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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산책] 운주사 천불천탑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고려 민중의 염원 깃든 법화의 항몽성지” 

천불천탑 형성 배경 놓고 ‘무속설’ ‘별자리설’ 등 추측성 백가쟁명 난무
대장경과 함께 몽골 침입 맞선 ‘백련결사 호국도량’으로 재평가해야


▎전남 화순군 운주사에는 산자락과 계곡 등지에 크고 작은 불상과 탑들이 즐비하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탑들이 한때 1000개에 이른다고 해서 ‘천불천탑’으로 불린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大草)리에 있는 천불산(千佛山) 야산과 계곡에는 돌부처와 석탑들이 흩어져 있다. 그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조선 초기까지 많은 불탑이 있어 ‘천불천탑’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돌부처 80여 구와 석탑 20여 기만 남았다. 운주사 현장과 천불천탑의 등장 배경에 대한 주장은 가히 백가쟁명이다. 풍수도참 차원에선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이름을 떨친 도선국사 비보사찰설을, 민속무속신앙 차원에선 칠성신앙설·도교사원설·백제유민설 등을 주장한다. 여기에 미륵신앙설, 천불신앙설, 아미타도량설, 외래세력 건립설 등도 있다. 하다못해 서양 별자리를 본떴다는 주장마저 나온다.

다양한 의견이 난립하지만, 대개 단편적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문양이나 주문, 칠성석, 윤등 등 부분으로 전체를 해석하는 주객전도 오류도 심각하다. 이처럼 온갖 주장과 추론에도 불구하고 운주사와 천불천탑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수차례 운주사 현장을 발굴한 전남대박물관은 고려 12~13세기 불적으로 파악하며, 11세기 초창기 유적을 언급했는데, 그 유일한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

무릇 잊히고자 대충 만들어진 유적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혹자의 주장처럼 무작위·무정제·무기교에, 우연이 겹치는 조형적 공간이 문학적 상상이 아닐 바에야 쉽게 등장할 수 있을까? 12~13세기 당시의 시간과 공간, 인간에 관한 흔적들이 저 운주계곡 수장고에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 숨겨진 비밀을 찾아 세간에 감춰진 ‘오래된 미래’를 되살려보기로 했다.

고려 중기 불교 개혁 꾀한 ‘백련결사’ 거점 도량


▎안팎으로 사회가 혼탁했던 12~13세기 불교 개혁 운동인 ‘백련결사’를 주도한 원묘국사 요세(왼쪽)와 수선결사를 주도한 보조국사 지눌(오른쪽). 그중 요세는 운주사를 백련결사의 거점도량으로 삼았다.
운주계곡에는 천불천탑 현장이 미리 계산된 기획공간일 가능성을 암시하는 몇 단서가 있다. 우선 전통사찰 입지 형식과 구별되는, 특별수행 기도도량의 형태를 띤다(현재 가득 들어선 사찰 건물들은 최근의 중창불사 결과일 뿐이다). 그 다음, 운주사 현장에 관한 기록(기억) 단절을 야기할 만한 역사적 사건에 유념해보면, 13세기 최씨 무신정권 집권기와 몽골 침입이 있다. 이 시기 전라도 지방에서 적극 활동하다가 어느 시점에 사라지고 만 특별한 불교결사체 집단이 있었다.

12세기 말엽에서 13세기로 치닫던 시절 고려는 안으로는 거듭된 무신 쟁투와 민란, 흉년과 재해, 부패한 왕실 귀족과 결탁한 불교사원의 탐욕에 시달렸고, 밖으로는 몽골의 외침 위협으로 말세론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최충헌 사망 후에도 지속되던 최씨정권 시기에 불교세력은 양분됐다. 고려 왕실과 밀착한 교종사원 세력과 수도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근거를 둔 선종사찰 세력이다. 선종 세력은 예컨대 불탑을 어떻게 보느냐로 다시 구분된다. 한쪽은 탑을 경시한 ‘불탑 불요파’, ‘무탑파’라 칭한다면, 다른 한쪽은 ‘불탑 경배파’, ‘다탑파’로 빗댈 수 있겠다. 이런 편의적 구분은 깨우침의 본질에 비추어 부처님과 그 말씀을 대신하는 경탑을 어떻게 취급하는지에 관한 태도 차이에서 비롯된다.

위 두 집단은 오탁악세(五濁惡世)로부터 벗어날 방법에서 견해 차이를 보였다. 무탑파의 대표 사찰은 송광사를 꼽을 수 있다. 송광사 경내 마당에는 탑이 없다.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이 주도한 무탑파, 수선결사는 [화엄경]에 의거한 일체심조, 즉 스스로 깨달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자력본원의 신앙을 추구했다. 나의 진정한 깨우침이 중요한 것이지 그 깨우침에 무관한 저 탑이 왜 필요하냐는 반문이다.

반면 다탑파는 [법화경]을 근거로 참회와 염불을 통한 타력본원의 신앙에 의지했다. 부처를 먼저 받들고서 그 말씀과 가르침을 대신하는 문자와 경전을 소중하게 여기며, 불법을 대신하는 경탑(經塔) 공덕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무탑파 송광사 수선결사는 상근기(上根機, 부처님 말씀을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첫 순간에 바로 깨달음을 얻는 바탕을 가진 사람)의 지혜력 높은 출가자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반면에, 다탑파 만덕사 백련결사는 중하(中下)근기[교법(敎法)을 받아들여 성취할 품성과 능력이 가장 낮은 정도의 사람]의 무지랭이 민중, 재가자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만덕사 본사의 본지를 전파하던 운주사 현장은 다탑파 도량으로, 염불도량 보현법화도량으로 조성됐다.

몽골 침입하자 대장경과 함께 경탑사업 전개


▎고려는 몽골의 외침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팔만대장경(사진)을 비롯해 백성의 불심을 하나로 모을 다양한 항몽불사를 전개했다. 운주사 천불천탑 현장도 [법화경]에 근거한 항몽 의지가 깃든 계획된 공간이다.
운주사 천불천탑은 고려 백련결사 운동을 전개한 원묘국사 요세(1163~1245)와 ‘천책’이 주도했다. 요세는 무탑파처럼 깨우침을 빙자해 마냥 고목처럼 면벽 좌선하는 것으로는 120가지 선병을 고칠 수 없다고 질타하면서, 누구나 부처 말씀을 존숭하는 방편으로 조탑기탑(造塔起塔)을 하여도, [법화경]을 읽고 외우고 베끼는 공덕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즉, 백련결사에 참여한 재가자들에게 탑이란 부처 말씀과 가르침의 상징물이었다. 그런 경탑을 중심으로 참회와 염불을 하는 염불결사였기에 집체적 기도도량으로서 일정한 현장공간이 필요했다.

1231년 몽골 침입이 시작되면서 백련결사는 운주사에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1235년 3차 침입 직후에는 ‘백련결사문’을 공표해 국난극복을 최대 과제로 설정했다. 당시 고려는 대몽 항쟁수단으로 ‘재조대장경 경판사업’을 통해 백성의 불심을 하나로 모으고 있었다. 또 외침의 혼란을 틈타 전라도 담양에서 ‘이연년 형제 난’이 일어났을 때도 요세를 비롯한 백련결사는 ‘호왕호불’을 기치로 진압군 쪽을 지원했는데, 당시 백련결사가 보여준 태도를 [법화영험전]에서 찾을 수 있다.

3차 침입 후 4차 침입 전까지 소강상태에 있던 1241년에 요세의 측근으로 실무 리더였던 천책은 운주사를 ‘법화도량’으로 공표한다. 몽골의 후속 침입에 대비해 법화경 기도도량으로서 규모와 질적 확대를 꾀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천책은 [법화도량소]에서 호왕호국 의지를 강조했는데, 이는 운주사가 대몽항쟁의 상징공간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승불교의 근본 경전인 [법화경]은 ‘경탑경’이란 별칭이 무방할 정도로 부처 말씀과 경전을 기리는 경탑(經塔) 공덕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몽골 세력 퇴치의 방편으로 고려 왕실과 무신정권이 대장경 ‘경판 불사’를 핵심 항몽 수단으로 내세웠던 만큼, 그 대장경 경판에 포함된 [법화경]에 의거한 ‘경탑 불사’ 역시 항몽 방편으로 삼았을 것은 불문가지다. 운주사 9층탑은 [법화경 21품 여래신력품]에 대응한 경탑으로, 3차 몽골 침입기에 소실된 경주 황룡사 9층탑을 대신했다. 여기서 ‘항몽호국의 신력이 깃든 경탑’으로 받아들였을 고려 민중의 소망을 읽을 수 있다.

천불천탑의 불사가 이토록 중차대한 소명을 품고 있었기에 권력집단의 후원도 남달랐을 것이다. 국책사업으로 추진한 ‘대장경 경판’에 견줄, 대형 프로젝트라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당시 권력집단의 후원이 직간접적으로 확인된다. 13세기 요세가 ‘이연년의 난’ 진압을 지지한 것을 계기로 요세는 고종으로부터 ‘선사’ 칭호를 받게 된다. 당대 무인정권의 실권자 최우(?~1249)의 의중이 실렸음은 물론이겠다. [법화영험전]에는 고려 강종의 서녀로 최충헌의 셋째 부인인 ‘정화택주왕씨’가 1237년경 무량수불을 백련결사에 봉안한 기록이 있다. 최우의 아들이자 운주사 인근의 쌍봉사 주지로 있던 ‘최항’도 가까운 운주사 현장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훗날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무오정변의 주역들인 유경(1211~1289), 이장용(1201~1272), 김구(1211~1278) 등은 과거급제자 출신의 출가자 천책과 가까이 교류했다. 특히 [법화경 11품]의 ‘이불병좌 다보탑’ 낙성을 축하하는, [1240년 다보탑경찬소](천책의 시문집[호산록]에 수록)에는 그 불사에 왕실과 양공(良工) 등 외부 지원이 언급돼 있다.

운주사 본연의 철학에 기반한 복원과 정비 필요


▎운주사에 남아 있는 와불과 9층석탑.
이처럼 운주사 현장을 구성하는 ‘시간, 공간, 인간’ 삼간 중에 시간과 인간의 흔적들은 운주사 현장과의 특별하고 의도적인 관련성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그렇다면 공간(空間)을 풀 수 있는 직접적 열쇠는 무엇일까? 요컨대, 운주사 현장은 [법화경 28품]에 대응한 공간으로서 [법화경 28품]의 ‘기의’가 운주사 현장의 ‘기표’로 발현되고 있다. 회화적 영산회상도가 영산회상 변상도량으로 입체화된 것이다.

운주사 중앙계곡은 [1품·영산법회(석가불)]와 [11품·견보탑품허공회(다보불) 집회]가 중첩되어 있으며, 동쪽 언덕은 [23품·약왕보살 약사신앙]의 공간이며, 서쪽 언덕은 [25품·관음보살 현세구원신앙]과 [16품·여래수량품 아미타불(이른바 와불) 극락왕생신앙], [26품·다라니품다라니탑]을 기도염불 주송하는 공간이다. [28품·보현보살품, 육아백상본원륜탑]도 확인이 된다.

이처럼 운주사 현장에는 법화경 상징용어와 상징물이 즐비하다. ‘영산법회, 일승진실, 비유방편, 백호방광, 불국광명, 허공회, 다보탑, 다보탑 이불병좌, 칠보탑, 칠발탑, 합장배례, 약왕보살, 육바라밀육아백상’ 등이 등장한다. 이런 현장조형물들은 총체적으로 보아 염불주송과 기도도량의 순례 코스를 형성하고 있다. 전남대박물관은 학술조사를 통해 운주사 현장이 여섯 불보살에 식솔처럼 권속이 딸린 군락군집 형태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런 ‘6군락’ 지적은 마침 법화경에 등장하는 ‘독립 보살품6보살’ 군락과 부합한다.

이처럼 법화경에 의거한 ‘보현법화도량’으로 출발한 운주사 현장은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장경 경판사업‘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항몽호국 경탑도량’으로 확장됐다. 천불천탑은 이런 법화경의 일승귀일 사상[가르침으로 깨우친 성문, 홀로 깨달은 연각, 자기와 남을 함께 깨우치는 보살의 삼승이 일승(一乘)으로 지향된다는 불교교리]을 받든 당대의 불승과 석공과 민중의 피땀이 스며든 결정체로 평가해야 한다. 이렇게 퍼포먼스 충만한 공간을 과연 무작위, 무정제, 미완성으로 포장한 맹목적 민중 공간으로 보는 건 속단에 불과하다.

당대의 항몽불사로는 ‘대장경 경판’ 사업을 비롯해 ‘법화경 개판인경, 금자 사경, 오백나한상 불상, 오백나한도 불화, 서사보탑도, 아미타여래불, 범종’ 봉안봉헌 등 다양했다. 운주사 천불천탑도 항몽호국 경탑사업의 방편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안타깝게도 항몽정신의 결정체로 탄생한 운주사 천불천탑은 고려가 1270년경 최종 항복함으로써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았다. ‘호국항몽 극락왕생’의 법화도량을 표방한 운주사 현장이 정치사회적 사각지대로 전락함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3세기 말엽 이후 운주사 현장의 기억과 기록이 철저하게 끊긴 이유이기도 하다.

운주사 현장은 제대로 복원돼야 한다. 그저 구색을 갖추는 식의 관광사찰이어서는 곤란하다. 안타깝게도 무(無) 문자주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 운주사의 ‘넌버벌(non-verbal) 퍼포먼스’는 현금에 현판과 기둥을 장식하는 주련(柱聯)과 이른바 중창불사를 빙자한 여러 건물로 퇴색되고 말았다. 운주사 현장 본연의 가르침과 철학, ‘오래된 미래’의 역사성 회복을 위해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다.

- 박형상 변호사(전 서울역사문화포럼 고문)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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