한을 품는다는 대목은 고려에 투항하지 않고 객지를 떠돌던 후백제 유민들을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고려 태조는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궁예와 견훤의 잔존세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 유훈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전라도를 들먹이는 억측이 나돈 것은 [훈요십조] 조작설과 관련이 깊다. [훈요십조]는 원래 왕건이 측근 박술희에게 전한 궁중비전(宮中祕傳)의 헌장이었다. 1010년 거란 성종의 개경 침입으로 고려 초의 역사서가 모두 소실되자, 고려 제8대 왕 현종은 사국(史局)을 설치해 선대의 실록을 다시 편찬했다. 이때 편수관 최제안이 현종의 사부였던 최항의 집에서 [훈요십조]를 찾아내 사료로 썼다.

공교롭게도 최항과 최제안은 경주에 뿌리를 둔 신라계 집안 출신이었다. 한때 서라벌을 짓밟은 후백제 사람들에게 복수하려고 [훈요십조]를 교묘히 조작했다는 게 일각의 주장이다. 하지만 근대에 [훈요십조] 조작설을 제기한 것은 이마니시 류 등 일제 강점기의 일본 학자들이었다. 정치적 의도를 배제할 수 없다. 이간과 분열은 식민 통치의 주요 수단이었다.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허무맹랑한 괴담들의 출처다.

고려 태조는 삼한을 통합하기 위해 전국의 호족들과 혼인동맹을 맺고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둔 임금이다. 공산전투 참패로 수세에 몰리기도 했지만 호족들의 성원에 힘입어 고창(안동)에서 견훤을 제압하고 대세를 이뤘다. 자식에게 쫓겨난 견훤과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건 삼한 통합의 명분과 민심이 왕건에게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도이장가’는 ‘주군을 오롯이 한’ 두 장수를 애도하는 헌사인 동시에 숭고한 희생을 딛고 ‘통합의 군주’로 우뚝 선 태조를 우러르는 찬사였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306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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