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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김정한作 [사하촌]의 ‘공유자본주의’ 

기업의 이윤을 노동자와 나눠 갖는 시스템 ... 협력사와 임금 인상분 나누기도 

박병률 경향신문기자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단편소설 [단거족]에 나오는 이 말은 요산 김정한 선생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문구다. 매년 10월 부산에서는 요산문학축전이 열린다. 지난해로 벌써 18회를 맞았다. 문학가의 이름을 단 문학행사로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됐다.

‘소설가 김정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강직함이다. 그의 초기작이면서, 동시에 대표작이기도 한 [사하촌]은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의 성품이 잘 녹아있다. [사하촌]은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1932년 양산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사건의 체험이 토대가 됐다. 소설 속 공간적 배경인 보광리 보광사는 범어사로 알려져 있다. 김정한이 태어난 곳이 범어사 아래 마을이기 때문이다. 당시 범어사 승려들은 ‘반 종교적 소설’이라며 작가에게 강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지렁이처럼 발버둥치는 농민의 팍팍한 삶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 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뜰 한가운데, 어디서 기어들었는지 난데없는 지렁이가 한 마리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 가지고 바둥바둥 굴고 있다. 새까만 개미떼가 물어 뗄 때마다 지렁이는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질을 한다’

[사하촌]은 시작부터 음울하다. 지독하게 가난한 농촌을 묘사한 문장이지만, 동시에 지렁이처럼 발버둥치는 농민의 모습이 연상된다. 찢어지게 가난한 성동리에 가뭄까지 겹쳤다. 마을은 흉흉하다. 이글이글 타는 폭양에 곡식들이 발갛게 타 죽는다. 농민들은 두 손발이 닳도록 T시 수도출장소에 애원해 저수지는 수문을 연다. 기쁨도 잠시. 봇물은 수문 아래 있는 보광사의 중의 차지다. 유아독존 식으로 날뛰는 절 사람들의 세도에 눌려 성동리 농민들은 흘러오는 물조차 마음대로 논에 못 댄다. 그저 쥐꼬리 만한 물줄기를 놓고 여기저기서 자기들끼리 물싸움을 벌일 뿐이다. 그날 밤. 물을 가득 댄 보광리 사람들이 물도둑을 당한다. 누군가가 논두렁을 몇 토막 내버려 물이 아랫마을 성동리 논으로 흘러가도록 한 것이다. 범인으로 지목된 고서방은 주재소에 끌려간다.

가뭄이 계속되자 ‘작년에도 속은’ 기우제를 또다시 지낸다.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는다. 백중날 보광사는 기우 불공을 드리기로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소원이 성취된다는 괘불까지 내걸었다. 하지만 성동리 아낙네들은 구경꾼이다. 시줏돈이 없어 불공에 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비는 오지 않는다. 올벼도 말라져 버렸다. 아이들은 수업료를 못내 학교에서 쫓겨온다. 추석이 왔지만 흥겨울 리 없다. 어느 날, 삭정이를 줍던 아이들이 보광사 산지기에게 쫓긴다. 그러다 아이 중 한명인 상한이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다. 산지기는 미안함조차 없다. 상한의 할머니는 미쳐버렸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가난한 사람들이 더 어렵다. 경제 침체의 충격을 가장 먼저 받는 사람이 저소득층이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에 찾아온 오랜 가뭄은 마을사람을 사지로 내몬다. 하지만 이들에게 소작료를 받는 보광사는 그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빈부격차는 갈수록 커진다. 성동리 사람들은 숨이 턱턱 막혀가며 쇠다리주사 논의 김매기를 하는데, 그 옆으로 자동차 한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해수욕을 갔다오는 보광리의 젊은 사람들이다. 땅을 갖고 있고, 소작료를 받는 보광리 사람들에게 가뭄은 남의 얘기다. 이런 식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지면 그 사회는 유지되기 어렵다.

경제학을 탄생시킨 동력은 소득불평등이다. 1800년대 초반 산업혁명으로 산업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영국 인구의 90%는 여전히 가난했다. 마샬, 맬서스, 마르크스, 리카도 등 당대의 경제학자들은 그 현상을 주목했다. 금융위기 이후 소득불평등이 대폭 확대됐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을 내놓으면서 소득불평등 이슈에 다시 불을 질렀다. 마르크스는 극심한 빈부차가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면서 생존의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소득불평등은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과도한 소득불평등을 방관할 수도 없다. 부의 쏠림이 과도해지면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부각되는 새로운 개념이 ‘공유자본주의(Shared Economy)’다.

공유자본주의란 기업의 이윤을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나눠 갖는 시스템을 말한다. 기업과 조직의 성과를 노동자의 임금 또는 부와 연계시켜서 성과와 과실을 함께 나눠 갖는 형태다. 예를 들어 기대보다 수익이 많이 생기면 성과급을 주고, 수익이 줄면 임금도 깎는 형태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대표적인 형태로 이익공유제와 성과공유제가 있다. 또 노동자가 자신의 돈을 쓰지 않고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자사주 소유와 노동자가 자기 회사의 주식을 특정 가격에 살 수 있는 스톡옵션도 포함된다.

공유자본주의는 미국 대선의 공화당 경선에 나온 미국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지난해 ‘이익 공유제’를 1호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이슈가 됐다. 힐러리 클린턴은 기업이 노동자에게 배분하는 이익의 15%에 대해 2년 동안 세액 공제를 해주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SK하이닉스는 직원들의 임금 인상분 일부를 협력사에게 돌려주는 ‘임금공유제’를 시행해 주목받았다. 원청과 하청 간 과도하게 벌어지는 임금 격차를 막자는 취지였다.

공유자본주의는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으로 이어진다. 성장을 하되 삶의 질과 사회 불평등 축소도 동시에 생각하자는 복합적 개념이다. 성장만 하면 불평등이 저절로 해소된다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와는 다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각료이사회에서 ‘포용적 성장을 위한 생산성 제고’라는 주제로 구체적인 계획 일정을 마련한다.

부자의 기부는 이타적 이기주의?

빌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는 거액의 기부금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이 거액을 쾌척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쟈크 아탈리는 이를 ‘이타적 이기주의’라고 밝혔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이타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유자본주의의 개념과 맞닿는다.

보광사는 막대한 소작료를 농민들에게 부과한다. 돈 나올 때가 더 없는 농민들은 소작료도, 빚도 이제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농민들은 보광사 농사조합에 소작료와 조합비, 비료대금 대출과 그 이자의 지불기한을 연기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고 며칠 뒤 논에는 ‘입도차압’이라는 팻말이 붙기 시작한다. 농민들은 야학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빈 짚단을 들고 긴 줄을 지어가지고 마을을 떠나 보광사로 향한다. 차압 취소와 소작료 면제를 탄원하기 위해서다. 철없는 아이들은 이 무리의 꽁무니에 붙어서 ‘절 태우러 간다’고 부산히 떠들어 댄다. 김정한이 예상한 ‘정글자본주의’의 끝이다.

- 박병률 경향신문기자

1323호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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