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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7)] ‘죽음도 불사할 각오’로 미국서 돌아온 안창호 

소수정예 비밀결사 ‘신민회’ 국내조직 창건 

김구·이동휘·이승만 등 400여 명 가입, 자유 공화제 실현 목표
동력 잃은 통합 일진회 밀어내고 민족운동 주도권 다시 잡아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는 동지를 규합해 신민회를 만들었다. 일제는 105인 사건 등을 조작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사진은 용수를 쓰고 형무소를 끌려가는 신민회 독립운동가들.
1907년 1월 8일,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출발해 고국으로 향했다. 1902년 미국에 도착한 지 햇수로 5년 만이었다. 25살의 젊은 청년으로 미국에 왔던 안창호는 어느덧 서른이었다. 출항 전날 밤, 부인 이혜련에게 편지를 썼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뒤로 안창호는 집 밖에서 외박할 경우 부인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5년 만의 귀국을 앞둔 그 날 밤, 잠을 이루기 힘들었을 듯하다. 잠 못 들던 그 밤에 안창호는 편지를 쓰며 각오를 다졌다. “나는 내일 도릭(DORIC)이라 하는 배를 타고 동양으로 가겠소이다”는 말로 시작되는 편지는 사뭇 비장한 느낌을 준다.

이어지는 문장은 귀국을 앞둔 그의 각오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슬프다. 내가 오늘 수만 리 대양을 다시 건너 고국에 다녀오려 하는 것은 무슨 좋은 경치를 구경하려 함도 아니요, 좋은 친구를 만나서 놀자 함도 아니라. 오늘 우리나라가 민멸(泯滅)하게 되고, 이천만 동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무엇이든지 내 힘대로 나는 우리나라와 우리 동포에게 도움 있게 할까 하여 다님이라”

위기에 몰린 조국을 구하려면 보통 각오로는 안 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안창호 역시 목숨을 걸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자기 나라를 위하여 죽는 남자도 많고 또 여자도 없지 아니하니, 이때를 당하여 우리가 죽음도 사양치 아닐 터이거늘 어찌 서로 이별하며 고생하는 것을 한탄하리오”라는 구절에 깊숙하게 들어있다.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쓴 편지는 사실상 유언장과 같았다. 고국에 갔다가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바라건대 그대와 우리 집 식구 되는 모든 부인들은 마음 가운데 적은 생각을 버리고 나라를 위하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대는 어머니로서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고 또 아이(판독 불가) 하여 아이에게 심성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라는 마지막 구절은 부인 이혜련에게 전하는 유언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안창호에게는 1905년 3월 29일 태어난 큰아들 안필립이 있었다. 1907년 1월 시점에서 계산해보면 안필립은 태어난 지 겨우 23개월밖에 되지 않은 젖먹이였다. 그런 젖먹이와 함께 24살의 젊은 부인을 남겨 놓고 귀국해야만 했던 그의 마음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젖먹이 아들이 큰 걱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그대는 어머니로서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고 또 아이(판독 불가) 하여 아이에게 심성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라는 말로 대신했다. 아마도 안창호는 이 구절을 쓰면서 솟아오르는 근심·걱정을 꾹꾹 내리눌렀을 듯하다.

젊은 아내와 젖먹이 아들 남겨두고 홀로 귀국


▎서른살의 안창호는 23개월 젖먹이 큰아들(안필립)을 뒤로하고 신민회 국내조직을 위해 미국에서 귀국했다. / 사진:독립기념관
한편 판독 불가한 내용은 ‘아이를 노엽게 하여 아이에게 심성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가 맞을 듯하다. 그 이유는 안창호도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과 함께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는 골로세서 3장 21절의 말씀을 근거로 큰아들을 양육했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6장 4절과 골로세서 3장 21절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교회의 성도들과 골로세서 교회의 성도들에게 당부한 자녀 양육 훈계로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녀 양육의 철칙과 같은 내용이었다. 안창호 역시 이에 따라 큰아들을 양육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귀국하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이 훈계를 다시 당부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경우, 젊은 이혜련이 젖먹이 아들에게 화풀이할까 우려했기 때문일 듯하다. 이런 면에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쓴 편지는 그의 국가관과 더불어 자녀 양육관도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을 횡단한 안창호는 1월 30일 도쿄에 도착했다. 그 기회에 태극학회(太極學會)라는 곳에서 연설했다. 이 학회는 1905년 서북지역 즉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재일유학생들이 도쿄에서 결성한 친목 단체였는데, 태극학보라는 회보를 발간했다. 1907년 2월 24일자 태극학보에 의하면 안창호는 2월 3일 태극학회에서 공립협회 학무원(學務員) 자격으로 1시간 동안 연설했다. 85명의 청중 앞에서 우리 민족이 어쩌다가 보호국이 되었는지, 그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연설했다. 안창호가 우리 국민의 약점을 분석하고 그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청년의 분발과 학생들의 전진방침(前進方針)을 설파하자 수많은 학생이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연설에서도 대중 연설가로서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났던 것이다. 연설 후에 안창호는 공립협회 이름으로 2원을 기부했다.

그날 안창호가 분석한 우리 국민의 약점이 무엇인지는 태극학보에 실려 있지 않다. 하지만 당시 그가 생각했던 우리 국민의 약점은 신민회 취지서(趣旨書)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취지서는 1906년 연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성했는데, 그는 한국인의 최대 약점으로 압제(壓制)와 의뢰(依賴)를 꼽았다.

안창호는 조선 후기 당쟁 때문에 압제와 의뢰라고 하는 한국인 최대의 악습이자 약점이 만성화됐다고 생각했다. 그 압제와 의뢰는 항상 동반하는 악습 중의 악습이었다. 예컨대 상민은 사족에게 의뢰해 동족을 압제하고, 사족은 수령에게 의뢰해 상민을 압제하며, 수령은 권문세가에 의뢰해 사족을 압제하고, 권문세가는 강적(强敵)에게 의뢰해 전국을 압제한다고 했다. 요컨대 조선인은 강자에게 빌붙어 사익을 도모하는 크나큰 악습이 있는데 그 악습은 압제와 의뢰라고 하는 노예근성에서 나왔다는 것이 안창호의 생각이었다. 한국인의 노예근성은 심지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비록 국권(國權)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강적에게 팔아먹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그는 조국을 자유 문명국 또는 자주 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노예근성 타파라고 생각했다. 안창호가 조국을 자유 문명국으로 만들기 위한 비밀결사의 이름을 신민회(新民會)라고 한 것 역시, 기왕의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는 백성을 새롭게 해야만 자유 문명국이 가능하다는 취지에서였다.

태극학회 연설에서도 한국인의 노예근성과 그 때문에 조국이 보호국이 되었다고 진단하고, 그렇기에 조국을 자유 문명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대오각성과 헌신이 절실하다고 강조했을 것이 분명하다. 고국에 귀국한 이후 안창호가 했던 거의 모든 연설의 핵심요지 역시 바로 노예근성 타파와 자유 문명국 건설이었다. 이런 취지의 연설은 당연히 젊은 유학생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였을 것이다.

“자주독립국 첫걸음은 노예근성 타파”


▎안창호는 1907년 2월 22일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양기탁을 만나 신민회 국내조직 창건을 논의했다. 사진은 대한매일신보사 옛터.
그런데 안창호가 일본에 도착하자 정보당국에서는 요시찰 인물이라 판단해 감시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보당국이 1907년 2월 25일자로 작성한 고비(顧秘) 제169호에 의하면 안창호는 수요일인 2월 20일 일본에서 출발해 당일 한양에 도착했는데, 남대문 부근에 숙소를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요일인 24일 전덕기 목사가 시무하는 상동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을 뿐 별다른 동정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창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미국 공립협회의 유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귀국했다고 말할 뿐이라 했다 한다. 이런 정보에 의하면 한양에 도착한 안창호는 별다른 활동 없이 공립협회 활동에만 전념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안창호는 신민회 국내조직을 창건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 속에서 움직였다. 우선 남대문 부근에 숙소를 정한 이유는 그 근처에 있는 상동교회 담임목사 전덕기와 쉽게 접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평일에 전덕기와 만나면 의심받을 염려가 다분했으므로 일요일 예배 때 상동교회를 찾았다. 당시 안창호는 모두가 인정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숙소 근처의 상동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배 참여 후에 전덕기 목사와 만나 자연스럽게 신민회 국내조직의 창건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상동교회에는 통합 일진회에 참여한 구 독립협회 인사들을 제외한 주요 인사들이 출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안창호는 전덕기 목사를 통해 통합 일진회에 참여하지 않은 구 독립협회 인사들과 손쉽게 접선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신민회 국내조직은 상동교회의 구 독립협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창건되기에 이르렀다. 전덕기 목사를 위시하여 이동녕·이동휘·정순만·옥관빈·김구·이승만 등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한편 한양 도착 2일 후인 2월 22일 대한매일신보사를 공식적으로 방문해 공립협회 이름으로 국채보상금 35원을 전달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21일 김광제, 서상돈 등이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300만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000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는 공고문을 내면서 전국화됐다. 당시 한양에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양기탁이 주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2월 22일에 안창호가 대한매일신보사를 방문해 국채보상금 35원을 전달한 것은 별로 의심할 일이 아니었다. 일본 정보당국도 방문을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창호가 신문사를 방문한 것은 사장 양기탁과 함께 신민회 국내조직을 창건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두 사람이 무슨 논의를 했는지는 1912년 12월 20일의 105인 사건 공판 때 양기탁이 했던 진술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대는 신민회에 가입하였는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양기탁은 “안창호가 미국에 있는 신민회의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파견돼 귀국했다면서, 그 회의 위임사항을 실행함에는 자신의 찬성이 없이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며 규칙서(規則書)와 세칙(細則)을 보여줬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의견과 합치되었기에 거기에 찬성하고 신문에 광고를 내주겠다고 말해줬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 협립교회(協立敎會) 일로 신문에 광고를 냈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으므로 이번에는 광고를 하지 않고 직접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다니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비밀스럽게 해서는 일본 당국의 오해를 살 우려가 있으므로 광고를 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했으나 그는 승낙하지 않고 돌아갔으며, 그때 규칙서 1통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교회 예배 참석하며 접선, 일본 감시망 따돌려


▎양기탁은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 국내조직을 조직했으며 총감독(總監督) 자리에 올랐다.
이 진술에 의하면 안창호는 양기탁을 만나 자신을 신민회 전권위원으로 소개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점은 공립협회 이름으로 국채보상금 35원을 전달한 2월 22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안창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공립협회 이름으로 국채보상금을 전달하고, 이어서 사적으로 양기탁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신민회 전권위원으로 소개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안창호가 자신을 신민회 전권위원으로 소개했다는 것은 자신의 비밀 신분을 노출한 것과 같았다. 이렇게 자신의 비밀 신분을 노출한 다음에 신민회 규칙서와 세칙을 보여주었다. 이를 읽어본 양기탁은 ‘나의 의견과 합치되었기에 거기에 찬성하고’라고 했는데 신민회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는 의미일 듯하다.

안창호는 다른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회원들을 가입시켰을 것이다. 즉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시킬 사람을 먼저 결정한 후 무난한 기회에 만난다. 그 뒤 다시 은밀히 접선해 자신을 신민회 전권위원으로 소개하면서 규칙서와 세칙을 읽어보게 한 후 정식회원으로 가입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럴 경우 바로 가입하는 사람도 있고 몇 번의 확인 절차를 거쳐 가입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컨대 양기탁의 경우, 규칙서와 세칙을 읽어본 후 신문에 광고를 내주겠다고 했지만, 안창호는 ‘이전에 협립교회(協立敎會) 일로 신문에 광고를 냈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으므로 이번에는 광고를 하지 않고 직접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다니겠다’며 거절했다. 당시 양기탁이 신문에 광고를 내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신민회를 합법조직으로 창건하자는 뜻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조직으로 구상했으므로 이에 찬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신민회 국내조직 창건에 합의하기는 했지만, 그 신민회를 합법조직으로 할지 아니면 비밀조직으로 할지에 대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그대로 헤어지고 말았다.

“조선민족의 자립 자존 정신을 보급할 목적”


▎신민회는 보호독립을 주장한 통합 일진회와 달리 자유 공화제를 지향했다. 사진은 독립 관련 강연에 모여든 사람들.
그 이후의 일에 대해 양기탁은 “그 후 안창호가 경성에 왔을 때도 그 규칙을 공공연하게 발표하기를 권했는데, 그는 이갑(李甲)과 상의한 후 경찰서에 규칙서를 신고한다면서 내가 이전에 받았던 규칙서를 가지고 갔다. 그 후 진행 상황을 물었으나 공공연한 발표를 보류하고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는지 ‘윤치호와 상의한 다음 실행할 것이니 자네는 관계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고 하여 처음 만남 이후 안창호를 두 차례 더 만났지만 신민회에는 가입하지 않은 듯 진술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 정보당국을 속이기 위한 진술이었다.

105인 사건 당시 대부분의 인사는 신민회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혹 가입 사실을 인정할 경우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신민회에 가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민회 취지서에서 본부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둔다고 명시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주장은 대한제국 내부에 별도의 신민회 국내조직이 없다는 주장과 같았다.

하지만 안창호가 귀국해 창건한 신민회는 국내조직이었다. 이는 진술로도 확인된다. 그는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당시 “신민회는 누가, 언제, 어떠한 목적으로 조직한 것인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조선민족의 자립 자존의 정신을 보급할 목적으로 경성에서 이갑·유동열·이동휘·전덕기·이동녕·양기탁 등과 함께 조직하였다”고 진술했다.

이 같은 진술은 일본 판사에게 한 것이므로 100% 신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1932년 당시는 이미 신민회가 해체된 지 여러 해가 지났고 또한 일본 정보당국이 신민회 실체를 파악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국내조직 창건 자체를 부정하면 안창호의 모든 진술이 의심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국내조직을 사실대로 진술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양기탁이 한 진술, 즉 “그 후 안창호가 경성에 왔을 때도 그 규칙을 공공연하게 발표하기를 권했는데, 그는 이갑(李甲)과 상의한 후 경찰서에 규칙서를 신고한다면서 내가 이전에 받았던 규칙서를 가지고 갔다. 그 후 진행 상황을 물었으나 공공연한 발표를 보류하고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는지 ‘윤치호와 상의한 다음 실행할 것이니 자네는 관계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를 이해한다면, 이 진술은 안창호가 양기탁을 만난 후 이갑, 윤치호 등과 신민회 창건을 논의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두 번째나 세 번째 만남에서 양기탁이 신민회에 가입한 사실을 함축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갑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과거 안창호와 더불어 독립협회 운동을 하던 동지였다. 이갑은 안창호가 미국으로 간 사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 요직을 역임했다. 윤치호 역시 구 독립협회를 상징하던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안창호는 양기탁을 통해 대한매일신보의 신채호, 임치정 등과 연결될 수 있었고 또 이갑을 통해서는 유동열·노백린·조성환 등 군 출신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물론 윤치호를 통해서는 구 독립협회 인사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한양·평양 돌며 핵심 조직원 직접 영입


▎중국 장사에 있는 신민회 건물 .
안창호는 귀국 후 약 한 달 동안을 한양에 머물며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상동교회의 전덕기, 구 독립협회 동지이자 고향 친구인 이갑, 구 독립협회의 지도자 윤치호 등을 만나 신민회 국내조직 창건을 논의했다. 그리고 3월 10일경 한양을 떠나 평양으로 가서 대략 한 달 동안 평양 일대를 순회하며 평안도의 주요 인사들을 접촉했다. 이렇게 한양과 평양에서 신민회 요인들을 확보한 안창호는 4월 말 한양에서 신민회 국내조직을 창건했다. 그때 참여한 핵심요인은 안창호를 비롯해 이갑·유동열·이동휘·전덕기·이동녕·양기탁 등 7명이었다. 당시 양기탁은 총감독(總監督), 이동녕은 총서기(總書記), 전덕기는 재무 그리고 안창호는 집문원(執問員)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집문원은 신민회 신입 회원의 자격을 심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즉 신민회 신입 회원의 가입 여부는 안창호가 결정했던 것이다.

신민회 국내조직을 창건할 때, 양기탁과 이동녕이 총감독과 총서기를 맡았다는 것은 당시 신민회 국내조직이 한양의 본부조직과 함께 지방의 지부조직으로 기획했음을 의미한다. 지방 지부조직으로는 도와 군 지부조직이 있었다. 안창호는 군이나 도를 대표하는 우국지사 또는 젊은 인재들을 선발해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 결과 1910년경 400여 명으로 추산되던 신민회 회원들은 팔도를 대표하는 우국지사이자 젊은 인재들이었다. 예컨대 평안남도 출신의 안창호 본인을 비롯해 평안북도의 이승훈, 황해도의 김구, 함경도의 이동휘 그리고 기호 출신의 전덕기와 이승만 등이 그들이었다. 이렇게 창건된 신민회 국내조직은 여러 면에서 통합 일진회와 대조적이었다. 우선 신민회 국내조직은 기독교 계열의 비밀조직이자 소수정예 조직이었음에 비해 통합 일진회는 동학 계열의 대중조직이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었다. 다음으로 신민회 국내조직은 자유 공화제를 지향했음에 비해 통합 일진회는 보호 독립을 지향했다는 점에서도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의 압제가 강화되면서 통합 일진회는 급속히 약화하였고, 상대적으로 신민회 국내조직이 강화된 결과 근대민족운동의 주도권은 다시 신민회 국내조직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통합 일진회로 실패했던 구 독립협회 계열의 구국운동이 신민회 국내조직을 통해 다시 살아났음을 의미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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