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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피플 [74] 궈타이밍 팍스콘 회장 - 세계의 IT공장 이끄는 대만 최고 갑부 

TV 부품회사에서 IT 생산업체로 애플 등과 국제 분업체제 이뤄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궈타이밍 팍스콘 회장.
훙하이정밀공업이라고 하면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팍스콘이라고 하면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팍스콘은 훙하이정밀공업의 기업 브랜드다. 이 회사는 훙하이과기집단 또는 팍스콘이라는 이름으로 대만·상하이·런던 증시에 상장됐다. 팍스콘은 전자기기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EMS)분야에선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매출 규모 면에서 세계 3위의 IT 업체이기도 하다. 기술 수준도 상당해 실질적으로는 공동 설계 제조나 공동 개발 제조까지 하는 하이테크 업체로 평가 받는다. 지난해 매출이 1318억 달러나 된다. 순이익은 35억5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총자산은 268억7000만 달러, 시가총액은 771억2000만 달러에 이른다.

애플의 아이패드와 아이폰을 위탁 제조하면서 유명해진 이 회사는 애플 말고도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전 세계 다양한 전자 및 IT업체의 상품을 주문자 제조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 팍스콘의 고객 중에는 세계 굴지의 업체가 수두룩하며 세계적 브랜드를 높은 품질로 제조하기로 명성이 높다. 아마존의 킨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X박스원 등을 위탁 생산하고 있다.

전자기기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분야의 최대 기업

직원이 123만명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는 민간기업 중 가장 많은 직원을 고용하는 업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플의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면서 한창 주가를 높일 당시 이를 생산하던 중국 공장의 직원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노동 조건이 관심을 끌기도 했다. 2012년에는 150여명의 직원이 근로 조건에 불만을 품고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회사를 압박하는 사건도 겪었다.

팍스콘의 궈타이밍(64) 회장은 대만 기업인이다. 이 회사의 창업주이자 지분 13%를 보유한 대주주다. 국제사회에서는 테리 구라는 영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지난 11월 발표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71위에 올랐다. 대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대만 총통보다 영향력이 큰 셈이다. 2013년 포브스지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61억 달러로 대만 4위의 부호다. 포브스에 따르면 구 회장은 2006년 세계 77위의 부자에 올랐으며 2007년에도 78위로 발표됐다.

팍스콘의 역사는 궈 회장의 일생이나 다름 없다. 이 회사의 성격과 경영방식도 그의 성격 그대로다. 그는 중국 본토 산시성 출신인 아버지와 산둥성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1950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본토와 대만에서 경찰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아들의 성공을 본 뒤 2002년 세상을 떠났다. 궈 회장은 대만 사회에서는 ‘산시성에 뿌리를 둔 외성인(外省人)’으로 분류한다. 외성인은 원래 대만 출신이 아니고 1949년 국민당에 본토에서 근거지를 대만으로 옮길 때 함께 이주한 본토 출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향민인 셈이다.

특이한 것은 궈 회장이 해운 업체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시에 있는 중국해사전과학교(현재는 대만해양기술학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를 졸업했다. 이후 병역을 마치고 해운회사에 입사해 운송 상품에 적합한 선박을 찾는 업무를 맡았다. 그 뒤 무역회사로 옮겨 일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상품을 주고받는 무역의 기본이 되는 ‘상품’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를 계기로 1년 간의 회사원 생활을 접고 제조업 분야에서 창업을 하게 됐다.

해운업으로 시작해 제조업으로 눈 돌려


▎중국 광둥성 선전의 팍스콘 공장 노동자들이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애플 아이폰을 생산하는 이 공장에는 4만여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그는 1974년 24세의 나이로 어머니가 보태준 10만 대만 달러를 포함한 30만 대만 달러의 자본금을 모아 홍하이플라스틱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환율로는 미화 7500달러에 해당하는 자본금이었다. 10명의 직원에 플라스틱 제품의 제조와 가공을 주로 하는 업체였다. 대만 수도 타이베이를 둘러싼 외곽 신도시인 신베이시의 서부 지역인 투청구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임대료가 싸기 때문에 선택한 입지였다. 그는 지금도 이 지역에 그룹 본사를 두고 있다.

젊은 창업자의 꿈은 웅대했다. 회사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기러기를 뜻하는 훙(鴻, 기러기 홍)과 바다를 가리키는 하이(海, 바다 해)을 합친 회사 이름은 ‘홍비천리 해납백천(鴻飛千里 海納百川, 기러기는 천리를 날고 바다는 백 개의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다)’이라는 중국 송대 사서인 통감절요의 한 대목에서 따왔다. 기업 이름에서부터 큰 야망을 담은 것이다.

궈 회장은 텔레비전에 쓰이는 플라스틱 부품을 제작해 전자회사에 납품했다. 그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찾아 왔는데 이를 모두 움켜쥐었다. 첫 기회는 1980년 찾아왔다. 미국의 게임 회사인 아타리로부터 게임용 콘솔에 들어가는 조이스틱과 게임기를 연결하는 커넥터를 주문 받은 것이다. 지금은 나스닥 상장회사인 아타리는 미국 기업인 놀란 부시넬이 1972년에 창업했다. 비디오 게임을 만들기 위해 창업한 세계 최초의 기업으로 분류되는 업체다. 초기 게임 산업을 선도하면서 수많은 아케이드 게임을 개발했으며 핀볼게임기와 가정용 게임기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PC가 대중화하면서 PC게임 산업에 뛰어들었으며 휴대용 소형 전자게임기도 만들었다. 궈 회장은 이를 계기로 수출에 사업의 명운이 달려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그래서 신규 고객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 11개월 간 미 전역을 돌아봤다. 낯선 미국에서 무턱대고 잠재 고객을 찾아 나선 그는 인상적이고 공격적인 영업활동을 펼친 끝에 상당량의 추가 주문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 출장으로 그는 회사를 수출 주력 업체로 탈바꿈시킬 수 있게 됐다.

두 번째 전기는 중국 본토 진출이었다. 그는 1988년 본토의 광둥성 선전에 전자 공장을 지었다. 홍콩의 맞은 편에 위치한 선전은 중국 개혁개방과 경제 발전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1978년 덩샤오핑의 주도로 시작한 개혁개방의 초기에 해당하는 당시 중국은 대만과 같은 앞선 지역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기업 운영 노하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대만 기업의 중국 진출이 일상적이지만 당시로선 한국 기업의 개성공단 진출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리스크를 안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 오히려 통 큰 투자를 했다. 당시 중국 최대의공장을 선전에 지은 것이다. 단순히 생산시설만 건설한 게 아니라 엄청난 숫자의 종업원이 그곳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아예 기숙사형 생산단지를 지었다. 종업원들의 숙소와 식당은 물론 진료소까지 마련했다. 직원들의 식탁에 공급할 수 있도록 양계장까지 함께 지었다. 생산시설과 생활시설을 수평 결합한 것이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혁신적인 시설이었으며, 종업원에 대한 배려가 대단하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는 중국에 거대한 생산기지를 설치해 적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대량 생산-저가 공급이 가능한 시스템을 마련했다.

팍스콘은 중국에 13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선전의 롱후아 지역에 있는 공장은 최대 45만명의 직원이 일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생산기지다. 이곳에는 기숙사는 물론 직원용 풀장과 자체 소방대까지 있다. 시내 중심부에 대규모 식품점·은행·식당·서점·병원을 갖추고 있다. 팍스콘 TV라는 이름의 자체 TV방송국도 운영하고 있다. 직원의 4분의 1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으며 상당수 직원은 하루 12시간씩 주 6일을 근무한다. 팍스콘은 쓰촨성 청두, 후베이성 우한 등에 추가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팍스콘은 ‘공장의 공장’으로서 최첨단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외에도 중남미에 브라질·멕시코, 유럽에 헝가리·슬로바키아·체코, 아시아의 인도·파키스탄·말레이시아 등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 중국 외의 생산기지에서 일하는 직원만 45만명에 이른다. 한 마디로 팍스콘은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고용 머신’인 셈이다. 일본에서도 샤프와 합작으로 오사카부사카이시에 2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도 3000만 달러를 들여 2개의 공장을 짓고 1000만 달러를 들여 R&D센터를 지을 예정이다. 한국에는 3억7700만 달러를 투자해 SK C&C 지분의 4.9%를 인수했다.

거친 경영인으로 불리지만 자상한 아버지

세 번째 터닝 포인트는 1996년에 찾아왔다. 높은 제조기술을 바탕으로 전자제품 주문자 제조 방식으로 전 세계 IT기업의 제품을 본격적으로 위탁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컴퓨터회사인 컴팩의 데스크탑 컴퓨터를 만들 제조라인을 신설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를 계기로 불과 몇 년 안에 미국 굴지의 전자·IT기업인 HP, IBM, 애플이 팍스콘을 전자제품 제조공장으로 지정했다. 미국에서는 다른 브랜드로 팔리지만 생산은 팍스콘에서 도맡았다. 궈 회장은 품질에 최선을 다해 불량품이 나지 않도록 세심한 생산·품질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미국와 유럽, 일본은 IT제품의 개발과 디자인에 주력하고 생산은 팍스콘이 맡는 국제 분업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궈 회장은 하루 최소한 16시간을 일한다고 알려졌다. 간부들을 자정이 넘은 심야에 불러 보고를 하게 한다든지, 회의를 연다는지 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그를 ‘거친 경영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궈 회장은 대만에서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만 학생들이 국회인 입법원을 점거하자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경제력에 의존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중요 인재와 정부의 에너지,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력을 쓸 데 없이 낭비하게 하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2012년 1월 대만 총통 선거 당시 대만 국민당 홈페이지에는 ‘궈 회장이 마잉주 총통후보를 지지한다’라는 문구가 뜨기도 했다.

일에 몰두하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히기로 유명한 궈 회장이지만 가정에서는 온화한 남편이자 아버지다. 그는 동갑내기인 첫 부인 린수루와의 사이에서 1남1녀를 얻었다. 1976년생인 아들은 영화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1978년생인 딸은 금융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궈 회장은 2000년 첫 부인과 함께 교육자선단체를 설립했으며 최종적으로 자신의 재산의 3분의 1을 여기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05년 첫 부인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2007년에는 동생인 궈타이청도 백혈병으로 숨졌다. 그러자 2008년 CEO에서 물러나 회장만 맡고 있다. 자선단체 관리는 딸에게 맡겼다.

궈 회장은 그런 다음 2008년 24세 연하인 발레 안무가인 정신잉과 재혼했다. 2009년과 2010년에 딸이 연년생으로 태어났으며, 올해 또 하나의 딸을 얻었다. 그러면서 인생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2014년 궈 회장은 팍스콘의 직원 상당수가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기러기 생활을 하면서 1년에 몇 차례씩 명절이나 휴가 때나 서로 만나고 있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팀을 구성하고 자신의 부인에게 책임을 맡겼다.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자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FOXY라고 불린 이 팀은 팍스콘의 직원들이 무료로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지어주자고 건의했다. 좋은 학교를 지어주고 함께 살 여건을 만들어주면 가족들과 함께 공장 주변에서 거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궈 회장이 새해에 어떤 모습으로 이를 실현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266호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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