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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4)] 예언의 노래냐, 역모의 노래냐, 모함의 노래냐 

“뽕나무에 말갈기가 나면 정여립이 왕이 된다” 

“미나리(인현왕후)는 사철, 장다리(장희빈)는 한철”… 참요도 백성의 입맛 맞춰 진화
정치적 의도 담겨 있어도 백성이 공감 않으면 입에 오르지 않아… 참요도 ‘공물(公物)’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대동계의 거병 장면.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대동계를 결성했다. 대동계는 손죽도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치고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1589년 모반할 것이라는 고변이 있어 정여립은 도피 중에 자결하고 계원들도 붙잡혀 죽었다.
"권신(權臣)으로 동요에 오르내린 자들은 패망하지 않은 경우가 별로 없다.”([청성잡기] ‘성언’) 18세기 문신 성대중의 통찰이다. 길거리의 민심을 담은 동요(童謠)에 이름이 오르내린 권신들은 누구일까?

김자점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득세해 권세를 부렸다. 당시 “자점점점(自點點點)”이라는 노래가 퍼져나갔다. ‘자점이 욕되어 점점이 흩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김자점은 인조와 사돈을 맺고 청나라를 등에 업으며 영의정에 오르는 등 권력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재물을 탐하고 안팎으로 결탁했다고 해서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결국 그는 아들의 역모 사건에 연루돼 멸문지화를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음은 조선 숙종 초에 정권을 잡은 남인 영수 허적. 그는 1680년 궁중의 유악(油幄), 기름칠한 장막을 집안 잔치에 유용한 일로 왕의 노여움을 샀다. 그 무렵 세간에 “허적이 산적(散炙) 된다”는 동요가 나돌고 있었다. 산적은 고기와 채소를 꼬챙이에 꿰어 구워 먹는 음식이다. 아니나 다를까,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들어갔다. 허적은 사약을 받았고 남인 정권은 무너졌다. 남인들이 꼬챙이에 꿰여 구워진 셈이다.

김일경은 경종을 보위한 소론 정권의 실세였다. 1722년 목호룡을 부추겨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그는 임금을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죽음으로 몰았으며 노론 수백 명을 극형, 유배, 멸문에 처했다. 이때 “일경(一鏡)은 파경(破鏡)”이라는 동요가 저자에 떠돌았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과연 거울이 깨지고 말았다. 김일경은 노론을 무고한 죄로 참형당했으며 삼족이 멸문당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했다. 권신의 위세가 한창 성할 때 거리와 골목에 노래가 퍼진다. 그것은 패망을 예고하는 동요다. 성대중은 이런 사례들을 추려 ‘성언(醒言)’ 편에 실었다. 백성의 노래가 곧 ‘깨우치는 말’인 것이다.

이 노래들은 예언적 성격을 띤 참요(讖謠)다. 조선시대 참요는 정치색이 뚜렷했다.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격화될 때마다 나라 곳곳에 예언의 노래가 난무했다. 어떤 정치가들은 민심을 움직이고자 몰래 참요를 지어 퍼뜨렸다. 권신들의 노래에도 그런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김자점은 산림, 허적은 서인, 김일경은 노론의 공적이었다. 참요는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한 무기였는지도 모른다. 민심을 선동하는 여론전의 첨병이랄까.

민심을 선동하는 여론전의 첨병


▎1722년 소론 김일경 등이 주도한 임인옥사로 목숨을 잃은 노론 4대신. 왼쪽부터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조선은 이성계 군단의 나각(螺角) 소리에 맞춰 ‘목자득국(木子得國)’ 노래를 합창하며 힘차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목자(木子)’, 곧 이(李)씨 성을 가진자가 나라를 얻으리라는 예언의 노래다. 한자의 자획을 나누는 파자(破字)를 이용해 이성계에게 천명(天命)이 있음을 암시했다. 백성들의 노랫소리가 커질수록 고려왕조의 쇠망은 돌이킬 수 없었고 이씨의 새 나라는 기정사실로 굳어져 갔다. 건국 과정부터 참요가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고려사] 등에서는 위화도회군 이전 이성계가 살던 동리에 이 동요가 나돌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을까? 솔직히 이 노래가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다고는 믿기 어렵다. 역성혁명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계가 회군해 나라의 실권을 쥔 뒤에 참요로 왕조 교체의 민심을 확산시키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을 주도한 인물로는 이성계의 으뜸 책사 정도전이 유력해 보인다.

“굳센 목자(木子)가 / 때를 얻어 일어나니 / 누가 보좌하리오 / 덕망 있는 주초(走肖)로다 / 비의(非衣) 군자는/금성에서 오고/삼전삼읍(三奠三邑)이 / 도와서 공을 이루네/신도(神都)에 터전 닦고 /왕위를 길이 전하리라”([태조실록] 1393년 7월 26일)

조선 건국 직후에 정도전이 태조에게 바친 악장 ‘수보록(受寶籙)’이다. 악장(樂章)은 당시 궁중 음악에 쓴 시가를 말한다. ‘수보록’은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 석벽 속에서 얻었다는 비결을 인용했다. 이른바 도참(圖讖)의 설이었다. 목자(木子)는 물론 장차 임금이 될 이성계다. 보좌할 중신들도 나온다. 주초(走肖)는 조준, 비의(非衣)는 배극렴, 삼전삼읍(三奠三邑)은 정희계, 정총, 그리고 정도전 자신을 가리킨다. ‘목자득국요’의 연장선상에서 도참설을 거론하고 스스로 악장을 지은 것이다.

새 악장들을 주군에게 바치며 정도전은 “천명을 받은 상서(祥瑞)를 노래와 연주로 널리 알리겠다”라는 뜻을 밝혔다. 여기서 상서는 이성계가 임금이 된다는 사실을 하늘이 미리 알려줬다는 것이다. 악장에 투영된 정도전의 견해는 ‘목자득국요’가 나타난 배경도 설명해준다. 왕조 교체의 혼란기에 천명은 민심의 향방을 가르는 키워드였다.

태조는 정도전이 올린 악장들을 악공으로 하여금 익히게 했다. ‘수보록’은 그 후 ‘몽금척(夢金尺)’과 함께 악부(樂府, 시가집)의 첫머리에 올랐다. 궁중에서 공식 행사를 열 때 가장 먼저 노래하고 연주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의 노래와 도참을 용납하지 않았다. 태종 11년(1411) 예조에서 군신이 함께 잔치할 때 쓸 악장의 차례를 올렸다. 이방원은 대뜸 맨 앞에 둔 ‘수보록’에 어깃장을 놓았다.

정여립 집에 유력자들이 드나든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이며 일정한 주인이 없다고 봤다. 1589년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오늘날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로 재평가받고 있다.
“예로부터 도참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보록의 설도 나는 믿지 않는다. 하륜의 ‘근천정(覲天庭)’을 첫 곡으로 하고, ‘수보록’은 삭제하라.”([태종실록]1411년 윤달 12월 25일)

태종은 현실적인 군주였다. 천명의 징조라면서 뜬구름 잡는 도참을 앞세우는 게 못마땅했다. 그보다는 태조의 실덕(實德), 실질적인 공덕을 찬양하는 게 먼저라고 했다. 이방원은 민심을 잡으려고 도참의 노래를 유포한 정도전이 음험해 보였을 것이다. 참요 또한 장차 나라의 안정을 해치고 국정에 혼란을 몰고 올 뿐이라고 봤을 것이다. 창업에는 필요할지 몰라도 수성(守成)엔 해가 되는 요설이라는 말이다. 태종의 통찰은 불행히도 적중했다.

“목자(木子)는 망하고 / 전읍(奠邑)이 흥한다”(안방준, [혼정편록])

1589년 전라도와 황해도에 이런 참요가 나돌았다고 한다.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것이다. 조선을 발칵 뒤집은 정여립 모반 사건의 전조였다. 정여립이 바로 참요의 전읍(奠邑)일까? 사람들은 호기심을 품고 그의 남다른 행보를 지켜봤다. 정여립은 1570년 24살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로 들어섰다. 당시 조정은 신진사림의 약진과 개혁 논의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신진사림은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백가쟁명 속에 성장한 선비 관료들이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그들은 훈구파를 밀어내고 드디어 집권에 성공했다. 성리학이 곧 정치의 규범이었다. 성현의 가르침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정여립 같은 젊은 선비들은 이상을 꿈꾸며 열정에 들떴다.

신진사림은 제각기 출신 지역을 배경으로 명망 높은 스승의 문하에 속해 있었다. 기호(경기도, 충청도) 지역 문인들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뤄 조정의 요직을 차지했다. 반면 영남과 해서(황해도)에 뿌리를 둔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의 문인들은 상대적으로 한직에 머물며 불만을 삭여야 했다. 촉망받는 인재였던 정여립은 이이와 성혼의 후원을 받으며 선비의 이상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신진사림 정권은 기대와 달리 골 깊은 난맥상을 드러냈다.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이 문관 인사권을 갖는 이조정랑의 천거를 둘러싸고 충돌했다. 조정은 둘로 갈라졌다. 심의겸은 도성 서쪽 정릉동에 살았기에 그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서인(西人)’이라고 불렀다. 반대로 도성 동쪽 건천동에 살던 김효원 측은 ‘동인(東人)’이라 일컬었다. 이른바 ‘동서분당(東西分黨)’이었다. 율곡과 우계의 문하인 기호학파는 대체로 서인이 되었고, 퇴계·남명·화담 등을 받드는 문인·학파는 동인의 대종을 이뤘다. 서인과 동인은 격렬한 당쟁에 휩싸였다. 탄핵과 고변이 그칠 날이 없었고, 극형과 유배가 줄을 이었다.

“나라 어지럽히는 자는 동인 / 나라 망치는 자는 서인”(조경남, [속잡록])

1582~1583년 무렵 동서분당을 빗댄 동요가 세간에 퍼져나갔다. 당쟁이 나라와 백성의 근심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이즈음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을 넘나드는 행보를 보였다. 그는 서인에 속했지만 1584년 홍문관 수찬이 된 뒤로는 동인 영수 이발과 가까이 지냈다. 스승 격인 이이와 성혼에 대해서도 아닌 것은 거침없이 비판했다.

대동계와 함께 주목 받은 ‘천하공물설’


▎[악학궤범]에 실린 악장 ‘수보록’. 정도전이 지은 도참의 노래다.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때마침 이이가 세상을 떠나고 동인이 집권하자 정여립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스승을 배반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평소 그의 강한 기질이 못마땅했던 선조도 사제의 의리를 저버렸다며 질책했다. 집권에 성공한 동인은 정여립을 거듭 천거했지만 서인과 임금의 노골적인 적대에 가로막혔다. 조정에 그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호남에서 그의 명망은 높았다. 게다가 동인 집권층과 친분을 갖고 있었으므로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명망과 영향력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도내 수령과 선비들이 정여립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지역사회의 관심사가 됐다.

대동계(大同契)의 결성은 정여립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차리고 무사, 기인, 모사들을 모았다. 매달 사회(射會)를 열어 활을 쏘고 술과 음식을 나눴다. 그것은 타고난 기질의 발로였다. 사실 그가 동인, 그 가운데 화담과 남명의 문하인 북인과 교류한 것도 이런 이유였을 터. 북인들은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서인과 달리 노장사상, 병법, 천문, 역법 등을 두루 포용했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중심으로 자기 세계를 거리낌 없이 확장했다.

1587년 전라도 손죽도에 왜선들이 들이닥치자 전주부윤 남언경은 평소 흠모하던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고을 군사들을 능숙하게 편제하고 대동계를 앞세워 왜적을 물리쳤다. 정여립과 대동계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과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이 그를 추종했다.

“호남서 성인이 일어나 백성들 구제한다네”


▎정여립이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 후원해준 율곡 이이. 그러나 정여립은 스승 격인 이이를 비판해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대동계와 함께 정여립의 사상도 주목받았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었다.

정여립의 명망과 영향력이 치솟을수록 추종자와 백성들의 기대 또한 높아지기 마련이다. 선비들의 문치가 갈등의 수렁에 빠진 가운데, 그의 색다른 행보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정감록]에서 끌어온 ‘전읍요’도 그 기대와 희망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정여립의 의지와 별개로 그가 왕이 되길 바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뽕나무에서 말갈기가 나면 / 정팔룡이 왕이 된다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는 또 다른 참요다. ‘팔룡(八龍)’은 정여립이 어릴 때 쓰던 이름이다. 처음에는 “금구의 정 수춘 댁에서 뽕나무에 말갈기가 나는 상서(祥瑞)가 있었다”라는 소문이었다. 풍문이 돌고 돌아 어느 틈에 이 노래가 호남의 너른 들판에 번진 것이다. 그런데 말갈기를 뜻하는 한자어 ‘마렵(馬鬣)’은 무덤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갈기 모양의 얇고 긴 봉분을 가리킨다. 불길한 암시다. 참혹한 죽음의 시간이 시나브로 다가왔다.

사달이 난 곳은 황해도였다. 과도한 공물과 부역으로 도망자가 많고 민심이 흉흉한 지역이었다. 임꺽정의 난(1559~1562)이 황해도에서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정여립의 추종자들이 대동계 조직을 크게 확대했다. “호남에서 성인이 일어나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참언이 돌았다. 수상히 여긴 안악군수가 추종자 조구를 잡아 족쳤다. 한강이 결빙하면 대동계가 거병하여 도성을 칠 것이라고 자백했다. 정여립의 모반 계획이었다.

1589년 10월 황해감사 한준과 수령들이 연명으로 역모를 고변했다. 선조는 동인 정권을 내치고 서인 강경파 정철을 위관(委官, 재판장)으로 삼았다.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역적 수괴를 추포하기 위해 전라도로 달려갔다. 정여립은 금구 별장에 있다가 변숭복의 제보를 받고 아들 정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로 몸을 피했다. 은신처는 곧 노출됐다. 포위망이 조여오자 그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육지 속의 섬’ 진안 죽도. 정여립은 이곳에 서실을 짓고 장정들을 모아 사회(射會)를 열었다. 대동계의 산실이다. / 사진:전라북도
정여립이 허무하게 죽으면서 역모는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대동계원은 물론이고 호남의 선비들이 굴비처럼 엮여 끌려갔다. 서인 위관 정철의 오라는 곧장 동인에게로 향했다. 동인 영수 이발은 정여립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고문당하다가 죽고, 조식의 수제자 최영경은 신원 미상의 주모자 길삼봉으로 몰려 옥사했다. 정여립과 친분이 있거나 동인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자가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렀다. 끔찍한 기축옥사(己丑獄事)였다.

정여립을 노래한 참요들은 천하공물설, 하사비군론과 함께 모반의 근거로 쓰였다. 그가 역심을 품고 전읍이 흥한다느니, 뽕나무에 말갈기가 났다느니, 요설을 퍼뜨려 민심을 현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축옥사를 무옥(誣獄)으로 본다면 참요의 출처가 의심스러워진다. 길삼봉으로 몰려 죽은 최영경은 1년 만에 무고였음이 밝혀져 신원됐다. 참요 또한 동인의 집권을 끝장내기 위해 서인 쪽에서 흘린 ‘모함의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여럿이 부르는 노래의 미덕은 ‘공감’


▎MBC 드라마 [동이]의 한 장면으로 궁에서 쫓겨난 인현왕후. 백성은 폐비를 동정하며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구절을 노래했다. / 사진:MBC
조선시대 참요는 당쟁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 한층 정교하고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파자(破字)처럼 뻔한 수법은 이제 식상하다. 민심을 사로잡으려면 백성의 입맛에 맞춰 진화해야 하는 것이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황윤석, [이재난고])

조선 숙종 때 거리와 골목을 뜨겁게 달군 참요다. 미나리는 임금에게 쫓겨난 왕비 인현왕후, 장다리는 국왕이 총애하는 새 왕비 장희빈을 가리킨다. 백성들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예견하며 숙종의 잘못된 처신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본부인은 (미나리처럼) 사철 푸르고, 첩은 (장다리처럼) 잠깐뿐이니 정신 차리라는 말이다. 조강지처 내치고 잘되는 남자 없다는 경고도 은근히 내포돼 있다.

이 노래 역시 당쟁과 무관치 않다. 숙종은 1689년 장희빈이 낳은 왕자를 원자로 삼으면서 환국을 단행한다. 원자를 반대한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 정권을 세운 것이다. 서인 집안인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남인과 연결된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려는 정지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인 거목 송시열이 사사(賜死)된다. 당시 서인은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懷尼是非)가 불거져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인현왕후 폐출과 송시열 사사는 노론과 소론을 일시적으로 뭉치게 했다. 재집권을 위해 거국적인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이다.

어쩌면 ‘미나리요’도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처럼 서인들의 정략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참요가 백성의 입에 오른 것은 쫓겨난 조강지처를 동정하는 민심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본부인과 첩에 대한 여론의 잣대가 노래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여럿이 부르는 노래의 미덕은 공감이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노래를 이용하려 해도 백성이 공감하지 않으면 입에 오르지 않는 법이다. 정여립의 사상을 빌리자면 백성의 노래도 ‘공물(公物)’이다. 정치가들이 마음대로 지어 유포하거나 요설이라 해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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