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바닥났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고민했지만, 아직 뾰족한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고종 3년(1866) 10월 30일(양력 12월 6일), 좌의정 김병학이 연방 고개를 조아리며 이제 겨우 15살밖에 안 된 어린 국왕에게 바닥난 재정 상황을 보고했다. 영건도감(營建都監: 경복궁 중건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도제조(都提調: 최고책임자)를 겸직하고 있던 김병학은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임진년(1597) 왜란 때 소실된 왕실의 법궁(法宮: 으뜸 궁궐)을 중건하는 국가적 대역사를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어린 국왕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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