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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지구촌 인문기행(9)] 세상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의 산티아고를 찾아서 

‘문제적 인간’ 피노체트와 ‘시성(詩聖)’ 네루다의 나라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축출하고 들어선 피노체트 독재 치하에서 경제 발전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만 두 명 배출한 문화 강국… 한국과도 교역 활발해


▎천혜의 와인 산지 칠레. 수도 산티아고 근교 와이너리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도 인기 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Santiago)의 12월은 유난히 밝고 화창했다. 한국의 맹추위를 떨치고 30여 시간을 들여 찾아간 국제공항은 한여름의 활기로 넘쳤다. 북반구 반대편에 놓여 있는 이 나라 날씨를 대충 짐작은 했건만 졸지에 도심 한가운데 야자수 그늘에 앉아 있자니, 먼 바깥세상으로 날아왔다는 감회가 일었다.

이 나라 중부지대에 놓여 있는 수도, 산티아고 국제공항(아르트노 메리노 베나테스, 칠레 공군 창설자의 이름) 청사를 빠져나오자 12월 하순의 온도는 늦은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는 듯 28도를 맴돌았다. 그때부터 여행의 성수기가 시작돼, 특히 1~2월은 다양한 문화 행사와 축제가 열리는 시발점이다. 시내 중심지는 공항에서 15㎞ 정도다.

아침에는 선선해 한국의 봄, 4월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저 평균 온도가 11도, 최고 평균이 25도 정도다. 시간대는 한국보다 12시간 정도 느리니 당연히 밤낮도 바뀐다. 남아메리카 태평양 남서부 해안가와 안데스 산맥 사이에 남북으로 길고 좁게 자리한 칠레 공화국의 태평양 남북해안 직선거리는 4300㎞(총 해안선 길이는 6435㎞)나 된다. 폭은 평균 175㎞ 정도니 지도가 보여주는 그대로 가늘고 긴 지형이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다. 이 나라 저 국토 끝 기후는 과연 어떨지 궁금해진다. 남극과도 멀지 않다니 말이다.

길고 긴 이 땅덩어리는 아주 다양한 기후대를 함께 품고 있다. 맨 북쪽에는 세상에서 가장 메마르고 건조한 아타카마 사막이 자리 잡고 있다. 산티아고가 있는 국토 중앙부는 보통 남·북위 30~40도 사이 지역에 나타나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강수량 계절 분포가 뚜렷하다. 건기와 우기가 번갈아 나타난다. 여름에는 건조한 반면 겨울은 습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필자는 도착 당시, 초여름 같은 12월을 맞았지만 안데스 산맥 꼭대기는 여전히 흰 눈이 덮여 있어 장관이었다. 국토 남부는 빙하 및 피오르 등을 포함해 다양한 기후대를 포괄하고 있다. 또 국토 전체가 환태평양 지진대에 있어 크고 작은 지진과 화산 폭발이 자주 일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남태평양 연안을 따라 자리 잡은 칠레는 북쪽으로는 페루와 볼리비아, 동쪽으로는 아르헨티나, 남쪽으로는 남극해에 면해 있다. 스페인이 점령하기 전인 16세기 초에는 잉카제국의 영토였다. 잉카가 칠레 북부를, 나머지 중부와 남부에는 원주민인 마푸체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잉카가 정복한 곳은 에콰도르 고원에서 중부 칠레에 이르는 지역. 전성기에는 약 700만 명의 인구를 다스렸다고 한다. 칠레는 그 후 1540년부터 270여 년 동안 스페인 식민지였으나 1810년 9월 18일, 대통령제 칠레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국토 면적이 75만6950㎢로 한국의 7.5배 정도의 규모다. 인구는 1800만 명 정도로 인구 밀도는 한국의 25분의 1 수준으로 낮다.

정복자와 원주민이 마주 보고 있는 광장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는 모네다 궁전은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고 당시 대통령인 아옌데를 살해한 곳이다. / 사진:고혜련
공항을 벗어나 찾아간 산티아고 구시가지 광장 주변. 가득 터 잡은 야자수 무리는 여행객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면서도 풍요롭고 편안한 휴양지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이국적인 산천초목이 겨울을 버리고 여름으로 날아온 여행객들에게 온몸으로 푸릇하고 왕성하며 따뜻한 생기를 선사한다. 안데스 산맥 해발 500m 분지에 자리 잡은 산티아고는 수도답게 전 인구의 28% 정도인 510만여 명이 모여 살고 있다. 백인과 원주민 혼혈인을 뜻하는 메스티소(Mestizo)들이 대부분이며 백인은 30% 정도다. 산티아고라는 명칭은 예수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첫 번째 순교자였던 야고보에서 유래됐다. 성인(聖人)을 뜻하는 ‘산토’(Santo)에 ‘티아고(Tiago)’라는 이름의 스페인식 발음이 합쳐진 의미다. 스페인이 지배 당시 개척한 곳으로 ‘티아고’는 스페인어권의 흔한 남자 이름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성야고보 성당’도 떠올리게 한다.

칠레의 정치·문화·역사의 중심지인 산티아고의 상징인 아르마스 광장. 다가서자마자 눈길을 끄는 것은 480여 년 전 칠레를 정복한 스페인 총독 발디비아(Valdivia)의 기마상이다. 늘씬하고 잘생긴 말의 등에 올라타 남자다운 기개를 뽐내는 그 기마상은 그 주인이 만만치 않은 존재였음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 건너편쯤에, 침략자 발디비아를 죽인 원주민 독립운동가, 마푸체족의 아론소 라우타로(Aronso Lautaro) 석상이 나타난다. 마치 두 조각상을 둘러본 후 험난하고 치욕적인 과거를 ‘잊지 말라’는 주문처럼 보인다. 서로 지독한 원수지간이었던 두 인물을 산티아고의 중심 광장에 세워놓은 기획자의 의중이 흥미롭다. 분하고 수치스러운 과거도 교훈으로 새기면 가치가 있다는 계산으로 그랬으리라.

16세기 초 쳐들어온 스페인에 수시로 항거, 1810년 쯤 독립 선언을 했던 칠레는 1818년 스페인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야 비교적 안정기에 들어서는 듯했다. 독립 후 200여 년이 지난 다음 또 다른 각고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피노체트의 빛과 그림자 서린 모네다 궁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산티아고 도시 전경. 칠레의 발전상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사진:고혜련
광장 주변에는 1558년 발디비아에 의해 건립됐지만 화재와 지진 등으로 손상돼 200여 년 전 재건축됐다는 메트로폴리타나(Metropolitana) 대성당이 위용을 자랑한다. 칠레에서 가장 큰 규모답게 아치형 대리석 기둥의 도열이 장중함을 선사한다. 각종 성화와 스테인드글라스가 빛난다. 근처 국립역사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칠레 역사를 잘 소개하고 있다. 근거리에 있는 ‘기억과 인권박물관’도 들러볼 만하다. 다큐멘터리 영상물이 일목요연하게 긴 세월 짓밟혔던 칠레인의 인권과 역사를 조명한다.

몇 블록을 벗어나면 현재 칠레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는 모네다(Moneda) 궁전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1805년에 지어진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이 궁전은 1973년 당시 군인이며 정치가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2006)가 사회주의 칠레 정부에 대항해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곳이다. 당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대통령이 끝까지 저항하자 폭격해 최후를 마치게 한 곳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의 억압에서 벗어나 안정기에 접어드는 듯했으나 150여 년이 지나면서 이 나라는 다시 폭풍우의 광기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20세기 들어 이 대륙에서 가장 잔혹했던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역사와 국민은 회오리 폭풍 속에 휘말리게 된다. 17년간(1973~1990년) 3000여 명의 국민이 살상, 행방불명되는 대참사를 겪는다. 투옥되고 고문당해야 했던 인구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궁전 앞 광장 지하는 피노체트가 지하벙커로 사용했던 곳을 문화센터로 바꿔 각종 전시와 기념품 가게, 카페 등으로 쓰고 있다. 궁전 앞에는 이 나라의 신헌법을 작성해 칠레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하고 번영에 힘을 쏟은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Arturo Alessandri, 1868~1950)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격일제로 오전 10시에 행해지는 근위대 교대식도 볼거리 중 하나다.

지난 1970~1980년대 세계 매스컴에 빈번히 등장할 정도로 유명했던 피노체트는 칠레공화국의 제33~35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칠레에서 군사평의회 의장(1973~1981년)과 16년간 대통령직(1974~1990년)을 수행한 직업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부모가 프랑스와 스페인 혈통이었다. 그는 의장직을 맡았을 때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사회당 소속 대통령이었던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았다. 군부가 입법부와 경찰의 역할을 대신했고 다른 정당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등 철권을 휘둘러 정적을 탄압했다. 그런 와중에 나라 경제의 기틀을 다졌다고 해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등과 비견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정의를 수호한다는 칠레 법무부 앞에는 이제 피노체트가 살해한 아옌데 전 대통령의 동상이 준엄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어 역사가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알려준다.

피노체트가 집권한 당시 국민의 10분의 1 정도가 해외로 도피했고, 3만여 명이 해외로 추방됐다는 통계도 있다. 또 4만여 명이 불법 구금됐고 사망 실종된 인구수도 3000여 명에 달한다니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이 간다.

흐드러진 야자수 아래 거리 곳곳에는 이들의 전통춤, 쿠에카(Cueca)를 즉석에서 추는 남녀 춤꾼들이 다른 분위기를 유도한다. 수탉이 암탉을 유혹하는 장면을 담았다는 민속춤이다. 망토와 중절모를 쓴 남성과 속을 잔뜩 부풀린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춤추는 여성들은 마냥 즐거워 보인다. 흰 손수건을 흔들며 관광객들도 합류하란다. 졸지에 다른 분위기 속으로 몰아가는 춤꾼들은 구경꾼들에게 어둡고 쓸데없는 걱정일랑 어서 결별하고 무조건 웃고 즐기라고 강권하는 것 같다.

관광지로 변모한 스페인 총독 거주지


▎칠레 대표 민중 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 / 사진:위키피디아
이곳 산티아고를 보다 가깝게 느끼려면 민생의 현장인 중앙시장에 가면 된다. 길고 긴 해안에 지역마다 서로 다른 기온 차이 덕분에 칠레에는 다양한 어패류와 과일, 채소 등이 넘친다. 탐스럽고 오색영롱한 과일들이 전시된 것만 봐도 어서 맛보고 싶어 마음이 분주해진다. 현지 상인들은 근처 길거리 간이식당에서 싱싱한 생선을 즉석에서 요리해 싼값에 공급해주는 해물탕 파일라(Paila) 등을 맛보라고 추천한다. 조개·홍합·새우가 어우러져 내는 구수한 맛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게 만든다.

해발 630m 높이에서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보게 하는 산타루시아 언덕에 오르자 스페인 총독이 거주하던 저택이 보인다. 수직으로 솟아 있는 그 언덕 위 요새인 양 쓰였던 공간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변해 있다. 관광, 전시용으로 배치된 대포 등의 무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세월 원주민과 맞붙었던 침입자 발디비아가 산티아고를 확고하게 손에 넣기 위해 지은 요새라니, 아래서 올려다보는 무기력한 원주민들의 심사가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산티아고 중심을 흐르는 리오 마포초(Rio Mapocho) 강의 다리를 산책 삼아 슬슬 걸어서 건너면 또 한 곳의 멋진 전망대에 이른다. 푸니쿨라를 이용해 올라갈 수 있는 산 크리스토발(Virgen Cerro San Cristobal) 언덕은 성모상이 높게 세워져 이곳 시민들이 기도하기에 적합하다. 320여m의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진 14m 높이의 하얀 성모상은 하늘을 우러르며 두 팔을 가득 벌리고 있다. 그 밑에 자리한 성당에는 여행객들이 소원을 빌고 마리아를 찬미하기 위해 편지와 불 밝힌 촛대들을 수북하게 놓아두고 있다.

파블로 네루다의 집, 라 차스코나


▎칠레 영공을 지나는 기내에서 내려다본 안데스산맥의 눈 덮인 모습이 장엄하고 신비하다. / 사진:고혜련
이 언덕 아래 가까운 곳에는, 칠레의 유명한 민중시인으로 이름을 알린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의 집 ‘라 차스코나(La Chascona)’가 자리한다. 1971년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기도 한 네루다의 집은 평소 그가 사랑했던 바다를 모티브로 해서 집 안팎을 장식했다. 다양한 벽화나 그림, 수집품 들을 통해서도 그의 예술적 감각과 애정이 드러난다.

칠레대학교에서 불문학과 교육학을 전공한 네루다는 마드리드 영사 등 외교관을 거쳐 41세부터는 공산당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953년에는 스탈린 평화상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는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 와중에 군인들의 침입으로 서재가 불타는 화재사건 이후 병원으로 급송된 다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외용 사망 원인은 투병 중이었던 전립선암 때문인 것으로 돼 있지만 사유가 수상하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한때 대통령 후보로도 추대됐고 민주화 운동의 상징처럼 불렸던 네루다의 장례식이 공개적으로 열리는 것을 피노체트는 허용하지 않았다.

감각적인 언어 구사에 민중을 선동하는 그의 능력과 시는 칠레 군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네루다의 시집 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충만한 힘’ 등이 한국에도 번역돼 널리 읽히고 있다. 네루다가 쓴 시는 어느 날 시와 맞닥뜨려 사로잡히게 된 문학 지망생들에게는 아주 리얼하게 다가온다. 무형의 추상적 대상인 시가 불현듯 그를 찾아왔을 때의 흥분과 감상을 전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마음대로 상상해 보았어.”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어느 외진 곳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둔하기도 했었던 네루다. 외딴섬에 놓인 그에게 쏟아지는 독자들의 편지를 전달하는 우체부를 통해 그려낸 영화 [일 포스티노](The Postman, 1996년 작)는 영국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외국어영화상과 음악상을 받은 걸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소개돼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네루다가 죽은 지 23년 만의 일이었다. 이탈리아 제작자가 만든 영화지만 원작은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1985년 발표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이다.

영화 속에서 편지들을 전달받으면서 우정을 나누게 되는 우체부에게 네루다는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야”, “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가슴을 활짝 열고 시의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해” 등의 명언을 남겼다.

네루다의 시와 삶을 주제로 다룬 영화 [네루다]도 칠레에서 만들어져 2017년 상영됐다. 칠레는 네루다 이전 이미 남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도 두고 있어 만만치 않은 문화 강국의 수준을 만방에 과시해왔다.

‘남미의 보르도’로 통하는 칠레 와인

요즘의 칠레는 1980년부터 꾸준히 전개해 온 민주화운동의 결과 이제 입법·사법·행정부가 독립한 안정적 민주 체제 단계로 접어들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8000달러(전 세계 57위) 정도로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자유시장 경제에 기반한 칠레는 천연자원을 이용하는 광업·농업·어업이 발달했고 이를 수출하는 무역업도 중추를 맡고 있다. 2700여 명의 한국 교민이 살고 있고, 현재 한국이 제4위 수출대상국이다.

지난 1962년 국교를 수립한 한국을 상대로 연간 4억24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구리·정제 구리 등 철광석 등이며 한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해 간 물건들은 전화·컴퓨터·자동차부품 및 액세서리·정형외과 의료기구 등이다. 산티아고 국제공항의 모든 안내 전광판, 컴퓨터, TV 등은 마치 삼성전자 전시장 같다.

칠레 중부의 따뜻하고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는 포도를 재배하기 딱 좋아 칠레산 와인은 ‘남미의 보르도’로 불리며 한국 애호가들에게도 요즘 관심을 받고 있다. 일조량이 풍부해 색깔이 진하고 단맛이 강한 포도가 많이 생산돼서다. ‘와이너리(winery) 투어 상품’도 있어 매시간 산티아고 교외 포도원들로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타도 좋을 듯하다.

※ 고혜련 - 칼럼니스트. 자연과 함께하기, 온 세상 여행하기가 요즘 주요 관심사다. 중앙일보 등 국내외 주요 일간지에서 기자·문화부장·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어머니, 당신은 내 운명], [힘내! 이제 다시 시작이야] 등 7권의 저서가 있다. 이화여대를 거쳐 미국 뉴저지주립대, 영국 런던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저널리즘을 전공했다. 현재 출판사(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로 일한다.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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