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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소부장, 新르네상스 열다 

수출 규제 1년 8개월, 되레 日이 당했다 

예상치 못한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한국 산업의 중추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정조준했다. 하지만 사태의 추이는 우려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본의 압승이 아닌 한국의 소부장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019년 삼성전자가 공개한 반도체 웨이퍼. 그해 7월 일본 정부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겨냥한 수출 규제 공격에 나섰다.
경쟁과 갈등 관계에 있는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다면 승패의 추도 이미 기울어지기 쉽다. 더욱이 숨통을 끊어놓을 만한 급소라도 찾았다면 더는 경쟁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로기 상태에 놓였던 상대가 예상을 딛고 일어나 전의를 다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격의 카운터도 언제든 전세를 역전할 수도 있다. 치명타인 줄 알고 넣었던 주먹이 돌고 돌아 스스로를 향한다면 전략의 실패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2019년 벌어진 일본의 수출 규제, 이에 맞선 한국의 대응이 꼭 그랬다.

2019년 7월 1일.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일본 경제산업상은 “한국으로 향하는 수출관리(외국환 및 외국 무역법)를 엄격하게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연이어 밝힌 후속 조치는 한국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3개 품목의 수출 절차를 기존의 포괄수출 허가에서 개별수출 허가로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반도체 식각 공정에 쓰이는 불화수소, 웨이퍼에 회로 패턴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포토레지스트,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재료인 불화폴리이미드가 그 대상으로, 세 품목 모두 거의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세코는 한 달 뒤인 8월 2일 “한국을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며 “우회 수출과 전용이 발생할 경우 엄정 대처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놨다.

수출 규제 이어 화이트리스트 배제까지


반도체 제조에는 수백여 가지 소재가 쓰인다. 그중 하나라도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전체 생산라인이 멈춰 설 수밖에 없다. 한번 생산을 멈춘 기업은 다시 생산을 시작하기까지 천문학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일본이 노린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한국 산업 경쟁력의 중추를 직접 타격함으로써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이라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사태 초반 국내 여론도 “대화와 국제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거나 심지어 “실리를 위해서는 억울하지만 머리를 숙여서라도 일본에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비등했다. 기세등등했던 일본의 자신감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의 구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소부장의 글로벌 밸류체인(GVC)은 철저한 독과점 구조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시장의 70%를 석권하고 있다.

반도체 등 완제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소부장 산업은 이러한 구조가 더욱 고착화돼 있다. 특히 일본은 하이테크형 핵심 소부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한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소재·부품·장비 산업 정책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하이테크형 소부장 주요 품목 814개 중 일본의 점유율이 50% 이상인 품목은 포토레지스트 등 화학 소재 54개, 감속기 같은 정밀기계 16개 등 283개에 달한다. 2019년 포브스가 선정한 글로벌 2000대 기업 중 일본 소부장 기업은 88개에 이른 데 비해 한국은 15개에 불과하다. 최종 디바이스 업체가 수율이나 완성도 이슈로 인해 쉽사리 공급 다변화에 나서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소부장 산업의 독과점 구조는 깨뜨리기 어려운 철옹성으로 인식돼왔다.

전격적인 일본의 공격 후 1년 8개월이 지난 현재의 평가는 어떨까. 한국이 무릎 꿇고 두 손 들 거라 확신했던 일본의 노림수는 오히려 부메랑이 돼 그들의 상처를 드러내게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애초에 역사·정치 문제를 경제 이슈로 풀려 했던 것 자체가 본질적인 실책이었고, 이로 인해 최대 납품처를 잃은 일본 기업의 피해만 커졌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저력은 위기 앞에서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식민지배와 전쟁, 민주화와 산업화,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에 단련된 한국의 DNA는 일본의 경제 침략을 또 다른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기습적인 수출 규제 발표 후 20여 일 만인 2019년 7월 22일, 정부는 수출 규제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소재부품수급대응지원센터를 꾸렸다. 소부장 수급에 따른 애로를 원스톱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산업부·기재부·중기부·환경부·관세청 등 9개 정부부처와 코트라(KOTRA)·무역보험공사 등 10개 유관기관, 대한상의·반도체협회·기계산업진흥회 등이 함께했다. 민관정이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한 대표적인 사례다.

충격과 공포에서 점차 벗어나자 위기는 곧 기회라는 인식도 확산됐다. 기업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비용관리 측면에서 재고 최소화와 해외 공급망을 고집했던 관행에 혁신적인 변화의 바람이 몰아쳤다.

민관정 똘똘 뭉쳐 위기 극복


올 1월 1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소부장 으뜸기업 선포식’은 소부장 경쟁력 강화에 사활을 건 지난 2년 여의 성과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2020년 4월 전면개편된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과 그해 7월 ‘소부장 2.0 전략’에 근거해 미래 성장 잠재력을 지닌 22개 기업을 최초로 선정했다. 특허, R&D 인원 및 역량, 관련 전문가 검토 등을 통해 핵심전략 기술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다.

반도체 부문에선 주성엔지니어링, 경인양행, 동진쎄미켐이 선정됐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차세대 반도체 공정에 적용 가능한 원자층 증착(ALD) 장비의 두께를 균일하게 향상할 수 있는 시공간분할 증착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업이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소재 기업들과 공동으로 장비 개발에 나선 상태다. 동진쎄미켐은 불화아르곤(ArF) 포토레지스트 개발에 성공하는 등 국내 포토레지스트를 대표하는 기업이고, 경인양행은 포토레지스트 제조에 필요한 고분자 소재를 생산해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디스플레이 부문 으뜸기업으로 선정된 신화인터텍은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인 QD패널에서 방오·방수에 필수인 배리어필름(전량 일본 수입)이 필요 없는 배리어리스(Barrier less) QD필름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글로벌 점유율 40%(1위)를 확보한 기업이다.

전기전자 부문의 일진머티리얼즈는 반도체 기판 회로 제작에 필수인 초극박 생산 기술을 개발해 국내 유일의 초극박 관련 원천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일진머티리얼즈의 초극박은 일본에 역수출(2019년 기준 35억원 규모)되며 한국 소재산업의 경쟁력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도 소부장 경쟁력 강화에 기업과 함께 팔을 걷었다. 향후 5년간 범정부 차원에서 100여 개 가용 프로그램을 연계해 ‘기술개발→사업화→글로벌 진출’로 이어지는 전 주기를 밀착 지원할 예정이다. 특히 선정된 소부장 으뜸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하도록 5년간 최대 250억원 규모의 R&D를 지원해 기업의 부담을 줄인다는 계획이다. 4000억원 규모의 산업기술정책펀드도 우선 제공해 기업 인수·합병(M&A)과 설비투자 등 필요자금 지원에도 적극 나선다. 산업부는 올해 안에 20개 이상의 소부장 으뜸기업을 추가 선정해 2024년까지 100개로 늘릴 방침이다. 특히 바이오·에너지 등 차세대 유망 산업 분야까지 선정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202103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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