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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 “천운은 사람에게서 온다” 

 

노유선 기자
입사 2년 차가 되던 해, 30세부터 60세까지 인생 로드맵을 짠 평사원이 있다. 그로부터 30년 뒤 마침내 그는 글로벌기업의 사장이 된다. 착실하게 로드맵에 따라 걸어온 인생. 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그 길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1984년 평사원으로 입사해 2015년 사장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때때로 고사성어를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책상 앞에 앉으면 가장 먼저 한자 책을 펼쳤던 공학도였다. 그는 중학교 1학년 시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처음 마주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의 옛말 앞에서 나이 어린 중학생이 인생의 허무함이라도 느꼈을까. 아니었다. 정반대로 그는 열정을 배웠다. 고동진(62) 전 삼성전자 사장은 “열흘일지라도 붉은빛을 낼 수 있을 때 최대한 빛깔을 내면 되지 않냐”며 “이 가르침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고 전 사장은 1984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대표이사 사장직까지 오른 뒤 2022년 3월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열흘보다 훨씬 더 긴 나날, 무려 38년 동안 태양처럼 빛났다. 덕분에 ‘갤럭시 신화’, ‘갤럭시 아버지’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지난해 7월 고 전 사장은 기업가로서 검붉게 타올랐던 꽃이 빛을 잃기 전에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자기계발서를 펴냈다. 그는 “나의 40년 가까운 경험이 현업에서 고민하는 청년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출간 배경을 밝혔다.

그는 이제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해 출발선에 섰다. 지난 1월 11일 서울 한남동에서 만난 고 전 사장은 인터뷰 내내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노력 앞에서 사람은 평등하다”고도 했고 “한국의 사회적 병폐 중 하나는 하향평준화하려는 경향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의 다음 발걸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평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스타 CEO에게 일과 성공, 사람과 인생에 대한 철학을 물었다.

청년에게 도움 되리란 확신… 생각 굳혔다

저서에서 “일은 성공을 위한 길이자 그 자체로 목표다”라고 했다. 고 전 사장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

30대까지만 해도 내게 성공은 계획한 로드맵에 따라 단계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내 월급으로 집안 전체가 버텨내야 하는 시절이었다. 20대 중반 신입사원 연수 때 사장님 강의를 보고서 ‘나도 저렇게 되면 참 멋있겠구나’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를 구체화한 건 입사 2년 차 때였다. 40대에 임원을 하고 50대에 부사장, 이후 사장까지 하겠다는 로드맵을 세웠다. 사실 사장이 되는 나이는 특정하지 않았다. 운도 따라줘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웃음)

그런 천운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에게서 온다. 아무리 승진을 원해도 아등바등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지 말자고 맹세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 난 늘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타인을 험담할 시간에 더 일하고 꾸준히 자기계발에 힘썼다. 내 좌우명이 ‘자겸즉인필복, 자과즉인필의(自謙則人必服, 自誇則人必疑)’다. ‘자신을 낮추면 주위에 사람이 따를 것이고 자신을 과시하면 주변의 의심을 살 것이다’라는 뜻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하지 않나. 항상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신중했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이가 들면서 성공의 정의도 달라지던가.

그렇다. 40대에 들어서자 승진을 성공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승진이 나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야지 내가 승진을 쫓아갈 게 아니었다. 이제 60대가 되니 성공의 개념이 또 달라졌다. 내 재능과 지식, 경험을 청년에게 오롯이 전달하고 그들이 잘 성장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사회에 환원하는 삶이 내겐 성공이나 다름없다. 물론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경험을 기반으로 그들이 자신의 고민에 쉽게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생각을 굳힌 건가.

4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을 게 아닌가. 청년을 위한 어드바이저 코치로서의 길이 어떻게 보면 힘들 수 있겠지만 그만큼 의미 있고 보람찰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최근 1년간 여러 북토크나 강연회에서 청년을 만나면서 이러한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또 그들과의 대화 덕분에 내 생각이 유연해지고 폭도 넓어지는 걸 느낀다.

기성세대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이 해외 출장 중 비행기 안에서 직원들에게 보낸 자필 편지. 사내 조직문화 개선에 대한 내용이다. / 사진:민음사
삼성전자에서 ‘소통맨’으로 통했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2019년 무렵이었다. 토요일 아침 8시 30분쯤이었는데 미국인 전무급 엔지니어가 내게 ‘DJ, 나 삼성 떠나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깜짝 놀란 나머지 곧바로 항공권을 구매해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 30분쯤 그를 만났다.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한국 기업에서 근무하기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는 “DJ, 당신이 관심을 보이면 뭔가 달라지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터놓고 말했다.

그의 고충에 너무나 미안했고 더는 설득할 여지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답답한 마음에 펜을 들었다. 삼성전자 부장급 이상 임직원에게 보내는 사내 메일이었다. 주제는 ‘조직문화, 이래서는 안 된다’. 글로벌기업을 지향하는 삼성전자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매달 한두 편씩, 2019년에만 약 15편을 작성한 것 같다. 자필로 적었다.

‘관리의 삼성’이라 불릴 만큼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조직문화 아닌가.

국내에서는 삼성의 조직문화가 최고라고 자신할 수 있다. 비록 내가 다른 회사를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삼성에서는 학연과 지연보다 공정한 평가가 강한 힘을 발휘한다. 열심히 일하면 회사가 알아서 직원을 챙겨주는 문화가 뿌리내려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경쟁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유교 문화는 기업에서 윗사람의 의견에 반박하기 어렵게 만든다. 상명하복 문화가 여전히 짙게 깔려 있어 전 직원이 같은 눈높이에서 토론하지 못하고 의사결정 속도도 다소 느린 편이다. 이런 문제만 해결된다면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한층 강화될 것이다.

MZ세대 등장으로 조직 내 세대 갈등이 부각되는 모습이다.

MZ세대는 현명하다. 기성세대보다 다양한 매체에서 정보를 흡수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지식이 방대하다. 자료에 대한 이해력도 높고 일 처리 속도도 빠르다. 그런데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도 기성세대가 있었다. 당시에 세대 차이를 극복했던 비결은 앞선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먼저 다가와서 눈높이를 맞춰주는 ‘솔선수범’에 있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가 MZ세대에 먼저 손을 내밀어주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MZ세대가 다가오길 한없이 기다리는 것보다 기성세대가 변화에 앞장서는 편이 더욱 효율적일 것이다.

워라밸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세컨드잡을 꿈꾸는 청년이 많다. 이런 현상의 배경은 무엇이라 보는가.

일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잘못도 있겠지만 리더의 불찰도 크다고 본다. 회사가 직원을 소모품 비슷하게 대하면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MZ세대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기성세대는 담대한 모습으로 확실한 비전과 마일스톤을 제시해야 한다. 리더는 직원이 자기계발을 하게끔 동기부여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일을 통해서 자신도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어떤 조직이든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발전한다.

영국 서섹스대에서 기술정책학 석사를 마쳤다. 이 과목을 택한 이유는.

삼성에는 사람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고 이병철 회장 때부터 전통처럼 내려왔다. 삼성전자는 기술이 이끄는 회사지만 그 기술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술정책학은 ‘기술개발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학문이다. 당시 대학원에서 쓴 논문 제목은 ‘Beyond Technological Dependency, Toward an Agile Giant(기술 종속을 넘어서 민첩한 거인을 향하여)’였다. 생산 기술을 뛰어넘는 핵심 역량을 갖추려면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고 그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내용이다.

AI에 대한 두려움? 뚫고 가야 한다

2015년 고 전 사장이 IM(Information technology & Mobile communications)부문 무선사업부장 겸 사장에 오른 지 1년 만에 삼성전자에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갤럭시노트7 배터리 폭발 사건은 삼성이란 일류 기업에 큰 오명이었다. 전 세계에 걸쳐 배터리 폭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고 전 사장은 2016년 9월 갤럭시노트7 전량 리콜과 판매 중단을 선언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 전 사장은 “밤잠을 줄여가며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전 세계 담당자와 화상회의를 진행했다”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상에 누운 아내가 2차 수술을 앞두고 있어 심적으로 무척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책임을 떠안았다.

소극적으로 살아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왜 다른 사람 마음에 상처를 내는가. 60대가 되어 지나온 길을 관조해보면 이기적인 삶보다는 이타적인 인생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않나. 조선시대 역사를 돌이켜봐도 다른 사람을 배려했던 사람의 말년은 타인을 배척했던 자들과 달리 풍요로웠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했다.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AI는 인류의 생활을 이롭게 할 것이 분명하다. 기술 발전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 때문에 AI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으면 안 된다고 본다. AI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신세계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론하는 기술을 KBMS(Knowledge Based Management System)라고 불렀다. 당시만 해도 AI라고 명명하지는 않았다. KBMS는 이후 캐즘(chasm·제품이나 서비스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까지 겪는 침체기)에 빠지고 말았다. 그랬다가 2010년대 알파고의 등장으로 KBMS는 AI란 얼굴로 재등장했다. 본격적인 AI 시대의 개막이었다.

약 30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은 빅데이터의 힘 덕분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확보하게 됐다. 이를 빠른 속도로 가공·처리하는 기술이 경쟁력인 시대가 왔다. AI는 인간의 사고방식과 비슷하게 추론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인간의 두뇌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단서를 찾아내 무언가를 추론해낸다. 이러한 인간의 고유 영역까지 AI가 침범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본다.

어떤 사람으로 대중의 기억에 남고 싶은가.

누군가 나를 떠올리면 미소가 절로 나며 마음이 푸근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특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다. 노력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한국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는데 사회의 고질적 병폐라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이 잘하면 독려해야지 왜 깎아내리는가. 이는 사회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뿐이다. 나는 타인의 성취와 행복에 기꺼이 박수 칠 준비가 되어 있다.


※ 1984년 | 삼성전자 개발관리과 입사
2004년 | 정보통신총괄 유럽연구소 소장, 상무
2007년 | 무선사업부 개발실 개발관리팀 팀장, 전무
2011년 | 무선사업부 개발실 개발관리팀 팀장, 부사장
2015년 | IM부문 무선사업부장, 사장
2018년 3월~2022년 2월 대표이사 사장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최기웅 기자

202402호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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