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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섭 동진쎄미켐 회장 

소부장 ‘克日’ 넘어선 기업가의 꿈 

1967년 창업 이래 54년을 달려온 노(老)기업가의 열정이 식을 줄 모른다. 국내 최초 발포제 개발, 세계 네 번째 포토레지스트 개발 등 이부섭 회장이 이끈 동진쎄미켐의 역사는 곧 한국 소재 산업 발달사의 표본이다.

2019년 7월 첫날. 여름휴가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달뜬 기분도 이날만큼은 종적을 감췄다. 대신 국민의 눈과 귀는 온통 TV 속 긴급 속보에 고정됐다. 이날 일본 경제산업성은 “사흘 후인 7월 4일부터 한국으로 수출하는 몇몇 소재에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해당 품목은 포토레지스트(PR),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PI) 등으로, 모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OLED) 제작에 없어서는 안 될 기초 소재들이다. 기존 포괄수출허가를 개별수출허가로 변경하겠다는 발표였지만, 사실상 해당 품목의 한국 수출을 막겠다는 선언이었다. 한국 산업 경쟁력의 핵심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명줄을 끊어놓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일본이 기습 펀치를 날린 지 열흘 남짓 후인 7월 12일. 경기도 화성시에 자리한 화학소재기업 동진쎄미켐(이하 동진)의 발안공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고위급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집권 여당 지도부가 총출동했고, 경기도 행정 최고책임자인 이재명 지사까지 합류했다. 이 대표는 이날 발안 공장에서 열린 현장최고위원회의에서 “당정이 연 1조원 규모를 집중 투자해 수출규제 품목의 자립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 지사도 회의 후 SNS에서 “이제라도 기업과 국민, 국가가 한뜻으로 부품·소재 국산화를 실현하고 안정적인 공급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임진왜란에 빗대 ‘기해왜란(己亥倭亂)’으로 불렸다. 전혀 예기치 못한 경제 공격이자 충격이었다. 한술 더 떠 일본은 한 달 뒤인 8월 2일, 아베 신조 당시 총리 주재로 각의를 열고,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다는 개정안을 의결했다. 화이트리스트 제외 국가는 공작기계·집적회로·통신장비 등 857개에 달하는 전략물자에 대해 훨씬 까다로운 개별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바로 그날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일본의 공격을 “우리 경제의 미래 성장을 가로막아 타격을 가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라고 규정했다. 이어 “소재·부품의 대체 수입처와 재고 물량 확보, 원천기술 도입, 국산화를 위한 기술개발과 공장 신증설, 금융지원” 등을 천명했다.

당정(黨政)이 급히 동진쎄미켐을 찾은 이유


▎경기도 화성시 동진쎄미켐 발안공장의 포토레지스트 생산 현장.
당정청이 급박하게 대책 마련에 나선 가운데 여당 지도부와 유력 대권주자가 앞다퉈 동진을 찾은 건 이어질 일본과의 소부장 전쟁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동진은 이미 1989년에 국내 최초, 세계적으로도 미국·독일·일본에 이어 네 번째로 포토레지스트(PR) 개발에 성공한 소재 전문 기업이다. 일본이 한국으로의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바로 그 PR은 이미 1990년대부터 동진의 주력 제품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초 소재, 그중에서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전자재료 소재를 생산하는 동진의 위상이 이날 여권 중진들의 회의를 통해 오히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셈이다.

PR은 반도체 웨이퍼 표면에 회로 패턴을 형성하도록 도포하는 코팅 액체다. 회로도에 따라 빛을 받은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이 구분돼 웨이퍼 위에 미세회로가 완성되는 원리다. 웨이퍼를 사진 인화지, PR을 감광재로 이해하면 쉽다. 반도체는 웨이퍼 위에 빛을 쏘여(노광) 회로를 새기고, 필요 없는 부분을 씻어낸 후(식각) 이온을 주입하는 과정을 수백 번 반복한 끝에 완성된다. PR의 민감도가 뛰어날수록 짧은 파장의 빛을 쏘여 더욱 정밀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

여당 지도부와 경기지사의 약속은 동진에도 그간 꽉 막혀 있던 체증을 뚫어준 계기가 됐다. 발안공장 초입에 마련해두었던 18만㎡ 토지는 이날 직후 신속한 용도 변경 허가를 통해 공장 증설 허가로 이어졌다. 정부가 보증한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 약속도 든든한 뒷배가 됐다. 이부섭 동진 회장은 곧장 PR 증산을 위한 발안공장 증축에 나섰다. 올 4월 완공을 목표로 한 새 설비가 마무리되면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최첨단 PR생산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100% 자동화 공정에 클린 룸(Clean room) 시설을 갖추고 10nm(1나노미터=10억 분의 1m) 미만 반도체에 투입할 수 있는 PR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현재 동진의 PR 제조 능력은 연간 15만 갤런. 새 공장에선 연간 40만 갤런 이상을 생산할 수 있다. 한국의 연간 PR 사용량이 70만 갤런임을 감안하면, 국내 전체 PR 수급의 80% 가까이를 동진이 책임지는 셈이다.

전쟁의 참화가 국토를 유린했던 1953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이 회장은 당시부터 화학반 활동을 하며 각종 실험도구와 연을 맺었다. 1956년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한 이 회장은 “학업과 창업으로 이어진 70년 화학 인생은 운명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회고했다.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후 교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지도교수님께서 감광성수지(포토레지스트)에 대해 연구해보라고 권유하셔서 석사 논문도 그 분야를 썼죠. 그때 연구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PR 사업으로 이어졌어요. 참으로 질기고 질긴 인연이지요.”

발포제 이어 전자재료 사업 뛰어들다


▎이부섭 회장은 수 차례 화재, 부도와 법정관리 등 위기를 이겨내고 오늘의 동진쎄미켐을 일궈냈다.
일본의 공격 전만 해도 PR이라는 소재는 일반에 생소했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지만, 동진은 올해로 창립 54년 차인 화학 소재 중견기업이다. 2019년 매출 8750억원(연결기준)을 올린 동진은 전체 계열사 기준으로는 지난해 연 매출 1조2000억원을 기록하며 ‘1조원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일찍이 1967년 창업 이래 화학 소재 개발에 평생을 바쳐온 이 회장과 동진의 역사는 곧 한국 소재 산업 역사나 다름없다. 이 회장은 기초 소재는 고사하고 산업기반 자체가 전무했던 1960년대부터 M&A나 기술이 전 같이 손쉬운 방식을 멀리했다. 원천기술, 즉 기초 기술부터 개발해야 향후 응용 기술에 이르는 확장이 가능하다는 경영 원칙 때문이었다. 1968년 정밀화학의 불모지였던 국내에서 최초로 발포제 독자 개발에 성공해 국산화 시대를 연 건 그 시작이었다.

이 회장은 이어 1983년 반도체를 외부 충격과 오염에서 지켜주는 봉지제인 EMC(Epoxy Molding Compound) 개발에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전자재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동진은 1989년 들어 국내 최초로 PR 개발에 성공하며 국산화 시대를 열었다. 1990년대 초에는 디스플레이용 PR 역시 국내 최초로 개발에 성공해 한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의 첨병으로 자리 잡았다.

이 회장은 “독자 기술 개발은 소재 기업으로선 당연한 책무”라며 “결심이 서면 장고(長考) 끝에 악수를 두기 전에 재빨리 뛰어드는 것 또한 기업가의 자질”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동진의 기틀을 마련해준 발포제 사업도 그랬다. 발포제는 플라스틱과 (합성)고무에 기공을 만들어주는 첨가제를 말한다. 베이킹파우더가 밀가루 반죽을 포근하게 만들듯, 플라스틱·고무 같은 고분자물질에 발포제를 첨가하면 제품의 무게가 줄고 단열, 완충, 방음 등의 성질을 추가해준다. 신발 밑창, 시트 같은 자동차 내장재, 스티로폼, 바닥장식재, 타이어, 차량용 범퍼 등 일상에서 쓰이는 수많은 제품을 발포제 없이는 만들 수 없다. 발포제가 ‘기초 소재의 쌀’로 불리는 이유다.

“꼭 필요한 화학제품인데도 수입에 의존하는 게 대부분인 시절이었습니다. 국산화할 만한 게 없을까 찾다가 발포제 개발에 나섰죠. 당시에도 발포제는 전량 일본에서 수입했어요. 20평밖에 안 되는 집에서 안방을 뜯어 실험실을 만들었는데, 실험 과정에서 암모니아 가스가 누출돼 고생한 경험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천장에서 암모니아수가 뚝뚝 떨어지고 유독가스가 집 안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온 가족이 이불을 둘러메고 피하느라 난리가 났었죠. 결국 1970년 발포제 제조법으로 특허를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사업 확대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이 회장은 당시 PVC 제조기업이던 대동화학, 삼영화학, 럭키화학 등에 발포제를 납품했다. 거래처마다 값싸고 안정적인 국산 발포제를 신기해했다. 신발 산업의 메카였던 부산지역 공장들에도 공급을 시작했다. 현재 동진의 발포제 사업은 전체 매출의 8%, 금액으로는 1200억원 정도를 담당하며 안정적인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PVC 스펀지 등은 동진 제품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인정받으며, 세계시장 점유율 30%대를 차지하는 1등 제품이다.

美·獨·日 이어 네 번째로 포토레지스트 개발


197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성장의 물결에 올라탄 건 동진도 마찬가지였다.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산업 굴기에 나선 정부의 지원 아래 동진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성장 궤도에 오른 것도 이 즈음부터다. 하지만 도전과 성취의 역사 뒤편에는 으레 그에 못지않은 고난과 좌절도 있게 마련이다. 발포제로 사업 기반을 갖춰가던 동진 역시 수차례 공장 화재로 사업 기반 전체를 잃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1980년 12월에는 2차 오일쇼크의 파고를 넘지 못해 부도라는 창사 이후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가장 큰 거래처였던 대동화학과 어음 거래를 했는데, 그렇게 큰 기업이 부도가 나리라곤 생각도 못 했죠. 몰려드는 채권자들을 맞기 전 깨끗이 목욕을 하고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었습니다. 얼굴이 훤해야 자신감도 믿어주지 않겠습니까? 채권자들을 설득한 끝에 결국 재산보전처분이 결정됐죠. 경영 정상화를 위한 여건이 마련된 겁니다.”

부도 당시를 회상하던 이 회장은 “어떤 조직이든 리더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관리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지, 제대로 일할 만한 사람이 조직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지를 항상 체크하는 것이 경영자의 자세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경쟁사의 마타도어와 부도로 잃어버린 해외시장을 찾는 것도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22개국을 한 달 열흘 만에 돌며 해외 거래선을 회복했다. 무리한 일정에 간에 무리가 가 손이 새빨갛게 변한 적도 몇 번이나 됐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죠. 한 나라 가서 저녁 먹으며 이야기하고 바로 다음 나라로 이동하는 식이었으니까요. 돈이 궁하니 이코노미석에서 빳빳하게 몇 달을 보낸 셈인데, 운 좋게 옆자리가 비면 1등석처럼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도니 도망갔던 거래처가 전부 돌아오더군요.”

1989년까지 이어진 법정관리 기간에도 신사업과 기술 개발만은 멈추지 않았다.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바꾸려는 기업가의 열정은 또다시 국내 최초 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1984년 국내 최초로 개발에 성공한 EMC가 대표적이다. 동진의 EMC 사업은 이후 품질 이슈와 거래처 확보 등에 어려움을 겪으며 1990년대 초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그때까지 전혀 몰랐던 전자재료에 대한 가능성, 특히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초석이 됐다. 입에 쓰되 몸에 좋은 약이 된 것이다.

오늘날 동진의 주력 제품이 된 PR도 다름 아닌 EMC 개발에서 출발했다. 이 회장은 “PR 개발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대학원 졸업논문 주제였던 감광성수지가 바로 포토레지스트, 즉 PR이었기 때문이다. 지도교수의 권유에 별 뜻 없이 임했던 연구는 30년 만에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먹거리로 눈앞에 나타났다.

“EMC 판매를 위해 국내 반도체 제조사와 자주 접촉하던 중 PR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대학원 졸업논문으로 쓴 바로 그 분야였어요. ‘이거다’ 싶었죠. 발포제를 팔아 번 돈을 몽땅 PR 개발에 쏟아부었습니다.”

서울대 공대에 변변한 실험실조차 없어 혜화동 생산성본부(당시 국립중앙공업연구소)를 빌려 쓴 대학 시절이었지만, PR은 이 회장의 주특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필름 인화 수준의 조악했던 연구 현실과 30년 후 반도체 생산을 위한 제품 양산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국내에 PR 양산 기술을 보유한 곳이 전무했던 터라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했다. 이 회장은 모교인 서울대 섬유공학과와 산학협동 연구로 장학생 2명을 선발해 본격적으로 R&D에 돌입했다. 이듬해인 1987년에는 부평공장을 매입하고 연구실을 마련해 PR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1989년 10월에 국내 최초, 세계 네 번째 PR 개발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1990년 들어서는 첫 제품인 DPR-100 6리터를 삼미전자에 판매하며 그토록 열망하던 상업화에도 성공했다. 서울대 공대의 작은 연구실에서 시작된 감광재 합성 실험이 34년 후인 2020년 연 매출 9000억원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사업으로 성장하리란 건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기적이었다.

소부장, 길고 넓게 봐야 산다


▎포토레지스트 등 전자재료 부문 연구개발을 이끌고 있는 발안공장 R&D센터 전경.
“국내 최초로 PR 개발에 성공한 기업은 동진쎄미켐”이라는 한 줄 설명에 이 회장과 동진 임직원들이 쏟아부은 열정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개발에 이어 양산화, 반도체 제조사 납품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난제를 풀어가야만 했다.

1989년 10월 1메가 DRAM급 G-라인 PR 개발에 성공한 동진은 이후 반도체에 비해 비교적 공정이 단순한 LED용의 상업화도 이뤄냈다. 하지만 그 사이 메모리 반도체는 1메가 DRAM에서 4메가 DRAM으로 전환됐고, 이에 맞는 고성능 PR 개발이 요구됐다. 1990년 성능 테스트를 위해 찾은 삼성전자에선 정문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돌아서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1년 삼성전자에 ‘국산화추진팀’이 생겨 재시험을 요청했지만, 프레젠테이션에 나선 동진 관계자들에게 돌아온 건 “당신들이 PR을 알기는 하느냐”는 면박뿐이었다. 이후로도 몇 년의 협력과 개발 끝에 1994년 마침내 삼성전자에 4메가 DRAM용 PR을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신기술로 세계를 제패하자’는 이 회장의 꿈도 반도체 소재 국산화로 이루어졌다.

“첫 국산 PR 개발이라는 타이틀은 명예로만 간직해야 했습니다. 이미 업계에선 4메가 DRAM을 테스트 중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직원들 앞에선 절대 포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전자재료 사업을 통해 동진의 도약을 이룰 거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죠.”

이 회장은 동진이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성공한 원동력으로 ‘기술 축적의 힘’을 꼽았다. 원자재부터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직접 설계하고 합성하며 쌓은 원천 기술력을 의미한다. 동진은 사업화 초기 모든 원자재를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했지만, 먼저 자사 연구소에서 화학구조를 설계하고 이를 직접 합성해 평가했다. 이후 제품에 적용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든 후에야 원자재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PR의 핵심 원료도 마찬가지로, 이 같은 개발 방식은 동진이 국산화한 모든 소재 개발에 똑같이 적용된다.

자체 R&D와 기술 개발이라는 본질에 천착해온 이회장의 뚝심은 일본 수출 규제라는 거센 파도에 맞서는 방파제가 됐다. 이 회장은 “1년 반 동안 이어온 소부장 체질 강화도 중요하지만, 소부장 산업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관심이 높아진 것이 더 큰 성과”라고 말했다.

“전 국민적 관심과 정부의 다양한 지원책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부장 기업과 고객사 모두 각자의 힘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동진도 수출 규제 관련 정부 과제를 진행하고 있지만, 소부장은 하루아침에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중장기적인 관심과 지원이 꾸준히 이어져야만 합니다.”

이 회장과 동진의 혁신은 창립 54년을 맞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높아진 반도체 직접도에 따라 G-라인(436nm), I-라인(365nm), 불화칼륨(KrF) PR(248nm), 불화아르곤(ArF) PR(193nm)까지 개발에 성공했지만, 다시금 극자외선(EUV)용 PR(13.4nm)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이 회장은 “향후 5년 이내에 ArF급 PR 등 고성능 재료의 국산화율을 50% 이상 끌어올릴 것”이라며 “EUV용 PR 개발도 시간이 걸릴 뿐 양산화에 성공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202103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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