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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정세] 30년 만의 일본 천황 교체와 남·북·일 관계 

나루히토 새 천황은 한국 땅 밟을 수 있을까?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특별편집위원
아키히토, 중국·싱가포르·인니 등 전쟁 피해국 10곳 방문했지만 한반도는 못 와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 문제에서 한·일 협력 여지 넓어질 듯


▎지난 2월 24일 천황 재위 30년 기념식에 참석한 아베 일본 총리(왼쪽 첫 번째)와 아키히토 천황(왼쪽 두 번째). / 사진:연합뉴스
일본에서는 5월 1일, 30년 만에 새로운 천황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올해 2월 23일 59번째 생일을 맞은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황태자가 제 126대 천황에 즉위하는 것이다.

필자는 예전에 한 모임에서 황태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시종 웃음을 잃지 않던 온화한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황태자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어릴 적부터 제왕학이 몸에 배어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는 일본 헌법 제1조부터 제8조에 걸쳐 명확하게 규정돼 있다. 그리 길지 않기에 관련 전문을 열거해 본다.

제 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따른다.

제 2조, 왕위는 세습되며, 국회가 의결한 ‘왕실전범(皇室典範)’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이를 계승한다.

제 3조,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하며 내각이 책임을 진다.

제 4조, 천황은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한을 갖지 않는다. 천황은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위임할 수 있다.

제 5조, 왕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섭정을 둘 때에는, 섭정은 천황의 이름으로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한다. 이 경우에는 제1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제 6조, 천황은 국회의 지명에 따라 내각총리대신을 임명한다. 천황은 내각의 지명에 따라 최고재판소의 장인 대법원장을 임명한다.

제 7조, 천황은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해 국민을 위해 다음의 국사에 관한 행위를 한다.

1, 헌법 개정, 법률, 정령 및 조약을 공포할 것 2, 국회를 소집할 것 3, 중의원을 해산할 것 4, 국회의원의 총선거의 시행을 공시할 것 5, 국무대신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관리의 임명 및 전권위임장과 대사 및 공사의 신임장을 인증할 것 6, 대사, 특별사면, 감형, 형 집행의 면제 및 복권을 인증할 것 7, 영전을 수여할 것 8,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문서를 인증할 것 9, 외국 대사 및 공사를 접견할 것 10, 의식을 행할 것.

제 8조 황실에 재산을 양도하거나 황실이 재산을 물려받거나 하사하는 것은 국회의 의결에 근거하여야 한다. 이상이다.

우선 제1조에서 규정했듯이 천황은 일본의 상징이다. 그리고 제3조에 있듯이 ‘모든 행위’에 대해 ‘내각의 조언과 승인’이 필요하다. 또 제1,3,4에서 국정에 관한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에서 ‘권력’은 어디까지나 내각의 총리대신, 지금은 아베 신조 총리의 손 안에 있다. 천황이 가지고 있는 것은 ‘권위’이다. 더 쉽게 말하면 국가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것은 아베 총리이며, 천황은 아베 총리가 결정한 것을 승인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권력과 권위를 분리시킨 제도는 일본이 자자손손까지 살아남고자 고안한 ‘지혜’라고 할 수 있었다. 최종적 책임의 소재를 일부러 부정확하게 함으로써, 양자의 존속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와 스가 중 누가 새 연호를 발표할까


▎일본의 새 천황으로 등극하게 될 히로노미야 나루히토(왼쪽)와 그의 딸 아이코 공주.
이는 한국의 대통령제와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한국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 절대적 권력과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기를 맞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권 말기에 촛불시위가 일어나서 대통령 탄핵 절차가 마무리되자 대통령의 권력도,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총리는 평균 2년마다 교체되지만, 천황은 계속 존속하기 때문에 ‘권위’는 끊임없이 유지된다. 이번처럼 천황이 바뀔 때에도 아베 총리는 존속하기 때문에, 일본 정치는 하루도 정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황이 바뀌면, 일본의 무엇이 변화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로 두 가지이다.

첫째로 연호가 바뀐다. 현재는 서기 ‘2019년’이지만, 일본의 달력으로 말하면 ‘헤이세이(平成) 31년’이다. 현재의 헤이세이 천황이 즉위한 지 31년째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천황이 바뀔 때마다 연호가 바뀐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9년 1월에는 선대의 천황이 죽고 연호가 ‘쇼와(昭和)’에서 ‘헤이세이’로 바뀌었다.

때문에 일본에서 지금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헤이세이’의 다음 연호가 무엇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4월 1일 새 연호를 발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과 같은 9단계 절차를 거친다.

1, 중국의 고대사·고대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 일본의 고대사와 국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에게 새로운 연호 후보와 그 해설까지 포함해 제출하도록 한다.

2, 아베 정권 내부에서 제출된 후보안을 3안 정도로 압축한다.

3, 아베 총리가 황태자에게 검토 상황을 설명한다.

4, 전문가 간담회를 열고 동시에 중의원과 참의원의 의장 및 부의장의 의견을 청취한다.

5, 각료회의에서 새로운 연호를 기록한 개원 정령(改元政令)을 결정한다.

6, 천황과 황태자에게 보고한다.

7, 4월 1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에게 공표한다.

8, 천황이 서명·날인해, 정령으로 공포한다.

9, 4월 1일부터 새로운 원호로 개력한다.

아베 총리 관저 관계자에게 확인하자 3월 10일 현재, 9단계를 신중하게 진행 중인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7번째 순서인 4월 1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에게 공표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냐, 아니면 아베 신조 총리인가 하는 것이다. 지난 1989년에 기자 회견을 열어 “다음 연호는 헤이세이입니다”라고 공표한 이는 다케시타 노보루 정권 때의 오부치 케이조 관방장관(후에 총리를 역임)이었다. 당시 영상은 반복해서 TV를 통해 흘러나왔고, 오부치 관방장관은 “헤이세이 아저씨”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국민적인 인기를 모았다.

30년 전의 선례를 따르면 스가 관방장관이 회견을 열고, “다음 연호는 000입니다”라고 공표하게 된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가능하다면 자신이 그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새로운 연호의 발표 회견을 둘러싸고,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하루라도 더 장기집권을 하고 싶은 아베 총리와 포스트 아베의 유력 후보로 새 시대는 자신의 것이라고 알리고 싶은 스가 관방장관, 그리고 이 둘을 지지하는 주변 사람들 사이의 힘겨루기 말이다.

천황이 바뀌면서 변하는 것의 두 번째는 일본인의 심경이다.

30년 전에 연호가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바뀐 1989년 1월 8일, 나는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둔 시점으로, 정확히 말하면 졸업논문 마감일이었다. 전날 아침 쇼와 천황이 87세로 사망했고, 오후가 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헤이세이’라는 연호가 발표됐다. 그 직후부터 TV는 일제히 정규방송을 멈추고 관련 특별프로그램으로 전환했고, 거리에는 차 한 대 달리지 않게 됐다. 며칠에 걸쳐 일본 전체가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막 완성한 졸업논문을 대학에 가져가는 데 애를 먹었던 일을 기억한다.

헤이세이 천황의 한국 방문 끝내 불발


▎1992년 중국을 방문한 아키히토 일본 천황 부부. 일본 천황은 끝내 한국 땅은 밟지 못했다. / 사진:연합뉴스
이런 일들을 거쳐 64년간에 걸친 ‘쇼와 시대’가 막을 내리고 지금의 ‘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되자, 일본인 전체가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의 전쟁시대도 ‘쇼와 시대’의 종결과 함께 씻겨 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일본 연호가 바뀌었다고 해서 과거 전쟁의 기억을 씻어낼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을 포함한 일본의 주변국 사람들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사이에서 ‘과거’나 ‘역사’를 둘러싼 갈등은 심화됐다.

또 한사람, 결코 과거의 기억을 씻어내지 않았던 이가 지금의 헤이세이 천황이다. 헤이세이 천황은 과거 전쟁에서 일본인과 일본군 병사가 희생된 땅, 일본군이 피해를 끼친 아시아 국가와 지역으로 ‘위령 여행’을 다니는 일을 스스로의 사명으로 부과했다. 한 곳, 한 곳을 돌며 모든 희생자를 추모하는 동시에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평화국가로 계속 존속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 헤이세이 천황이 즉위한 이후 방문한 나라는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중국·사이판·싱가포르·하와이·인도·팔라우·베트남 등 10개국이다. 그중에서도 천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2년 10월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중·일 관계 개선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천황 재임 중에 방문을 완수하지 못한 곳이 바로 한국이다. 천황은 한국을 방문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환경이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궁내청 자료에 의하면, 30년 남짓한 헤이세이 시대에 일본 황실 멤버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세 번 정도다.

첫째, 1989년 5월 7일~8일 다카히토 친왕(쇼와 천황의 막내동생)부부가 이방자 여사 장례식 참석차 방한했다. 둘째, 2002년 5월 29일~6월 3일 도모히토 친왕(다카히토 친왕의 장남) 부부가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월드컵 개막식 참석차 방한했다. 셋째 2007년 8월 18일~25일 노리코 여왕(다카히토 친왕의 손녀)이 가쿠슈인 대학 재학 중 여행을 위해 방한했다.

한 관계자에 의하면 이밖에도 황실 인사의 방문이 진지하게 검토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헤이세이 27년(2015년) 4월 12일부터 17일까지 제7회 ‘세계물포럼’이 한국의 대구에서 열렸을 때였다. 대회는 3년마다 개최됐다. 히로노미야 황태자는 제3회 교토 대회, 제4회 멕시코시티 대회, 제5회 이스탄불 대회에 참석한 바 있다. 그래서 국제회의 참석이라는 명분이라면 ‘천황의 대리인 황태자’의 한국 방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베 정권과 박근혜 정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황태자의 한국 방문은 위험이 클 것이라는 생각에 보류되었다.

황태자가 5월 1일 새로운 천왕으로 즉위한 뒤, 방한할 가능성이 있을까? 나는 당분간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더불어 헤이세이 천황이 퇴위한 후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의 발언 파동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2월 7일 미국의 경제전문지인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문희상 의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라도 좋다.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나 혹은 나로서는 곧 퇴위하게 되는 천황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 분은 전쟁범죄의 주범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 분이 한번 할머니 손을 잡고 정말 미안하다고 하면 다 해소될 것이다.”

이 발언으로 일본 전체가 크게 술렁거렸다. 이 한마디로 일본에서 문희상 의장은 같은 문씨인 문재인 대통령보다 훨씬 더 유명해져 버렸다. 일본의 TV와 신문, 인터넷까지 문희상 의장의 경력과 과거 발언 등을 상세히 보도했으며, 과거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낸 문 의장과 일면식 있는 일본의 국회의원, 전직 외교관들에게도 매스컴의 인터뷰가 쇄도했다.

이때 흥미로웠던 것은 문 의장은 총리나 혹은 천황이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일본 매스컴과 일본인들의 처절한 분노는 ‘천황의 사죄’에 집중한 것이었다.

日, 권력 비판은 수긍해도 권위에 대한 비판은 못 참아


▎일본 천황 생일 기념 리셉션이 열린 지난해 12월 6일 서울 그랜드하야트호텔 앞에서 한 시민이 태극기를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에서는 ‘권력’과 ‘권위’가 분리되어 있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용서받지만, 권위에 대한 비판은 좋게 보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출판업계에는 ‘차별’과 ‘황실’ 이라는 점검 항목이 있었다. 출판 예정인 원고에 사람을 차별하는 표현이나, 황실을 비하하는 표현이 없는가를 체크하고, 체크를 받고 나서야 출판하는 습관이다. 덧붙여서, ‘정권’(총리에의 비판)이라고 하는 점검 항목은 없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것은 알려진 대로이다. 한국은 물론 한국의 입장과 주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반년 동안에 일어난 한·일 양국 간의 각종 갈등 속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장을 일으키면서 일본인 전체의 혐한 감정을 증폭시킨 게 바로 ‘문희상 발언’인 것이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여러 가지는 옐로카드였지만, 문 의장의 발언만큼은 레드카드이다. 이것이 만약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었다면 일본은 한국과 단교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낙관적인 일도 있다. 문제가 산적해있다고는 하지만 한·일 관계가 온통 먹구름만 드리운 것은 아니다.

일본 관광청 발표에 의하면, 작년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 752만6000명으로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소비액도 5842억 엔으로, ‘큰 손’ 중국인 다음으로 많은 돈을 뿌린다.

역시 한국관광공사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도 295만 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전년대비 28%포인트 늘어난 규모다. 이러한 한·일 교류의 증가는 정치문제와 상관없이 문화적 관계가 열기를 띠고 있음을 반영한다.

일본에서 부는 김수현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열풍


▎지난해 11월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열린 일본 도쿄돔 공연장 앞에서 팬들이 멤버들의 사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3월 7일 현재, 일본의 아마존 서점에서 문예작품 단행본 1위는 일본의 유명 작가의 작품이 아닌, 한국인 작가 김수현이 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이다. 2위와 3위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이지만, 4위에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들어 있다. 베스트셀러 5위까지 한국 작품이 2개나 들어간 것은 과거에 본 일이 없다.

K-pop 부문에서도 방탄소년단(BTS)의 인기는 일본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오리콘 주간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싱글곡이 4곡이나 됐고, 2017년 6월에는 인기 패션잡지 [an an]의 표지를 장식했다. 지난해 11월 6일 유튜브에 오른 방탄 소년단의 ‘Airplane pt.2’ 일본어 버전 공식 뮤직비디오는 불과 4개월 만에 5612만1802회나 재생되었다(3월 7일 현재).

‘방탄 소년단’은 지난해 11월 9일,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TV의 음악 프로그램 [뮤직 스테이션]에 생방송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멤버 한 명(지민)이 과거에 입었던 티셔츠가 문제가 돼 갑작스럽게 출연이 취소되었다. 그런데도 그 후로도 도쿄 돔, 오사카 코세라 돔, 나고야 돔, 후쿠오카의 야후 오쿠! 돔 등 4개 도시에서 9번의 공연을 열어 38만 명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류 드라마의 인기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한·일 관계가 최악인 국면에서도 NHK 종합채널에서는 밤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옥녀~운명의 여자(한국 원제 옥중화)]를 내보내고 있다.

많은 한국 드라마를 사들이는 일본 기업의 바이어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 업계에는 혐한이 없습니다. 2014~2016년에 걸쳐 주춤하던 한류 드라마의 인기가 다시 회복세를 보이면서, 드라마 가격도 지난해부터 회당 20만 달러의 드라마가 속출합니다. 예를 들면 [100일의 낭군님]은 회당 23만 달러, 최근 한국에서 방영된 [남자친구]는 한류 드라마 사상 최고 수준인 회당 30만 달러에 계약됐습니다. 한국 측도 한때 중국이 최대 수출시장이었지만, 2016년 사드(THAAD, 고고도방어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이 최대 수출시장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재의 한·일 관계는 정치적으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문화면에서는 전례 없이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필자가 한·일 관계에 기대하는 건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3월 4일 주일대사로 내정, 발표된 남관표 국가안보실 2차장의 외교 수완이다. 필자는 진난해 6월 남 차장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장소는 싱가포르였다. 6월 12일 세기의 회담으로 불리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 세계에서 3000명에 가까운 언론인이 싱가포르에 집결했는데 필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당초 문재인 대통령도 싱가포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으나 문 대통령의 방문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온 사람이 남관표 국가안보실 2차장이었다.

정상회담 전날인 6월 11일 오후 4시반부터 스위스 호텔 4층에 한국 정부가 급조한 프레스센터에서 남 차장의 기자 회견이 열렸다. 출석한 사람은 주로 한국 기자들이었고, 일본인 기자는 나와 또 다른 한 명밖에 보지 않았다.

회견에 앞서 사회자가 일본의 기자 회견 스타일과는 다른 이상한 말을 했다.

“남 차장은 두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공식 회견이고, 두 번째는 백그라운드 브리핑입니다. 두 번째는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이니 녹음이나 사진촬영은 하지 말아 주세요.”

두 번째 등장에서 과연 어떤 중요한 이야기해 줄 것인가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건질 만한 정보가 거의 없이 두 번의 회견은 막을 내렸다. 참고로 남 차장은 첫 번째 등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관표 신임 일본대사의 역할론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을 때 내일 있을 역사적 회담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새로운 미래가 내일 열리게 될 것이고, 그것은 아주 뜻깊은 일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북·미간의 물밑협상은 계속되고 있으며, 내일 회담이 끝났을 때는 좋은 결과가 보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북·미 회담은 문재인 정부가 중개자가 돼 3월 8일에 내놓은 것입니다. 그동안 북·미 양국 간의 중재자로서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5차례의 전화회담을 가졌으며, 두 차례의 김정은 위원장과의 남북 정상회담 등을 거치며(북·미 회담 주선을) 진행한 것입니다. 비록 먼 길이겠지만 계속 전전하여 세계의 마지막 냉전을 종식시키고 싶습니다.”

필자는 좀 더 얘기를 듣고 싶어 단상에서 내려온 남 차관을 직격 취재했다.

내일 회담의 구체적 성과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이번 북·미 회담은 큰 방향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 점을 잘 이해해 주세요.”

북한 문제에 관한 일본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정상회담을 세팅하기 전까지는 우리 한국이 큰 역할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일본의 역할도 매우 중요해집니다. 일본과도 긴밀히 협력해 한반도 평화를 이루고 싶습니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남관표 차장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동안 많은 한국 정치인이나 외교관들을 인터뷰하고 만나곤 했는데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일본 정치인이나 외교관들보다는 ‘강골’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격동의 한반도 문제를 다루다보면 다소 기가 세 보이거나 강경한 인상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남 차장의 경우는 이들과는 다르게 매우 온화한 인상을 가졌던 것이다. 친한파인 필자로서는 신임 대사의 수완에 크게 기대하고 싶다.

또 하나, 향후 한·일 관계에서 기대되는 것은 북한을 둘러싼 협력이다.

2월 27일과 28일,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은 결렬로 막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앞서이 총리 관저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해 이후 북한을 두고 국제사회에서는 ‘버스 타기론’이 유행했다. 북한과의 대화로 가는 버스에 한국·중국·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정권까지 올라탔는데, 우리 아베 정권만 버스를 놓쳐 버린 형국이 되었다. 그래서 혼자서만 ‘대화행’ 버스를 놓친 아베 정권의 판단이 과연 옳았는가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 버스가 이번에 엔진 스톱을 일으키며 멈춰서 버렸다. 그러니 혼자서 버스를 타지 않고 버틴 아베 총리는 판단이 옳았다는 얘기가 된다. 또, 그로 인해 북·일 관계에 진전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 북한이 일본에 추파를 보내온 시기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됐을 때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북·미 관계가 악화되면 북·일 관계가 호전된다. 대표적 사례가 2002년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의 방북이었다. 김정은 정권도 교착 국면을 타개하고자 트럼프 대통령의 맹우인 아베 총리에게 추파를 보낼 것이 틀림없다고 일본 정부는 보고 있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은 같은 스탠스로 북한에 대한 ‘협력자’가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한·일 양국은 북한 문제에서 협력하는 것으로 서로의 국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새로운 천황 시대를 맞이해 한·일 관계가 호전되길 기대해 본다.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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