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정계에 등장한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신진 개화파 인사들은 제도를 개혁하고, 산업을 육성해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실권을 장악한 외척 민씨 일파의 정치적 견제는 고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었다.
화파 인사들 앞에는 국왕의 힘으로도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버티고 있었다. 바로 개혁 추진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財源) 마련 문제였다. 1881년 12월, 홍문관 부교리(종5품) 김옥균은 일본 방문을 위해 제물포를 출발했다. 조선 주재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친히 제물포까지 나와 조선 정부 하급관리의 도일(渡日)을 환송했다.
조선 정부는 김옥균의 도일에 관한 공식기록을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았지만, 일본 신문들은 앞 다투어 김옥균의 도일 사실을 보도했다. “조선 개화당 영수 김옥균, 일본 시찰 위해 내일(來日)”이란 첫 보도가 나간 후 “김옥균은 일본 사정 시찰뿐만 아니라 왕명을 받들어 일본 관리와 국채 모집 준비를 위해 내일한다”는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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