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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인터뷰 |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 

나는 도전한다, 고로 존재한다 

장진원 기자
일흔을 넘긴 기업가의 자세가 여느 청년 못지않게 꼿꼿하다. 의류 제조·수출을 넘어 제지, 건설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온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이다. 세계 최대 의류 OEM·ODM 기업을 일구며 대기업 반열에 올라선 창업 CEO는 여전히 “창조적 도전을 멈추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어머니의 재봉틀. 모든 게 거기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어머니는 언제나 재봉틀과 함께였다. 상보, 버선, 저고리, 설빔과 추석빔이 모두 어머니 손끝과 재봉틀에서 나왔다. 한쪽 귀퉁이에 앉아 바늘귀를 꿰어드리던 아들도 남은 천 조각으로 재봉틀을 장난감 삼아 돌리곤 했다. 어머니와 재봉틀, 실과 천은 시나브로 아들의 DNA에 각인됐다.

의류·섬유산업에 몸담게 된 배경을 묻자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은 대뜸 재봉틀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화가를 꿈꾸던 고등학생 시절엔 직접 바지를 수선해 입을 정도로 재봉틀을 손에 익혔다. 대학에선 섬유공학을 전공했고, 첫 직장도 의류 수출 영업팀이었다. 회사를 세운 후엔 눈앞에 마주한 숙제를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그렇게 40여 년이 지난 후 세아상역은 세계 최대 의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 기업으로 성장했다. 재봉틀 앞에서 정성스레 옷을 짓던 어머니의 손길이 오늘날 세계 최대 의류 생산 기업으로 승화한 셈이다. 그제야 김 회장의 ‘재봉틀 서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김 회장이 세아상역(당시 세아교역)을 세워 기업가의 길에 들어선 건 1986년이다. 자본금 달랑 500만원을 손에 쥔 채 직원 2명과 함께 의류 OEM 사업을 시작했다. 창업 이후 37년이 지난 세아상역은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눈부신 성장을 이어왔다. 중국에서 시작한 해외 진출은 사이판,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은 물론 과테말라, 멕시코, 나카라과, 아이티,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등 중미 지역에도 생산 거점을 마련했다. 현재 세아상역은 세계 최대 패션 OEM 기업으로 우뚝 섰다. 월마트, 타깃, 콜스, 갭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기업들이 세아가 만든 옷을 판매한다. 업계에선 김 회장을 ‘한국 패션계의 거목’이라 칭송한다.

“이종업 진출은 1등 기업의 숙명”이라는 경영 철학 아래 인수합병(M&A)에도 적극적이다. 2007년 나산(현 인디에프)을 인수했고, 2018년에는 세아STX엔테크를 출범했다. 2020년 태림그룹, 2022년에는 쌍용건설, 발맥스기술을 차례로 인수했다. 기업 외형을 그룹사 수준으로 키운 글로벌세아(2015년 지주사 출범)는 마침내 2023년 대기업집단에 포함됐다. 2025년에는 그룹 매출 10조원을 바라본다. 자본금 500만원으로 일어선 청년 창업가가 40여 년 동안 일궈온 피와 땀의 기록이다.

재봉틀에서 시작된 기업가의 운명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경찰공무원이었던 부친을 따라 어릴 때부터 전남에서 자랐다. 김 회장은 “아버님께서 1~2년 단위로 전근을 다니셔서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친구를 새롭게 사귀는 일이 반복됐다”고 회고했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게 습관처럼 굳어져서 였을까. 대학을 마친 김 회장은 남들 하는 대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고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결혼한 누님이 살 집을 직접 지어주겠다는 제안이 시작이었다.

“어릴 때 적산가옥에 살면서 돼지 축사며 닭장이며 많이 지었어요. 적산가옥이 으레 그렇듯 마당이 넓어 부속 건물도 지었죠. 목수를 고용하면, 어머님 따라 제재소, 벽돌공장을 따라다니며 물건을 떼 왔죠.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 뭘 짓는다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군 제대 후 직장을 알아보는데, 누님이 집을 산다 하길래 ‘내가 지어주겠다’ 했죠.”

그의 말마따나 주택 건축은 간단했다. 땅 60평을 구입한 후 설계회사에 설계를 맡겼다. 도면이 나오면 군청에서 건축허가를 받고, 허가가 떨어지면 ‘오야지목수(대목수)’를 구하면 그만이었다. 새끼목수와 토수, 미장이, 잡부는 대목수가 알아서 구했다. 김 회장은 목수가 산출한 자재를 직접 구매하고 막걸리와 담배 같은 잔심부름을 맡았다. 그렇게 집 한 채를 새로 짓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사업이라는 생각도 없었어요. 누님 집 지어놓고 끝내자 싶었는데, 해보니 너무 쉽더군요. 50평 정도 되는 땅을 사서 내리 4채를 더 지어 팔았습니다. 6개월에 1채를 지었으니 2년 정도 걸렸어요. 지금으로 치면 시행과 건설을 다 한 거죠. 그런데 겨울에 바람 불고 눈 오고, 여름에 모기장 쳐놓은 채 자재를 지키는 게 여간 고되지 않더군요. 대학 나와 남들은 좋은 회사 들어가는데 난 뭔가 싶었죠. 그렇게 손 떼고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건설을 계속했더라면 세아의 모기업이 건설회사가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 회장은 “지금 생각해보니 단독주택 시행사업 경험은 운명이었다”고 돌이켰다. 사회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20대 청년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주택건축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경영이 뭔지도 모른 채 시작했지만 못하나, 벽돌 한 장, 나무토막 한 개 허투루 쓰지 않았다. 김 회장은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원가절감이지 뭡니까”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건축업이 사업가의 길을 알게 해줬다면, 첫 직장은 평생의 업(業)을 만나게 해준 또 다른 운명이 됐다. 당시 충남방적 계열사인 충방에 입사해 의류사업부에 배치됐다. 의류 제조·수출업에서 뗀 첫발이었다.

“당시 제 목표는 충방의 전문경영인이 되는 거였어요.” 신입사원 꼬리표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과장의 꿈치고는 거창했다. 하지만 당시 사장과 업무상 갈등을 빚었고, 뜻하지 않게 사직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회사보다 자신의 이익을 중시한 CEO와 마찰이 생겼었다”며 “괘씸죄로 수주 결제를 해주지 않아 원부자재 발주 길이 막혔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경영자는 승부사 기질이 있어야 한다. 기회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찾아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니 기회가 왔을 때 용기와 결단력을 발휘해서 기회를 잡고 승리해야 한다. 40여 년 기업을 이끌어온 김 회장의 지론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그만둔 서른다섯 청년은 그 길로 의류 수출업계에 있던 선배들을 만나 창업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백이면 백 모두가 말렸지만, 며칠 밤을 설치며 고민해도 사업에 대한 뜻은 꺾이지 않았다. 대학 졸업 직후 주택건축 사업에 뛰어들었던 겁 없는 패기가 다시 꿈틀거렸다.

업계에서 안면을 튼 모두가 창업을 말렸다. 그의 성실함을 잘 아는 무역회사와 바잉에이전트 몇 곳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도 받았다. 단 한 사람, 아내의 응원을 얻은 후에야 뜻을 굳혔다. 마포 공덕동 로터리 5층짜리 건물에 11평 사무실을 얻었다. 책상과 소파, 철제 캐비닛, 타자기, 커피포트, 다이얼 전화기를 들였다. 김 회장은 얼마 전 펴낸 책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 나이 서른다섯은 청춘이었다. 종잣돈 500만원으로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청춘은 희망의 꿈을 꾼다. 청춘은 도전과 용기다. 아마도 나는 청춘을 사업의 가장 큰 자산으로 여겼나 보다.”

500만원 손에 쥔 청년 사업가의 패기


▎김웅기 회장이 ‘물방을 화가’로 알려진 김창렬 화백의 작품 앞에 섰다. 글로벌세아그룹이 운영하는 S2A갤러리에선 다양한 미술작품이 무료로 공개된다. 예술을 통한 사회공헌의 일환이다.
돈이 부족해 주식회사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출발한 세아상역은 창업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크고 작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성장 드라이브를 멈추지 않았다.

김 회장이 세아상역을 창업한 1986년은 이미 국내 섬유산업이 절정을 지날 즈음이다. 섬유업종은 한국의 초기 산업화 시대를 이끈 첨병이다. 하지만 국가경제가 커갈수록 노동집약적 업종보다 첨단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이 주류로 등장한 건 정해진 순리였다. 창업 시기뿐 아니라 해외 진출도 남들보다 한 발짝 늦었다. 국내 섬유기업들은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나라 밖으로 향했다. 높아진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더는 국내에 공장을 짓기도 어려워지면서다. 1993년 세아상역의 첫 해외 생산공장인 중국 칭다오공장(청도승리세아복장유한공사), 1995년 완공한 사이판 공장(위너스)도 모두 투자 전성기가 지난 지역이었다. 이미 진출해 있던 기업들마저 경쟁력 저하로 철수를 준비하던 차였다.

“설립 시기도 늦었지만, 무엇보다 투자금이 없어 해외로 나갈 수 없었어요. 하지만 국내 사업만으로는 경영이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남들이 철수할 즈음에야 비로소 해외에 눈을 돌렸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남들과 같은 길을 가는 건 실패를 답습하는 일과 다름없었다. 김 회장은 현지 한국 기업들이 철수하는 이유부터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앞서 터를 잡았던 기업이 했던 실수와 오류만 피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세아교역 창업 때 모두가 말렸던 것처럼, 세아상역의 중국 진출 역시 주위의 우려와 만류 속에 출발했다.

“실패한 기업들은 거의 대부분 과거 방식을 답습합니다. 인건비가 오른다고 무조건 철수할 게 아니라 그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요즘 흔히 말하는 자동화설비를 강화해 같은 인건비로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면 되죠. 실패의 이유를 걷어내고 성공 모델을 이식하면 됩니다. 물론 어려운 작업이고 시간도 오래 걸려요. 하지만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김 회장은 합작법인인 청도승리세아복장유한공사를 마무리한 후 1986년 단독으로 ‘세아황도복장공사’를 세웠다. 1986년 창립 이후 처음으로 갖게 된 자가 공장이었다. 청도승리에서의 경험 덕에 기계설비, 인력 수급, 운영 등 모든 면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당시를 돌아보던 김 회장은 “중국몽과 함께 비로소 ‘세아몽’도 시작됐다”고 말했다.

1등 기업의 숙명은 이종업 진출

김 회장의 별명은 ‘플라잉 맨(Flying Man)’이다. 그의 책에도 “남들이 걷고 뛸 때 나는 늘 지구 위 어딘가를 날고 있었다”고 쓰여 있다. 중국에서 첫발을 떼고 사이판에서 도약할 준비를 마친 세아상역은 1998년 과테말라 방문을 시작으로 ‘중미(中美) 시대’를 열며 본격적으로 글로벌 경영을 추진했다. 이코노미석에 올라 10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을 수도 없이 이어갔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도미니카공화국 등 중미 6개국은 미국과 ‘도미니카-중미 자유무역협정(CAFTA-DR)’이라는 무관세 협정을 맺은 나라들이다. 미국을 포함한 7개국에서 생산한 원사로 원단과 의류를 생산·수출하면 관세가 부과 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도 치안이 가장 위험한 나라들이지만 적게는 17%, 많게는 34%에 달하는 면세는 수출입 회사에는 대단한 혜택이었다.

1999년 과테말라에 처음 세운 ‘세아인터내셔널’은 몇 년 후 과테말라에서 연간 2억6000만 달러를 수출하게 됐다. 커피 등 농산물을 포함한 과테말라 전체 수출액 중 무려 1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섬유류 수출기업으로 좁히면 세아인터내셔널 혼자서 과테말라 전체 수출에서 23%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과테말라 제조 업체 중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것도 세아였다.

이후로도 김 회장은 멕시코, 니카라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코스타리카에 자체 방적공장을 짓고 엘살바도르에 진출했다. 현지 노조의 불법행동, 부패한 공무원, 조직폭력배에 의한 현지 직원 피습과 법인장 납치, 불안한 정치 등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일이 줄을 잇는 가운데서도, 세아상역은 매출 2조4000억원대 회사로 성장했다. 남보다 한 발 늦은 해외시장 개척에도 불구하고 거둔 성과에 대해 김 회장은 “성공 가능성을 먼저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패한 기업은 저마다 실패의 이유가 있어요. 그 원인을 제거할 자신이 있고, 그렇게 했을 때 성공할 가능성이 명확하다고 판단하면 투자하는 거죠. 인수합병(M&A)도 다르지 않아요. 과거 동종업종에서 1, 2등 했던 기업이 현재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제거하면 또다시 1, 2등 할 수 있습니다. 진짜 필요한 건 경영 능력과 자신감이죠.”

김 회장은 2007년 나산 인수를 시작으로 세아STX엔테크, 태림그룹, 쌍용건설, 발맥스기술 등을 그룹사로 편입했다. 과감한 경영 행보에 사업 초창기나 해외 진출 때와 마찬가지로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김 회장은 “불황에 대비하기 위해선 사업다각화가 필수”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편하게 사업하려면 의류 OEM·ODM이라는 한 우물만 팠겠죠. OEM은 좋은 사업입니다. 주문만큼만 생산하면 되니 재고가 없어요. 재고 없는 사업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한 업종에서 잘한다 해서 무한히 클 순 없어요. 경쟁사가 있으니 매출과 이익을 내는 데 한계가 있게 마련이죠. 더욱이 주력 업종에 불황이 오면 마땅한 대책이 없어요. 위험을 분산하는 차원에서도 1등 기업의 이종업 진출은 숙명입니다.”

2007년 나산에 이어 2018년부터 시작된 공격적 M&A는 인재경영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운 계기가 됐다. 김 회장은 “썩은 사과 하나가 전체를 망친다”며 “피인수기업에 동질의 문화를 전파하고 성공을 위한 회사의 비전을 임직원들과 공유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나산과 세아 STX엔테크의 경우, 인수기업의 조직문화 전파와 공유에 어려움을 겪은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피인수기업의 조직문화와 체질을 바꿀 적임자를 선정해 리더로 앉혀야만 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이른바 ‘참모형 인재’와 ‘리더형 인재’의 차이다.

리더를 바로 세워야 기업이 산다


“참모는 말 그대로 리더 옆에서 돕는 인재죠. 매사에 디테일하고 실무도 상세히 꿰고 있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과제도 마쳐야 해요. 반면 리더는 참모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업무 하나하나가 아니라 숲 전체를 조망하고, 때론 숲 너머 새로운 세상에서 기회도 찾아야 하죠. 물론 참모형 인재도 좋은 리더 밑에서 배우고 역량을 발휘하면 리더가 될 수 있어요. 허물을 벗는 거죠. 사장이 되기 위해선 특별한 능력과 자질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글로벌세아그룹은 김 회장의 인재론에 따라 전문경영인 체제가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그는 “창업 후 매출액이 400억원 정도 됐을 때부터 전문경영인 위주의 경영 전략을 고민하고 실행했다”고 말했다. 상담과 출장 등 영업활동 외에 공장 생산관리까지 한눈에 들어오던 것이 400억원을 기점으로 달라졌다는 설명이다.

“2000년대 초반 즈음이에요. 그때부터 영업에 직접 나서지 않았어요. 바이어도 일절 안 만났죠. 생산에서도 손을 뗐어요. 회계관리를 비롯해 총괄적으로 관리하기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문경영인에게 전결권을 폭넓게 주고 회장 결재를 최소화하려 합니다. 오너 혼자 다 챙긴다는 건 회사 규모가 그만큼 작다는 말과 같아요.”

지금도 김 회장은 분기별로만 사장단 회의에 직접 참석한다. 월별 보고는 대부분 페이퍼로 이뤄진다. 현재 모기업인 세아상역은 창업 이래 전문경영인 5명이 배턴을 이어받아 경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여성 CEO를 선임했다. 그룹의 경영체제를 소개하던 김 회장은 리더의 ‘경청’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이랍시고 혼자 결정하는 건 없어요. 중요하고 큰 이슈일수록 리더들이 중지를 모아 결정합니다. 그게 우리 발전의 진짜 원동력이에요. ‘오너가 다 알아야 한다’, ‘나 없는 데서 자기들끼리 해먹는다’ 의심하는 이도 많아요. 의심하면 쓰지 말아야죠. 제가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후 선임한 세아상역 CEO들은 하나같이 부장, 이사를 거쳐 능력을 인정받아 그 자리에 오른 분들이에요. 다섯 분 모두 저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녔습니다. 제발 회의 때 아랫사람 말을 자르지 마세요. 리더일수록 자기 말은 줄이고 남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중지를 모아 신중히 결정한 후 실행해내는 게 리더의 가장 큰 덕목이에요.”

영원히 꿈꾸는 기업가의 길

그룹사 매출 10조원대를 눈앞에 둔 소회를 묻자 김 회장은 창조와 도전으로 이야기 방향을 틀었다. 지구촌 곳곳에 포진한 어떤 경쟁사보다도 창조적 시도와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어렵더라도 이종업종에 진출해 그룹의 외형을 키우면 무한히 뻗어갈 수 있는 비즈니스가 가능해지죠. 국내뿐 아니라 세계로 뻗어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깨뜨리는 게 기업가의 숙명이에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명감입니다. 처음엔 ‘돈 많이 벌겠다’며 시작했어요. 나이 드니 알겠더군요. 정주영, 이병철 회장께서 왜 ‘사업보국’을 앞세웠는지를요.”

김 회장은 국내는 물론 그룹사가 진출한 다양한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사회공헌(CSR)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3년 9월 개교한 아이티 세아학교가 대표적이다. 지난 2010년 대지진이 발생한 아이티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힌다. 김 회장이 아이티 투자를 결정한 것도 대지진이 발생한 바로 그해였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이 장관으로 있던 미국 국무부에서 투자 파트너십 제안을 받았다. 예상한 대로 모든 임원진이 아이티 투자를 반대했다. 김 회장 뜻도 같았다. 하지만 세아상역의 주력 시장인 미국 정부와 파트너십을 맺는다는 상징성도 컸다. 넉 달여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2011년 11월 11일 김 회장을 비롯해 미 국무부 관계자, 아이티 총리, 빌 클린턴 전 대통령까지 모여 아이티 투자조인식을 열었다. 아이티 북부 카라콜산업단지 공장(S&H 글로벌) 준공식은 2012년 10월 거행됐다. 힐러리 장관은 모두가 꺼리던 아이티 투자에 대해 ‘무역을 통한 원조(Aid for trade)’라 극찬했다. 김 회장은 S&H 글로벌 준공식 날 세아학교 초등학교 건물 기공식을 함께 열었다.

“아이티 세아학교에서 아이티의 미래를 책임지는 리더들이 배출되기를 희망합니다. 그 아이들이 리더가 돼 아이티에서 가난과 폭력을 몰아내고 경제와 정치를 발전시키길 간절히 바라요. 내 기억 속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도 그랬어요. 무엇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을까요. 교육은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2012년 아이티 공단 준공식 때까지 아이티 북부에는 지속가능한 학교 운영과 시스템이 전무했다. 현재 세아학교는 초등학교에 이어 중고등학교까지 운영 중이다. 총 700명이 100% 무상교육 혜택을 받는다. 우리 문체부의 지원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후원기업들의 도움까지 더해져 태권도와 오케스트라 팀도 운영한다. 10여 년이 흘러, 당시 코흘리개 아이들이 지난해 처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1년생,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김 회장은 그의 책에 “나는 도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썼다. 살아온 매 순간, 모든 경영 현장이 도전과 결단의 연속이었다는 설명이다.

“도전과 창조의 삶 말고는 제게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글로벌세아의 성장 자체가 그런 역사였죠. 다만 경영자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경영자는 목표를 달성한 성취의 공을 임직원들에게 돌리되, 실패의 최종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해요. 언젠가 제가 떠난다 해도 변치 않을 글로벌세아의 가치죠.”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403호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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