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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6)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 

한 말(斗) 한 말씩 쌓아 태산(山)을 이루다 

사업 다각화 추진하며 국내 최장 역사 자랑하는 기업집단으로 발돋움
부친 경영철학을 계승한 박두병, 동양맥주·두산상회 연달아 성공시켜


▎1921년 경성포목상조합 당시 모습. 앞줄 한가운데 인물이 박승직 창업주다. / 사진:(주)두산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朴承稷)은 1864년 6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에서 밀양박씨와 김해김씨의 셋째 아들(5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박문회(朴文會)는 광주 돌마 임의실(이매리)과골에서 여흥민씨의 위토(位土) 15마지기를 소작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박승직은 건강했을 뿐 아니라 두뇌도 영리했다. 그는 17세이던 1881년 민영완(閔泳完)이 전남 해남군수로 부임하자 그를 수행해 전라도로 갔다. 민영완은 박문회와 위토(位土) 관계로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해남군수로 발령받자 박승직을 해남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는 지방관이 부임할 때 객식구 한명 정도는 대동할 수 있었다.

박승직의 해남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박승직이 살던 과골이 한강 이남의 최대 장터인 송파장 인근이었다는 점에서 장사 경험이 있던 그가 해남 도착과 동시에 행상의 길을 모색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승직은 해남에서 3년 동안 머무르며 300냥을 모았다. 이후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1885년에 100냥으로 포목행상에 나섰다. 인천과 강원도, 충청도는 물론 송파장을 중심으로 낙생, 분당, 경안장터를 전전했다. 송파장은 사통팔달의 삼전도진에 위치한 탓에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될 때까지 삼남지역의 최대 화물 집산지 역할을 했다.

1886년부터는 인천 제물포에서 면포를 구매, 경기도 산간지방과 강원도 일대에 판매했다. 강원도 산길을 다닐 당시에는 두 달 동안 오로지 감자만으로 허기를 달래는 등 근검절약의 정신을 발휘했다. 박승직이 25세 되던 1888년에는 그동안 모은 자금으로 광주 대왕면 둔전리에 30여 석을 추수할 수 있는 전답을 매입해 부친 박문회 일가를 이주시켰다. 박승직은 약 3년간의 행상생활로 모은 자금을 들고 서울에 진출했다. 당시 서울에는 7세 연상인 맏형 박승완이 머물렀다. 박승완은 포목 행상으로 약간의 자금을 모아 서울 마전교(청계천 5가) 일대에서 무쇠솥 장사를 했다. 다만 사업이 신통치 않아 휴업 중이었다. 박승직은 1889년에 배오개(종로4가)의 집 두 채를 260냥에 매입해 앞채에는 승완이, 뒤채에는 자신이 1920년까지 살았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겸비한 박승직은 서울에 터전을 잡은 이후에도 10여 년 동안 전라도 영암, 나주, 무안, 강진 등지를 돌며 포목 행상과 위탁판매, 객주 기능도 수행했다. 정직과 신용으로 가는 곳마다 단골들을 확보했다. 무명을 산지에서 헐값에 대량으로 매입했다가 최대 소비지인 서울에서 적당한 이문을 붙여 처분하기도 했다.

박승직은 서울 이주 7년 만인 1896년 8월에 종로 4가 15번지에서 ‘박승직상점’을 열었다. 경기도 광주 땅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때 거상의 꿈을 품고 10여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오로지 근면과 절약으로 이룩해낸 창업주 박승직의 꿈이 실현된 순간이자 두산그룹 128년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의 나이 33세 되던 해의 일이다.

박승직, 행상으로 자본 축적해 서울 거상으로


▎박두병 초대회장이 동양맥주 창립기념일에 기념사를 하는 모습. / 사진:(주)두산
‘신용본위’를 표방한 박승직상점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초기에는 한국산 목면을 취급했으나 점차 해외에서 기계로 직조한 헐값의 양포들이 국내에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박승직상점도 수입 면포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박승직상점 인근 동대문시장은 전차 개통과 함께 크게 발전했다.

박승직은 뛰어난 상술로 러·일 전쟁(1904∼1905년) 직후에는 동대문 일대의 거상으로 성장했다. 일본 주도의 화폐개혁(1905년)이 초래한 백동화인플레이션은 스톡세일(stock sale) 위주의 대상인들에게 유리했는데, 박승직도 이때 한몫 챙긴 것으로 추정된다. 박승직은 재력과 타고난 리더십으로 서울지역 포목상계의 지도자가 되어 1906년에는 중추원(中樞院) 의관에 임명됐다. 1905년 7월에는 종로 및 동대문 일대의 포목상들을 규합하여 자본금 7만8000원(圓)의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종로구 예지동4(종로5가)의 광장시장 관리업체인데, 박승직은 취체역 및 주주로 참여했다. 당시 설립 및 경영에는 장두현, 최인성, 김태희, 김한규 등이 참여했다. 장두현은 남대문통1가에서 해동저(海東苧)와 동양목(東洋木)을 판매하는 흥일사를 경영했다. 최인성은 종로4가에서 주단포목상인 최인성상점(崔仁成商店)을 경영하는 한편 수표동에 있는 동양흥산주식회사 사장을 겸한 동대문 상인으로, 박승직과는 절친했다. 김태희도 동대문시장 포목상으로 추정된다. 이후부터 박승직은 서울지역의 상인을 대표하는 사업가로 자리매김했다. 1906년 1월에는 조선인 상인들이 결성한 한성상업회의소 설립발기인으로, 1907년에는 조선박람회 협찬회 역원으로 추대됐다.

박승직은 1907년 8월 30일에 최인성, 김원식, 최경서, 장석우, 인천 박문여중·고 설립자 등 객주 출신 포목상 30∼40명과 함께 자본금 2만900원(圓)의 공익사를 설립했다. 미쓰이의 광목 독점 횡포에 맞서기 위해 수입선을 일본 오사카(大阪)의 이토추상사(伊藤忠商事)로 바꿔 면직물의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했다. 공익사는 1910년에 이토추상사와 합작하면서 영업종목도 면사, 면포, 피혁, 콩 등으로 다변화했다. 박승직은 8·15해방 때까지 공익사 사장을 맡았다.

1917년 박승직은 동대문시장 안에 곡물류 무역 및 정미업을 주종으로 하는 공신상회를 개설했다. 이후 1916년에는 종로4가에 박가분제조본포(朴家粉製造本鋪)를 개업했다. 그의 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박가분은 당초에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 공급되었으나 점차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지면서 전국의 박승직상점 판매망을 통해 공급했다. 1920년에는 박승직의 자택인 종로구 연지동으로 생산거점을 옮겼다. 당시 여공만 30여 명이 근무했다.

“박가분이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판매고가 한창 올라갔을 때는 1926년부터 1930년 사이였다. 분 1갑 출고가격이 42전5푼이었으며 소매로는 50전씩에 팔았다. 1상자를 분 20갑씩 단위로 포장했고 1궤짝에 50상자를 담았다. 이 기간에는 보통 평균 10궤짝씩 나갔다고 한다. 1상자 가격은 8원50전, 1궤짝의 가격은 425원이었으니, 평균 10궤짝씩 나갔다 하면 4250원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낸 것이다.”([연강 박두병]) 그러나 1930년대 초부터 일본산 고급 화장품이 유입되면서 매출이 줄어 박가분제조본포는 결국 1937년 문을 닫았다.

아들 박두병, 은행원 그만두고 ‘박승직상점’ 입사


▎박승직은 서울 이주 7년 만인 1896년 8월에 종로4가 15번지에서 ‘박승직상점’을 열었다. ‘박승직상점’ 1층 소매부의 모습. / 사진:(주)두산
박승직의 가정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15세에 결혼했던 첫 부인 김씨는 박승직이 서울로 이주하기 전에 별세했으며, 이후 재혼한 노씨와도 1905년 사별했다. 박승직은 노씨가 사별하던 그해에 재혼한 정씨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뒀다.

박승직과 부인 정씨 소생인 박두병은 4남 6녀 중 장남으로 1910년 10월 9일에 서울 종로4가 92번지에서 태어났다. 박두병은 심상소학교와 전국 최고 명문인 경성중학교를 거쳐 1929년에는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경성고상은 1922년 4월에 국립으로 설립됐다. 당시 전교생 대부분은 일본인으로, 1932년 박두병 졸업 당시 전체 졸업생 84명 중 한국인 학생은 17명에 불과했다.

박두병은 경성고상 졸업 직전인 1932년 3월 명씨와 결혼, 같은 해에 조선은행에 취직했다. 조선은행은 1909년 7월에 ‘한국중앙은행 설립에 관한 협정’에 근거해 중앙은행으로 설립됐다. 이후 1911년 3월 조선은행으로 변경됐다. 박두병은 침착하며 신중한 데다 겸손해서 윗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곳에서 그는 구용서(한국은행 총재 역임)와 장기영(경제기획원 장관 역임), 백두진(국회의장 역임), 김영찬(상공부 장관 역임) 등과 교분을 쌓았다. 구용서는 박두병의 경성중학교 선배이자 직장 상사였으며 장기영, 백두진, 김영찬 등은 그보다 2년 늦게 입사했다.

박두병은 약 4년간의 은행원 생활을 마치고 1936년 2월에 (주)박승직상점 전무취체역으로 입사했다. 70대의 고령인 부친이 가업 승계를 요구한 탓이다. “김용관(박두병의 경성고상 동기동창)이 연강(박두병의 아호)의 상점과 나란히 건물이 붙어있는 한성은행 동대문지점으로 오게 됐다. 그들은 자주 만나게 됐고 점심도 같이하는 때가 많았다. 때로 갑자기 자금이 필요하게 되면 연강은 김을 찾아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러면 (김용관은) 가능한 한 돈을 돌려줬다.”([연강 박두병])

박승직상점은 1940년대 불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과 관련한 전시통제경제 때문이었다. 박두병은 굴하지 않고 1941년에는 소화기린맥주(昭和麒麟麥酒) 대리점을 개설했다. 국내에는 1930년대부터 일본산 수입맥주인 ‘삿포로’, ‘기린’, ‘사쿠라’ 등의 수요가 점증했는데, 소화기린맥주는 1933년 12월에 자본금 300만원으로 일본의 기린맥주 자회사로 설립됐다. 소화기린맥주는 1주당 50원씩 총 6만 주를 발행했다. 기린맥주가 5만7000주를 소유한 반면 한국인으로는 박승직과 김연수(삼양사그룹 창업자)가 각각 200주씩 보유했다. 소화기린맥주는 본사와 생산공장을 영등포에, 영업소는 남대문통에 두고 1934년 4월부터 ‘기린비루’란 상표로 시중에 공급했다.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 대리점 경영권을 다섯 살 연하의 친동생인 우병에게 맡겼다. 1915년생인 우병은 경성중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가업을 돌보는 중이었다. 당시는 중·일 전쟁 중이어서 맥주가 배급제로 공급되곤 했다. 일주일에 2회씩 배급차가 연지동 창고에 도착하면 이를 접객업소나 각 도매상에 공급했다. 한번 입고된 물량은 2~3일 안에 전부 소진됐다.

박승직 영면… 박두병, 마침내 동양맥주 인수


▎동양맥주 영등포공장을 찾아 직원들의 근무모습을 지켜보는 연강 박두병(오른쪽). / 사진:(주)두산
박두병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서둘러 일본인과의 거래 관계를 정리하는 한편 1939년 이후 매출이 줄어들고 있는 박승직상점의 문도 닫고 사태추이를 관망했다. 해방 이후 기업환경이 어떻게 조성될지 가늠되지 않은 탓이었다. 해방 직후 일본인 경영진이 퇴진한 소화기린맥주에는 한국인 종업원 40여 명이 근무 중이었다. 이들 중 20여 명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장가동을 준비했다. “관망과 모색의 일주일이 지날 무렵, 영등포에 자리 잡고 있는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자치위원회 사람들이 돌연 연지동으로 매헌(박승직)을 찾아왔다. 그들은 소화기린의 한국인 종업원들로서 자치위원회의 핵심위원들이라고 했다. 그들 가운데 최인철은 아우 우병과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연강 박두병]) 최인철은 기린맥주 경성지점 근무 때부터 업무관계로 인연을 맺었던 사이였다. 윤현두는 일본 도쿄농업대학양조학과 출신의 일류 기술자였다.

박승직은 82세의 고령이어서 대신 장남인 박두병이 1945년 10월 6일부로 소화기린맥주 관리지배인으로 임명됐다. 기린맥주는 노사분규, 전력난 등으로 어려웠지만 원료와 빈 병 등의 재고가 있어 공원 70명과 사무직 15명으로 생산을 재개했다. 박두병은 경성고상 후배이자 영어에 능한 정수창을 영입해서 미군정 관련 업무를 맡겼다.

1947년 6월 상호를 동양맥주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상표도 OB(Oriental Brewery)로 교체했다. 박두병은 1948년 7월에 동양맥주 사장에 취임했지만 소위 ‘월급쟁이’인 전문경영인이었다. 그는 자신 소유의 개인사업을 경영할 목적으로 같은 해에 무역과 운수업을 겸한 두산상회(두산산업 전신)를 설립했다. 이는 개점휴업 상태의 박승직상점 후신이었다. 박승직이 작명한 상호 ‘두산(斗山)’은 박두병의 이름에서 착안한 것으로 ‘한 말(斗) 한 말씩 쌓아서 태산같이 커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편 창업자 박승직은 고령임에도 건강했으나 6·25전쟁 4개월 후인 1950년 10월부터 몸져 누웠다. 그동안 박승직은 연지동 자택에 머물렀으나,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 직후인 1950년 12월 12일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의 먼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8일이 지난 12월 20일 아침 8시경에 그곳에서 86세로 천수를 다했다. 외세의 경제적 침략에 국내의 상권 보전을 고민했던 조선의 마지막 거상은 초라하게 세상을 떴다. 박두병은 부친 상을 치르고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피란지 부산에서 두산상회는 활기를 띠었다. 두산상회는 당초에 구형 포드 승용차 2대와 일본군이 사용했던 도요타 트럭 2대로 택시영업과 화물운송업을 겸했다. 6·25전쟁 중인 1951년에는 미국 대외원조(ECA)계획의 일환으로 수입된 원조 트럭 14대를 외자관리청에서 불하받았다. 불하대금은 저축은행에서 3억5000만원을 대출받아 충당했다. 10월 29일에 두산상회를 자본금 299만원의 (주)두산상회로 재발족했다. 박두병은 회장에, 아우 우병은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주차장은 부산 영도에 뒀다.

정부는 1951년 3월 동양맥주의 민간불하를 추진, 1952년 3월 22일에 공개입찰에 부쳤다. 정부의 불하 계획을 전해 들은 박두병은 1952년 5월 공개입찰을 통해 동양맥주를 인수한다. 1만8500여 평의 대지와 57건의 건물을 포함한 주식 5만9540주와 부수재산 일체였다. 불하가격은 34억1366만6360환(圜)으로, 계약 시 3억6338만6360환을 납부하고 나머지 30억5028만환은 9년에 걸쳐 분할상환하는 조건이었다. 정부는 1953년 2월 정부는 전시 인플레 수습차원에서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圜)으로 변경했다. 교환비율은 1환=100원이었다. 계약금은 박승직이 보유했던 서울 근교의 부동산에 대한 지가증권과 일부는 시중에서 액면가의 30%로 거래되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충당했다.

이로써 박두병은 국내 최대의 맥주회사를 보유하게 됐다. 당시 폭발적인 전시인플레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두산의 첫 번째 다각화는 1960년 7월 동산토건 설립이었다. 동양맥주 영선과를 확충, 자본금 500만원의 독립사업체로 발족한 것이다. 이 회사는 동양맥주 공장건물 보수 및 사택 건설과 외부 주주 등으로 1970년대에는 국내 굴지의 토건회사로 성장했다.

1961년 11월에는 풍국화학공업을 인수, 한국맥아공업으로 개명했다. 풍국화학은 1958년 10월에 서울 양평동3가 16의 2286평에 맥주 주원료인 맥아생산 공장을 건설하다 자금난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동산토건이 1962년 12월에 연건평 1100평의 맥아생산공장을 완성했다. 1963년 6월에는 맥주원료인 호프 생산을 위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속사리에 대관농산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1972년 1월에 동양맥주에 흡수됐다. 1967년 5월에는 동양맥주의 공무과를 분리해서 자본금 5000만원의 (주)윤한공업을 설립했다. 1970년 11월에는 고척동76에 대지 1710평, 건평 702평을 확보하고 중형자동차 정비 및 기계제작업체로 거듭났다.

토건·유리·음료·금융업 진출하며 사업다각화


▎지난 1968년 코카콜라 첫 출하 당시 박용곤 (박두병 초대회장의 장남) 선대회장 모습. / 사진:(주)두산
1969년 4월에는 농어촌개발공사와 한국유리공업, 동양맥주 등 3사 합작으로 자본금 1억원의 한국병유리를 설립했다. 경부선 군포역 인근인 경기도 시흥군 남면 당리140의 1에 1만3000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일본 동양그라스에 건설을 맡겼다. 1970년 7월 동양맥주가 한국유리 주식 35%를 인수해서 동양맥주는 한국병유리 주식 95%를 확보했다. 1971년부터 한국병유리는 맥주병, 환타, 콜라병 등을 생산했다. 한국병유리는 동양맥주와 한양식품에 납품했을 뿐 아니라 그해 10월에는 일본에 콜라병 40만 달러를 수출했다. 동양맥주는 원료인 호프, 맥아의 생산에서부터 병유리까지 자체 생산함으로써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다른 업종으로의 다각화도 병행했다. 첫 작업은 박두병이 1956년에 합동통신사의 주식 49%를 인수한 것이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박두병이 경영난을 겪던 합동통신의 나머지 주식도 인수했다. 둘째, 금강융단(자본금 500만원)을 인수했다. 금강융단은 1955년 11월에 서울 문래동에 대지 2584평, 공장 1031평을 마련하고 국내 최초로 융단을 생산해서 연 5만~6만 달러를 수출 중이었으나 경영난으로 박두병이 1964년에 주식 51%를 인수했다. 당시 정부는 수출실적이 있는 자만 수입무역을 허가하고 있어 동양맥주는 몰트, 호프 등의 수입에 수출실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셋째, 동양맥주는 1956년부터 청량음료사업에 진출하여 ‘OB시날코’를 생산했다. 1962년부터 ‘OB콜라’도 생산했으나 원액 확보 애로로 박두병은 코카콜라와 연결, 1966년 5월에 자본금 2억원의 한양식품을 설립했다. 코카콜라로부터 원액을 공급받아 시판 및 군납하기 위해서였다. 3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영등포구 독산동310의 1에 대지 1만5000평을 확보하고 1967년 3월부터 동산토건이 시공하여 1968년 2월에 완공했는데, 생산능력은 1분당 370병이었다. 넷째, 수산업에도 진출했다. 1965년 6월에 충남 서산군 근흥면 정죽리 일대의 해안 18만 평에 대한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얻고 내자 및 한·일 어업협력자금으로 1966년에 14만5000여 평의 새우양식장을 완공했다. 1968년 7톤, 1969년 13톤, 1970년 8톤을 생산해서 국내판매 및 수출했다.

다섯째, 1970년대에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1972년 ‘8·3조치’ 이후 정부는 사채업을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하고자 단자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재벌들은 단기금융업에 적극 진출했다. 당시 두산도 1973년 6월 국내 최초의 단자회사인 한양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여섯째, 1974년 2월에 한국OAK주식회사(자본금 102만2900달러)를 미국의 OAK와 합작으로 설립했다. TV, 라디오, 전자계산기 등의 인쇄회로 기판과 배관밀봉용 테이프 생산을 목적으로 1974년 4월에 경기도 김포군 오정면 오정리에 부지 9223평, 공장 1000평을 완공하고 생산에 착수했다.

이로써 동양맥주는 산하에 무역, 건설, 기계, 농수산, 병유리, 청량음료, 금융, 언론 등 다채로운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재계의 전면에 부상했다.

박두병은 63세로 세상을 떠난 순간까지 한국경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기업가였다. 그의 경영 덕분에 두산그룹은 오늘날 현존하는 국내 기업들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기업이 됐다. 어려서부터 행상으로 잔뼈가 굵은 창업자 박승직이 1896년 8월에 서울 종로4가 15번지에 박승직상점을 개설한 이후 올해로 128년 동안 존속 중이다.

국내 최고(最古) 기업 이룬 두 부자(父子)

두산의 역사는 한국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이 일본의 반식민지,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 땅에 식민지공업화가 진행됐다. 주변적 존재였던 한국의 토착자본은 근대적인 상사 조직으로 탈바꿈했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자립경제 건설의 대의 아래 상업자본들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됐다. 그 중심은 소비재산업 위주의 경공업이었다. 자본과 기술이 턱없이 부족한 후진국 공업화의 한 단면이었다.

두산의 역사에서 창업주 박승직은 행상으로 축적한 자본을 박승직상점, 공익사, 광장주식회사 등으로 진화시켜 두산그룹의 기초를 닦았다. 장남 박두병은 선대에서 축적한 상업자본을 동양맥주에 투자해서 두산그룹을 완성했다. 두산그룹은 박승직, 박두병 등 부자(父子) 2대에 걸쳐 완성됐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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