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20)] 몽골 ‘쿠빌라이의 꿈’ 실현한 명나라 영락제 

정화의 대원정 ‘더 큰 천하’ 바닷길 열다 

30년간 7차례 출정, 동아프리카까지 나가 무역 항로 개척
닫힌 중화 벗어나 ‘열린 제국’ 지향, 북경으로 수도 이전도


▎정화의 출생지인 쿤밍에 조성된 정화공원의 정화상.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은 서로 다른 성격의 과업이다. 혼란된 상태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창업자에게는 구조와 형태를 임의로 결정할 여지가 많다. 빈 공간에 새 건물을 세우는 건축가처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공학적 구조가 제대로 갖춰져야 하지만, 그 한도 내에서 많은 것을 선택할 여지가 있다.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종전의 상태에 비해서는 어떤 건물이라도 대다수 신민(臣民)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워진 국가를 물려받은 수성의 군주는 건축가가 아닌 관리자의 입장이다. 관리자는 건물을 크게 바꾸기 어렵다. 어떤 변화에도 수혜자와 피해자가 함께 따르는데, 수혜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 아니면 피해자의 반대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리고 재정을 비롯한 모든 자원도 용도가 정해져 있어서 임의로 활용할 여지가 적다.

창업자와 뜻이 달랐던 당 태종과 명 영락제


▎남경 부근 용강 조선소의 드라이도크 유적. / 사진:바이두
규모 있는 왕조는 창업이 한 세대에 끝나지 않는다. 첫 세대가 기초를 닦고 다음 세대가 건물을 올리는 셈이다. 한(漢)나라는 고조(전 206~전 195)의 증손인 무제(전141~전87)가 창업을 완수했고, 당(唐)나라는 고조(618~626)를 이은 태종(626~649)이 창업을 끝냈다. 조선의 창업을 마무리한 것도 태조(1392~1398)의 손자 세종(1418~1450)이었다. 명(明)나라는 홍무제(洪武帝, 1368~1398)가 30년간 재위했지만 창업을 완성한 것은 아들 영락제(永樂帝, 1402~1424)였다. (중국 제왕의 호칭은 묘호(廟號)로 적는 것이 관례이지만 홍무제와 영락제는 ‘태조’, ‘성조’ 대신 연호(年號)로 적는 일이 많다.)

당 태종, 조선 태종과 영락제가 모두 초대 창업자인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후계자 자리를 쟁취한 것은 창업의 구상을 따로 가졌기 때문이었다. 초대 창업자는 중앙권력을 세우기에 바빴던 반면 그 후계자들은 보다 적극적인 건국방략을 제시했고, 그들의 권력투쟁 승리에도 그 방략의 타당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명나라가 원(元)나라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에는 ‘열린’ 몽골제국과 ‘닫힌’ 중화제국의 양면성이 있었다. 홍무제가 넘겨받고자 한 것은 중화제국이었다. 양자강 지역의 반란세력으로 출발해 남방 진신(縉紳) 세력의 지지로 원나라를 타도한 홍무제에게는 중국에 대한 지배력의 탈취가 목표였을 뿐, 몽골제국의 서방 관계는 관심 밖이었다.

홍무제는 30년간의 통치를 통해 황제전제(皇帝專制)의 체제를 구축하고 그 체제가 자손에게 그대로 전해지기 바라는 뜻에서 장손 윤문(允炆)에게 제위를 넘겼다. 영락제가 조카에게서 제위를 빼앗은 데는 개인의 권력욕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국의 발전 방향에 대해 홍무제와 다른 구상을 가졌던 사실도 그가 추진한 여러 가지 정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락제가 새로 찾은 길의 첫 번째 지표는 남경에서 북경으로의 천도였다. 남경은 홍무제가 초년부터(1358) 응천부(應天府)라는 이름으로 근거지로 삼은 곳이었고 삼국시대 오(吳)나라 이래 여러 남방 왕조가 수도로 삼은 곳이었다. 북경은 예전 한족 왕조들이 수도를 두던 황하 유역보다 훨씬 북쪽으로, 정복 왕조인 금(金)나라와 원나라가 수도를 둔 곳이었다.

영락제가 1370년 연왕(燕王)에 책봉되어 20세가 된 1380년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활동했기 때문에 천도의 이유를 권력 장악을 위한 영락제의 이기적 선택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토머스 바필드는 [The Perilous Frontier 위태로운 변경] 234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족 왕조로서 북방 변경 가까이에 수도를 둔다는 것은 몽골 문제를 불필요하게 키우는 길이었다. 남경에 수도를 두었다면 유목민의 침입이 귀찮기는 해도 먼 곳의 문제이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정이 북경에 있기 때문에 유목민의 공격 하나하나가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영락제의 북경 선택은 이 장기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파미르고원 경계로 동·서양 역사 따로 전개


▎중국이 2005년 정화함대의 원정 600주년을 기념해 건조한 명나라 함대 선적모형.
수도 위치가 제국의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너무 편협한 해석으로 보인다. 서북방 유목민과의 관계는 중화제국의 안정성을 좌우하는 중대한 요소였다. 동남방에 수도를 두는 것은 북중국을 완충지대로 내놓는 소극적 정책이었다. 북경에 조정을 둠으로써 유목민의 공격 하나하나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황하 이북의 북중국이 과연 1644년까지 명나라 강토로 남아 있었을지 확언하기 어렵다.

영락제가 일찍부터 원나라의 옛 중심부에 자리 잡고 북방으로 옮겨간 원나라 잔여세력과 다년간 대결하면서 두 가지 배운 것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북방세력이 중화제국에 얼마나 큰 잠재적 위협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나라가 추구한 세계제국의 의미다. 몽골제국을 통해 동양과 서양 사이의 거리가 크게 좁혀져 있던 사실을 그가 인식하지 않았다면 또 하나의 중대한 사업, 정화(鄭和)의 함대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의 지붕’은 곧 ‘유라시아의 지붕’이었다.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중세기까지 따로 전개되었다는 생각은 들여다볼수록 굳어진다. 고원 북쪽으로는 인구가 희박한 사막과 초원, 동토 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동서 간의 교통이 어려웠다. ‘실크로드’의 의미는 그 장벽을 뚫고 약간의 교통이라도 이뤄졌다는 사실에 있다. 실크로드의 실제 교통량은 어느 시대에도 다른 문명권들 사이의 교통량보다 적었다.

몽골제국의 활동이 동서 간의 거리를 좁혔다고 하지만 이전 시기와 비교해서 좁혀진 것일 뿐, ‘문명의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13~14세기에도 동-서양 사이를 오간 사람들은 경계지역 출신이 압도적 다수였다. 동-서 문명권의 중심부는 그리 크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제국의 내부 균열에 따라 바로 길이 막히게 되었다.

파미르고원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 아열대 지대를 뚫고 해로가 펼쳐져 있었는데, 이 해로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큰 규모의 제국으로 조직되지 않고 작은 세력들로 갈라져 있었다. 이 해로의 장거리 항해를 위해서는 여러 경유지 현지세력의 양해와 협조가 필요했다. 원나라와 일-칸국 사절단의 편도 여행에 2~3년씩 걸렸는데, 당시의 항해기술에 비추어 매우 긴 시간이다. 통과할 때마다 현지세력과 교섭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부-루고드의 [Before European Hegemony 유럽 패권 이전] 306~307쪽에는 851년경으로 추정되는 한 페르시아 상인 술라이만(Sulaiman al-Tajir)의 중국 여행기록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페르시아만 입구에서 인도 남단까지 1개월, 말라야반도 북부 해안까지 다시 1개월, 말라카해협을 지나 티유마섬까지 10일, 그곳에서 중국의 광동까지 2개월 걸렸다고 한다. (윌리엄 번스틴은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교역으로 빚어진 세계] 81~82쪽에 술라이만의 일정을 소개하면서 항해 기간은 4개월 남짓에 불과하지만 항구에 체류한 시간을 포함하면 1년 넘게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붙였다. 이 추측은 조금 지나치게 길게 잡은 것 같다.)

11세기 사라진 중국~페르시아 직항로 수수께끼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초상.
술라이만은 9세기 중엽에 페르시아의 무스카트에서 중국의 광동까지 여행한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11세기 이후 여행기록이 늘어났을 때는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직항로가 이용되지 않고 있었다. 스튜어트 고든은 [When Asia was the World 아시아가 곧 세계였던 시절](2008)에서 흥미로운 여행의 주인공이던 근대 이전의 인물 몇 명의 행적을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인도와 이집트 사이에서 활동한 유태인 상인 아브라함 빈 이주(Abraham Ben Yiju)였다. 빈 이주가 인도 서해안에서 12세기 전반기의 수십 년 동안 활동하면서 남긴 상당량의 기록 중에 중국 선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실을 고든은 주목한다. (118쪽)

이것은 차우두리에게도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이 시기에(9세기에) 중동지역에서 중국까지 곧바로 가는 항해 노선이 있었다는 사실은 후세의 교역이 말라바르 해안과 말라카해협을 매듭으로 한 짧은 항로들을 묶어서 운영되던 관행에 대비되는 인도양 상업구조의 한 역사적 수수께끼다.”([Trade and Civilization in the Indian Ocean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 49쪽)

차우두리는 앞 시기 직항로의 존재를 수수께끼로 보지만 내게는 뒤 시기 직항로의 실종이 진짜 수수께끼다.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중국과 페르시아 양쪽 모두 경제도 성장하고 조선술과 항해술도 발전했다. 그런데 9세기에 이용되던 직항로가 11세기에는 이용되지 않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몇 권의 책을 들춰봐도 이 수수께끼는 잘 풀리지 않는다. 떠오르는 짐작 하나는 이 시기에 동남아시아 지역의 산업·경제와 정치조직이 큰 발전을 보았으리라는 것이다. 9세기까지는 이 지역의 자체 시장이 빈약하고 선박의 통행을 규제할 무력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나 11세기경까지는 동서 양 방면으로 수출할 자체 상품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양 방면의 상품을 수입하는 시장도 자라남으로써 ‘중계무역’의 기능이 자라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쿠빌라이는 남송 평정(1276) 직후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방면으로 군대를 보냈다. 지금의 미얀마에 있던 버간(Pagan)왕국에 1277년·1283년·1287년에 출병했고 베트남에 있던 참파(Champa, 占城)와 다이비엣(Dai Viet, 大越)을 상대로 1282년·1285년·1287년에 출병했다. 이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보다는 손실이 많았고, 지역 세력에게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았을 뿐, 실제 통제력은 확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다이비엣의 경우 1258년의 정벌로 조공 관계를 맺고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세로 있다가 참파 정벌의 협조 요구를 거부하면서 1284년부터 다시 정벌 대상이 되었다.

동남아시아는 중국 왕조들이 명목상의 종주권에 만족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던 지역이다. 그런데 쿠빌라이가 이 지역 정벌에 큰 힘을 쏟은 데는 남중국해 해로의 확보에 뜻이 있었을 것으로 많은 학자가 추측한다. 쿠빌라이의 대칸 즉위 이후 4칸국의 분열에 따라 서방의 육로 교통이 어려워졌다. 육로가 막힌 원나라에 해로를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그를 위해 해로의 기항지에 대한 통제력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추측이다.

‘열린 시스템’과 ‘닫힌 시스템’ 사이의 선택


▎중국 베이징의 고궁(故宮). / 사진:바이두
해로 확보의 노력은 1293년 자바 정벌의 참혹한 실패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 정벌의 실패 후 원나라와 일-칸국 사이의 해상교통은 불편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로부터 천하를 넘겨받을 때, 그 천하는 송나라 이전의 천하가 아니었다. 서방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중국사회에 널리 퍼져 종래의 ‘천하’가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이 알려져 있었다. 문명 초기부터 온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해 온 ‘천하’를 이제 ‘중국(中國)’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은 중국문명의 중심부만을 가리키던 원래의 뜻이 아니라 다른 문명권과 대비되는 중국문명권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원나라 황제는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더 큰 천하의 통치자를 지향했다. 원나라로부터 ‘천하’를 넘겨받는 명나라 입장에서 원나라 이전의 천하, 즉 중국만을 넘겨받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넓혀진 천하를 넘겨받으려는 뜻을 가질 수 있었다. 열린 시스템과 닫힌 시스템 사이의 선택이라는 쿠빌라이의 과제를 명나라 창업자들도 물려받은 것이다. 홍무제는 30년 재위 기간을 통해 더 넓은 천하를 향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영락제는 즉위 직후부터 서방으로 함대를 보내는 거대한 사업을 추진했다.

영락제의 정화(鄭和) 함대는 해로 확보라는 100여 년 전 쿠빌라이의 꿈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자바 원정에는 2~3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지만 함대는 빈약했다. 큰 배가 약 30m 길이로 수십 명씩 태운 것으로 추정된다. 정화 함대의 주력인 보선(寶船)은 120m가 넘는 길이로 한 척 한 척이 하나의 병영이었다. 쿠빌라이의 함대가 수송 기능에 그친 반면 정화 함대는 장기간의 원정을 위한 온갖 기능을 갖춘 하나의 군사기지였다. 무기와 생활용품의 생산과 관리를 위한 각종 공방(工房)이 갖춰져 있었고 200명 가까운 의원(醫員)이 탑승했으며, 심지어 채소를 경작하는 채마밭까지 갖추고 있었다.

정화 함대보다 100여 년 후 세계 일주에 성공한 마젤란의 항해(1519~1522)는 배 5척에 270명 인원으로 출발했다가 그중 18명이 배 한 척으로 돌아왔다.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의 항해를 큰 위업으로 여겨 온 통념에 비겨 본다면 그 100배 규모의 정화 함대는 불가사의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정화 함대의 업적을 엄청나게 부풀려 상상하는 풍조도 일어난다. (루이즈 리베이즈의 [When China Ruled the Sea 중국이 바다를 지배한 시대](1994)를 많이 참조했는데, 이 책에도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소개할 수 있는 범위로 인용 내용을 제한하려 애썼지만 의문의 여지가 남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보선의 크기다. 120m가 넘는 길이의 항해 가능한 목선의 제작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근년 용강(龍江)조선소의 발굴로 꽤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제작된 가장 큰 목선은 1765년에 진수된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호로 알려져 있는데, 길이가 70m에 못 미쳤다.)

정화 함대가 원나라 ‘세계제국’의 꿈을 이어받은 사실은 그 사령관이 색목인의 후예인 환관이었다는 데서부터 나타난다. 정화 외에도 함대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 중에 색목인 출신과 환관이 여러 명 눈에 띈다. 큰 국력을 기울인 이 사업을 정규 관료가 아닌 환관들, 그리고 서방 종교와 언어에 능통한 색목인 출신들에게 영락제가 맡긴 사실에서도 그가 ‘열린 제국’을 지향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대항해의 주목적은 이슬람 세계와 접촉


▎쿠빌라이의 자바 정벌대 상상도. / 사진:위키피디아
명나라 함대는 일곱 차례 남양(남중국해)을 거쳐 서양(인도양)으로 출동했다.

제1차: 1405년 7월에서 1407년 10월까지. 참파·자바·수마트라·말라카·실론을 거쳐 인도 서해안의 칼리쿠트(Calicut, 古里)에 제일 길게 체류하고 돌아왔다. 정화 함대가 무력 사용을 극력 절제한 점이 이 항해에서부터 눈에 띈다. 자바의 마자파힛(Majapahit, 麻喏八歇)에서 내전에 휘말려 대원 100여 명이 살해된 일이 있는데, 가해 세력에서 오해였다며 사죄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해적 진조의(陳祖義) 일당이 장악하고 있던 팔렘방을 나가는 길에는 피해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소탕한 일을 보면 무력 사용에 앞서 상황 파악에 매우 신중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1407년 말에서 1409년 초까지. 제1차 항해에서 데려온 조공 사절들을 돌려보내는 이 항해에 정화 자신은 출동하지 않았다. 1년 남짓 걸린 이 항해는 충분히 확보된 정보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기간에 다녀올 수 있도록 기획되고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

제3차: 1409년 10월에서 1411년 7월까지. 1~2차 항해와 같은 해역에서 활동했지만 기항지가 크게 늘어났다. 윤곽만 파악해 놓았던 이 지역에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말라카(满剌加)를 샴(暹羅)의 영향권에서 독립시킨 것이다. 이 항해 중에는 적극적인 군사행동도 있었다. 실론(錫蘭)에서 현지의 5만 병력과 맞서다가 왕도를 급습해서 왕과 실력자를 포로로 잡은 일이다.

제4차: 1413년 말에서 1415년 8월까지. 이 항해는 종래의 해역을 넘어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에 이르렀다. 인도 서해안에서 호르무즈까지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데 25일밖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항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충분했던 것 같다. 항해 준비 중 정화가 중국 최대의 모스크이던 서안(西安) 청진사(淸眞寺)를 찾아가 항해에 동행할 몇 사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 항해의 중요한 목적이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5차: 1417년 가을에서 1419년 7월까지. 호르무즈를 거쳐 홍해 입구의 아덴을 방문하고 동아프리카 해안을 적도 부근까지 남하했다. 인도양 각지의 사정과 해류·풍향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빠른 일정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2차 항해와 마찬가지로 큰 군사행동이 없었다.

제6차: 1421년 3월에서 1422년 7월까지. 비교적 짧은 항해 기간이지만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다녀온 것으로 보아 원활한 항해를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춰졌던 것으로 보인다. 리베이즈는 [중국이 바다를 지배한 시대] 151쪽에서 정화가 북경 천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도중에 함대 일부를 이끌고 먼저 돌아왔으리라는 추측을 내놓았지만 근거는 확실치 않다.

제6차 항해까지는 항해 사이의 간격이 길어야 2년가량이었는데, 1422년 이후 항해가 여러 해 중단되었다가 근 10년 후에야 제7차 항해에 나서게 된다. 1424년 7월 영락제의 죽음이 물론 이 지연의 직접 원인이었지만, 영락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함대의 더 이상 출동이 어렵게 되어가고 있었다.

정화 함대와 함께 영락제가 큰 힘을 쏟은 사업이 북경 천도였다. 명나라 건국의 주축인 남방 진신 세력은 당연히 천도에 반대했다. 혜종(惠宗, 1398~1402)을 옹위하던 이 세력이 영락제의 등극으로 다소 풀이 꺾였지만 여전히 명나라 지배집단의 주축이었다.

홍무제가 1358년에 ‘응천(應天)’의 뜻을 내걸고 근거지로 삼은 남경은 중국 경제의 중심이 된 남중국의 중심지였다. 반면 북경은 정복 왕조인 금나라와 원나라가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한족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변방이었다. 그런데도 영락제가 ‘순천(順天)’의 이름을 내걸고 북경을 제2의 황도로 삼은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는 통설과 같이 자신이 연왕(燕王)으로 기반을 닦은 곳에서 권력 관리를 손쉽게 하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명나라가 종래의 한족 왕조와 달리 원나라 체제를 이어받으려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후자의 취지는 기존 논설에서 잘 해명되어 있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으므로 하나의 가설로 남겨두고 넘어간다.

북경에 거대한 황궁 짓고 1421년 정식 천도


▎홍무제의 능원인 효릉(孝陵)의 코끼리 석상을 보면 명나라 사람들에게 서방이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진 것 같다. / 사진:바이두
영락제는 즉위 후 ‘순천부’에 행재(行在, 임시 황도)의 명목으로 머물면서 거대한 황궁을 지은 다음 1421년 초에 정식 천도를 거행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큰불로 중요한 건물들이 타버리고 3년 후 영락제가 죽을 때까지 복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락제의 노선에 의문이 크게 일어났을 뿐 아니라 재정에도 타격이 커서 남방의 항해 활동을 재개하기 어려운 사정이 되었다.

정화 함대의 탑승자들이 남긴 몇 가지 기록 중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이 가장 널리 참조된다. 4차·6차·7차 항해에 통역으로 참가했던 마환은 항해 당시부터 기록을 시작한 것으로 볼 때 기록 작성의 공식 책임을 가졌던 것 같다.

고든은 [아시아가 곧 세계였던 시절]의 제7장(117~135쪽)에서 마환의 기록을 토대로 정화 함대의 활동을 살펴보는데, 교역을 진행하는 절차가 흥미롭다.

“왕의 대표자와 함대의 교역 주무관이 먼저 비단 등 중국 상품을 검사하고 가격을 정할 날짜를 잡는다. 그 날이 되면 모두 손을 맞잡고 ‘가격이 높든 낮든 누구도 그 가격을 거부하거나 바꾸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다음에는 도시의 상인들이 진주와 산호 등 귀중한 상품을 가져온다. 그 가격은 ‘그날로 정해지지 않는다. 빨리 하면 한 달, 천천히 하면 두 달이나 세 달 걸린다.’ 그 이후 함대의 교역은 그렇게 정해진 가격에 따라 행해진다. 함대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가격 협상에 몇 달씩 걸린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가격과 조건을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함대 전체가 대기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함대가 나가는 길에 들러서 협상을 시작시킨 다음 소규모 교역단을 상품과 함께 남겨두고 다음 목적지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볼일을 끝낸 교역단을 싣고 귀국했을 것이다. 몇 해 후 다시 함대가 올 때는 꼭 변경이 필요한 사항 외에는 전번의 협상 내용을 준용했을 것이다.

이 협상 방법은 필립 커틴이 [Cross-Cultural Trade in World History 세계사 속의 문화 간 교역](1984) 132~133쪽에서 소개하는 ‘집단협상’과 흡사하다. 15세기를 전후해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서 시행된 관례로 커틴이 보는 이 방법은 입항한 배의 선장이 화물을 선적한 상인들을 대표해서 항구의 상인 대표들과 일괄해서 가격을 협상하는 것이다.

커틴은 이 협상 방법을 그로부터 100년 후 인도양에 나타난 포르투갈인의 태도와 대비하여 ‘자유무역’ 원리로 해석한다. 교역 중심지의 현지세력이 방문하는 모든 교역자의 자유롭고 공평한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장기적 이득을 추구한 것이다. 정화 함대는 무력 사용을 절제하면서 현지 관행에 적응하는 방침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정화 함대의 활동이 명나라에 어떤 이득을 가져왔을까? 서방세계와의 교통로 확보가 장기적으로는 큰 가능성을 가진 사업이었을지 몰라도, 함대가 당장 가져온 것은 기린·사자 등 신기한 동물과 진주·보석 등 진귀한 사치품으로 전해진다. 후세에 중국의 대외개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지대물박(地大物博)’을 내세워 교역의 필요성을 부정했거니와, 실제와 부합하는 주장이다. 근대 이전의 중국은 외부로부터 필수품의 수입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성이 강한 하나의 세계였다.

‘민생에 도움되지 않는 사업’ 반발 심했던 해상원정

정화 함대를 통해 기린이 조공품으로 들어왔을 때 이 기이한 모습의 동물이 전설 속의 상서로운 짐승이라 하여 천명의 강림으로 축하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황제가 이를 물리치고 간소한 축하에 그쳤다고 전해진다. 새 황도의 건설과 함께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이라는 정화 함대에 대한 비판을 황제도 의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24년 영락제가 죽은 후 46세 나이로 즉위한 인종(仁宗)은 즉위 조서에서 해상원정의 중단을 선포하고 뒤이어 남경으로 수도를 되돌릴 방침을 발표했다. 순조로운 황위계승이었음에도 중요한 정책들을 뒤집은 것을 보면 그 정책들에 대한 반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26세 나이로 즉위한 선종(宣宗, 1425~1435)이 북경을 수도로 확정하고 정화 함대를 다시 내보냈지만, 인종의 정책을 다시 뒤집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선종은 내실을 중시하는 인종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랐다고 하여 두 황제의 통치를 묶어 ‘인선지치(仁宣之治)’라 부르기도 한다.

선종은 1430년 6월 함대 출동의 조서를 내리고 이에 따라 정화 함대는 이듬해 초 남경에서 출항했지만 정작 중국 해역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였다. 함대는 1433년 7월에 제7차 항해에서 돌아왔는데 정화는 도중에 칼리쿠트에서 죽었다고 한다. 많은 수수께끼가 남는다. 제7차 항해는 설거지를 위한 ‘마지막 항해’로 기획된 것이었을까? 선종 황제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대함대의 파견이 다시 있었을까? 확실한 대답을 직접 찾을 수 없지만, 그 후 명나라의 대외정책, 특히 해금(海禁) 정책의 추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9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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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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