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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6)] 내면의 성장을 공부한 성재(惺齋) 금난수 

학문보다 스승 퇴계의 인품을 본받다 

첫 스승 김진 이어 퇴계 문하 들어가 출세보다 위기지학에 힘써
성재·고산정 지어 퇴계와 문답, 낙향 뒤 임진왜란 나자 향리 지켜


▎성재 금난수의 후손 금창업씨가 도산구곡의 8곡에 들어선 고산정 앞에 섰다. / 사진:송의호
"일동 주인 금군/ 물 건너에서 부르네, 지금 있는가/ 농부가 손을 젓는데 소리는 안 들리고/ 구름 낀 산 쓸쓸히 보며 홀로 한참 앉았네”

퇴계 이황이 봄날 청량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한 제자를 보고 싶어 남긴 시다. 발길이 멈춘 곳은 낙동강이 청량산을 지나며 씻긴 뒤 가송협으로 빠지는 고산곡이다. 도산구곡 중 제8곡이다. 강 저편 언덕에 그림처럼 정자 하나가 서 있다. 고산정(孤山亭). 퇴계는, 그 정자를 지어 책 읽고 자연에 묻혀 사는 제자를 찾은 것이다.

3월 17일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고산정을 찾았다. 스승 퇴계와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연의 품 안에서 주고받은 향기를 맡고 싶어서다. 제자는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 그는 퇴계의 많은 제자 중 벼슬이 높지도 않았고 50년간 쓴 일기를 빼곤 저술도 따로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퇴계는 수시로 고산정을 찾았고, 또 진심을 담은 편지를 그에게 남겼다. 후손인 금창업 선생님이 현장을 안내했다.

고산정은 절벽 외병대 옆에 겨우 들어섰지만 앞 공간은 10여 명이 다닐 만큼 넉넉하다. 먼저 시인 묵객의 시판을 살폈다. 퇴계 등 당대 명사들이 남긴 시가 있었다. 나무에 새긴 본래 시판 대신 탁본을 복사한 종이가 유리 액자에 들어 있다. 금창업 후손은 “도난을 우려해 원본은 모두 국학진흥원에 맡겨졌다”고 설명한다. 고산정 풍광은 압권이다. 정자 앞은 물이 깊고 그 뒤로 소나무 우거진 산과 마을이 건너다보인다. 성재의 안목은 자호인 ‘고산주인(孤山主人)’답게 화룡점정으로 정자를 배치했다. 외병대 절벽 쪽에 조선총독부가 세운 천연기념물 먹황새 번식지 표석이 남아 있다.

성재는 1564년 35세에 고산정을 지었다. 일동정사(日洞精舍)라고도 한다. 주변엔 매화와 소나무를 심고, 앞에는 작은 배를 마련해 흥이 나면 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렸다. 퇴계는 청량산 길목에 제자가 이 정자를 짓기 전부터 이곳 경치를 사랑했다. 마침 그곳에 금난수가 정자를 지어 독서하고 휴식한다니 스승은 오가는 길에 그 집을 바라보며 즐거웠다.

퇴계는 고산정에서 제자를 만난 날의 감회도 시로 남겼다.

선비들의 명승이 된 고산정


“험지 넘어 깊은 곳에 한 천지 얻었으니/ 멋진 절벽 고운 물에 영지밭이 비치네/ 전에 와서 못 만나고 이번에 만나 보니/ 이 골짝 신선을 만났는가 싶구나” 제자도 스승의 운을 빌려 시를 짓는다. “고산에 다시 모시니 계절은 사월인데/ 긴 낮에 가끔가끔 거친 밭을 갑니다/ 어찌 꼭 신선 공부 배울 필요 있을까요/ 사물 밖에 노니니 바로 신선입니다”

고산정은 이후 선비들이 좋아하는 명승이 되었다. 퇴계 선생이 고산을 노래한 시 13수와 월천 조목의 시 6수, 권동보·금보·김극일 등 34명의 시를 모아 엮은 [고산제영(孤山題詠)]이 별도로 전해진다. 이런 금난수도 처음에는 퇴계 선생의 제자가 아니었다. 태어난 곳은 도산서당에서 낙동강 건너편인 예안면 부포. 그는 7세에 조부로부터 [소학]을 배우다가 그 뒤 외가가 있는 안동 내앞에서 청계 김진을 스승으로 모셨다.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 청계는 당시 서당을 열고 있었다. 금난수는 그곳에서 16세까지 학봉 형제와 벗 등을 만나 함께 공부하고 어울렸다. 여기서 성재는 선비는 남에게 드러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성장시키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일찌감치 깨닫는다. 외가 마을에서 사귄 벗은 이후 퇴계 선생 문하에서 다시 만나고 관직 생활과 국난 때도 뜻을 함께할 수 있었다.

성재는 21세에 건넛마을 다래에 살던 규수와 혼인한다. 월천 조목의 누이였다. 조목은 당시 퇴계 문하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월천은 매부가 된 성재를 퇴계 문하로 이끈다. 그때부터 금난수는 비로소 퇴계의 제자가 됐다.

고산정을 나왔다. 길은 도산서원 쪽으로 이어진다. 성재의 고향 부포로 향했다. 부포는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된 마을로, 도산서원에서 낙동강 건너편이다. 평소엔 낙동강에 막혀 먼 길을 돌아야 하지만 긴 가뭄으로 도산서원 앞 잠수교가 드러나 좁은 다리 위로 물을 건넜다.

도로 옆 산자락에 큰 고택이 외따로 보인다. 대문 옆으로 ‘성성재종택(惺惺齋宗宅)’이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금난수는 호를 성재라고도 하고 성성재로도 불렀다. 종택은 ‘ㅁ’자형 본채와 사당, 아래채로 이뤄져 있다. 안방은 다락이 뚜렷한 2층 구조이다. 벽체 일부는 시멘트 마감이 보이는 등, 종택은 원형을 다소 잃은 상태였다. 집이 오래 비어 처마엔 벌집이 만들어졌다.

과거시험 준비보다 내면 공부 주력


▎퇴계 이황이 이름을 붙인 임경대 바위 뒤로 서실 성재가 보인다. / 사진:송의호
동행한 후손이 내력을 설명했다. “종택은 몇 차례 곡절을 겪고 여기에 남았습니다.” 처음엔 낙동강 가까운 호소골 입구에 있었다. 18세기쯤 지어진 종택은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불에 탔다. 1957년 후손들은 부포로 옮겨 32칸 종택을 재건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20년이 지나지 않아 이번엔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수몰됐다. 1976년 종택은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전했다. 전하던 유품이며 전적은 도둑맞기도 했다. 본래 이 자리는 성재와 퇴계 손자 이안도를 제향하다 훼철된 동계서원(東溪書院)이 있던 곳이다. 종택 오른쪽 사당에 들렀다. 불천위 성재의 신주만 모셔져 있다. 예를 표했다.

성재는 퇴계 문하에 들어간 뒤 처음부터 지향점이 좀 달랐다. 그는 여느 제자들처럼 과거 준비하는 공부를 하려 들지 않았다. 퇴계는 성재가 22세에 공부가 부족하다며 과거에 응하지 않는 것에 주목했다. 이듬해 스승이 편지를 쓴다. “남들은 모두 과거에 마음 쓰느라 이 학문(내면을 성장시키는 공부)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하는데 그대는 여기에 뜻을 두고 과거 공부를 돌아보지 않으니, 그 뜻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세상에 살고 있고 또한 늙은 부모가 계시니 어찌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겠습니까.” 스승은 제자의 자세와 기상을 칭찬하면서도 두 가지 공부를 겸할 것을 권유했다.

종택을 나와 개울 오른쪽 언덕에 작은 건물이 보였다. 성재(惺齋)라는 서실이다. 금난수는 25세에 이 집을 지으면서 스승에게 알렸다. 부모를 모시고 가정을 돌보는 틈틈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퇴계는 이야기를 듣고 ‘성성재(惺惺齋)’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손수 ‘성재(惺齋)’라는 글씨를 써줬다. 서실 안에 편액이 걸려 있다. [안동 성재 금난수 종가]를 쓴 김윤규 한동대 교수는 “자신의 호를 항상 깨어 있으리란 다짐의 성재로 지어 그런 실천으로 생애를 관통한 것은 두려운 모범”이라고 표현했다.

성성재 앞에는 개울을 따라 너럭바위가 자리해 있다. 바위는 도로가 나면서 파헤쳐졌고 지금은 잡초 더미에 덮여 있다. 임경대(臨鏡臺)·풍호대(風乎臺)·총춘대(總春臺)·활원당(活源塘). 퇴계는 이들 바위에 손수 이름을 짓고 성성재를 읊은 시 여덟 수를 써주었다. 퇴계는 제자가 항상 깨어 있는 마음(常惺惺)으로 경(敬)에 머무르기를 기대했다. 어렵게 풀더미를 헤치자 ‘임경대’ 글자가 선명히 보였다. 금창업은 “수몰 전 어렸을 땐 여기서 목욕하고 성성재에 올라 잠도 잤다”며 “그땐 참 경치가 좋았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50세에 종9품 참봉으로 첫 관직


▎동계서원 자리에 들어선 안동시 예안면 부포마을 성재 금난수의 종택. / 사진:송의호
성재는 이 서실에서 공부에 매진했다. 성재를 지은 이듬해인 1555년 퇴계는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다. 이때부터 성재는 스승으로부터 [주자서절요]를 배웠다. 29세엔 퇴계가 부포를 찾아 우탁을 현창하는 역동서원 설립을 추진하자 힘을 보탰다. 31세 들어 성재는 과거에 응시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이듬해 회시에 생원으로 합격한다. 관료로 나아갈 최소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성재는 바로 벼슬에 나가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스승 곁에서 더 배우고 향약 등 유학을 실천하는 공부에 힘썼다. 35세에 고산정을 짓고 39세엔 스승에게 여쭈며 역동서원 원규를 정했다.

1570년. 41세 성재는 도산에서 [심경]을 공부하며 퇴계 선생을 찾아뵙고 가끔 편지를 썼다. 어느 날 답장이 왔다. “남의 뜻을 억지로 하지 말고, 스스로 부끄러울 일은 언제나 마음에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스승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 됐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성재는 1년간 베옷을 입었다. 이후 성재는 스승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았다.

성재는 1579년 50세에 종9품 제릉참봉으로 임명된다. 첫 관직이다. 제릉은 개성 인근이어서 그는 그때부터 서울 출입이 잦아졌다. 2년 뒤엔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는 경주 집경전 참봉으로 이동한다. 54세엔 다시 경기 고양에 위치한 경릉참봉으로 자리가 바뀌었다. 그는 이후 벼슬은 높지 않았지만 서울이 가까워져 어린시절 동문인 김극일·김성일 등과 동향인 류성룡·배삼익 등을 만나 교유한다.

성재는 장흥고(종이 등의 물품을 공급하던 창고) 봉사와 직장을 거쳐 60세에 장예원 사평으로 임명된다. 그 무렵 정여립 옥사로 동인이 궁지에 몰리면서 성재는 이듬해 해직된다. 1590년 그는 낙향한다. 성재는 10여 년을 비운 성성재와 고산정을 손보고 나무를 심었다. 2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성재 일가는 청량산으로 피란했다. 왜적은 고산정까지 쳐들어왔다.

성재는 서울 함락 소식에 향병을 모으고 훈련을 시작한다. 물러나 있었지만 나라가 어려우니 떨쳐 일어선 것이다. 김해가 의병장이 되고 아들 금경이 군량유사를 맡았다. 원근의 지인이 식량을 구하러 성재를 찾으면서 그는 전염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해 6월 성재는 예안 수성장(守城將)의 직첩을 받는다. 의병장 김해가 전사하고 의병이 흩어지자 고을 사람들이 그를 추대해 의병장으로 삼아 수성장에 임명된 것이다. 성재는 군기를 세우고 창고를 열어 주민을 구휼했다. 이듬해 다행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성재는 평화가 찾아오자 고산정에서 부포까지 뱃길을 유람하며 조목·이덕홍 등과 시를 주고받았다.

수성장 맡아 향리 안정시키고 전쟁 지원


▎퇴계 이황과 제자들이 고산과 고산정을 노래한 시를 모은 [고산제영].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68세 성재는 다시 수성장으로 임명돼 왜적을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당시 많은 수성장이 있었지만 68세 노령에 지역을 안정시키며 전쟁을 지원한 이는 흔치 않았다. 조정은 훗날 성재를 선무원종공신에 녹훈하고 정3품 통정대부로 증직했다.

1599년 성재는 70세에 금씨의 본향인 봉화현감에 임명된다. 그는 부임하자 환곡을 풀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생활을 도왔다. 또 민심을 순화하기 위해 퇴계 향약을 현지에 맞게 고쳐 시행했다. 그 뒤 봉화 관아에 불이 나면서 1년여 목민관 임무를 끝낸다.

71세 성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차남 금업과 3남 금개가 함께 문과에 급제하는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성재는 고을의 축하를 받으며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향사례를 주관하고 벗들과 산수를 유람하며 삶의 마지막을 보냈다.

성재는 평생 퇴계를 우러르며 본받기를 원했다. 퇴계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누고 20편이 넘는 편지를 보내 격려했다. 그는 선생이 매달린 저술에 뛰어드는 것은 외람된 일로 여겼다. 또 출세보다 마음을 닦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우선하고, 부포마을 등지에 향약 등 생활 속 유학을 실천한 고산의 은일지사(隱逸志士)였다.

[박스기사] 봉화 금씨는 당대의 명문가 - 정비석 작품에 등장한 퇴계 홀대는 사실과 달라

봉화 금씨는 진성 이씨, 영천 이씨, 광산 김씨 등과 함께 16세기 안동 예안을 대표하던 문벌이다. 항간에는 이 가운데 봉화 금씨와 진성 이씨 중 어느 성씨가 더 양반이었는지 견주는 이야기가 전한다.

퇴계의 맏아들은 준, 맏며느리는 봉화 금씨였다. 퇴계는 맏며느리를 맞아올 때 상객(上客)으로 사돈댁에 갔다가 금씨 문중의 혹독한 냉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혼인에서 사돈댁은 상객을 융숭히 접대하는 것이 통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금씨 문중사람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오직 혼주 한 사람만 상객을 맞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씨 가문은 그 지역에서 떵떵거린 세도가여서 그들은 문벌도 지체도 없는 퇴계 가문과 통혼하는 것을 거족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소설가 정비석이 쓴 〈퇴계일화선〉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며느리는 “생전에 시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유언을 했고, 지금은 퇴계 묘소 바로 아래 홀로 묻혀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성재 금난수만 해도 넷째 고모는 퇴계의 형수가 되고, 셋째 고모는 질부가 됐다. 후손은 “이미 퇴계 선생 이전부터 양가는 혼인이 많았다”고 세보를 확인해줬다. 봉화 금씨는 지금은 드문 성씨가 됐지만, 당대엔 번성한 명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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