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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어쩔 수 없을 때 한다고? 

긍정적 효과도 있어 … 사과의 기술 알아야 진정한 21세기 리더
정재승·김호의 ‘사과의 기술’ ① 아주 분명한 트렌드 

정치, 비즈니스, 학계에서 ‘사과’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최근 전문가들은 사과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고 지적한다. 사과로 얻는 것은 무엇이며, 사과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경과학자인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와 위기관리 컨설턴트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와 함께 이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자.

일본 핵연료제조회사 JCO의 기타니 고지 회장이 최악의 방사능 누출사고를 빚은 것에 대해 사고 지역 주민들 앞에 머리 숙여 사과하고 있다.

지금은 흔하게 듣는 ‘대국민 사과’란 표현은 10년 전만 하더라도 흔치 않았다. 한 일간지 웹사이트에서 ‘대국민 사과’를 검색하면 이 표현이 들어간 기사가 2001년 이전엔 연평균 10건이 되지 않는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에는 이 표현이 아예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2002년부터 2008년 사이에 연평균 200건으로 늘어난다. 특히 2002년은 주목할 만하다. 2002년에 300건이 넘는 관련 기사가 검색되는데, 대표적으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차남 홍업씨의 구속 문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으며, 김각중 전경련 회장 대행은 정권이 바뀌자 지난 30여 년간 기업 활동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연말에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정몽준 의원이 선거 막판 혼란을 가져온 것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이런 ‘사과 급증 현상’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과’ 전문가인 의학박사 아론 라자르는 ‘사과(apology)’ 혹은 ‘사과하다(apologize)’라는 표현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나타난 빈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1990년과 1994년 사이에는 1193건이던 것이 1998년에서 2002년 사이에는 2003건으로 두 배 가까이가 됐다. 중앙일보에서는 1990~94년에 ‘사과하다’ 혹은 ‘공개사과’라는 단어(‘사과’는 과일과 혼동으로 검색어에서 제외)가 아예 검색되지 않는다. 하지만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공개사과’로 1200여 건, ‘사과하다’로 무려 9000건 가까이 검색된다.

검색의 정확도가 100%가 아니라 해도 엄청나게 증가한 수치임엔 틀림없다. 그렇다면 외환위기 이후 사람들이 ‘사과해야 마땅한 일’을 더 많이 저지르게 된 걸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투명해지면서 예전보다 드러나는 죄가 많아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에 따라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하버드 대학에서 리더십을 연구하는 바버라 켈러먼은 2006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리더의 공개적인 사과가 지금처럼 중요한 이슈가 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학계에서 ‘사과의 중요성’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아론 라자르에 따르면 사회심리학이나 언어심리학 분야에서 사과에 대한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다. 사과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나 구체적인 방법론은 1990년대에 나타났다. 최근 5~6년 동안 아론 라자르나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정치학자인 멜리사 노블 교수 등이 저서를 내놓으며 조금씩 본격화되고 있다.

왜 정치나 비즈니스, 학계에서 ‘사과’ 가 중요해지는 것일까? 첫째 이유는 디지털 테크놀러지의 발전과 이로 말미암은 사회 변화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2006년 6월 21일 영국의 언론 매체인 인콰이어러에 델 노트북 컴퓨터가 일본의 한 회의장에서 폭발해 불타는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 사진 한 장으로 사람들은 델의 배터리 문제에 대해 지적했고, 처음에 부인하던 델은 결국 8월에 문제점을 인정하고 사과한 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배터리를 리콜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진은 당시 회의장에 있던 한 청중이 휴대전화에 달린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델의 사례는 지금처럼 디지털 사회가 되기 이전에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면서 앞으로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시나리오다. 쇠고기 사태에서 인터넷이 없었다면 그처럼 자발적인 대규모 촛불시위가 가능했을까? ‘웹 2.0’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명은 비밀이 없는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고를 취재했다면, 이제는 누구나 휴대전화에 달린 카메라로 일상을 ‘취재’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덕분에 기업의 실수나 잘못이 쉽게 공론화되고, 이에 따라 사과해야 할 경우의 수는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카메라폰으로 기업 실수 공론화

둘째 이유, 이른바 ‘힘의 이동’이 조직에서 개인으로 옮겨가면서 이제는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과거와 같지 않게 됐다. 삼성의 차명계좌 의혹으로 이건희 전 회장이 물러나게 된 사건과 현대자동차의 비자금 사건은 모두 내부 고발자에 의한 것이었다. 국내 최고의 ‘관리’를 자랑하던 삼성도, 국내 최고의 권위를 뽐내던 현대자동차도 이런 내부 고발에 의해 결국 대국민 사과를 하고 후속 조치를 내놓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조직의 힘이 빠질수록 일반 소비자나 국민의 공개 사과 압력은 점점 강해진다. 마지막으로, 기업에 요구되는 책임감이 늘어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단순히 사업에 대한 책임을 넘어선다. 생각해 보라. 지금처럼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 때가 있었는가? 소비자에게서 벌어들인 이익을 사회에 환원할 책임을 비롯해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 환경적 책임 등 기업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종류는 점점 늘어만 간다.

책임의 무게와 사과의 가능성은 비례한다. 즉 더 많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리더가 나서서 사과해야 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사과는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갈등 조정 수단이다. 최근 사과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책임감 있게 위기와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오히려 ‘조장’하는 사과가 자주 목격되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지난해 쇠고기 수입 개방 사태, 태안반도 앞 유조선 침몰과 관련한 삼성중공업의 때늦은 사과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많은 경우 ‘법적인 보호’를 위해, 혹은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기업은 사과보다 변명과 합리화에 급급하다. 기껏 한다는 사과 역시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주거나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는 등 ‘사과의 기술’ 부족으로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일이 많다.

19세기 영국의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사과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하는 것(Apologies only account for that which they do not alter)”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과에 대한 인식은 오랫동안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의 바버라 켈러먼은 사과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고 “실수나 잘못 앞에서 사과하는 리더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리더들은 일반적으로 사과가 가져오는 부정적 측면은 과대평가하고, 긍정적 측면은 과소평가한다고 켈러먼은 지적한다. 부정적 측면으로는 고소나 체면 손상, 긍정적 측면으로는 갈등 해소, 관계 개선, 문제 해결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사과가 주는 구체적 이득은 무엇이고, 과학이 알려주는 사과의 기술은 과연 무엇인가? 앞으로 이 칼럼에서 고민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사과의 기술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리더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점에 공감한다면, 당신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재고하는 일이다.

정재승.(위)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 박사.『과학콘서트』(2001)의 저자. 복잡한 사회에 감춰진 과학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호. 위기관리 워크숍 전문회사인 더랩에이치 대표. PR컨설팅 회사인 에델만코리아 사장 역임. 세계적 베스트셀러『설득의 심리학』 트레이너 자격이 있다.


974호 (200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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