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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5)] 공작원 보이친스키, 상해임정의 주요 인물들을 포섭하다 

상해임정의 최대 파벌로 부상한 한국공산당 

김립 총리 비서장 등 ‘임시정부 안의 4인조’, 대통령 이승만 축출 공작
안창호는 이승만 축출 공작에 반대, 김구도 총리 이동휘의 포섭 거절


▎한인사회당을 한국공산당으로 변경한 후, 총리 이동휘(앞줄 왼쪽에서 둘째)와 비서장 김립(앞줄 오른쪽에서 첫째)은 적극적으로 공산당 당원들을 포섭했다. 예컨대 비서장 김립은 만주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계봉우(뒷줄 가운데)를 포섭했다. / 사진: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
1920년 5월 초 코민테른의 공작원 보이친스키, 김만겸 등이 상해에 도착했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을 기본 슬로건으로 내세워 한국인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당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해 가장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는 동아시아 민족은 단연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한인사회당의 당수 이동휘가 상해임정의 총리로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5월 13일, 보이친스키와 김만겸은 상해임정을 찾았다. 총리 이동휘를 만난 그들은 레닌 정부가 상해임정과 한국인들에게 보내는 공식 서한 두 통을 전달했다. 이어서 상해임정과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이미 한형권 밀사를 소비에트 러시아에 파견한 이동휘는 대환영이었다. 임경석 교수의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에 의하면, 한국공산당을 설립하자는 김만겸의 제안에 이동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한국공산당으로 변경돼 ‘동아시아 비서부’ 산하 한국부가 됐다. 한인사회당의 핵심간부인 이동휘, 김립 등은 그대로 한국공산당의 핵심간부가 됐다.

보이친스키와 김만겸은 이동휘뿐만 아니라 여운형도 포섭했다. 그런데 1919년 상해임정 설립을 전 후해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여운형은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국내로 압송된 여운형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29년 8월 6일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제6회 여운형신문조서]에 의하면, 여운형은 1920년 여름 한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계기는 상해 프랑스 조계의 김만겸집에서 만난 보이친스키의 권고 때문이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었다가 절망한 여운형은 보이친스키가 내세우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기본 슬로건, 즉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에 크게 감동해 한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말뿐이었음에 비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은 훨씬 현실적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에서 여운형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 등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등 공산주의를 열심히 전파했다. 여운형의 영향 아래 있던 신한청년당 계열 인사들도 한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됐다. 조동호, 안병찬 등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압박민족 해방이론


▎여운형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었다가 절망한 뒤 소비에트 러시아의 기본 슬로건, 즉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에 감동해 한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한편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보이친스키는 김만겸의 주선으로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한국인을 대상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강연회를 개최했다고 하는데, 강연회 때마다 상당한 수의 한국인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 같은 선전 활동으로 신채호, 조완구, 김두봉 같은 저명한 민족주의자들도 한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됐다.

그들은 여운형처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었다가 절망한 상태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라는 기본 슬로건에 감동해 가입했다. 따라서 여운형, 신채호 등은 처음부터 공산주의 사상 자체에 경도돼 가입했다기보다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제국주의 타도이론과 피압박민족 해방이론에 감동해서 가입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여운형은 1929년 [제6회 여운형신문조서]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1922년 1월-필자 주)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그때까지는 러시아가 조선에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레닌이 조선의 교통, 국어에 관해 물었을 때, 교통은 자동차로 하루 만에 달할 수 있는 정도고, 국어는 1개 국어라고 대답하자, 레닌은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가 낮기 때문에 지금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이는 나의 이전부터의 주장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상해임정 최고의 정치 수완가 김립


▎이승만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 후 하와이에 들러 찍은 사진. 1920년 5월 이동휘와 김립 등 친레닌 노선은 이승만의 친미 노선에 반발해 그를 축출하고자 했다.
여운형은 당시 식민지 조선을 ‘봉건주의 시대’로 판단해 우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면에서 여운형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 중에서 정통 이론을 따랐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여운형은 정통 공산주의 사상이 당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상해임정의 민족해방운동에 유용하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하다고 판단했으며, 그랬기에 상해임정을 유지하려 노력할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이동휘는 여운형과 달랐다. 이동휘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그랬기에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상해임정을 타도하려 했다. 즉, 이동휘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 중에서 특수 이론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동휘는 마르크스의 특수 이론을 따른 레닌과 같은 볼셰비키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차이로 여운형은 훗날 상해 고려공산당을 조직한 이동휘와 결별하고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참여하게 됐다.

한편 한인사회당을 한국공산당으로 변경한 후, 총리 이동휘와 비서장 김립은 적극적으로 공산당 당원들을 포섭했다. 예컨대 김립은 만주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계봉우를 포섭했다. 계봉우의 [꿈속의 꿈]에 의하면, 그는 1920년 4월 한인사회당에 가입했다. 당시 계봉우는 독립운동사 자료 수집을 위해 만주에서 상해로 왔다. 만주에서 이동휘, 김립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인연으로 계봉우는 상해임정 청사에 머물 수 있었다.

어느 날 김립이 [사회신수(社會神髓)]라는 책을 주며 보라고 했다. [사회신수]는 일본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가 쓴 사회주의 입문서였다. 계봉우는 이 책을 보면서 식민지 조선이 독립하려면 사회주의 혁명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 한인사회당에 가입했다. 계봉우는 한인사회당이 한국공산당으로 바뀐 5월 한국공산당 당원이 됐다.

계봉우 이외에도 김립은 상해임정의 청년 차장들을 한인사회당 당원으로 포섭했다. 포섭된 청년 차장중 확인 가능한 사람은 이춘숙, 윤현진, 이규홍 등 3명이다. 이춘숙은 상해임정 초반 군무차장으로 재직하다가 김희선으로 교체됐다. 이춘숙은 김립과 같은 함경도 출신이었기에 포섭하기가 수월했을 듯하다.

반면 재무차장 윤현진과 내무차장 이규홍은 청년 차장 중에서는 실세였으며 동시에 영남 세력을 대표하기도 했다. 김립은 평안도 계열의 안창호와 기호 계열의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영남 출신 윤현진과 이규홍을 집중적으로 공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김립은 상해에서 최고의 정치 수완가로 손꼽히고 있었다. 예컨대 계봉우는 [꿈속의 꿈]에서 김립을 “정치 수완이 민활한 것만은 나로 하여금 탄복하게 했다. 그에게는 파괴도 잘하고 건설도 잘하는 수단이 있다. 그때의 상해 정계에는 그를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윤현진과 이규홍이 김립에게 포섭된 시점은 1920년 4월 전후로 생각된다. 그 즈음 김립, 윤현진, 이규홍, 김철 등 4명이 공모해 한형권의 여행 경비를 조달했기 때문이다. 김철수의 [친필유고]에 의하면 김립, 윤현진, 이규홍, 김철은 ‘임시정부 안의 4인조’라 불릴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당시 교통차장 김철은 비록 한인사회당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1919년 조직된 대동단에서 윤현진, 이규홍 등과 함께 활동했으므로 친한 관계였다고 이해된다.

[안창호일기]에 의하면, 1920년 5월 13일 윤현진이 안창호를 방문해 “기개(幾个-몇몇) 동지로 더불어 현 통령(統領-대통령 이승만)을 도(倒)하기로 결심했는데, 차(此)가 미수(未遂) 되면 자퇴(自退)하겠노라”고 통보했다. 뒤이어 이동휘가 안창호를 찾아와 “현 대통령을 갈아엎자” 하며 말하기를, “불연(不然)한즉슨 자기는 퇴거(退去)하겠다”고 통보했다. 청년 차장들과 총리가 대통령 이승만을 축출하기 위해 총사퇴를 담합했다는 뜻이었다.

김립이 주도한 이승만 축출 공작 급물살


▎안창호는 이동휘와 김립 등의 대통령 축출 공작에 상해임정이 와해될 수 있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일을 공작한 배후는 김립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배경은 코민테른 공작원 보이친스키와 김만겸의 상해임정 방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20년 5월 13일에 이동휘는 보이친스키와 김만겸을 만나 기존의 한인사회당을 코민테른 산하 ‘동아시아 비서부’의 한국부로 편입하고 명칭도 한국공산당으로 변경했다. 당시 이동휘와 보이친스키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보이친스키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라는 기본 슬로건을 선전했을 것이 확실하다.

레닌 정부가 상해임정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을 공식적으로 제안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동휘 입장에서는 레닌 정부가 일본제국주의와 전면전쟁을 각오하고 상해임정에 연대를 요청한 것으로 이해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해임정은 즉각 무력투쟁 노선을 확정하고 레닌 정부와 손잡아야 한다고 이동휘는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동휘가 주장하는 무력투쟁 노선과 친레닌 노선은 이승만의 외교 노선, 친미 노선과 정반대였다. 이승만을 축출하지 않고는 무력투쟁 노선과 친레닌 노선은 불가능했다. 이런 판단에서 김립은 이승만 축출을 결심하고 총리와 청년 차장들을 움직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재무차장 윤현진은 재정 문제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미국에서 들어오던 재정을 이승만이 외교활동에 돌려쓰는 바람에 상해임정은 극심한 재정 곤란을 겪었고, 그것은 대통령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이런 불만을 이용해 김립은 아예 대통령을 축출하려 공작했던 것이다.

당시 청년 차장은 김립까지 포함해서 재무차장 윤현진, 내무차장 이규홍, 군무차장 김희선, 외무차장 정인과 교통차장 김철 등 6명이었다. 이 중에서 ‘임시정부 안의 4인조’라 불리던 김립, 윤현진, 이규홍, 김철은 대통령 축출에 적극 동조했고 그 외에 김희선과 정인과는 분위기에 휩쓸려 동의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김희선과 정인과는 안창호 계열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청년 차장들의 동의를 확보한 위에 이동휘까지 동의함으로써 대통령 축출 공작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대통령 축출 공작을 막아낸 안창호


▎김구는 철저한 민족의식으로 이동휘의 포섭을 물리쳤다. / 사진:국가보훈처
하지만 김립의 공작은 안창호의 격렬한 반대로 진전이 되지 않았다. 안창호는 청년 차장 중에서 자기 계열인 김희선과 정인과를 만나 설득했다. 만약 총리와 청년 차장들의 뜻대로 대통령이 축출된다면 상해임정은 와해될 것이고, 반대로 대통령이 축출되지 않고 총리와 청년 차장들이 총사퇴해도 상해임정은 와해될 것이라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청년 차장들의 주장을 철회하는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이 같은 설득에 김희선과 정인과는 대통령 축출 주장을 철회했고, 김철은 어중간한 태도를 취했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이 모스크바 특사 문제를 제기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이동휘가 궁지에 몰린 것이었다. 급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이동휘는 1920년 6월 18일 사직서를 제출했고, 23일에는 아예 웨이하이웨이(威海衞)로 가버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궁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여의치 않으면 모스크바로 직접 가기 위해서였다.

이동휘를 웨이하이웨이로 가게 한 것 역시 김립의 공작이라 짐작된다. 김립은 안창호 때문에 대통령 축출이 여의치 않자 극단적인 수단을 썼던 것이다. 상해임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는 수단이었다. 총리의 웨이하이웨이 행은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1919년 8월 이동휘 때문에 해산됐던 대한국민의회는 1920년 2월 부활돼 있었다. 따라서 현재 확장 중인 한국공산당을 매개로 이동휘 세력이 대한국민 의회에 참여한다면 상해임정보다 더 강력한 임정이 될 수 있고, 그것을 명분으로 모스크바로부터 지원금도 받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이동휘의 웨이하이웨이 행은 양수겸장이었다. 만약 총리를 다시 상해임정에 참여시키기 위해 안창호가 양보하면 상해임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이동휘가 모스크바로 직접 가서 한국공산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키고, 상해임정에서 탈퇴해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해 주도권을 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창호는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김립은 1920년 7월 17일 웨이하이웨이의 이동휘에게 편지를 보내 “이젠즉 사세불피(事勢不避)하여 우리는 상해정부에 물러가게 되었소이다”라고 했다. 상해임정의 총리를 사직하고 모스크바로 가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틀 후인 1920년 7월 19일에 김립은 다시 이동휘에게 편지를 보내 “김만겸씨의 소개로 아인(俄人)에게 거액 차관을 할 수 있사온대, 아인(俄人)이 신임하기로는 선생님이 총리로 계심과 개인 명의가 현저하오니 결코 총리를 사직 말라 하오며 겸하여 제(弟)의 사직하라는 일을 애쓰고 만지(挽止)하오이다”라고 했다. 모스크바에서 거액의 차관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려면 임시정부의 총리 직위가 필요하므로 사직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당시 이동휘는 김립의 말대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계봉우가 [꿈속의 꿈]에서 김립을 “그때의 상해 정계에는 그를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고 평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민족정신으로 총리의 포섭을 거절한 김구

김립의 말대로 이동휘는 상해로 귀환했다. 그때가 1920년 8월 11일이었다. 상해 귀환 후, 이동휘는 한국공산당 당원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예컨대 주요한의 [안도산 전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느 날인가, 안창호와 이동휘가 함께 있는 자리에 목사 백영엽(白永燁)이 참여하게 됐다. 그때 이동휘는 “백 목사, 내가 앞으로 백 목사한테 서류를 보낼 테니 선전을 좀 해주게”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창호는 그것을 막으면서 “아니 여보, 백군이 교회 일을 하는데 그걸 어떻게 선전하란 말이오”라고 했다. 당시 이동휘가 목사 백영엽에게 보내겠다고 한 서류는 공산주의 선전물이었다. 이동휘는 안창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달 팸플릿을 백 목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또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어느 날인가 이동휘가 경무국장 김구에게 공원 산보를 청했다. 산보 중에 총리는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다. 김구는 “제가 경무국장으로 총리를 보호하는 터에 직책상 무슨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총리는 손을 저으면서 답변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요. 대저 혁명이란 유혈 사업으로 어느 민족에게나 대사인데, 현재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오. 따라서 이대로 독립을 한 후 또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되니, 두 번 유혈은 우리 민족에게도 큰 불행이오. 그러니 적은이(동생-필자주)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라고 했다. 김구가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 국제당(國際黨-코민테른)의 지휘, 명령을 받지 않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자, 총리는 고개를 저으며 “불가능하오”라고 했다. 그러자 김구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弟)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총리는 불만스러운 낯빛으로 떠났다고 한다.

당시 김구는 철저한 민족의식으로 이동휘의 포섭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라는 기본 슬로건에 감동해 한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결과 1920년 9월에 접어들어 한국공산당은 상해임정의 최대 파벌로 확장될 수 있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6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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