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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5)] 일본인에게 엄청난 인기였던 조선의 그림 

진짜 호랑이도 자괴감 느낄 단원 김홍도의 ‘죽하맹호도’ 

부산 동래 ‘왜관’에서 사다가 본토 가서 팔아 큰돈 벌어들여
한·일 회화 교류 중심지 부산… 화가들 수준도 그만큼 높아


▎김홍도의 ‘죽하맹호도’. 대나무는 문인화가 임희지가 그렸다. “세상 사람들은 자칫 개 그림이 될까봐 호랑이를 그리기 꺼리지만 이 그림은 진짜 호랑이가 자괴감을 갖게 한다”는 황기천의 감상과 함께 ‘조선’이라는 국가명이 씌어 있다. 일본에 수출된 그림이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 사진:이훈범
지난 호에서 한류(韓流)스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도화서 화원 김명국에 대해 살펴봤다. 사실 김명국처럼 열도 전체의 열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선 화가들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일본 통신사를 수행한 화원을 따라다니며 그림을 청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래에 설치된 왜관에도 조선 화가들의 그림을 찾는 일본인들의 발길을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조선 화가들이 직접 왜관을 찾아가 그림을 파는 미술 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왜관이란 복합적 단어다. 조선시대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뜻하고, 통상을 하던 시장을 일컫기도 한다. 이 같은 업무를 관장하기 위한 행정기관을 의미하기도 했다. 고려 말 준동하는 왜구를 회유하기 위해 웅천(진해)의 내이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 등 삼포(三浦)를 연 게 왜관의 시초다.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왜관을 제포(진해)로만 축소했고, 1541년 제포의 왜인들과 조선 관군의 충돌이 일어나자 조정은 왜관을 부산포로 축소 이전했다. 이후 일본 측이 여러 차례 원상 회복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국교 회복 차원에서 부산 남쪽 섬 절영도(오늘날 영도)에 왜관이 다시 설치됐다가, 1607년 부산 인근 두모포(오늘날 동구 수정동 일대)로 옮겼다. 예전에는 오늘날처럼 다리가 없어 조선으로서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도 장소가 협소한 데다 수심이 얕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협상을 거쳐 숙종 때인 1678년 오늘날 동구 초량동 근처로 왜관을 확대 이전했다. 초량 왜관은 약 10만 평 규모로 두모포의 10배 정도였다. 그것은 나가사키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인 데지마(出島)나 중국인 거주지 당인옥부(唐人屋敷)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한다. 왜관에는 보통 400~500명의 왜인 성인 남자들이 거주했으며 많을 때는 1000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그림이 왜관에서의 주요 교역 물품은 아니었겠지만, 일본 본토에 가져가서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조선 화가들의 그림이 왜인들한테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왜인들이 사간 조선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단원 김홍도의 ‘죽하맹호도’다. 이름 그대로 대나무 아래 호랑이가 있는 그림이다. 김홍도의 또 하나의 걸작 ‘송하맹호도’와 기본적인 구도가 같다. 그림 우측 상단에 조선 후기의 문인 황기천의 제발(題跋)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호랑이 그리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칫 개를 그려놓은 꼴이 될까봐서인데, 이 그림은 오히려 진짜 호랑이가 자괴감을 갖게 만든다. 조선의 서호산인 김홍도가 호랑이, 수월옹 임희지가 대나무를 그리고 능산도인 황기천이 평한다((世人罕畵虎憂狗之似. 此幅却令眞虎自愧. 朝鮮西胡 散人畵虎, 水月翁畵竹, 菱山道人評).’

조선 그림 찾는 일본인 북적거리던 부산


▎초량 왜관 부분을 확대한 ‘초량화관지도’ 부분. / 사진:부산박물관
임희지는 중인 출신 역관으로, 김홍도보다 나이가 스무 살 정도 어리다. 조선 후기 여항 문인인 조희룡의 [호산외기]에 따르면 키가 8척에 이르는 장신에 미남형 풍모로 생황을 잘 부는 기인이었다고 한다.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고, 특히 묵란의 경우 추사 김정희 이전 작품으로는 최고라는 평을 얻었다.

그림에 ‘조선’이라는 국명이 들어가는 것은 통신사 사행으로 일본에 전해진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하지만 김홍도가 통신사를 수행해 일본에 간 적은 없다. 따라서 그의 ‘죽하맹호도’는 왜관에서의 거래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왜관에서 팔리는 그림 중에는 특히 호랑이나 매 등을 그린 영모화(翎毛畵)가 인기가 있었다. 영모화란 당초 새 그림만을 지칭했지만, 근세 들어 동물화로 의미가 확대됐다. 영모화는 영화와 길상을 축원하는 의미에서 고려시대부터 많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문인 사대부들의 취향과 맞아 산수화, 인물화 다음으로 비중이 컸던 종류다. 화원 선발 때 인물화와 함께 시험 과목으로 들어갈 정도였다. 성종 같은 임금은 궁 안에 꽃과 풀, 벌레, 가금류 등을 모아놓고 화원들에게 그려보라며 경쟁을 시키는 등 각별한 관심 또는 악취미(?)를 갖고 있기도 했다.

왜인에게 팔릴 운명의 그림에 단원은 약간의 장난을 쳤다. ‘송하맹호도’의 호랑이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죽하맹호도’의 호랑이는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돌린 채 뭔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 아마도 조선과의 왕래를 통해 왜인들이 호랑이의 존재를 알았을 터다. 그런 일본에 김홍도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용맹하다는 조선 범을 소개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단지 무섭고 흉포하기만 한 호랑이의 모습이 아니다. 타락하고 위선적인 양반을 꾸짖는 [호질]의 호랑이처럼, 은혜를 노략질로 갚던 무도한 왜인들을 엄하면서도 관대한 선비의 풍모로 점잖게 꾸짖으려는 호랑이의 모습이다. 이 호랑이는 그러한 임무를 마치고 1978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단원 그림도 왜관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이재관의 ‘쌍작보희도’. / 사진:리움미술관
김홍도의 그림이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 보니 김홍도의 화풍이 일본 화단에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원이 일본에서 활약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김홍도가 명성을 날릴 당시 일본에는 도슈샤이 샤라쿠(東洲齊寫樂)라는 미스터리 화가가 있었다. 1794년 5월 어느 날 에도(江戶, 오늘날 도쿄)에 갑자기 나타나 10개월간 140여 점의 그림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인물이다. 그 10개월을 전후한 종적은 말할 것도 없고 어디에서 출생했는지, 누구한테 그림을 배웠는지, 어떻게 살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샤라쿠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실 1901년 독일의 미술 비평가 율리우스 쿠르트가 쓴 [샤라쿠]에 의해서다. 쿠르트는 책에서 샤라쿠를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와 함께 세계 3대 초상화가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 샤라쿠가 바로 김홍도라는 주장이 있다. 샤라쿠가 활동하던 때와 같은 기간에 김홍도가 국내에서 활동한 흔적이나 남긴 작품이 일체 없다는 것이 그러한 주장의 주요 근거다. 여기에 김홍도의 불화 중 발가락이 여섯 개인 부처가 있는데 샤라쿠도 발가락이 여섯 개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도 주장에 힘을 싣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당시 임금이던 정조가 비밀리에 김홍도를 대마도에 파견해 지도(또는 풍속화)를 그려오게 했다고 말한다. 김홍도가 지도를 그리면서 체재비도 마련하고 신분도 위장하기 위해 일본에서 우키요에 판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우연하게도 정조 때는 조선통신사를 한 번도 파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무리가 따르는 게 사실이다. [연풍읍지(延豊邑誌)]에 따르면 김홍도는 1791년 12월 22일부터 1795년 1월 7일까지 연풍(오늘날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현감으로 재직했다. 이 기간에는 해마다 가뭄이 들어 현감 김홍도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는 등 애를 많이 쓴다. 충청도 감사가 보고한 내용을 보자.

“연풍 현감 김홍도는 (중략) 나라 곡식에 의지하지 않고 나름대로 부지런히 노력해 곡식을 나누고 죽을 끓여 먹였는데 정해진 규정대로 시행해 굶주린 백성이 살아나게 됐다.”([일성록] 1793년 5월 24일자 기사)

미스터리 화가 ‘샤라쿠’가 단원이라는 설까지…


▎이재관의 ‘귀어도’. / 사진:이훈범
가뭄은 이듬해에도 계속되고 정조는 홍대협이라는 사람을 호서 지방에 내려 보내 정황을 살폈다. 이때 김홍도는 전해와 달리 심한 비방을 받는다.

“연풍 현감 김홍도는 다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하나도 잘한 행적이 없고 (중략) 백성에게 악형을 베풀어 경내 전체가 소란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하다고 합니다. (중략) 이같이 백성에게 포학한 무리는 중히 다스려 벌주어야 합니다.”([일성록] 1795년 1월 7일자 기사)

이에 김홍도는 연풍현감에서 파직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서울로 압송돼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지만 가까스로 용서를 받는다. 김홍도가 백성을 괴롭힌 혹리라고 비판 받은 것은 중인 출신 수령에 대한 불만과 질시에서 나온 모함일 가능성이 크다. 가뭄 구제에 노력하던 수령이 1년 만에 그토록 악질 탐관오리로 돌변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홍대협의 보고도 본인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들었다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조희룡은 김홍도의 인품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호산외사]에 일례가 나온다.

“원래 집이 가난해 가끔은 끼니를 잇지 못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아주 특이한 모양의 매화 한 그루를 팔았다. 마침 누군가 그림을 요청하며 삼천 전을 보냈다. 이천 전으로 매화를 사고 팔백 전으로 술을 사 동인들과 나눠 마신 뒤 남은 돈 이백 전으로 쌀과 땔나무를 샀으니 삼천 전이 하루에 다 나갔다. 그의 소탈함과 배포가 이와 같았다. (중략) 김홍도가 김득신, 최북, 이인문보다 유독 명성을 떨친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품이 높아야 필법도 높다.”

17세기 일본 화풍에 영향 미친 임영대군 증손 이암


▎17~18세기 일본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16세기 조선 화가 이암의 ‘화조구자도(보물 제1392호)’. / 사진:리움미술관
조희룡이 김홍도와 친분이 있어 좋게 평가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비방이 사실이라면 이토록 과장해서 평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정황을 살펴볼 때 김홍도가 샤라쿠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임금이 비밀 유지를 위해 수령을 몰래 밀정으로 파견할 수는 있겠지만, 국내에 있지도 않은 수령을 파직하고 죄를 주라는 보고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일본 화단에서 샤라쿠의 정체로 거론되는 인물은 30여 명이다. 그중에는 네덜란드인도 있고, 비중이 높지는 않지만 김홍도도 끼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 화가들의 그림은 이미 김홍도 이전 16세기 말~17세기 초부터 일본에서 유통됐으며 일본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암이라는 화가가 있다. 이암은 조선 왕실 종친으로,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 이구의 증손이다. 조선 초기 동물화에서 독자적 화풍을 정립한 화가로 꼽힌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잘 알려진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보물 제1392호)’가 그의 대표작이다. 나른한 봄날 꽃나무 아래서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놀고 있는 강아지 세 마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걸작이다. 이 그림은 하마터면 북한으로 갈 뻔했던 것을 우여곡절 끝에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구입해 더욱 유명해졌다.

유키오 리핏 하버드대 교수는 2021년 3월 한국미술사학회 창립 6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16세기 조선 화가 이암의 강아지 그림이 17~18세기 일본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암은 사실적으로 묘사한 나비와 새, 꽃과 달리 강아지는 먹을 뭉개듯 번지게 그렸는데, 그러한 “이암의 기법이 일본의 다라시코미(번짐) 기법의 기원이 됐다”는 것이다. 이 기법은 “번짐 효과 때문에 대상이 불분명하고 모호하게 표현되는데, 그것이 당시 일본 선종의 화두였던 개를 그리는 최적의 방법이었다”고 리핏 교수는 설명한다.

왜관에서 인기가 있던 조선 화가 중에는 소당 이재관(1783~1837)도 있었다. 이재관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몰락한 집안을 오직 그림 실력만으로 일으키고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렇다 할 스승도 없이 혼자서 그림을 그렸는데, 천부적 재주로 도화서 화원이 됐으며 우리 역사상 최초로 개인 화실을 갖고 있던 화가로 기록되고 있다.

이재관은 화원이었지만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문인화가 이인상, 윤제홍 등의 영향을 받아 문인화 화풍을 추구했다. 그는 꽃과 새, 풀과 벌레, 물고기 그림에 뛰어났으며 초상화를 가장 잘 그리는 것으로 명성이 났다. 안동의 이현보 집에서 이현보의 영정을 다시 그릴 때 추사 김정희에게 화가 추천을 의뢰했는데, 추사가 이재관을 추천했을 정도였다.

“특히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초상화에 뛰어나 위 아래로 백년 사이에 이런 그림은 다시 없었다(尤長於傳神寫照 上下百年無此筆也).”(조희룡 [호산외기] ‘이재관전’)

이 같은 실력을 바탕으로 1837년 영흥 선원전에 있던 태조 어진이 훼손된 것을 복원한 공을 인정받아 등산첨사(登山僉使)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다. 왜인들은 특히 이재관의 영모화를 좋아해 부산 왜관을 찾아 그의 그림을 사갔다고 한다. 이재관의 그림은 일본에 많이 팔려가서 그런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 드물다. 조선 후기 활약한 화원이었음에도 남아 있는 작품이 30여 점에 불과하다. 특히 영모화를 보기 힘든데,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쌍작보희도(雙鵲報喜)’는 김홍도의 ‘쌍작보희도’보다도 뛰어난 걸작이다. 쌍작보희란 문자 그대로 ‘한쌍의 까치가 희소식을 알린다’는 뜻으로, 경사를 축원하는 의미로 많이 그려졌던 그림이다.

이재관은 영모화뿐 아니라 산수화도 잘 그렸다. 특히 8폭의 [소당화첩(小塘畵帖)] 중 하나인 ‘귀어도(歸漁圖)’는 앞서 얘기했듯 그가 문인화, 그중에서도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에도 빼어났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초가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의 색채와 먹의 농담에 변화를 줘 성하의 계절을 풍성하게 그려냈고, 달빛 아래 망태기를 걸머지고 귀가하는 어부를 사립문 앞에서 강아지가 반기는 모습을 정겹게 표현했다.

이재관의 그림 중에 재미있는 것이 또 있다. 6폭짜리 병풍화인 ‘고사인물도’다. 고사인물도란 군왕과 영웅, 현자, 은둔자, 학자 등 역사 또는 문학작품·경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잘 알려진 행적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김홍도의 ‘고사인물도’에 등장하는 주희, 광무제, 왕희지, 도연명 등을 보더라도 주로 남성 인물 위주였다.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재관의 ‘고사인물도’를 보면 6폭 중 4폭이 여성이다. 그래서 병풍이 원래 8폭짜리가 아니었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각각의 그림 크기를 고려하면 8폭은 지나치게 크고 6폭이 합당해 보인다. 게다가 ‘고사인물도’의 모든 폭에는 ‘소당(小塘)’이라는 같은 필체의 관서와 이재관의 절친한 친구였던 조희룡과 강진(姜溍)이 쓴 제사가 남아 있다.

그림 청탁 들어주다 힘들어 울 뻔한 이재관


▎18세기 일본 시인이자 화가인 요사 부손이 그린 ‘구자도’. 이암의 영향을 받은 화풍이 뚜렷하다. / 사진:이훈범
이재관의 ‘고사인물도’에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 명시돼 있지 않은데, 고연희 성균관대 교수가 2013년 ‘고사인물도’ 제화시(題畫詩)의 내용을 분석해 여성 주인공 네 명이 각각 설도(薛濤), 농옥(弄玉), 홍불(紅拂), 홍선(紅線)임을 밝혀냈다. 설도는 당나라 때의 기생이자 시인으로, 그녀의 시는 우리나라 가곡 ‘동심초’의 가사로 쓰이기도 했다. 농옥은 춘추시대 진 목공의 딸로 생황을 잘 불어 봉황 울음소리를 그대로 낼 수 있었다. 홍불은 최초의 무협소설이라 할 수 있는 [규염객전]에 등장하는 기생으로, 당나라 건국공신 이정의 연인이다. 여담이지만 규염객은 붉은 수염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정에게 자신의 재산과 함께 비책을 가르쳐준 뒤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부여로 가서 왕이 된다는 인물이다. 단재 신채호는 규염객이 연개소문이라고 주장한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으로 중국에 와서 이정과 교유하고 홍불과 남매의 정을 맺은 뒤 중국의 제왕 자리를 손에 넣고자 도모하였다. 하지만 당고조 이연의 아들 이세민(당태종)을 만나보고 그 기상에 눌려 이정에게 뜻을 버렸다고 말하고는 귀국하여 난을 일으킨 뒤 왕이 되었다.”(신채호 [조선상고사]) 마지막으로 홍선은 당나라의 소설 [홍선전]의 주인공으로, 산동 지방관의 여종으로 주인을 위해 신기에 가까운 무술을 발휘한 뒤 떠났다.

반전통적 여성들이 그림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해옹의 ‘해암응도’. / 사진:부산박물관
이재관의 ‘고사인물도’에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의 사회 인식이 그만큼 많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봉건적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던 여성들이 자의식을 되찾고 의지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고사인물도’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뛰어난 무공 또는 의협심으로 약한 자를 돕고 탐관오리를 처벌해 사회질서를 바로잡았다. 결혼관과 가정관에서도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가정에 연연하지 않는, 당시 전통적 가치관에 반하는 주도적이고 주체적 태도를 보였다. 이런 반전통적 여성들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회가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강남문화의 영향을 받은 조선 경화세족들이 문화적 소양을 갖춘 재녀와 무공과 의협심을 구비한 여협을 이상적 동반자로 새롭게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안석경의 [삽교만록]에 실린 단편 한문소설 [검녀(劍女)]의 여주인공 역시 뛰어난 무예와 용기를 지닌 여성으로, 주인집 원수를 갚고 자신 의지대로 배우자를 선택했으며 이후 남편 인품에 실망하고는 과감히 떠나는 모습을 보인다. 무릇 예술이 그렇듯 사회 변화상을 이재관의 그림이 앞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화가들의 인기에 힘입어 왜관이 있던 부산은 18~19세기 대일본 그림 수출의 본거지이자 한·일회화 교류의 중심지로 발돋움한다. 그야말로 수도 한성과 평양을 뛰어넘는 국제적 그림 도시가 된 것이다. 2022년 부산박물관에서 열린 국제교류전 ‘조선시대 부산의 화가들’에는 모두 130점의 미술품이 전시됐는데, 그중 69점이 해외에 있는 작품이었다. 모두 부산을 통해 수출된 그림이다. 대부분 일본에 있는 것들이지만 이시눌의 ‘서원아집도’처럼 독일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도 있다. 일본에서 독일로 재수출된 것이다.

부산이 조선 회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다 보니 지역 화단이 형성되기도 했다. 18~19세기 부산에서는 변박, 변지순, 이시눌 등 20명 이상의 수준 높은 화가가 활동했다. 옥천, 삼락재, 청풍주인, 송수원, 해옹, 군실, 만취 등 자호만 남은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화가들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변박은 부산 화단의 싹을 틔운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왜관 연구의 일급 사료로 잘 알려진 변박의 ‘왜관도’는 1783년 초량 왜관의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푸른색이 칠해진 소나무들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다.

변박은 동래부의 무관으로, 1763년 조선통신사의 사행 때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서 왜인들의 요청으로 ‘묵매도’와 ‘송화맹호도’ 등을 그려줬으며, 귀국하고 나서도 왜인들의 주문이 밀려들어 ‘송하고승도’ ‘유마도’ 등을 그려 일본에 보냈다. 변박이 부산 화단의 싹을 틔웠다면, 부산 화단의 꽃을 피운 화가는 같은 밀양 변씨 일가인 변지순과 변지한이다. 두 사람 모두 동래부 소속 무관들로, 김홍도의 영향을 깊게 받은 그림을 그렸다.

일본에서 서구로 건너간 조선 작품도 다수

부산 화단 화가들은 수준이 아주 높아 동래부는 달리 화가를 수소문할 필요 없이 그들에게 주문할 수 있었다. 변박은 동래부사 홍명한의 주문으로 1760년 ‘동래부 순절도’와 ‘부산진 순절도’를 그렸다. 두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 격전 장면을 그린 기록화다.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끝까지 왜군의 공격에 저항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전투였다. 이 밖에 조선 후기 동래부사가 일본 사신을 맞는 장면을 도해한 병풍 그림인 ‘동래부사 접왜사도’도 있다. 조선 관리가 초량객사로 행차하는 모습, 일본 사신을 위해 마련된 연회 모습 등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림의 수준이 워낙 높고, 붓 터치가 범상치 않아 과거에는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동래부사 접왜사도’가 정선 사후 달라진 동래 정보를 담고 있어 오늘날에는 변박 등 부산 화단 화가들의 작품이라는 시각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처럼 부산 화단 화가들의 수준이 높았던 이유는 두 말 할 필요 없이 부산이 한·일 회화 교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통신사행에 참여한 중앙 화단 화가들이나 그림을 팔기 위해 왜관을 찾은 중앙 화가들이 풍광이 빼어난 부산에 오래 머물며 부산 화단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영향을 미쳤다. 이름을 알 수 없지만 통신사를 수행했던 화원으로 추정되는 ‘해옹’을 자호로 쓰는 화가의 ‘해암응도’는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기암절벽에 앉은 매를 그렸는데,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매 그림에 영락없이 부산의 풍정이 물씬한 그림이다.

반대로 부산 화단 화가들은 일본 화풍 또한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예컨대 작가 미상의 ‘동래부도’는 동래읍성이 지어지기 전 동래부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일본 그림의 영향을 받아 산을 파란색으로 처리한 게 특징이다. 당시 부산은 중국은 물론 일본까지 한·중·일 삼국 문화가 국경 없이 넘나들던 국제도시였던 것이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2022년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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