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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아르헨티나의 트럼프’ 밀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는 

“문제는 경제야…” 살인적 인플레에 정치 신인 왕좌에 

페소화 폐지, 달러 도입 공약했지만 막상 취임하자 국정과제 우선순위에서 배제
중남미 핑크 타이드(진보 물결)는 옛말, 경제난 심화에 시장 자유주의 강풍 예고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후보가 유세활동을 펼치는 모습. 그가 위협적으로 전기톱을 공중에 휘두르면 대중의 시선이 밀레이에게 금세 집중됐다. / 사진:로이터
하비에르 밀레이(53)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취임해 4년 임기를 시작했다. 그의 당선은 경제난에 직면한 남미 국가가 극단적인 이념까지 수용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유세 현장에 전기톱을 들고 나올 정도로 과격하고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밀레이가 어떻게 아르헨티나 권력의 심장부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말레이의 당선은 정치적 양극화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남미 국가들에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새 대동령 밀레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밀레이는 지난 대선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유세활동을 펼쳤다. 행사장 무대에 서는 기존 정치인과는 달리 매번 유세 때마다 트럭 위에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유세 때마다 밀레이의 한 손에는 항상 전기톱이 있었다. 그가 위협적으로 전기톱을 공중에 휘두르면 대중의 시선이 밀레이에게 금세 집중됐다.

헝클어진 채 휘날리는 그의 머리카락과 검은 가죽 재킷은 군중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정치인의 인위적인 미소가 아닌, 노련한 연극배우의 미소를 가진 밀레이에게 군중은 호기심이 생겼다. 호기심은 관심으로, 관심은 이내 지지로 바뀌었다. 트럭 위에선 밀레이가 손을 내밀면 군중은 그의 손을 잡기 위해 몰려들곤 했다.

기존 정치 문법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신임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해결책으로 페소화 폐지와 달러 도입을 제시했다. / 사진:로이터
복잡하지 않은, 밀레이의 간단 명료한 연설도 그의 인기를 높이는 데 주효했다. 그는 “기득권은 나를 두려워한다”라고 외치며 군중을 휘어잡았다. 밀레이는 후보 시절 줄곧 자신의 가장 큰 적으로 기득권을 지목했다. 기득권에 신물이 난 군중은 박수로 화답했다.

밀레이가 대통령에 취임한 2023년 12월은 공교롭게도 아르헨티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은 40년을 기념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오랜 평화의 역사를 이어온 아르헨티나에는 여전히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밀레이의 취임도 빛과 어둠의 경계에 있다. 정치 신인 밀레이는 불과 4년 전 정계에 입문했다. 토크쇼에 출연해 거친 입담으로 숱한 논란을 일으켰고. 그 논란이 유명세로 이어졌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그의 여동생 카리나도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 신임 부통령으로 올라선 빅토리아 비야루엘 의원은 정치적 성과보다는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의 희생자 수를 부인했다. 아르헨티나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이유다.

밀레이는 집권당의 경제부 장관인 세르히오 마사를 결선투표에서 누르고 왕좌에 올랐다. 강성 보수 우파인 밀레이는 중도 성향의 마사를 11% 포인트 따돌리며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밀레이의 정치적 경험은 미미하며, 국회에서의 경험도 2년밖에 되지 않는다. 기존의 정치 문법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대통령이 된 셈이다.

밀레이가 경제학자인 것은 맞지만, 그가 경제 이론을 실무에 적용해 본 적은 거의 없다. 국가 개입은 최소화돼야 한다는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의 이론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참고로 밀레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전기톱은 공공 지출 삭감을 상징한다.

필자는 아르헨티나 언론인으로서 밀레이의 정치적 노선을 특히 우려한다. 과격한 그의 공약과 발언 때문이다. 대통령은 과거 독재 정권이 저지른 유산이자 상흔을 어루만질 생각이 없다. 3만 명의 실종자를 낳은 독재 정권의 범죄를 두고 “과잉 행위에 불과하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밀레이는 낙태에 반대하며, 총기 소지도 적극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같은 대통령의 언사는 당장 논란과 동시에 뉴스를 만들어냈다. 지난 2022년 그가 부모와 절연했다는 사실,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난 반려견 ‘코난’과의 관계도 뉴스 헤드라인 단골 소재였다. 반려견 코난이 세상을 뜨자 밀레이가 무려 다섯 번 그를 복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선 정국은 반려견 코난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대통령 지팡이에 다섯 마리의 개 얼굴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도 뉴스가 됐다.

이처럼 비전통적인, 논란의 중심에 선 밀레이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밀레이와 맞붙은 마사 전 장관이 패배한 이유를 들여다봐야 한다. 답은 간단하다. 경제다. 지난 1년 동안 아르헨티나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물가가 142.7%나 급등해 3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결론적으로 정치분석가 후안 코렐(Juan Courel)의 3단 논법 분석이 주효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는 1983년 민주화 이후 빈곤율의 상승이 여당의 선거 참패로 이어졌다. 빈곤율은 이번 정부 들어 급등했다. 고로 정권 교체는 예정됐다”라고 분석했다. 결국 ‘경제’가 오늘날 ‘경제학자’ 밀레이를 대통령으로 세운 것이다.

기득권에 반대하는 표심 결선 투표에서 밀레이에 쏠려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의 주가가 올라가고 있다. 재선 도전을 선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3년 11월 연설하고 있다. / 사진:로이터
야당 후보들 가운데 정치 경험이 가장 적은 밀레이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밀레이 전기를 집필한 후안 루이스 곤살레스(Juan Luis González)의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곤살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밀레이의 당선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밀레이는 인플레이션 해결책으로 달러 도입을 제안했다. 달러화는 국민들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줬다. 둘째, 밀레이는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통해 자신을 ‘새로운 것’으로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셋째, 밀레이가 가죽 재킷을 입고 ‘은행을 불태우겠다’고 외치자 대중은 그를 기득권에 저항할 적임자로 봤다.”

밀레이 대통령의 지지층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폐지와 같은 대담한 제안을 지지하는 젊은 국민이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폐쇄는 키리바시, 미크로네시아와 같은 소국에서만 시행되고 있는 ‘독특한’ 조치다. 중앙은행 폐쇄 외에도 밀레이의 공약에는 각종 ‘충격 요법’이 담겼다. 중앙정부 부처 대폭 축소, 보건·교육과 같은 민감한 분야의 축소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국영기업(수익성이 있는 기업 포함)의 민영화, 연료 가격 및 전기, 가스, 수도, 공공 서비스 요금 등 각종 정부 보조금 폐지도 있다. 밀레이 대통령이 해당 공약을 모두 이행하면, 급격한 소비재 가격의 인상이 뒤따를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밀레이의 공약 중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단연 달러 도입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화폐인 페소화를 폐지하고 암시장 환율로 페소-달러를 거래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합법적으로 구매 가능한 달러가 200달러(한 달 기준)로 제한된다는 점에서 밀레이의 공약은 파격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밀레이의 공약은 실현 불가능하다. 밀레이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긴축 정책을 시행하고 중앙은행을 통제한다면 달러 도입 공약은 설자리를 잃는다. 아르헨티나 국고에 달러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대통령 취임과 함께 출범한 밀레이 경제 자문팀은 달러 도입을 국정과제 우선순위에서 배제했다. 아르헨티나 페소가 하루아침에 증발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남미에서 극단적 자유시장 이데올로기 더 강해질 것


▎취임식 당일 하비에르 밀레이(가운데) 아르헨티나 신임 대통령과 빅토리아 비야루엘(왼쪽) 신임 부통령. / 사진:로이터
밀레이의 극단적인 공약에 대한 지지세가 높아진 또 다른 요인은 ‘징벌 투표’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징벌 투표 현상이란 앞서가는 후보보다 뒤처진 후보에게 표가 쏠리는 것을 말한다. 밀레이는 결선투표보다 비교적 ‘잘 치렀다’고 평가받는 예비선거에서는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이후 집권당의 마사 후보가 결선투표에서 당선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기득권에 반대하는 표심이 밀레이한테 쏠렸다. 무정부주의 자본주의자(밀레이)가 탄생한 비결이다. 합리적이고 온건한 연설을 하는 후보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갖고 있더라도 금방 기억 속에서 잊힌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장을 지낸 오라시오 로드리게스 라레타가 당내 경선에서 강경파인 파트리시아 불리치에게 패한 게 대표적이다.

아르헨티나를 넘어 국제 정치판도도 밀레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우파의 승리가 이어지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됐으며,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의 주가가 올라가고 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보수우파 나입 부켈레 대통령이 높은 지지율을 누리고 있다.

칠레 공화당 대표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콜롬비아 대선에 나와 깜짝 돌풍을 일으킨 로돌포 에르난데스도 빼놓을 수 없다. 유럽도 보수우파 바람의 영향권에 속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제2의 트럼프’로 불리는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대표로 있는 자유당이 원내 제1정당이 됐다.

‘정치신인·보수우파’ 밀레이 현상이 역내 중남미 국가들로 ‘수출’될 수 있을까? 예단하긴 어렵지만, 역내(중남미)에 널리 퍼진 경제에 대한 불만, 좌우로 분열된 여론을 감안하면 2024년에도 우파 강풍이 이어질 가능성은 높다. 극단적인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후퇴하기는커녕 더욱 강해질 것이다.

- 카리나 니에블라 아르헨티나 언론인 karinamelisa@gmail.com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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