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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하나의 전쟁 두 개의 무덤, 왜덕산과 코무덤 교훈 

왜덕산을 한·일 관계 개선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적군마저 품은 진도 왜덕산 정신은 인류가 공유해야 할 문화 자산
진도 주민, 매년 일본 건너가 코무덤 평화제 참여하며 화해 한마당


▎2021년 3월 진도 왜덕산 현지를 방문한 필자와 오카사카 켄타로 일본 교도통신서울지국장, 박주언 진도문화원장. / 사진:문관현
스위스 청년 사업가 앙리 뒤낭(1828~1910)은 이탈리아 솔페리노 지역의 전쟁터를 지나가다 전투 현장에 방치된 부상자와 전사자의 시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뒤낭은 1862년 발간한 저서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erino)]에서 전쟁의 상흔을 반드시 치유하자고 주장했다. 뒤낭은 잘나가던 개인 사업을 접고 시민운동에 뛰어들어 인도주의 활동을 전개할 구호 기관을 설립하고, 안전한 구호 활동을 보장할 국제규약을 만들었다. 국제적십자 조직과 제네바협약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이다.

제네바협약은 국가 또는 기구 간 무력 충돌로 발생한 희생자를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49년 8월 기본 골격이 완성된 제네바협약 제17조는 “충돌 당사국은 사망자를 가능한 한 이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의식에 따라서 정중히 매장하고 동 사망자의 묘소를 존중할 것이며 가능하면 사망자의 묘지를 국적별로 구분하며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적절히 유지하고 표시해야 한다”고 명문화했다.

명량해전 때 전사한 왜군 시신 묻어준 진도 백성들


▎명량해전 당시 숨진 왜군이 묻힌 진도군 왜덕산 묘지와 일본 교토에 있는 코무덤. / 사진:문관현
놀라운 사실은 제네바협약이 만들어지기 352년 전,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적십자정신이 실제로 구현됐다는 점이다. 노란 조끼를 입은 적십자 요원이 아니라 흰옷 차림 진도 주민이 침략자인 일본 수군을 대상으로 일찌감치 제네바협약 정신을 발휘했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휴머니즘 정신의 생생한 현장이다.

정유재란의 참화를 당한 1597년 9월 16일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진도 울돌목에서 일본 군함 133척을 격파해 일본 수군 2만4000여 명 가운데 2500여 명이 수장됐다. 대부분 일본 시고쿠(四國) 에히메(愛媛)현 이마바리(今治) 시를 근거지로 삼아 해적 활동을 벌였던 구루시마미치후사(来島通総)가 이끄는 선봉대 소속이었다.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와 마산리, 오산리, 지수리, 지막리, 하율리, 황조리 등 7개 마을 주민은 오산만(五山灣)으로 흘러든 일본 수군의 시신을 수습해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줬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넋을 위해 일본 방향으로 공동묘지를 조성한 것이다. 전남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산 162번지. 대한민국 행정지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400년 넘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왜덕산(倭德山)의 실체다.

필자는 명량해전 현장에서 불과 10㎞ 떨어진 왜덕산 일본군 묘지를 2020년 11월 처음 방문했다. 야산 한쪽은 배추가 자라는 밭이고, 다른 한쪽은 봉분이 주저앉고 잡초가 무성해 무덤의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공동묘지였다. 시체가 무더기로 흘러든 오산만 일대는 일제 강점기인 1928년 방파제가 조성되면서 남아 있던 역사의 흔적마저 사라졌다. 심지어 공동묘지 부지에 수로가 조성되고 무분별한 개간 작업이 진행돼 경작지로 둔갑했다. 이 과정에서 주인 모를 뼈가 수없이 발굴됐다고 한다.

왜덕산 공동묘지가 조성되던 시기에 일본 교토시 토요쿠니 신사(豊國神社)에서 100m 떨어진 지점에 조선인 코무덤이 만들어졌다. 조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군은 조선인의 목을 베지 말고 병사 1인당 코 1되씩 베서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명령했다. 정유재란이 임진왜란보다 더 잔혹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같이 무자비하게 진행된 왜군의 코베기 작전 때문이었다. 심지어 살아 있는 조선인 코를 베어 가는 바람에 코 없이 사는 사람이 많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정유재란 당시 베인 조선인 코는 약 20만 명분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1614년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 왜적 편은 “정유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할 때 平秀吉(히데요시)이 모든 왜군에게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베어 수급 대신 바치게 했으므로 왜졸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이고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서 秀吉에게 보냈다. 秀吉은 이를 점고해본 뒤에 북망인 대불사(大佛寺) 옆에 모두 매장해 한 구릉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교토시에는 조선인 코무덤 만들어 명복 빌어


▎9월 24일 진도군 고군면 왜덕산 현장에서 사상 최초로 한·일 합동위령제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가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교토시 코무덤 조성 당시에 세워진 비석에는 “주군(히데요시)은 장수들에게 명하여 다시 조선을 정벌하였다. 우리의 장수와 병사들이 성채와 마을을 평정하였을 때…거리가 멀어 우리 군대의 승전을 주군이 확인할 수 있도록 코를 보내왔다. 주군은 이를 확인할 때 더는 복수의 마음을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주군이 고잔의 선승들에게 명하여 죽은 자들의 평안과 명복을 빌기 위해 신성한 제단을 세우고 코무덤이라고 명명했다”고 기록됐다.

정유재란을 치르면서 한국과 일본에 전혀 다른 성격으로 무덤들이 조성된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지던 왜덕산의 존재는 2002년 가을 삼별초 전적지를 답사하던 박주언 진도문화원장이 찾아냈다. 당시 내동리 주민 이기수씨는 명량해전 상황을 거론하며 “전사한 일본군이 썰물 들물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이 안통 바다로 들어오게 되어 있어, 시체들이!”라고 발언했다. 칡넝쿨 무성한 시골 야산이 역사적 현장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해당 야산 소유주인 창녕 조씨 족보를 살펴보면 왜덕산(倭德山) 이외에 덕산(德山), 범덕산(凡德山), 와덕산(臥德山), 왜덕전(倭德田), 외덕산(外德山) 등으로 표기했다. 족보에 기록된 창녕 조씨 42명의 봉분 이외에 연고 없는 봉분이 100여 기 산재한다.

히구마 다케요시 히로시마슈도대학 교수가 2006년 박주언 진도문화원장에게 왜덕산 역사를 전해 들었다. 그는 현장을 답사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지역신문에 기고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 현창회와 그 후손들에게는 충격 자체였다. 그들은 놀라운 역사적 사실 앞에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이들은 매년 추석 무렵인 ‘오봉(お盆)’을 기해 왜덕산 묘지를 참배했고, 진도와 이마바리 고교생이 상호방문 교류행사를 진행해왔다.

올해 왜덕산 국제학술대회 개최 계기로 공감대 확산

진도 주민들이 2016년 9월 28일 일본으로 건너가 ‘왜덕산 사람들의 코무덤 평화제’를 개최했다. 일본 시민단체에서 뜨겁게 환영했고, 평화제는 2019년까지 3차례 더 열렸다. 평화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보기 드문 화해와 교류 한마당으로 승화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3년째 중단된 상태다.

2022년 9월 23일 전남 진도에서 ‘정유재란이 남긴 진도 왜덕산과 교토 귀(코)무덤’이라는 주제로 첫 한·일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이튿날 왜덕산 현장에서 한·일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동 위령제가 열렸다. 이날 위령제에 참석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추도사에서 “425년 전 명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 수군을 진도 주민들이 묻어줬다”며 “이 사실을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더는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일본은) 계속 사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왜덕산 국제학술대회 개최를 계기로 적군마저 품은 진도 왜덕산 정신이야말로 인류가 공유해야 할 문화 자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덕산이 지역 이슈에서 벗어나 글로벌 가치로 승화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를 위해 더 적극적인 현지 발굴조사와 부대시설 정비, 대외 홍보활동 등이 과제로 남았다. 왜덕산 이외에 일본 수군을 안장한 무덤이 몇 군데 더 존재하며, 조선인의 한 맺힌 코무덤들이 일본 각지에 산재한다는 사실이 국제학술대회에서 확인됐다.

왜덕산이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개선할 새로운 출발점으로 떠올랐다. 일본에서 침략자 후손들과 전직 총리대신, 외교관 출신 시민운동가 등이 참배한 뒤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진도 주민들은 늦은 감이 있지만 일본 측의 화해 제스처에 따뜻하게 응대했다. 전쟁과 약탈, 지배로 얼룩진 과거사를 털어내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고 약속했다. 이제 일본에서 책임 있는 정치인과 양심 있는 최고 지도자들이 방문할 차례다. 진도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한·일 관계의 미래를 묻거든 눈을 들어 왜덕산을 보게 하라.”

- 문관현 연합뉴스 K컬처기획단 부단장·북한학 박사 khmoon@yna.co.kr

202211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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