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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인생 이모작] 전통식초 명인 한상준 초산정 대표 

“우리 식초 지킴이로 평생 바치렵니다” 

글 고혜련 월간중앙 기획위원,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 사진 김현동 기자
가난 싫어 농촌 떠났다가 귀농해 전통발효식초 되살려… 양조식초 차지한 시장에서 전통식초 우수성으로 경쟁력 높여

▎전통식초시장을 개척해 가는 초산정 한상준 대표가 500여 개의 대형 식초항아리 (2백ml)가 묻힌 저장고에서 1년간 발효를 거쳐야 제대로 만들어지는 곡물발효식초의 맛을 음미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10년은 이룬 것 없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이 시간에 인생을 바꾸기란 오롯이 나 자신의 몫인 셈이다.

꿈을 이루고자 고향 농촌으로 돌아온 한 중년 남성이 있다. 가난을 피해 도망쳤던 그곳이 기업을 일군 토대가 됐다. 절망뿐이던 곳에서 돌아와 그가 본 것은 희망이었다. 10년 만에 남부러울 것 없는 ‘창농 기업가’로 우뚝 선 한상준(45) 초산정 대표의 얘기다.

“꿈을 잃은 많은 젊은이에게 농촌에 꿈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시야를 넓히면 농촌에는 창업 아이템이 무궁무진하거든요.”

서울에서 200여㎞ 떨어진 경북 예천군 용궁면 송암리의 산골에서 ‘전통 발효식초’를 만난 한씨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한씨는 국내 최초의 ‘식초 명인’으로 알려졌다. 그가 창업한 전통식초 제조업체 초산정은 백화점과 대형마트 등 전국 450여 개 유통업소에 전통 방식의 프리미엄 발효 식초를 공급하고 있다. 한 해에 1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프리미엄 식초 시장을 주도한다.

가난 싫어 떠났어도 마음은 여전히 ‘촌사람’


▎국내 최초로 전통식초 명인이 된 한상준 씨가 식초공부 및 개발 10년 만에 발효식초 전문가를 키우기 위한 식초학교의 강의도 부지런히 맡고 있다. 전통식초시장을 후진들과 함께 키워나가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지금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안겨준 고향이지만 한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가득한 고향이기도 하다. 가난에 찌들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땡볕이 내리쬐는 남의 밭에서 일을 거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씨는 가난을 벗고 싶어 10대 후반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학사장교를 지원해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8년간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그는 서울 강남의 한 정보기술업체에 입사해 온라인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프로그래머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렇게 동경했던 도시 생활은 점점 지쳐갈 뿐이었다. 농촌에 남겨진 노모께 불효라고 생각하며 떠나온 고향이 자꾸 떠올랐다. 한씨는 “태생이 촌사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 것만 같은 도시 생활에서도 그가 꿈꾼 희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귀농하기로 마음먹은 뒤부터 직장생활 틈틈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할 일을 찾아 나섰다. 귀농 관련 자료들을 섭렵하고 사람들을 만나 조언을 들었다. 손수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으니 종목을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인삼과 같은 특용작물을 할까, 멧돼지를 키울까… 모든 게 고려 대상이었지만 어느 것도 자신 있게 선택할 수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우연히 곰팡이와 발효 균류에 관한 책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 몸에 이로운 유산균, 고초균, 초산균의 가치를 처음 알았다. 발효식품으로 고부가가치의 상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한씨는 우리나라에서 전통방식으로 만든 발효식초가 일제시대를 거치며 사라지고 대신 빙초산이나 주정을 이용한 식초가 점령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때마침 식초가 음식의 조미료뿐만 아니라 건강음료로 각광받으며 시장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발효 기술을 배우기 위해 1년여 동안 전북 정읍, 경남 합천 등 전국의 개인 식초제조업자들과 영농조합을 찾아 다녔다. 일본의 흑초 산지인 가고시마현을 오가며 발효식초 시장을 벤치마킹했다. 일본에서 식초가 조미와 음료 등 다양하게 활용되는 것에 놀랐다. 심지어 식초 전문 카페나 식초 전문 레스토랑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전통 발효식초 시장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들면서 그의 행보가 빨라졌다.

전통발효식초 개발하려 전세보증금 빼서 귀농


▎1. 현미 등 오곡을 솥에 쪄서 식힌 뒤 누룩을 섞어 물을 붓고 발효시키는 등의 오곡식초 만들기 과정을 학생들이 직접 실습하는 것도 한상준 식초학교 강의 중 일부다. / 2. 연간 100여 톤의 식초 및 식초가공품을 생산하는 초산정의 연구실에서 한 대표가 오곡식초 외에도 오미자초, 유자식초, 마시는 초콩 등 관련 제품의 맛과 유효성분등을 점검하고 있다.
그는 서울의 전셋집을 아내 몰래 월세로 돌렸다. 돌려받은 보증금으로 2006년 고향의 폐가를 사들여 ‘식초공장’을 차렸다. “별안간 무슨 식초냐”며 반대하는 아내와 아이는 서울에 남겨둔 채 홀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폐가를 고치고 식초를 담글 커다란 항아리 50여 개를 땅에 묻었다. 약 200리터 크기의 항아리에 각각 다른 조건으로 식초를 만드는 실험에 돌입했다. 실패와 비교를 거듭하면서 최적의 식초 결과물을 찾아내는 데 열중했다. 똑같은 조건 아래서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데도 맛이 달랐다. 궁금했지만 누구에게 배워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발효된 천연곡물식초가 탄생하는 데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씻은 현미 등을 솥에 쪄서 식힌 뒤 누룩을 섞어 물을 붓고 발효하기까지 1년을 기다려야 했다. 2007년 겨울에 얻은 식초를 시중 제품과 비교해보니 자기가 만든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국내외에서 판매 중인 일부 식초에선 곡물과 누룩에서 나는 쿰쿰한 맛이나 간장 맛이 도는 게 문제였는데 자신이 만든 식초는 그런 잡냄새가 없었던 것이다. 현미를 기본으로 해서 보리와 수수, 차조, 기장 등 다섯 가지 곡물로 발효한 그의 첫 작품이 탄생했다. 그는 여기에 ‘오곡미초’라는 이름을 붙였다.

“직접 만든 식초들을 병에 담으면서 감개가 무량했어요. 이제 불행은 이걸로 끝이다. 이제는 부속품으로 살던 도시 생활을 끝내고 스스로 제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거든요.” 그는 우선 200여 명의 지인과 친척들에게 주소를 물어 택배로 식초를 보냈다. 주머니가 텅 비어있던 그는 식초병을 사고 택배비를 마련하려고 보일러실에 있던 등유까지 빼서 팔았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대부분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결국 한 병도 팔지 못했다.

“시골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후회가 밀려왔어요. 딸이 먹고 싶다고 졸라대던 탕수육도, 제가 먹고 싶던 삼겹살도 못 사먹고 버텼는데…. 잠든 식구들 얼굴을 보며 참담함을 느꼈죠.”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10년 전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듯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돌아갈 곳도 없으니 거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식초병을 챙겨 차에 싣고 행상으로 나섰다. 고속도로 휴게소 가판대나 골프장, 온천의 매점을 돌아다니며 식초를 놓고 팔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문전박대뿐이었다. 공들여 만든 홈페이지도 무용지물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방송에 눈을 돌렸다.

농촌의 동향이나 먹거리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 제작진들에게 자신의 사연과 전통식초의 우수성을 알렸다. 드디어 2007년 11월 어느 날, 공중파 방송을 통해 한씨가 만든 전통식초가 소개됐다. 초산정의 식초를 ‘땅속의 보물’이라고 소개한 방송이 나가자 전국에서 구매 전화가 빗발쳤다.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이 재구매하고 입소문을 퍼뜨리면서 단골이 늘었다. 전국의 대형백화점과 유통점에서도 입점 의뢰가 들어왔다. 명인명촌코너, 유기농 코너에서 500㎖들이 한 병에 1만4천원에 팔려나갔다. 한 달 매출이 1억원을 넘어섰다.

2008년에는 그때까지 없었던 전통식초표준규격을 정부와 함께 만들었다. 미숫가루, 장아찌, 족발에도 있는 표준규격이 전통식초에는 없었다. 전통발효식초 분야에서 그의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가 만든 초산정의 오곡식초는 새 규격에 따라 첫 품질인증을 받았다. “그늘진 땅속의 전통옹기에서 1년이상 숙성을 거친 식초에는 각종 유기산, 특히 아미노산이 풍부해요. 1년 동안 사계절의 변화와 땅속 온도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 전통 식초만의 풍미가 살아납니다.”

전통식초 품질 알고 나니 단골 늘어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가 10년 만에 다시 돌아와 고생하는 어머니께 효도할 수 있게 돼 무엇보다 기쁘다는 한상준 씨. 공장 바로 옆에 어머니를 위해 지은 붉은 벽돌집 앞에서 환하게 웃음짓는 한씨 모자(母子)
그는 근처 22개 농가와 현미 등 잡곡 재배계약을 맺었다. 연간 100톤의 식초 및 식초가공품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오곡명초 외에 마시는 초콩, 오미자초, 초배즙, 초밀란, 식초비누까지 상품을 다양화했다. 한씨는 사업을 좀 더 체계화하고 규모를 늘렸다. 초산정을 일으켰던 폐가 바로 옆 에 1200여평의 부지를 사들여 넓적한 공장을 지었다. 식초를 발효하는 대형 항아리는 500여 개로 10년 만에 10배로 늘었다. 누룩방과 여과기, 압착기, 살균기 등을 설치해 식품제조공장으로서 구색이 갖춰졌다. 직원도 9명으로 늘었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한씨는 전통식초 제조기술을 나누는 데로 관심을 돌렸다. 식초장인들을 키워 시장을 넓히겠다는 포부다. 그는 ‘한상준 식초학교’를 열어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국 전통발효아카데미에서 인기리에 진행됐던 식초학교는 식초의 종류와 식조 제조원리(1강), 밀누룩과 쌀누룩 띄우기(2강), 식초용 전통주(막걸리) 제조(3강), 곡물식초와 과일식초 만들기(4강), 사람의 감각으로 맛과 향을 알아내는 식초 관능검사 등 품질검사 실습(5강), 식초야채절임·식초요구르트 등 요리 실습(6강) 등 다양한 식초 관련 실습 프로그램으로 짜여져 주부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또 매년 대학과 백화점 문화센터,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강의한다. 그의 강의를 듣는 사람이 연간 3천 명을 넘는다. 한 달의 3분의 1은 전국으로 출장 강의를 다닌다. 수강생 중 단 몇 명만이라도 전문가가 돼 함께 식초를 개발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한씨는 “식초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가정에서 손쉽게 식초를 제조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고, 식초를 활용한 초밥과 초콩 등 다양한 요리와 건강식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전통주 발효제인 누룩 띄우기와 전통식초 발효의 전 단계인 전통주, 식초용 막걸리 제조는 식초를 공부하면서 배우는 덤이다. 그가 진행하는 강좌의 수강생 중에는 귀농해 농장을 운영하거나 귀농을 앞둔 사람들이 많다. 그 외에도 건강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한의사, 스님과 목사 등 종교인, 식품 관련 학과 교수, 식초산업 참여 희망자, 와인 전문가, 셰프, 공무원 등 다양하다. 이들은 전통식초의 효능과 상품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통식초 경쟁력 높여 시장 확대


▎초산정 직원들이 식초가 든 병의 밀봉작업을 하고 있다.
전국의 식초 장인들과 의기투합해 한국전통식초협회도 구성했다. 우리식 전통식초를 앞세워 세계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첫 포석이다. “빙초산과 주정식초에 밀려 사라져가는 한국 고유의 전통발효식초를 살려내자”는 포부다. 이 협회에 따르면 식초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정식초는 식초 생산기간과 단가를 낮추기 위해 알코올 발효 없이 주정(에탄올)을 물로 희석해 첨가한다. 초산발효에 필요한 공기를 인위적으로 불어넣어 2~3일 만에 속성 발효시킨다. 이렇게 만든 식초는 신맛은 내지만 다양한 유기산과 비타민, 항산화성분인 폴리페놀 함량이 떨어진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400~600년씩 된 식초양조장이 있는데 우리는 다 사라지고 없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식초에 들어있는 풍부한 유기산과 아미노산은 혈압을 낮추고 비만, 당뇨에 좋아요. 면역력 증진과 간의 해독작용도 돕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단순한 조미료에서 건강용으로 소비 패턴이 바뀌고 있어서 앞으로 시장 전망이 아주 밝아요.” 그의 말대로 프리미엄 식초 시장은 매년 급성장하고 있다. 국내 전체 식초 시장의 성장률이 지난 해보다 4.3% 오른 것에 비해 발효식초 같은 프리미엄 시장은 10.8%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한씨의 초산정 홈페이지(www.chosanjung. com)에는 대표상품인 오곡미초 제조방법이 자세히 게시돼 있다. 비법 공개를 꺼리는 여느 장인들과 다른 점이다. 전통발효식초 대중화를 바라는 그의 염원이 엿보인다. 홈페이지 구매후기 게시판에는 발효식초의 효능을 체험한 소비자들의 호응이 줄을 잇는다. 올바른 복용방법이나 체질별 제품선택에 대해서도 소통하는 모습에서 그가 단지 상업적인 욕심만 갖고 초산정을 운영하는 게 아님을 짐작케 한다.

최근에는 예천으로 가는 34번 국도변에 1천여 평의 땅을 매입했다. 이곳에 20억원을 들여 450평 규모의 3층짜리 식초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6차산업의 완성을 위해선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읍내 사거리에 식초카페를 열고, 그곳에 초산정과 카페에서 일할 직원들의 기숙사도 만들 계획이다. 식초의 대중화와 함께 젊은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 도시의 일꾼들을 끌어 들여 꿈과 활력이 넘치는 젊은 농촌을 만들어가려는 야심 찬 포부의 첫걸음인 셈이다. 그에게 기업가로서의 사명감이 읽혀졌다.

개인적인 소원도 이뤘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나면서 ‘성공하겠노라’ 다짐했던 대로 공장 바로 옆에는 어머니를 위해 크고 멋진 벽돌집을 지어드렸다. “수시로 들락거리며 모자의 정을 자주 나누니 불효했던 지난날의 한도 풀게 됐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농촌에는 노는 땅이 넘칩니다. 농지은행을 통해 땅을 저렴하게 빌려 6차산업의 기반으로 활용하면 풀 죽은 젊은이들이 달려오지 않을까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의 젊은이들이 농촌에서 한씨처럼 밝은 미래를 찾았으면 좋겠다.

고혜련 - 칼럼니스트. 이화여대에서 국문학, 미국 뉴저지 주립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파이낸셜뉴스 문화부장과 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저서로 <신문, 취재와 기사작성> <자연에 산다> <매스커뮤니케이션개론> 등이 있다. 홍보 및 콘텐트 기획사 ‘제이커뮤니케이션을 운영하고 있다.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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