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8) 최종회] 조선 석학들이 평가한 세종 시대 

“백성이 살 만한 나라 이룬 동방의 요순” 

조선뿐 아니라 한국사 통틀어서도 가장 현명한 군주
부국강병 이끈 그의 유산, 어떻게 계승할지 궁리해야


▎세종대왕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한 군주로 평가된다. 광화문에 설치된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은 진실로 우리나라가 만대에 태평을 누릴 터전(基業)을 다지셨다.”

정조의 평이 이러했는데 [일성록]에 실려 있다(정조 24년 1월 20일). 정조는 세종의 빼어난 업적으로 공법(세법)의 제정을 비롯해 한글 창제와 아악 정리, 천문학의 발달과 금속활자 제작 등을 망라했다.

예전부터 조선의 왕 중에서 세종처럼 호평을 받는 군주는 없었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었으나 비판적인 견해도 없지는 않았다. 아래에서는 조선 석학들의 견해를 소개하며 세종의 장단점을 가려보고자 한다. 율곡 이이와 백호 윤휴, 성호 이익과 농암 유수원, 청장관 이덕무 그리고 다산 정약용을 소환해 그들의 평가에 귀 기울이겠다. 그들은 세종과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하다.

조선의 많고 많은 학자 중에서 매사에 가장 비판적인 인물이 누구였을까.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해오면 나는 서슴없이 농암 유수원이라고 대답하겠다. 날카롭기 짝이 없는 유수원, 그는 세종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 세종(‘영릉’)은 그 공적이 동방의 요순(堯舜)에 해당했다. 그 시절에는 백성도 평안했고 물자도 풍성했다. 풍속이 아름다웠으며 교화가 크게 이뤄졌다.”([우서], 제1권, ‘비국[備局]을 논함’) 가장 비판적인 안목의 소유자라고, 내가 그렇게 믿는 유수원의 평가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정말 극찬이 아닌가.

유수원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그의 선배들은 조선 초기에는 쓸만한 재상이 없었다고 봤다. 그러나 자신은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후대와는 달리 문장도 질박(質朴)하고 풍류도 대단하지 못했을는지 모르나, 초기에는 재상들이 삼가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믿음직했다고 평했다.

유수원은 세종 때 재상들이 실용적인 데다 성실하기도 했다고 봤다. 그들이 제정한 법과 제도는 옹졸하지 않고 너그러웠으며, 쓸데없이 기교를 부리지 않아서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조선이란 나라의 명맥을 오래가게 만들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만든 공이 그 시절의 재상에 있다고 판단했다. 후세의 눈으로 보면 어딘가 답답하고 엉성한 것 같으나, 함부로 폄훼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우서], 제1권, ‘비국을 논함’). 세종은 왕으로서 탁월했고, 그를 보좌한 재상들도 공이 많았다는 후한 평가였다.

백호 윤휴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 특히 그는 세종이 간관(사헌부·사간원)의 기능을 강화했다는 점을 특기했다. “우리 세종께서 황희를 재상으로 삼으셨으나, 파면하기도 해 대각(臺閣)의 풍모를 이루셨습니다.”([백호전서], 부록 3, ‘행장 중’) 이러한 윤휴의 평가는 핵심을 짚었다고 평가한다. 세종은 재상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의 비행을 파헤치는 대간의 용기와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인데, 태종 때까지는 대간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았다.

황희 정승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거론한 학자도 있었다. 성호 이익이었는데, 그는 최윤덕 장군이 여진족을 무찌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의 일화를 꺼냈다. 세종은 친히 마중 나가서 공을 치하하려고 했으나 황희가 가로막았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며, 이익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황희는 왕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왕의 자만심을 조장하고 군대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키웠다. 이렇게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였는가?”([성호사설], 제19권, ‘정건주위[征建州衛]’)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정은 군사적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생겼고, 이는 후세를 위해 불행한 일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익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서 세종은 큰 업적을 낼 수 있었을까. 후세의 석학들은 왕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고 믿었다. 선조 때 율곡 이이는 경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이의 제자 김장생이 남긴 기록을 인용해본다.

연공서열 파괴, 능력 위주 인재 발탁


▎대마도 정벌 당시를 기록한 그림. / 사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세종대왕의 정사를 본받으셔야 합니다. 인재를 등용하면서 (세종은) 구질구질한 습관(‘常例[상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어진 사람에게 직무를 맡기셨는데, 능력이 있는 사람을 잘 골라 각자의 재주에 어울리는 자리에 앉혔습니다. 지금도 사람을 잘 선택해서 벼슬을 주고, 직임을 (소질대로) 맡겨 책임을 다하게 한다면 업적이 크게 드러날 것입니다.”([율곡선생전서], 제35권, 부록 3, ‘행장]’)

세종의 인사정책을 진지하게 연구한 이는 유수원이었던 것 같다. 그는 세종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데 뛰어났다고 주장하면서 그 점을 꽤 자세히 설명했다. 벼슬이 낮은 관리라도 능력이 검증되기만 하면, 세종은 그를 대번에 발탁해서 높은 자리(‘卿宰[경재]’)에 앉혔다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관리가 평범한 인물이라고 판단하면 평생 낮은 자리에 뒀단다. 이처럼 능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한 덕분에 그때는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주장이었다. 세종은 이른바 연공서열 따위를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수원은 세종의 인재 등용법을 함부로 따를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러한가? “임금이 세종처럼 현명하다면 모르겠으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관제에 격식이 사라진다. 또, 이리저리 변통하는 틈을 이용해서 사적 이익(‘私意[사의]’)을 추구하는 사람이 나오기 때문이다.”([우서], 제4권, ‘고적(考績)의 사의[事宜]를 논함’) 인사권자가 세종처럼 현명하지 못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인데, 설득력이 있다.

세종에게도 물론 인재 등용에 관한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 유수원은 그 점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근무평가가 좋은 지방관만 중앙관직(내직)으로 불러들인다는 원칙이었다. 근무 성적이 좋은 지방관은 임기를 다 채웠고(‘瓜滿[과만]’), 그런 다음에는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 원칙을 누구나 알기 때문에 지방관들은 최선을 다해서 높은 성적을 받고자 했다([우서], 제4권, 위와 같음).

세종 이후에는 분위기가 싹 바뀌어, 지방관으로 임기를 채우는 이가 드물었다. 근무평가도 공정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는 문벌이 있는 지방관은 으레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 국가 재정이 나빠져 중앙관리는 급료를 제대로 못 받았다. 중앙이든 지방이든 관청의 기강이 무너지고 말았다.

“노비가 원하면 돈 받고 풀어주라” 명하다


▎세종대왕의 유물로 추정되는 익선관 (翼善冠, 왕이 집무할 때 쓰던 모자).
세종은 백성을 아꼈는데, 특히 최하층 신분인 노비를 힘껏 돌봤다. 유수원은 그 점을 강조했다. 노비의 가엾은 처지를 걱정한 세종의 마음은 유수원이 소개한 [하교(下敎)]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한 마디로 노비를 죽이거나 혹독하게 때리는 주인을 처벌하라는 내용이었다. 또, 노비에게 신공(身貢)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도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훗날에는 기득권층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러한 조항을 무력화했다고 한다. 유수원은 그런 사실을 지적하며 세태를 한탄했다.

또, 세종은 노비가 원하면 주인은 돈을 받고 풀어주라고 명했다(‘贖良[속량]’). 아무리 건장한 종이라도 그 가격은 은(‘백금’) 6냥(兩, 225g, 현재 가치로 약 27만원)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유수원은 충실히 전했다. 후세에 사회적 기강이 무너져 세종이 정한 훌륭한 법이 무너진 것은 유감이었다며, 유수원은 이렇게 탄식했다.

“세종이 정한 대로 노비를 풀어주는 법규를 바로잡는다면 어떠할까. 무식한 주인이 감히 법과 이치를 어긴 채 가혹한 수탈을 하지는 못하게 말이다.”([우서], 제7권, ‘노비의 공역(貢役)을 논의함’) 유수원과 이익 등은 노비 제도를 반대했다. 만약 세종이 정한 법규대로만 집행했더라면 얼마 안 가서 노비가 사라진 세상이 올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수원은 못내 안타까워했다.

과연 세종은 사회적 약자를 염두에 둔 왕이었다. 다산 정약용도 왕의 그러한 마음 씀씀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약용은 특히 형법에 밝았는데, 세종 12년(1430)에 왕이 내린 [하교]를 읽고 특별히 다음의 두 가지 점에 주목했다.

첫째, 세종이 채찍으로 죄수의 등을 때리지 말라고 금지한 사실이었다. 내장 기관(‘五臓[오장]’)이 등과 밀접하므로 자칫하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고 해 왕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면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둘째, 노약자는 옥에 가둘 수도 없고 고문도 절대로 금지하라고 지시했다. 세종은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의 노약자는 옥에 가두지 말라고 했고, 80세 이상과 10세 이하는 고문을 금지한다고 했다([목민심서], ‘형전[刑典] 6조’) 모든 통치자가 세종처럼 사회적 약자를 정성껏 배려한다면 어느 정도는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정약용은 조선의 경제 문제도 깊이 연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의 통념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는 세종 시대에는 연분 9등 전분 6등의 제도가 시행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알다시피 고려 말에는 농경지를 토질에 따라 세 등급으로 구분했고, 그것을 세종은 다시 5등급으로 세분하였다. 말년에는 6등급으로 바꿨다. 이른바 전분 6등이었다.

그때 토지제도를 전담한 기관은 상정도감이요, 책임자는 수양대군(세조)이었다. 정약용의 분석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의논만 했을 뿐 실지로 시행하지는 못했다”([다산시문집], 제12권, ‘전결법[田結法]에 대한 변증’).

훗날 중국 사신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를 봐도 경작지를 6등급으로 정하는 일은 의논만 했다는 주장이 옳아 보인다. 정약용은 그런 증거를 제시하고, 효종4년(1653)에야 전분 6등의 제도가 시행된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토지를 여러 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제도라고 말하였다. 토지제도를 바로 잡으려면 모든 경작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량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했다.

후세는 세종이 추구한 세제(공법)개혁을 높이 평가한다. 모두가 연분 9등과 전분 6등 제도의 합리성을 극구 칭찬하는데, 정약용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그는 경작지 면적을 정확히 잰 다음에 수확량에 따라 세금의 높낮이를 조절하면 된다고 했다.

세종과 정약용의 관점은 이렇게 다른데, 과연 누가 옳았는가. 15세기라면 세종이 옳았고, 19세기라면 정약용이 옳다고 생각한다. 15세기에는 같은 면적의 농경지라도 토질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크게 났다. 그런 이유로 일정한 수확량을 기준으로 장부를 만드는 것이 실용적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농업 생산성이 조금씩 향상된 결과, 면적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길 수 있었다. 짐작하건대 정약용은 15세기의 농업 여건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 같다.

정약용, 시대 차이 감안 않고 세종의 세법 비판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세종대왕 영정. / 사진:문화체육관광부
보통은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학예를 장려해 큰 성과를 얻었다고 말한다. 정조도 그렇게 믿고 규장각까지 뒀다. 그런데 유수원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세종의 성리학 진흥은 효과가 없었다고 평했다. 그의 주장을 조금 자세히 알아보자. 고려 말부터 정도전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이 대두해 성리학(‘理學[이학]’)을 옹호했다. 유수원은 정도전 등의 학문을 “앵무선(鸚鵡禪)”이라며 실속이 없었다고 깎아내렸다. 그로 인해 세상의 도리(世道)가 무너지고 문학도 수준이 낮아졌다고 봤다.

바로 그와 같은 폐단을 알았기에 세종은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불행히도 큰선비(‘大儒[대유]’)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해서 왕은 신하들에게 다달이 ‘월과(月課)’라는 글쓰기 숙제를 내는 데 그쳤다고 봤다. 이 말끝에 유수원은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전에 없었던 일을 새로 만들어내면(월과를 의미), 실속이 없는 지경이 되고야 만다”고 혹평했다. 월과 제도는 불필요하였다는 지적이다([우서], 제10권, ‘규제를 변통하는 이해[利害]를 논의함’).

유수원의 평가는 너무 심하지 않았던가. 훗날 김굉필·정여창·조광조 등이 나타나 성리학의 정수를 알게 된 것이 과연 우연한 일이었는가. 세종이 집현전에서 훌륭한 학자를 길러냈고, 독서당(뒷날의 호당) 제도까지 만들어 학문을 권장한 효과가 아니었던가. 또, 월과가 형식에 흐른 나머지 폐단이 심해졌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세종에게 책임을 전가할 일은 아니었다.

유수원의 짐작과는 달리 세종 때는 학문의 열기가 높았다. 그런 사실을 정확히 알았던 이가 윤휴였다. 그는 세종이 날마다 네 번씩이나 경연에 참석한 날이 많았다고 하면서 왕의 학구열에 감탄했다. 나이가 든 다음에도 세종은 경연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윤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세종은 하루라도 학문에 종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한 가지 생각도 학문을 바탕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과 도(道)를 구하는 정성이 여러 임금보다 탁월하셨고 후손에게 모범을 남긴 것이 이러하셨습니다.”([백호전서], 제11권, ‘경연을 중지하지 말기를 요청한 차자[請勿停講箚(청물정강차)] 1월 16일’)

이러한 주장은 사실에 정확히 부합한다. 세종처럼 학문에 힘쓴 왕은 천고에 없었다. 왕은 역사 공부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 점을 옳게 지적한 이도 윤휴였다. 특히 그는 [자치통감훈의]의 수준이 높다고 말했다. 이 책은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고도 하는데, 세종이 신하들에게 명해 고금의 주석을 종합한 다음에 손수 ‘재정(裁定, 판단해서 결정함)’한 것이었다. 윤휴는 이렇게 말했다. “고금의 주석서 중에 이 책보다 더 훌륭한 책은 없습니다.”

그런 의견에 허적도 동의했다. 그는 중국에서 나온 여러 주석서를 검토해본 결과 [자치통감훈의]처럼 훌륭한 책이 없었다고 평했다([백호전서], 제13권, ‘경연강설[經筵講說], 을묘년[1675, 숙종1] 1월 10일’). 유수원의 비판은 사실을 심하게 왜곡한 것이요, 윤휴와 허적의 견해가 실정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훈민정음 창제 주역에 대한 이익의 오판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 앞쪽으로 정자각이 있고 왼편에 수라간이 있다. / 사진:이영관
세종의 시대를 빛낸 또 다른 쾌거는 향악과 아악 등 음악의 정리였다. 박연의 역할이 컸는데, 그가 한 일에 관해서는 찬반양론이 팽팽했다. 정조는 박연의 역량을 호평했다. 하지만 이익은 부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박연이 정한 ‘황종률’(서양 음악의 C에 해당)을 의심했다. [성호사설](제5권)에 ‘박연악률(朴堧樂律)’이라는 글까지 남길 정도였다.

이익이 문제로 삼은 것은 무엇인가. 그는 박연이 세상을 속였다고 판단했는데, 이른바 황종률이란 박연이 적당히 짐작해서 정한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박연이 해주에서 기장을 구해서 황종률을 만드는 데 썼다고 하는데, 그런 기장이 존재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그가 남양에서 캐냈다는 옥도 사실과 큰 거리가 있다고 봤다. 조선 초기 음악의 대가 성현(成俔)도 “박연이 발견했다는 이른바 경석은 흙 부스러기(土苴)였다”라고 평가했다. 이익은 그 말을 잊지 않았다.

훈민정음에 관해서는 호평이 쏟아졌다. 이덕무는 세종의 천품을 높이 기리며 왕이 심혈을 기울여 한글을 직접 창제했다고 말했다. 또, 한글 덕분에 한자의 음운이 바로잡혔다고 했다. 문제는 그 후 수백 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발생했다. 선비의 풍습(‘士風’)이 나빠져 글자(字)도 와전되고 한자 음(音)도 틀리게 됐다는 것이다([청장관전서], 제20권). 이덕무처럼 한글 창제의 의의를 온전히 이해한 선비는 드물었다.

이익도 훈민정음을 호평했다. 온갖 소리를 옮겨 적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누가 한글을 창제했는가’ 하는 점은 생각이 달랐다. 이익은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의 주역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세종이 궁중에 관청을 만들어서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에게 한글의 ‘찬정(撰定, 짓고 정함)’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성호사설], 제16권, ‘한글[諺文(언문)]’).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잘못된 생각이다. 당대의 지식수준으로 미뤄 이익의 오판을 심하게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특이하게도 이익은 명나라 학사 황찬(黃鑽)의 역할도 재검토했다. 그가 내린 결론이 흥미로웠다. 성삼문 등이 13차례나 요동을 왕복한 것은 한글 창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물론 이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그런데 이익은 황찬이 조선 측에 전해준 것은 몽골 문자뿐이었다고 짐작했다.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역사 자료를 검토해보면 황찬은 한자의 정확한 음운을 일러줬고, 음운에 관한 이론적 설명도 제공했다.

세종 시대의 또 다른 업적은 출판과 인쇄술이었다. 정조는 그 점을 본받으려고 성대중과 이덕무에게 [어정팔자백선(御定八子百選)]이며 [국조보감]을 인쇄하라고 명령했다. 이덕무는 그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조선의 각공(刻工, 새김질 담당), 탑공(搨工, 도안 담당), 균공(勻工, 인쇄 담당인 듯)이 우수하다고 했다.

국가가 정성껏 기르지 않고 인재 찾는 건 연목구어


▎자격루.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이 제작했다. / 사진:이영관
이덕무는 세종 때의 박연과 장영실 같은 인재를 얻을 수 있다면 인쇄 기술이 더욱 향상되리라고 전망했다([청장관전서], 제61권, ‘청나라 각본[刻本]’). 옳은 판단이겠지만, 박연과 장영실은 저절로 생긴 인재가 아니라, 세종이 애써 키운 결과였다. 국가가 인재를 정성껏 기르지 않으면,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마찬가지로 도무지 성사될 수 없는 일이었다.

국방에도 관심이 많았던 정약용은 세종이 변방에 군사기지를 설치한 일을 언급하며 높이 평가했다. 세종이 4군과 6진을 경영한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정약용은 그 점을 고심한 끝에, 왕이 두만강을 방어선으로 삼으려고 한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후세는 그 방어선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정약용은 그 점을 지적하며 서글퍼했다. 그는 이미 폐지된 4군을 꼭 회복하자고 주장했는데 누구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다산시문집], 제12권, ‘폐사군론[廢四群論]’).

장차 요동 지역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정약용은 고심했다. 그는 세종과 그 아들 세조도 끝내 요동을 수복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로, 항상 전쟁의 위협이 있다. 그런 이유로 성실하지만 온순한 한국(조선)인이 요동을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것이 정약용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그는 세종이 미처 요동을 공략하지 못한 까닭도 알아냈다. 명나라가 이미 북경에 도읍한 뒤여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차지할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는 추론이었다. 요동 땅은 척박해서 그 자체로는 별 소득이 없었다. 따라서 세종처럼 현명한 임금이 무리수를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해석하기도 했다([다산시문집], 제12권, ‘요동론[遼東論]’).

몇 가지 이견은 여기저기서 확인됐으나, 조선의 석학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세종의 업적을 호평했다. 특히 국방·문교·재정·복지·사법 및 인사 행정의 분야에 후한 점수를 줬다. 세종은 조선의 28명의 임금 가운데서 으뜸이었다. 아마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현명한 왕이었을 것이다. 그가 우리 왕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우리는 이제 그의 유산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궁리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세종의 업적을 기꺼이 칭찬하지만, 아직도 논의가 충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듣기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관해서는 8만 권도 넘는 책이 간행됐다고 한다. 그럼 세종에 관한 책은 몇 권이나 되는가. 오늘부터라도 각 분야의 전문가는 물론이요, 시민 여러분도 각자의 처지에서 세종 연구를 시작하기를 권하고 싶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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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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