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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초전, 6월까지 하락” 

대체로 “한국은 크게 문제없을 것” 대세 … 그러나 “신뢰 회복이 정책 1순위” 한목소리
다시 요동치는 외환시장 … 원화가치 급락 


지난 2월 20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 왼쪽 전광판 숫자가 코스피 지수, 오른쪽이 원-달러 환율을 나타낸다.

"괜찮겠지, 괜찮아….”

자영업자 조모씨는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힘없이 대답했다. 달러당 원화가 1400원을 넘었다는 아내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지난해 두 딸을 미국에 유학 보낸 이후 종종 있는 일이다. 조씨는 애써 불안감을 떨쳤다. 다음날인 18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날 달러당 원화는 1468원으로 마감했다. 20일에는 전날보다 25원 급등한 1506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지난해 11월 25일 이후 처음으로 전광판에 다시 뜬 ‘1500’이라는 숫자는 일반인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코스피 지수도 원화 가치와 동반 하락했다. 2월 6일 1210을 기록한 코스피 지수는 18일 1065선까지 하락했다.

불과 사흘 동안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급락’이었다. 더 큰 문제는 당장 급한 불을 끌 ‘카드’가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체결한 한·미 스와프 협정으로 확보한 300억 달러는 절반이 채 남지 않았다. 외환 당국에 따르면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서 163억5000만 달러를 인출했다.

이 돈은 이번 달 26일에 만기가 돌아온다. 정해진 날짜에 상환해야 하는 돈이라서 남은 136억5000만 달러도 외환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마음껏 쓰지 못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월 말 기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2017억4000만 달러다. 보통 2000억 달러가 넘으면 심리적 마지노선을 확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시장에 적극 개입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규모인 데다 글로벌 경제 환경이 너무 불확실하다는 비관적 해석이 많다. 이번 원화 가치 급락의 원인은 국외에서 찾을 수 있다. 경상적자가 크고 외채가 많은 동유럽 국가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상승해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커진 것이 진앙이라는 의견이 많다.

이에 따라 글로벌 외환시장에 위기감이 고조됐다. CDS는 국채 부도에 대비한 보험료인 셈인데 이 비용이 많이 들수록 부도 위험이 크다. 그러자 미 증시가 급락하고 불안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매도세를 보이며 달러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이성태 총재 “외화 차입 부족하지 않다”

금융업계는 여기에다 국내 시중은행인 우리은행이 최근 2004년 발행한 4억 달러 규모의 외화 후순위채에 대해 조기상환권을 행사하지 않아 대외 이미지가 추락했다고 분석한다. 세계 시장에서 조기상환은 관행처럼 여기는 것인데 이를 벗어나자 한국의 외화 유동성에 ‘빨간 불’이 켜진 게 아니냐는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우리은행 측은 글로벌 자금 경색을 우려해 만기를 연장했다는 입장이다. 이종휘 우리은행장은 “법률상 문제가 없고 도이체방크 등 다른 은행 사례도 있다”고 밝혔다. JP모건체이스의 임지원 상무는 “외환시장 불안이 우리은행이 외화 후순위채를 중도 상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다만 이를 놓고 국내 은행의 외화자금 사정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임 상무는 “북한 미사일과 동유럽 금융위기 같은 악재들이 꼬리를 물면서 원화 가치가 떨어졌는데, 결과적으로 우리은행 문제가 최근의 원화 약세를 촉발한 것처럼 돼버렸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동유럽 위기, 우리은행 사건은 단편적인 이유일 뿐 근본적인 원인은 ‘글로벌 신용경색’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초 외환시장이 잠시 안정된 것은 외국인 투자자의 매수세로 인해 잠시 안정된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외환은행의 강지영 연구원은 “외국인 순매수라는 요인이 사라지면서 원화 가치 하락을 가져오는 요인들이 한꺼번에 터졌다”고 말했다. NH투자선물의 이진우 부장은 “구조조정이 아닌 구제금융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가운데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1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 보고에서 “한국은행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시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그냥 가진 않는다”고 말해 당국의 적극적 개입을 암시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도 “외화 차입이 부족하다는 조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현재로선 없다”며 “문제는 차입금 기일이 돌아왔을 때 차환해 주느냐 여부”라고 말했다.

국내 외화차입 규모는 850억 달러고 올해 상반기에 만기가 돌아오는 금액이 100억 달러 정도다. 이 총재는 유동외채(앞으로 갚아야 할 외채)가 외화보유액보다 많다는 소문에 대해 “그동안 조금씩 갚아서 유동외채 비율이 최근 떨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원-달러 환율·코스피 지수 추이
금융당국은 도를 넘으면 손을 쓰겠다는 입장이지만 정작 시장에서는 정부 개입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 개입을 했다고 해도 사실상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이다.

시장에서는 윤 장관이 개입에 소극적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한·미 스와프 자금 잔액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살필 정도로 온 국민의 이목이 쏠린 데서 오는 부담감 때문이다.

또 원화 가치 하락 압력이 워낙 많은 현 상황에서 지난해 강만수 전 장관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라는 생각이다.

한 외환 관계자는 “방향성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상황이 왔다고 판단하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윤 장관은 정부가 은행의 지급을 보증하는 문제에 대해 “은행과 합의했으며 다음주에 내용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 은행장들은 20일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협의회에서 기존 차입금의 만기 연장 등으로 외화 조달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JP모건체이스의 임지원 상무는 “단기적으로 달러 수요가 생긴다면 원화 가치가 하락할 리스크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현 상황에서 외화를 못 갚는 외채 위기가 발생할 확률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2분기에 경상수지 등 경제지표가 개선되면 외환시장 안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허경욱 기획재정부 1차관은 17일 KBS 라디오 방송에서 “올해 130억~150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예상한다”며 구체적인 전망치를 내놓기도 했다. 한국투자증권의 이준재 애널리스트(은행 담당)도 “통상적으로 보면 문제가 없는 상황”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상대적으로 비관적인 전망을 한 외환은행의 강지영 연구원은 “실물경제가 악화한 상황이고 얽힌 요인이 모두 민감한 문제라 지금은 전초전이고 상반기까지는 비슷한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구체적인 전망치에 대해서는 “작년 고점이었던 1500원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만 말했다. 조선사 수주 취소 우려와 북한의 미사일 발사 문제, 자동차 업체 GM의 자회사인 사브의 파산보호 신청도 부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전망은 엇갈리지만 무엇보다 신뢰감 회복이 중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은행권의 해외 차입 여건을 개선하고 통화 스와프를 확대해야 한다는 해결 방안도 내놓았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정부가 시장에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20일 국내 은행들의 외화차입 현황을 점검하기로 했다고 밝혔고, 정부는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아세안과 한·중·일 3국의 통화 스와프 계약 네트워크) 기금을 기존 800억 달러에서 1200억 달러로 확대하는 방안을 시사했다.

이 발표는 원래 22일 예정된 것이었다. “외화를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늘어 외환시장이 보다 안정될 것”이라는 관계자의 말이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976호 (200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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