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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연구 | ‘현캐’ 배구단 스토리(2)]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삼현주의(三現主義), 배구로 구현되다 

“낡은 것의 계획적인 폐기야말로 새로운 것을 진행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신치용 감독의 ‘분업배구’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최태웅 감독의 ‘토털배구’
넷플릭스 ‘인재밀도’와 닮은 현대캐피탈의 선수 순환, 리빌딩 성공으로 이어져


▎2022~2023시즌 현대캐피탈의 준우승은 직전 두 시즌 동안 이어진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은 끝에 이룬 것이었다. / 사진:연합뉴스
2014년 1월 9일 신치용 삼성화재 배구단 감독은 체육인 최초로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았다. 시기적으로 그해 5월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배구계에서는 “이 회장이 신 감독에게 건넨 최대치의 칭찬”이라고 해석했다.

신 감독은 1995년 삼성화재 창단 감독이 된 이래 슈퍼리그 8회 우승·V리그 8회 우승을 이끌며 ‘배구명장’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2004년 3월 삼성화재가 3년 2개월에 걸친 77연승이라는 신화적 기록을 마감하자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대한민국 주요 인쇄매체에 ‘패배 후 감사 광고’를 할 정도로 배구단에 애정을 보여줬다. 그가 2015년 감독직에서 내려오자 삼성은 삼성화재 단장 겸 제일기획 부사장(스포츠구단 운영 담당)으로 예우했다.

신 감독 시절의 삼성화재는 ‘관리의 삼성’, ‘초격차’의 이미지를 현실에서 완벽에 가깝게 구현했다. 이 팀 선수들은 코트나 STC(경기도 용인 소재의 ‘삼성트레이닝센터’. 배구단 숙소와 훈련장을 겸한다)에서는 물론 사생활까지도 철저하리만치 조직의 규율을 따랐다. 그들에게 배구는 인내와 절제를 연마하는 일종의 인격수행이었다. 구성원들은 V9(1965~73년 일본시리즈 9년 우승을 지칭, 이후 일본 프로야구의 국민구단으로 자리매김) 시절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흡사한 프라이드를 공유했다.

배구로 보여준 삼성의 ‘초격차’ 정신

대한민국 배구사에서 신 감독은 ‘분업배구의 완성자’라는 입지를 점한다. 분업배구는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전술이다. 우월한 피지컬로 무장한 외국인 아포짓의 공격 점유율을 최대한 올리고, 세터는 (느리더라도 정교한) 오픈 토스에 집중한다. 그리고 2인의 아웃사이드 히터 중 최소 1명은 수비에 주력한다. 기본적으로 배구는 3R(3명의 리시버)-3A(3명의 공격 참여)의 포메이션을 갖추지만, 분업배구에서는 실제적으로 3R-1A(몰빵배구) 혹은 2R-2A(쌍포배구)의 패턴 플레이에 가깝다. 더 거칠게 표현하면 공격 조와 수비 조를 구분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분업배구는 헌신, 인내 같은 정신론적 가치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화려한 공격은 외국인 선수에게 전담시키고,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포지션에서 ‘살림꾼’이 될 때, 팀 승리로 가는 최적의 루트가 확보된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현역 시절 세터로 뛰었던 신 감독은 “나에게 배구는 배구(排毬, 공을 때리는)가 아니라 배구(配球, 공을 나눠주는)다”라는 철학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에게 세터란 포지션은, 야구의 포수나 미식축구의 쿼터백처럼 감독의 대리인 같은 존재여야만 했다.

2010년 4월 19일, 삼성화재는 V리그 3년 연속 우승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현대캐피탈과 맞붙은 챔피언결정전 7차전이었고, 파이널 5세트까지 흘러갔다. 여기서 신 감독은 V리그 MVP 출신이자 최고 연봉선수였던 최태웅 대신 당시 25살의 유광우(현 대한항공)를 세터로 투입했다. 결과적으로 이날 외국인선수 가빈은 초인적인 50득점을 해냈고, 삼성화재는 기어코 승리에 닿았다. 우승 직후 신 감독은 “5세트에 유광우를 내보낸 것이 승인이었다”고 담담하게 평했다. 언론은 ‘유광우는 가빈의 입맛에 맞는 토스를 올렸고, 내년 시즌 주전 도약을 예약했다’고 썼다. 실제로 최태웅은 그해 6월 14일 FA 아포짓 박철우(현 한국전력, 신 감독의 사위이기도 하다)의 보상선수로 지명되며, 삼성화재를 떠나 현대캐피탈로 옮겼다.

세터 최태웅은 불과 23살 나이에 국가대표팀 주전 세터를 꿰찼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실력에 근거해 그를 전격 발탁한 지도자도 신 감독이었다. 1999년 8월 대표팀을 맡은 신 감독은 승선한지 채 한 달밖에 안된 최태웅을 중용했다. 신 감독은 혁신을 “기본을 잊지 않는 마음가짐”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의 좌우명은 정정당당(正正堂堂)이다. 김세진(전 OK저축은행 감독), 신진식(전 삼성화재 감독), 김상우(현 삼성화재 감독), 석진욱(전 OK금융그룹 감독), 장병철(전 한국전력 감독), 여오현(현대캐피탈 플레잉코치), 최태웅 등 당대의 스타들과 배구를 하면서 그는 제자 누구에게도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글로벌 OTT 점유율 1위 기업 넷플릭스의 성공 비밀을 다룬 책 [규칙 없음] (원제는 NO RULES RULES)에는 이 회사 창업주 리드 헤이스팅스의 고백이 나온다. “재능이 뛰어난 베스트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는 좋은 직장의 조건은 호화스러운 사무실이나 멋진 체육관, 혹은 공짜 스시 같은 게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재능 있고 협동심이 강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즐거움이다.” 넷플릭스는 이를 ‘인재 밀도’라는 용어로 축약했다.

최고 용병 뽑지 않고 꼴찌 했어도 문책 안 해


▎2012년 런던올림픽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었던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한국 선수촌을 찾아 여자배구 대표팀 선수들을 격려했다. 이 회장은 스포츠팀의 위닝 스피릿을 그룹 경영의 지침으로 삼았다. / 사진:삼성
첫 우승을 이룬 뒤 최태웅 감독은 인터뷰에서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의 차이를 이렇게 비교한 적이 있다. “삼성화재는 정리정돈이 참 잘된 방인데 항상 그 위치에 정리해야 하는 방이라면, 현대캐피탈은 잘 정리된 방이지만 필요하다면 위치를 바꿔도 되는 방이다.”

최 감독은 한국 배구의 오랜 관행이었던 합숙 문화를 폐지했다. 삼성화재의 전통적 극기 훈련인 산악 구보도 따라하지 않았다. 이런 사례를 들어 배구계 일각에서는 신치용의 삼성화재와 최태웅의 현대캐피탈을 정반합(正反合)적 프레임으로 바라본다. 신치용식 분업배구의 안티테제(antithese)로써 최태웅의 토털배구가 등장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사실과 꽤 괴리가 있지만, 여기에는 ‘신치용에게 버림받은 최태웅이 라이벌 팀에 와서 다른 스타일의 배구로 복수한다’는 서사가 보태진다.

분업배구가 담(각 포지션의 영역)을 철저히 지켜서 단단하다면, 스피드배구는 ‘담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물어서 자유롭다. 구글의 안드로이드와 애플의 iOS처럼 운영체계는 판이하지만 이를 작동시키는 본질은 동일하다. ‘인재밀도’를 높이는 리더십 권위를 끊임없이 모색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넷플릭스의 표현을 빌리면 “(구성원이) 맥락을 이해해 자발성을 확보하는 조직일 때” 비로소 분업배구든, 스피드 배구든 온전히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5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프런트 수뇌부는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를 찾았다. 신인 혹은 외국인 드래프트가 열리기 직전, 이곳을 찾아 행운을 기원하는 것은 그들만의 의식(儀式)이었다. 5월 4일 봉은사 인근에 위치한 청담동 리베라호텔에서 V리그 외국인선수 드래프트가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기도의 내용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그들은 ‘1순위 구슬이 제발 우리 팀으로 오지 않기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해 드래프트 최대어는 이견 없이 ‘쿠바 특급’ 레오였다. 삼성화재 ‘V8 시대’의 외국인선수 계보는 안젤코~가빈~레오로 이어졌다. 당시 31살이었던 레오를 지명하는 팀은 단숨에 우승권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게다가 현대캐피탈은 직전 시즌 순위는 7팀 중 6등이었다. 확률적으로 두 번째(최하위 삼성화재 다음으로 많은 구슬)에 해당했다.

그러나 드래프트 며칠 전 최종 회의에서 현대캐피탈은 내부적으로 레오를 지명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배경에 대해 최태웅 감독은 “레오가 오면 모두가 그쪽만 바라볼 것이다. 팀이 어려울수록 그럴 것이다. 그런 배구에 젖어들면 나중에 더 힘들어진다. 힘들어도 팀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 결정 이후 여론을 살펴야하는 프런트는 내심 좌불안석이었다. 만약 1순위 지명권을 얻었음에도 레오 말고 다른 이름을 호명한다면, 그 여파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그날 현대캐피탈의 구슬은 6번째에서야 나왔다. 바깥에서는 현대캐피탈의 불운을 동정했지만, 사실 그들은 내심 안도했다. 그 시즌 현대캐피탈은 꼴찌를 했다. 6번째로 지명한 세르비아 출신 외국인선수는 워크 에식(work ethic, 직업윤리)에서 문제를 드러내며 시즌 개막도 맞지 못하고 퇴출됐다. 대체 외국인선수도 실패하며 창단 첫 최하위를 경험했다. 하지만 2시즌 연속 15승(21패)밖에 얻지 못한 감독을 현대캐피탈은 문책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의 ‘모멘트’, 품질경영 선언


▎신치용 감독은 작전타임 때 유독 사위인 박철우(오른쪽)를 더 엄격하게 다그쳤다. 형평성은 그가 선수들로부터 권위를 끌어내는 도구였다.
2021년 EBS 교육방송은 자체 제작 프로그램인[모멘트]를 책으로 엮어 펴냈다. 그들은 굳이 모멘트(moment, 순간)라고 제목을 정한 이유에 대해 “(기업에서) 새로운 방식의 스토리가 시작되는 결정적 순간을 조망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그들은 현대자동차의 비즈니스 모멘트를 1999년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품질경영 선언’에서 찾았다. 정 명예회장의 품질경영은 현장중심경영과 쌍으로 이뤄져 있다. 그는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현장에서 느끼고, 현장에서 해결한 뒤 확인까지 한다”는 삼현주의(三現主義)를 경영 원칙으로 삼았다.

정 명예회장은 ‘품질이 올라가면 브랜드 이미지가 바뀌고, 그 브랜드를 향한 시장의 일관된 믿음이 형성되면 그것이 곧 혁신’이라는 가설을 집요하게 관철하는 여정에서 숱한 에피소드를 양산했다. 실리주의에 입각한 덩샤오핑의 경구를 빌리면 “오직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6등 했어도 재계약


▎넷플릭스 창업주 리드 헤이스팅스는 탁월한 인재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면 평범한 직원을 솎아내야 한다고 봤다. 스포츠 팀의 리빌딩 마인드와 흡사하다. / 사진:넷플릭스
이런 생각의 궤적을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배구단도 충실히 이행했다.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는 ‘스피드배구’라는 고(高)퀄리티 상품을 들고 나와서 기존의 표준(standard)처럼 작동했던 전성기 삼성화재의 분업배구와 차별화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V리그 우승을 거친 뒤 2020년부터 리빌딩 시점과 맞물리며 팀의 사이클은 하향세로 접어들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2021년 5월 외국인선수 드래프트장은 현대캐피탈 배구단의 ‘모멘텀’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레오(단기 실적) 대신 원팀 정신에 입각한 스피드배구(브랜드의 일관성)를 선택했다. 그리고 과거의 안전한 방식을 추종하지 않다가 꼴찌로 떨어진 패장을 그룹은 유임으로 지지해줬다. 드래프트가 끝나고 3일 후인 5월 7일, 현대캐피탈은 최태웅 감독과의 3년 재계약을 발표했다.

언젠가부터 부동산시장에서 학군지의 미래에 관한 논쟁이 치열하다. 영원할 줄 알았던 학군지의 위상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현상 자체가 우리 시대의 가치 평가 기준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학군지가 예전만큼 고평가를 받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는 실력에서 평판으로 인재의 기준이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천재론’에 부합하는 수준의 인재가 아닌 이상, 고(故) 구본무 LG 회장의 ‘인화론’이 현대 조직에서 더 호환이 잘 되기 때문이다.

2016~2017시즌 최태웅 감독의 첫 V리그 우승은 S급 외국인선수 없이 달성됐다. 역대 V리그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되는 당시 챔피언결정전에서 현대캐피탈은 객관적 전력상 절대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했다. 당시 상대팀 대한항공에는 가스파리니라는 톱클래스 아포짓 외국인선수가 있었다. 이에 비해 현대캐피탈은 무명에 가까운 크로아티아 출신 아웃사이더 히터 대니로 맞서야 했다.

최후의 5차전 3세트에서 대니는 점프 후 착지를 하다가 오른쪽 발목이 돌아가는 치명상을 입었다. 자칫 선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부위였지만, 대니는 교체를 거부하고 뛰었다. 팀을 위한 이방인의 헌신은 나머지 팀원들을 결속시켰고, 결국 현대캐피탈은 10년 만에 V리그 왕좌를 탈환할 수 있었다.

1등부터 꼴찌까지 다 해봤지만, 최태웅 체제에서 현대캐피탈은 팀보다 탁월한 재능을 우선시한 적은 단 한 시즌도 없었다. 그룹은 6등한 감독에게 재계약을 제의했고, 그 다음해 7등을 했어도 인내해줬다. 그리고 2022~2023시즌 현대캐피탈은 준우승으로 올라서며 비로소 리빌딩이 궤도에 진입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2018년 5월, 이탈리아 밀라노 인근의 몬차라는 시골 마을에 현대캐피탈 수뇌부가 모였다. 며칠 후 이곳에서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과 드래프트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이국의 호텔에서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현장과 프런트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꺼내놓고 팀의 진로를 논했다.

최태웅 감독은 다가오는 2018~2019시즌을 윈나우(win-now)의 시간으로 설정해놓고 있었다. 외국인선수 드래프트 직후 개장하는 FA 시장에 참전해 “2명을 영입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프런트가 난색을 표하자, 최 감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을 정도로 분위기는 격렬했다.

결과적으로 현대캐피탈은 그해 우승이라는 뜻을 관철시켰다. 외국인선수 드래프트에서 V리그 득점왕 출신 파다르를 잡는 횡재를 누렸고, FA 최대어로 꼽힌 전광인 쟁탈전에서도 승리했다. 이로써 아포짓파다르, 아웃사이드 히터 전광인과 허수봉을 비롯해 센터 신영석과 최민호, 리베로 여오현을 망라하는 초호화 스쿼드를 완성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팀은 스피드배구에 특화된 세터 노재욱을 FA 보상선수로 내줬다. 또 캡틴이자 MVP 출신 아포짓 문성민이 웜업존으로 밀려나야 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대한항공을 3연승으로 셧아웃시키며 압도적 우승을 달성했지만, 그해 현대캐피탈의 배구는 가장 스피드배구와 거리가 멀었다. 고비가 닥치면 파다르에 의존하는 ‘몰빵배구’ 색채가 짙었다. 우승 직후 파다르가 러시아리그로 이적을 선언하자 균열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듬해 코로나19로 중단된 2019~2020시즌 현대캐피탈은 3등을 했다. 외부에선 “외국인선수만 잘 뽑으면 다시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 낙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과격했던 리빌딩 버튼을 이때부터 그들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MVP 센터 포기하며 선제적 리빌딩 감행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아버지 정주영 창업회장의 경구를 올곧이 실천했다. 정 명예회장은 석 달 동안 지구 한 바퀴 거리에 해당하는 해외 출장을 소화한 적도 있었다.
2020년 11월 13일, 지금까지도 그 타당성을 놓고 갑론을박 중인 논란의 트레이드가 발표됐다. 현대캐피탈이 MVP 출신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 센터 신영석을 한국전력에 넘긴 것이다.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이 그 반대급부로 받아온 자원은 24살 신인 세터 김명관과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이었다. 시기적으로도 2020~2021시즌 개막 후 불과 7경기(3승 4패) 만에 트레이드를 결행했다. 신영석이 떠난 뒤 치러진 처음 10경기에서 팀은 연전연패(1승 9패)를 거듭했다. 꼴찌까지 떨어졌다. 배구계 일각에선 “현대캐피탈이 의도적으로 ‘탱킹’(드래프트 상위 순번을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최하위를 감수하는 행위)을 하려고 저러는 것”이라는 의혹까지 일었다.

현대캐피탈에서 사실상 감독과 단장 역할이 포개져 있는 최태웅은 2020년 겨울을 리빌딩 타이밍이라고 봤다. 2018~2019시즌 우승 멤버들의 쇠퇴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자발적 해체를 강행했다. 팀은 아웃사이드 히터 허수봉(24)과 김선호(23), 리베로 박경민(23), 세터 김명관(25)의 팀으로 재구성됐다. 센터 최민호(34)와 아포짓 외국인선수를 제외하면, 청소년 대표 출신 20대로 포지션 전부를 채운 셈이다. 이를 두고 최 감독은 “나의 현대캐피탈 2기 멤버”라고 표현했다.

“진정한 스타는 시스템”


▎현대캐피탈은 V리그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이자 대학에 와서야 농구에서 배구로 전업한 다우디를 영입하는 등 틀에서 벗어난 실험을 감행했다. 드러난 리스크보다 숨은 잠재력을 중시하는 마인드가 바닥에 깔려 있다.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는 ‘인재 밀도’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인재라고 판단하면 흥정하지 않고 잡았다. 그 대표적 케이스가 2015년 신영석 영입 과정에서 불거졌던 법정 소송이었다. 당시 상무 소속이었던 신영석의 원 소속팀은 우리캐피탈이었다. 이 팀은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장기를 적출하듯 핵심 선수를 타 팀에 팔아서 연명하려 했다. 그렇게 신영석의 이적이 비밀리에 성사됐지만, “시장 생태계를 해친다”는 나머지 팀들의 격한 반대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현대캐피탈은 물러서지 않았고, 2015년 6월 서울서부지방법원의 이적 승인 판결을 받아냈다. 2016년 1월 신영석은 군 제대 후 팀에 가세했고, 이후 현대캐피탈의 융성기와 거의 정확히 겹친다. 코트에서 보여준 퍼포먼스 외적으로도 신영석은 팀의 부주장으로서 “비공식 센터 코치”라고 불릴 정도로 후배들이 따랐다. 이런 신영석을 내보내는 결정에 대해 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신영석이라는 선수가 있는 한, 현대캐피탈은 ‘향후 몇 년간’ 봄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등을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었다.”

우리 시대의 경영학 구루로 통하는 피터 드러커는 “완전하게 실패한 것을 버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어제의 성공은 비생산적인 것이 된 후에도 계속 존속한다. (…) 낡은 것의 계획적인 폐기야말로 새로운 것을 강력하게 진행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파했다.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가장 기피하는 대상은 패배가 아니라 진부함이다. 드러커 식으로 표현하면 2020년 겨울의 트레이드는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진부해지는 격변기에, ‘어제’를 조직적으로 잘라내야 했고, ‘내일’을 위해 자원을 계획적으로 집중시키는 성장 전략을 채택”한 것이었다.

현 시점에서 놓고 보면, 신영석을 내주고, 데려온 195㎝의 장신 세터 김명관은 성장이 더딘 편이다. 최 감독은 202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지명된 이현승을 주전 세터로 활용하고 있다. “신영석 트레이드는 패착”이라는 비판이 비등한 이유다. 그러나 현대캐피탈에서 중시하는 논점은 다수의 정서와 다른 데 자리한다. “진정한 스타는 시스템”이라는 정신이 그것이다. 미 프로풋볼(NFL)의 명문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는 쿼터백의 레전드 조 몬태나를 스티브 영으로 교체하는 모험을 단행했다. 엄청난 우려와 냉소에 직면했지만, 그들은 새 쿼터백을 중심에 둔 시스템으로 또 다시 왕좌에 올랐다. 이 팀이 지금까지도 2020년 11월의 ‘빅딜’을 후회하지 않는 배경이다.

출구가 안 보이는 암흑기의 터널을 걷던 2015년 봄,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취한 개선책은 최태웅 감독 선임이 전부는 아니었다. 진순기 전력분석팀 코치(현 현대캐피탈 수석코치)는 훗날 “건의는 했지만, 정말로 이런 걸 만들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당시 현대캐피탈이 운영 방식의 롤모델로 참고한 팀은 삼성화재 같은 V리그 경쟁팀도, 러시아·이탈리아·브라질 등 빅리그의 빅클럽도 아니었다. 뜻밖에도 그들은 일본 여자배구대표팀을 연구했다. ‘피지컬의 한계를 딛고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주목했다. 현대캐피탈은 ‘비결은 데이터에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런 생각에 바탕을 두고, 비공개로 탄생한 프로그램이 ‘SW21’이다. SW는 SkyWalkers의 줄임말이다. 21은 당시 현대캐피탈 배구단 로스터 숫자였다. 소속 선수 21명에 관한 모든 데이터를 SW21에 입력하고, 유의미한 가치를 추출하겠다는 의욕을 담았다.

SW21은 ‘정보에 속도를 담으며’ 기존 전력분석 시스템과 차별화했다. 예전엔 데이터에 관해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선수가 전력분석팀을 따로 찾아와 물어봐야 했다. 하드디스크나 USB 같은 ‘창고’에 정보가 보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SW21은 데이터를 클라우드(cloud)에 저장했다. 팀원 누구라도, 굳이 전력분석관을 찾지 않더라도, 검색어만 넣으면 원하는 정보에 바로 접근할 수 있었다.

SW21을 구축한 뒤 현대캐피탈 선수들은 전원 개인용 아이패드를 지급받았다. 오직 이 기기에만 SW21 프로그램이 깔렸다. 선수들은 화장실에서든 침실에서든 배구에 관한 호기심이 떠오르면, 아이패드를 켜고 탐색할 수 있었다. 금융회사 소속 배구팀 답게 사용은 간편하되 보안에는 엄격했다. SW21이 깔린 아이패드는 외부 반출금지다. 캐슬 안에서만 이용 가능하다. 선수들은 외출 시, 아이패드를 전용 보관함에 넣어놓고 나가야 한다.

SW21은 야구의 수비 시프트(shift)에 비견된다. 빅데이터를 분석해 수비 위치를 미세 조정하는 시프트는 일종의 ‘확률게임’이다. 작두 탄 듯 적중할 때도 있겠지만, 정상 포메이션이었으면 잡혔을 타구가 안타로 둔갑되는 리스크도 존재한다. 결국 팀원 전체가 통계의 합리성을 믿어야 시프트는 온전히 성립할 수 있다.

SW21에 관한 신뢰도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는 선수들의 데이터 소비량이었다. 선수들이 찾아보지 않는다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시스템을 개발해서 계속 업데이트하는 보람이 없었다. 초창기 최 감독은 “사용량이 떨어지는 선수를 체크해서 주의를 줄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시각적 효과가 선명할수록 선수들의 SW21 체류시간은 자연스레 증가했다.

현대캐피탈의 합리성 응축한 ‘SW21’

네트를 사이에 두고 로테이션으로 움직이는 배구에서는 데이터가 활용될 공간이 더욱 광활했다. 관건은 ‘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역량과 의지가 팀에 내재해 있느냐’였다. 꽤 오래 전부터 V리그 팀들은 전력 분석을 해왔지만, 정작 전력분석팀이 제공하는 자료는 투명하지만 엄정한 비닐장막에 막혀 있었다. 상당수 기존 배구인들은 “통계로 다 해결되면 감독이 왜 필요하겠느냐?”고 여겼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배구를 숫자로 재단하려는 행위는 부정확할뿐더러 심지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데이터의 공백을 리더십, 카리스마, 지옥훈련, 투혼 같은 종류의 정신론으로 메우려 했다. 2015년 이후 현재까지 현대캐피탈의 노선은 전통적 관념과 맞서는 세계관을 만드는 과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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